테마로보는역사 의학과 이용후생 - 어진 재상이 되지 못한다면 차라리 명의가 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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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47회 작성일 16-02-06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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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박지원은 중국 북경을 다녀오면서 지은 『열하일기』에서 이용후생을 강조했다. 이용을 한 후라야 후생할 수 있고 후생을 한 연후라야 정덕1)(正德) 할 수 있다는 것이다.2) ‘쓰임을 벼려 삶을 두텁게 한다.’는 이용후생이야말로 항산 이후 항심이라는 공맹 이래 유가 정치의 대원칙이었다.

의학 혹은 의술은 이용후생의 중요한 방도 가운데 으뜸이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죽고 사는 일은 인간의 삶에서 가장 기본이었기 때문이다. 살기 위해서는 음식이 필요하고 죽음을 멀리하려면 의약 지식이 필요했다. 농업기술과 의술이야말로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정보였다. 조선 후기에 재야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다룬 책들에는 의약학 지식이 빠짐없이 수록되었다. 당시 산거(山居)와 산림(山林)3) 그리고 임원(林園)의 경제를 표방하는 책들에 중요하게 인용되던 책이 『동의보감』이었다.




『산림경제』, 조선 후기 동의보감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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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준박물관에 있는 구암 허준상 <출처: @Wikimedia Commons (CC BY-SA)>



17세기 초에 발간된 『동의보감』은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조선사람들의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서적이 되었다. 서울 양반이었던 유만주는 『흠영』이라는 일기 속에서 당시 사족들의 필수품으로 운서와 법률서를 포함하여 『동의보감』을 거론했으며,4) 규장각 검서관을 지냈던 이덕무 또한 그러했다. “나는 전부터 우리나라에는 세 가지 좋은 책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바로 이이의 『성학집요』, 유형원의 『반계수록』, 허준의 『동의보감』이다. 『성학집요』는 사람답게 사는 방법을 알려주기 때문이요, 『반계수록』은 경제생활에 없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고, 『동의보감』은 사람을 살리는 방법이기 때문이다.”5) 19세기에 이르러 홍한주는 『동의보감』에 대한 당시의 높은 평가는 ‘예전부터 당시까지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논의’라고 못 박았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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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보감』 표지. <출처: 문화재청 – 공공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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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보감』 내지. <출처: 문화재청 – 공공누리>



특히 조선 후기에 널리 유포된 『산림경제』는 특별히 주목할 만하다. 홍만선의 저작으로 알려진 『산림경제』는 현존하는 이본이 수십 종에 달한다. 도대체 원본이 어떤 것이었는지 확정하기조차 어려울 정도이다. 그만큼 산림경제라는 용어는 책 이름인 동시에 ‘산림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의미하는 보통명사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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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만선이 지은 『산림경제』는 농업활동과 함께 생활에 필요한 모든 지식을 담은 경제서적이다. <실학박물관 제공>



『산림경제』에는 거처를 정하는 복거에서부터 곡식과 야채를 재배하는 치농과 치포 기술 그리고 의약학 정보를 수록한 섭생과 구급 항목 등이 자세하다. 이 책 한 권이면 조선 팔도 어디에든 거처를 마련한 후 쌀과 보리를 재배하고 과수와 채소 등을 길러 반찬으로 곁들이고, 또 아프기 전에 예방하거나 병 들면 구급에 대처할 수 있었다.

모든 소민(小民)들의 바람대로 주경야독하여 관직에 오를 수 있다면 다행이겠지만 조선 후기에 이르러 과거에 합격하고 싶어 하는 이들은 늘어난 대신 관직에 오른 자는 많지 않았다. 스스로 사족을 자처하는 대부분의 유학들은 한편으로는 농사와 양잠을 겸하고 다른 한편으로 사서를 읽거나 아니면 공문서 양식을 배워 소지나 써주면서 서생 노릇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들에게 『산림경제』는 시골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지침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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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제비급. 이병모가 함경도 관찰사로 있을 때 미신만 믿고 의약을 쓰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편찬케 한 의서 <출처: e뮤지엄 – 공공누리>



『산림경제』의 저자는 <구급편>을 만든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산골에 살다보면 읍내와 멀리 떨어져 있어 오랫동안 앓고 있어 고치기 어려운 병 의원에게 찾아가 침을 맞거나 약을 먹을 수 있겠지만, 만약 갑자기 급한 병을 만나면 손을 쓸 수 없어서 끝내 요절하는 자가 많다. 때문에 구급법을 기록한다.”

구급방에는 목을 매 죽으려는 자를 구활하는 방법부터 중풍과 타박상을 치료하는 처방 등 생활에 필요한 의학 지식이 빼곡하다. 타박상을 치료하는 방법을 보자.

“타박상을 입어 어혈이 뭉쳐 죽게 될 경우 포황 3전을 뜨거운 술에 타 먹이거나, 백양수 껍질을 술에 담갔다가 먹는다. 또 생마의 뿌리와 잎을 짓찧어 즙을 내서 한 되를 먹이는데, 생마가 없을 때에는 마른 마를 삶아 즙을 먹인다. 또 어린아이 소변 한두 되를 뜨거울 때 먹이면 즉시 살아난다. 또 개똥을 불에 구워 가루로 만들어서 뜨거운 술에 두 숟갈을 타 먹이거나, 개의 쓸개 두 번에 나누어 뜨거운 술에 타 먹이면 나쁜 피가 모두 빠져나간다.” 혹은 “타박상을 입어 통증을 참을 수 없을 경우 파의 흰 부분을 뜨거운 재에 구워서 쪼개면 그 속에 찐득한 액체가 있는데 이를 상처에 붙인다. 열이 식으면 뜨거운 것으로 갈아 붙이는데 잠깐 사이에 통증이 멎게 된다.”7)

이들 처방은 모두 『동의보감』에서 인용된 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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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을 위한 백과사전 『규합총서』



이뿐인가. 『산림경제』에는 두창을 이겨내는 방법, 산모가 아이를 출산할 때 주의할 사항들도 자세하게 기록되었다. 19세기 초 빙허각 이씨는 시집간 딸에게 출산과 육아의 경험을 전수해주고 싶었다. 물론 자신도 아이를 낳아 기른 경험이 있으므로 그것만으로 충분할 수 있었지만 그녀는 당시 유행하는 『산림경제』를 구해 읽었다. 아이를 낳아 대를 잇는 방법을 비롯하여 많은 정보를 얻은 빙허각은 자신의 경험을 보태어 딸을 위한 의서를 만들었다. 이름하야 『부녀필지』였다. 여성들을 위한 필수 지식은 이후 규방의 백과사전인 『규합총서』의 한 챕터로 발전했다.8)

『동의보감』이 조선 후기의 필수품이 되었던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렇지만 18세기 후반은 『동의보감』 간행 후 이미 200년이 흐른 뒤였다. 그동안 중국에는 많은 의서들이 출판되었고 조선 의원들의 경험도 쌓여갔다. 현실적으로 『동의보감』을 보완해야 할 필요성이 늘고 있었다. 『산림경제』에는 이미 윤씨, 허씨, 임씨, 전씨 등 이름을 알 수 없는 무명 의사들의 경험방이 추가되고 있었고, 빙허각의 『부녀필지』에도 저자 이씨의 경험이 보태지고 있었다.




새로운 의학 지식을 수용하다.



정조는 조선시대 그 어느 누구보다 백성을 구제하겠다는 의지를 흉년에 버려진 아이를 보호하는 『자휼전칙』을 간행하여 전국에 보급했던 것도 그였다.9) 정조는 『동의보감』 이후 수많은 경험방을 수집하고 새로 중국에서 수입된 의서를 참고하여 새로운 의서를 만들어 보급하고자 했다. 이 일을 감당한 자는 어의 강명길이었다. 그는 30대 초반 내의원에 들어와 오랫동안 혜경궁 홍씨의 주치의 노릇을 했으며 어린 시절의 정조를 돌보았다. 세자 시절부터 정조는 강명길에게 의학을 묻고 또 공부했다. 후일 왕위에 오른 정조는 강명길에게 『동의보감』 이후의 새로운 처방을 증보하는 동시에 간편하여 실용적인 의서를 만들도록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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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9년 정조의 명으로 편찬된 의학서 『제중신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799년 『제중신편』이 완성되자, 정조는 ‘백성을 구제하는 새로운 의서’라는 제목을 직접 지어주었다. 서문에서 강명길은 그동안의 사정을 밝혀두었다. 정조의 부탁은 다음과 같았다. “우리나라 의서로는 오직 허준의 『동의보감』이 있는데, 비록 상세하지만 글이 어수선하고 쓸데없기도 하고 말이 겹치거나 증상이 빠진 것들이 있다. 근래 응용하는 처방들도 누락된 것들이 많다. 『내경』에 이르지 않았는가? 요점을 아는 이는 한 마디로 다 할 수 있으나 그 요점을 모르면 어수선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대(강명길)는 모든 의서들을 널리 모아 산만한 것을 덜어내고 요점만을 추려 한 책을 만들어 바치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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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의학자 장개빈이 저술한 의학서 『경악전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정조는 강명길로 하여금 『동의보감』 이후 개발된 경험방을 널리 수집하고 또 새로 수입된 중국의 의서들을 응용하여 간편하지만 실용도 높은 의서를 편찬하도록 명했다. 『동의보감』 이후 조선에 수많은 중국의 의서들이 수입되었지만 이 가운데 대표적인 것을 꼽자면 『경악전서』와 『의종금감』을 들 수 있다. 전자는 1624년 명대 의학자 장개빈이 저술한 의서이고, 후자는 청대 건륭황제 연간에 국가사업으로 편찬한 종합의서였다.

가령 강명길은 『제중신편』의 구급조에 간수를 마신 사람을 살리는 처방을 『경악전서』에서 인용했다. “염로독(간수독): 무릇 부녀가 간수를 먹고 죽을 지경이면, 급히 산 오리나 닭의 머리를 잘라 입안에 넣어 뜨거운 피를 마시게 한다. 능히 간수독을 풀 수 있다. 만약 간수를 많이 마셨다면 반드시 여러 마리를 잡아 피를 마시도록 해야 해독할 수 있다[경악(景岳)].”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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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구의 『임원경제지』 본문 일부.



조선 후기 실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서유구는 『임원경제지』 가운데 의약학을 다룬 <인제지>를 저술하면서 많은 내용을 『경악전서』로부터 인용했다. 다른 의서를 참조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기본적인 진단과 처방에서 『경악전서』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말이다.

특히 <인제지>의 외과 서술의 대부분은 청대 『의종금감』의 내용을 전재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11) 뿐만 아니라 정약용은 온역 유행시 성산자 처방을 권하였는데 역시 『경악전서』에서 인용한 것이다. 성산자는 창출, 방풍, 후박 등 다양한 약재를 가루로 내어 대추와 함께 물에 달여 따뜻하게 복용하는 약물이었다. 장개빈은 “일체의 풍토병[山嵐瘴氣]이나 시역, 온역, 상한, 풍습 등 다양한 질병을 치료하는 데 비상한 효험이 있다.”고 설명했다.

정약용이기양이 문의현감(현재 충청북도 청원군 문의현) 시절에 온역이 유행하자 성산자 처방으로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했으며, 심지어 이웃 청주와 옥천 사람들도 살려냈다고 강조했다.12)

『제중신편』 이전에도 『동의보감』을 보완하려는 시도가 없지 않았다. 주명신은 평생을 의학자로 지냈던 인물로, 몇 권의 시집을 남길 정도로 시인으로도 유명했다.13) 그는 1780년 연암 박지원과 함께 중국 북경을 다녀왔다. 당시 그는 연행사절의 건강을 책임진 의관으로 참여했지만 연행 도중 중국의 의서들과 새로운 지식에 관심을 기울이기도 했다.14) 1784년 주명신이 편찬한 『의문보감』은 『동의보감』 이후의 발달된 의학지식을 보충한 것으로 후일 강명길의 『제중신편』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청의 학문을 배우자고 주창한 북학파들뿐 아니라 관인들 상당수가 중국의 새로운 문물과 정보에 관심이 많았다.15) 특히 두창이나 마진 등 무수한 생명을 앗아가는 전염병에 대한 치료법이야말로 이용후생의 중요한 방도였다. 『의종금감』의 두진 치료법은 조선 후기의 역병에 대한 연구를 자극하기도 했다. 많은 학자들이 이들 의서를 읽으면서 두창과 마진의 치료법과 예방법을 연구했다. 종두법과 같은 예방법도 과감하게 실험되었다. 박제가와 정약용은 이 분야의 선구자들이었다. 두 사람은 각각 종두법을 연구하던 중 1800년 서울에서 만나 함께 종두법을 연구함으로써 조선의 종두법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종두법을 실험하다.



1797년 곡산부사 시절 『마과회통』을 편찬하여 두진 치료에 앞장섰던 정약용은 종두법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16) 그는 1799년 가을 북경을 다녀 온 의주사람으로부터 <종두방> 필사본을 얻게 되었는데 단지 두어 장에 불과했다.

이듬해 1800년 봄 규장각에 근무하던 다산은 서울에서 박제가를 만났다. 다산은 박제가에게 자신의 <종두방>을 보여주었고 박제가는 자신도 같은 처방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박제가는 예전에 규장각 소장 중국 책에서 초록해 둔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초록본이 너무 소략하여 깊이 연구할 수 없었는데 이제 두 가지를 합치면 종두법을 완성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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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신이 개발되기 전까지 천연두(두창) 바이러스는 전염력이 매우 강할 뿐만 아니라, 사망률 또한 높았던 무서운 질병이었다.



이상의 기록을 보면, 의주에게 입수한 정약용의 필사본과 규장각 책에서 초록한 박제가의 필사본은 같은 책의 내용을 베낀 것으로 보인다. <정씨종두방>으로 알려진 책이다. 사실 정망이의 <종두방>이라는 책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정망이의 <종두방>은 단행본이 아니라 청대 의학자 섭계(1667~1746)의 『임증지남의안』 속에 수록되어 있는 종두법에 관한 논설이기 때문이다.

섭계는 평생의 임상 치료 경험[醫案]을 그의 문인들에게 남겼고 12명의 문인들이 섭계의 의안을 보충하고 편집하여 의서를 간행하였다. 1746년에 초간된 후 수십 차례 간행되어 널리 활용되었다. 모두 10권으로 권1~권8은 내과를, 권9는 부인과를 권10은 소아과를 다루고 있다.17)

권10의 소아과 부분에 정망이의 종두법이 기록되어 있다. 정망이의 이력은 자세하지 않지만 섭계의 문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두창 치료에 경험이 많은 유의로 보인다. 의주사람이 북경에서 이 책을 필사하면서 <정씨종두방>으로 정약용에게 전해주었고, 박제가는 규장각에서 초록하면서 『임증지남』으로 제목을 달아두었다.18) 제목은 달랐지만 같은 내용의 필사본을 정약용과 박제가가 가지고 연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부만 초록된 두 사람의 필사본을 합하면 종두법을 완성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 박제가는 서울에서 영평현으로 귀가하여 즉시 사람을 보내어 자신의 초록본을 정약용에게 보냈다. 정약용은 두 가지 내용을 연결하여 한 권으로 만든 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주석을 달고 허황된 서술은 대폭 삭제했다.

책을 완성하자 정약용은 곧 박제가에게 이를 보냈고, 이후 다시 서울에서 박제가와 만나 종두법의 가능성을 논의했다. 해결해야 할 시급한 문제는 접종에 필요한 두묘를 확보하는 일이었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두묘 제조법을 논의하였지만 결론에 이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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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가는 종두법의 일종인 인두법을 성공했다.



그런데 수십 일 후에 박제가는 다시 정약용을 방문하여 두묘를 완성했으며, 당시 영평현의 이방과 노비의 아이 그리고 자신의 조카에게 접종하여 성공했다고 밝혔다. 두 사람의 연구가 결실을 맺은 순간이었다. 다산은 이 일을 1800년 6월 정조의 승하 전으로 기억했다. 조선에서 종두법이 처음 시행된 역사적 순간은 1800년 봄에서 여름 수개월 사이의 어느 날이었다. 이 해 정약용과 박제가의 우연한 만남과 이후의 열정적인 노력으로 공포스러운 두창을 이겨낼 수 있는 종두법이 탄생한 것이다.

 


조선 후기의 학인들 대부분은 지식인으로서 백성 구제의 책무를 마다하지 않았으며, 의약학은 그 중심에 있었다. 의약공부는 개인적으로 산림경제의 처세인 동시에 사회적으로 경세제민의 방도였다. 『동의보감』은 18세기 후반 『산림경제』와 같은 생활백과서적에 대거 인용되면서 이용후생의 필수서적이 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동의보감』을 응용하여 경험방을 만들어 내었고, 명·청대의 신간 의서들은 조선 의학계에 신선한 자극이 되었다.

정조는 국가사업으로 『제중신편』을 편찬하여 조선 후기의 의학 발전을 선도했으며, 서유구는 개인의 노력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방대한 의·약학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했다. 또한 두창처럼 위험한 역병을 이겨내려는 열정은 종두법의 도입을 가능케 했다. 정약용과 박제가는 위험한 치료법으로 간주되던 종두법을 깊이 연구하여 과감하게 실험한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덕을 바르게 한다는 뜻으로 곧 도덕적 인간이 된다는 의미 (먹을거리가 충분해야 도덕성도 발휘된다는 뜻으로 연암이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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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혈조 역, 『열하일기』1 p.6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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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야 즉 향촌에서 살아가는 일로 시골생활을 일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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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 1998 <18세기 후반 居京 士族의 衛生과 의료: 『欽英』을 중심으로> 『서울학연구』1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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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무 『청장관전서』 권6 <이낙서(李洛瑞)에게 주는 편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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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한주, 『지수염필』 김윤조 외 역, 2013, 소명출판 p.10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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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림경제』 <救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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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양완 역주, 1992 『규합총서』 (보진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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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 1783년(정조7) 11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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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중신편』 권5 <解毒> “凡婦女服鹽滷垂危者 急取活鴨或鷄斬頭 將塞口中 以熱血灌之 可解 若飮滷多 必數隻方 盡收其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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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 외, 2014 『풍석 서유구 연구(상)』 (사람의무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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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민심서』 애민 6조 ‘寬疾’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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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준상 외, 2013 <『醫門寶鑑』의 편찬과 주명신의 행적에 대한 연구> 『대한한의학원전학회지』26-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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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석, 2014 <장서각 소장 『玉振齋詩稿』 연구:1780년 周命新의 북경 기행시를 중심으로> 『장서각』3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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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 연행 뿐 아니라 조선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왔던 관료들이나 학자들은 일본에 전해진 네덜란드의 서양의서들을 구입하여 돌아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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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 1996 <조선 후기 두진(痘疹) 연구: 마과회통을 중심으로> 『한국문화』1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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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식 외, 1995 <『臨證脂南醫案』에 관한 연구> 『한국한의학연구원논문집』1-1 pp.47-6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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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종통편』 <序文>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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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 | 경인교육대학교 사회교육과 교수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허준의 동의보감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책임연구원과 가톨릭대학교 교양교육원 교수를 거쳐 현재 경인교육대학교 사회교육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최근에는 조선시대의 '교화와 형벌'에 관해 연구 중이며 지은 책으로 『원통함을 없게 하라』, 『조선의 명의들』, 『정약용, 조선의 정의를 말하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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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실학,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다
실학은 18세기 한국 역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이지만, 여전히 실체와 환상이라는 상반된 시각 속에서 실학을 바라보고 있다. 실학은 실패한 개혁의 꿈인가? 아니면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고자 했던 학문이었던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 찾아 17명의 전문가들이 다양한 시각으로 개혁사상이자 문화사조로서 실학을 조명해 본다.


발행2015.12.01.



주석


1


덕을 바르게 한다는 뜻으로 곧 도덕적 인간이 된다는 의미 (먹을거리가 충분해야 도덕성도 발휘된다는 뜻으로 연암이 말함)

2


김혈조 역, 『열하일기』1 p.69 참조.

3


재야 즉 향촌에서 살아가는 일로 시골생활을 일컬음

4


김호, 1998 <18세기 후반 居京 士族의 衛生과 의료: 『欽英』을 중심으로> 『서울학연구』11 참조.

5


이덕무 『청장관전서』 권6 <이낙서(李洛瑞)에게 주는 편지> 참조.

6


홍한주, 『지수염필』 김윤조 외 역, 2013, 소명출판 p.102 참조.

7


『산림경제』 <救急>

8


정양완 역주, 1992 『규합총서』 (보진재) 참조.

9


『정조실록』 1783년(정조7) 11월 5일.

10


『제중신편』 권5 <解毒> “凡婦女服鹽滷垂危者 急取活鴨或鷄斬頭 將塞口中 以熱血灌之 可解 若飮滷多 必數隻方 盡收其毒”

11


김호 외, 2014 『풍석 서유구 연구(상)』 (사람의무늬) 참조.

12


『목민심서』 애민 6조 ‘寬疾’ 참조.

13


유준상 외, 2013 <『醫門寶鑑』의 편찬과 주명신의 행적에 대한 연구> 『대한한의학원전학회지』26-2 참조.

14


김동석, 2014 <장서각 소장 『玉振齋詩稿』 연구:1780년 周命新의 북경 기행시를 중심으로> 『장서각』32 참조.

15


북경 연행 뿐 아니라 조선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왔던 관료들이나 학자들은 일본에 전해진 네덜란드의 서양의서들을 구입하여 돌아오기도 했다.

16


김호, 1996 <조선 후기 두진(痘疹) 연구: 마과회통을 중심으로> 『한국문화』17 참조.

17


신순식 외, 1995 <『臨證脂南醫案』에 관한 연구> 『한국한의학연구원논문집』1-1 pp.47-68 참조.

18


『시종통편』 <序文>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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