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리히텐슈타인 대공 가문 - 유럽 왕실 중 가장 많은 재산을 보유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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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363회 작성일 16-02-06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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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히텐슈타인은 모나코, 안도라와 함께 대공이 집권하는 입헌군주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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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히텐슈타인 대공 가문이 거주하는 파두츠 궁성



리히텐슈타인은 스위스와 오스트리아 사이의 산악 지대에 위치한 중립국으로, 크기는 남북 25㎞ 동서 6㎞ 정도에 면적이 160㎢에 불과해 우리나라 강화도의 절반 수준이며, 유럽에서 네 번째,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작은 3만 7천 명의 소국이다. 공식 언어는 표준 독일어지만 일상생활에서는 스위스와 유사한 방언 독일어를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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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히텐슈타인 지도



리히텐슈타인 가문은 8조 원이 넘는 재산을 보유해 유럽의 군주들 가운데 가장 부유하다. 1인당 GDP는 공식 세계 집계에 포함되지 않지만 룩셈부르크에 버금가는 11만 달러 수준으로 추정된다.

국가 예산 전체를 대공 가문이 부담하기 때문에 일반 국민들은 납세의 의무를 지지 않으며 1868년 군대가 해산되고 안보를 스위스가 책임지므로 병역의 의무도 없다. 덕분에 대공 가문에 대한 인기는 여전히 굳건히 유지되고 있으며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통치권을 지니고 있다.




리히텐슈타인 정치 체제의 특징



리히텐슈타인은 의회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지만 세습 입헌군주인 대공이 국가 원수를 맡는다. 대공은 의회가 제안한 법안을 거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의회를 휴정하거나 해산시킬 수 있을 만큼 막강한 권한을 가진다. 외교와 사법에 있어서도 최고의 지위를 누려 국가를 대표해 국제조약에 서명을 한다. 헌법재판소, 대법원, 고등법원, 지방법원의 판사를 직접 임명하고 모든 재판은 대공의 이름으로 확정된다. 집행유예와 사면을 적용하거나 재판을 중지시킬 수도 있다.

행정부는 총리를 비롯해 4명의 장관이 겸직으로 전체 임무를 맡는다. 의회는 단원제로 임기 4년의 의원 25명으로 구성된다. 2003년 개정 헌법에서는 대공에게 의회를 해산할 권리와 입법부가 결의한 법안을 거부할 권리도 부여되었다. 유럽의 여타 왕실과는 다르게 국가의 수장이 막강한 권한을 휘두르는 독특한 통치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12세기부터 이어진 리히텐슈타인 가문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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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히텐슈타인 대공 가문의 문장



정식 국가 명칭은 ‘퓌르스텐툼 리히텐슈타인 Fürstentum Liechtenstein’이다. 독일어로 국가 원수를 가리키는 ‘퓌르스트 Fürst’가 다스리는 땅이라는 의미다. 퓌르스트는 공작보다 낮은 지위를 가리키는 ‘후작(marquis)’ 이외에 왕 또는 황제 바로 아래에서 소국의 군주를 맡은 ‘공(prince)’을 통칭할 때도 사용한다.

그러므로 우리말로는 ‘리히텐슈타인 후국’이 아닌 ‘리히텐슈타인 공국(Principality of Liechtenstein)’이라 하는 것이 적합하다. 국가 원수는 대공(Prince)이라 칭하지만 룩셈부르크의 대공(대공작, Grand Duke)과는 다른 직명이다. 대공작은 왕이나 황제가 임명하는 귀족 직위 중 가장 높은 위치지만 대공은 왕실 소속으로 국왕 계승권을 가지거나 독립적으로 자신의 영토를 다스리는 군주를 뜻한다.

리히텐슈타인 가문은 가문명이 정식 국가명으로 남아 있는 몇 안되는 나라에 속한다. 12세기 건국 초기의 가문 족보는 명확히 보존되어 있지 않지만 13세기부터는 혈통이 끊이지 않고 이어져 왔으며 지금까지 15명의 공(prince)을 배출했다. 현재 입헌군주로서 국가 원수를 맡은 한스 아담 2세는 제15대 대공이다. 1945년생인 한스 아담 공은 지금의 영토에서 태어난 최초의 대공으로 국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다. 리히텐슈타인 가문이 현재의 수도 파두츠로 중심지를 옮긴 것은 1938년으로 비교적 최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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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국가 원수를 맡고 있는 한스 아담 2세



원래는 1136년 후고 폰 리히텐슈타인이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 인근에 위치한 리히텐슈타인 성에서 가문을 열었고 이후 오스트리아 동쪽을 근거지로 800년 동안 살아왔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직전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하면서 귀족의 영지와 재산을 몰수했고, 프란츠 요제프 2세 대공은 서쪽으로 600km나 떨어져 있는 현재의 영토로 이주를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리히텐슈타인 가문이 귀족의 반열에 오른 것은 하인리히 1세(?~1265/66) 때부터다. 1249년 보헤미아의 왕 오토카르 2세(Ottokar II)로부터 현재 체코의 동남부 지역에 해당하는 모라비아 중에서 니콜스부르크를 둘러싼 자유 영지의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지금으로 치면 오스트리아 빈에서 북쪽으로 80km 떨어져 있는 체코의 국경 도시 미쿨로프까지의 영토 대부분을 소유한 것이다.

이후 150년 동안 가문은 저지대 오스트리아라 불리는 빈 북쪽으로 영토를 넓혀 갔다. 니콜스부르크 인근에 위치하며 지금은 체코 영토로 발티체라 불리는 펠트베르크도 확보했다.

그러나 13~14세기에 비극이 닥쳤다. 13세기 말 가문이 리히텐슈타인, 로라우어, 페트로넬러 등의 세 갈래로 나뉘었다가 리히텐슈타인을 제외하고는 한 세대 만에 혈통이 끊기면서 소유권을 잃어버린 것이다. 유고시 누구에게 권한을 넘길 것인지 법률적인 구속력을 가지는 규약을 마련해 놓지 못한 것이 비극의 원인이었다. 게다가 합스부르크 가문을 30년 넘게 섬겨온 요한 1세가 권력 쟁탈전의 희생양이 되면서 다시 한 번 영토를 잃었다. 1394년에는 알브레히트 3세 공작에게 도나우 강 이남 지역, 즉 지금의 빈과 리히텐슈타인 성도 빼앗겼다. 15세기에는 펠트베르크와 현재 오스트리아 중북부에 위치한 슈타이레그를 근거지로 명맥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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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 가문이 출발한 빈 인근의 리히텐슈타인 성



1504년에는 가문 규약을 새로 정비하면서 종손에게 전 재산을 물려주는 조항을 확립했다. 덕분에 가문이 통치하는 지역 명칭을 따라 니콜스부르거, 펠츠베르거, 슈타이레거의 3개 분가로 나뉘었다가 2개 혈통이 단절되었을 때 재산을 타인에게 빼앗기지 않고 펠츠베르거 계열로 귀속시킬 수 있었다.

16세기 말에는 새로운 부흥기가 시작되었다. 하르트만 폰 리히텐슈타인(1544~1585년) 남작의 세 아들인 카를, 막시밀리안, 군다커 세 형제가 가톨릭으로 개종함으로써 다시금 정치적인 입지를 확보한 것이다. 큰아들 카를은 신성로마제국의 마티아스 황제를 보필하면서 1606년 대궁중백(Great Count Palatinate) 직위를 얻었다. 1608년에는 리히텐슈타인 가문 최초로 세습이 가능한 공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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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리히텐슈타인 영토를 구입한 요한 아담 1세



일반적인 귀족은 왕이나 황제가 임명하고 인정해야만 대대로 직위 유지가 가능하지만 공으로 격상되면 가문 자체적으로 국가를 운영할 수 있게 된다. 세 형제는 1606년 장자 상속제를 가문 규약을 개정해서 종손의 큰아들이 모든 재산을 상속받고 가문을 대표하는 장자 상속제를 확정했다. 이 조항은 1993년 12월 6일 리히텐슈타인의 대공직 계승 규약을 개정할 때도 법적인 근거로 작용했다.

영어로는 한스 아담 1세라 불리는 요한 아담 1세(재위 1684~1712년)는 1699년 현재 리히텐슈타인 영토에 속한 북부 셸렌베르크를 구입하고 1712년에는 남부 파두츠도 사들인 인물이다. 그러나 후사가 없이 서거하면서 공 직위는 작은할아버지인 군다커의 손자 안톤 플로리안(재위: 1718~1721년)에게 넘어갔고 오늘날까지 군다커의 혈통이 이어지고 있다.

안톤 플로리안은 1719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6세에게 칙서를 받으면서 현재 오스트리아 동쪽 끝과 서쪽 끝의 땅을 연계해 황실이 인정한 정식 공국(imperial principality)을 세웠다. 리히텐슈타인이 후국령에서 공국으로 격상된 것이다.




오스트리아 동부에서 서쪽 끝으로 이주한 리히텐슈타인



17~18세기에 가문은 펠츠베르크를 공국의 수도로 삼고 파두츠와 빈 인근을 영토로 관할하며 합스부르크 가문을 보필했다. 그러나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 1806년 신성로마제국이 해체되면서 리히텐슈타인의 공국도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1815년에는 알로이스 2세(재위: 1836~1858년)가 독일 연방 가입을 결정했지만 50년 후인 1866년 요한 2세(재위: 1858~1929년)는 독립국을 천명하고 중립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외교 문서로만 독립국 지위를 누렸을 뿐 실질적인 자립은 이루지 못했다. 1867년 오스트리아가 헝가리를 합병해 거대한 제국으로 거듭났을 때도 리히텐슈타인은 재정 부족으로 인해 1868년 군대를 해산했을 정도다. 이후 지금까지도 리히텐슈타인은 자체 군대 없이 스위스에 국방을 위탁하고 있다.

리히텐슈타인이 오스트리아와 등을 돌리게 된 것은 1938년 무렵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과도한 전쟁 배상금을 떠안아 불만이 쌓인 독일은 나치스라 불리던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의 득세를 허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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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히텐슈타인을 독립시킨 요한 2세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스는 1933년 총선에서 승리해 제1의 다수당이 되자 파시즘과 군국주의를 결합시켜 옛 독일 연방 지역을 침략해 손아귀에 넣었다. 1938년 리히텐슈타인의 프란츠 1세(재위: 1929~1938년)는 85세로 연로한 상태였는데 독일이 오스트리아까지 합병한 직후인 7월에 후사 없이 서거했다.

공 직위는 작은아버지의 증손자인 프란츠 요제프 2세(재위: 1938~1989년)에게 넘겨졌고, 나치스의 박해를 피해 빈에서 서쪽으로 600km 떨어진 파두츠로 거주지를 옮겼다. 가문의 일원들도 모라비아 지역과 저지대 오스트리아에 산재해 있던 토지와 궁성 대부분을 처분하고 뒤를 따랐다. 파두츠로 이주를 결정한 것은 프란츠 요제프 2세지만 수도 이전 준비는 리히텐슈타인을 독립시킨 요한 2세 때부터 이루어졌다.

오스트리아 지역에 전운이 감도는 것을 느낀 요제프 2세는 가문 소유로 내려오던 파두츠 성을 1905년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수리했다. 이후 1930년대 초부터 프란츠 요제프 2세가 파두츠 성을 확장하고 개조했으며 대공에 오르자마자 이주를 실행에 옮겼다. 이후 리히텐슈타인 공국은 스위스와 오스트리아 사이에 자리한 채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리히텐슈타인, 작지만 강한 나라로 성장하기까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리히텐슈타인은 스위스와 더불어 중립국을 선언했고 덕분에 전쟁의 포화를 피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 이후 동유럽이 공산화되면서 1,600km2에 달하는 가문의 옛 영토를 체코슬로바키아에게 징발 당했다. 공산주의 러시아가 득세하던 냉전 기간에는 출입마저 금지 당했다. 현재 리히텐슈타인은 국제재판소에 소송을 건 상태다.

그럼에도 1945년 5월 독일을 침공한 러시아 군인 중 500여 명이 탈영해 망명을 요청했을 때 리히텐슈타인은 이들을 받아 주었다. 중립국이었고, 부유하지 못했던 작은 나라였음에도 러시아의 송환 요구도 거절한 채 피난처와 음식을 제공했다. 2년 반 동안의 망명 이후 이들은 아르헨티나 정부의 허가를 받아 남미로 옮겨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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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제2차대전 시기부터 1989년까지 리히텐슈타인 공국을 이끈 프란츠 요제프 2세.



비슷한 경우를 겪은 영국이 망명자들을 전부 러시아로 송환시켜 처형대에 서게 만든 것과는 대조적이다. 처음 망명 요청이 있었던 북부 힌터셸렌베르크에는 기념비가 세워졌고 러시아인들의 관광 명소가 되었다. 리히텐슈타인이 중립국으로서 인정받는 이유는 지금까지 확고한 원칙을 지키며 실행해 왔기 때문이다.

전쟁 이후에도 가난을 면치 못했던 리히텐슈타인 대공 가문은 가문 소유의 예술품을 내다 팔면서 정상적인 국가 운영을 고집했다. 국민들이 통치자에게 무한한 애정을 보내는 것도 이 시기의 노력 덕분이다. 글로벌 경제 시대가 열린 1980년대부터는 낮은 법인세율을 내세워 글로벌 기업들을 불러들였고 덕분에 국가 재정도 크게 나아졌다.

무엇보다 국가 예산 전체를 대공 가문이 부담함으로써 일반인과 기업들은 세금을 면제 받거나 거의 내지 않게 된 이유가 크다. 지금도 리히텐슈타인 국민들은 납세와 국방의 의무를 지지 않는다. 지금의 리히텐슈타인을 출발시키고 전쟁의 포화를 피해 영세 중립국의 기틀을 닦은 프란츠 요제프 2세가 1989년 11월 서거하면서 큰아들 한스 아담 2세가 대공직을 이어받았고 현재도 국가 원수로 재위 중이다.




리히텐슈타인 가문의 평가



2014년 11월 13일로 즉위 25주년을 맞은 한스 아담 대공은 1989년에 최고 권좌에 올랐지만 국가 운영의 임무는 그보다 5년 전인 1984년부터 맡아 왔다. 그 전 해인 1983년 7월 1일 즉위 45주년 기념식을 맞이한 아버지 프란츠 요제프 2세가 “내년 봄에 모든 권한을 아들에게 물려주겠다.”라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국가 원수직은 유지하되 실질적인 권한을 미리 아들에게 물려주는 전통은 한스 아담 대공도 실천해 왔다. 2003년 초 국가 원수의 권한을 대폭 확대하는 개정 헌법이 국민투표에서 64%의 찬성으로 통과되자 이듬해 국경절인 8월 15일에 큰아들 알로이스를 후계자로 지명하면서 자신은 뒤로 물러나겠다고 발표했다. 유고로 인해 대공직이 갑자기 교체될 경우 권력에 누수가 생길 것을 우려해 평소부터 지배 체제를 공고히 하려는 목적이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지금도 공식 국가 원수는 여전히 한스 아담 대공이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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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 후계자로 선정된 알로이스 대공자



리히텐슈타인의 대공은 여타 유럽 국가와는 다르게 입법, 사법, 행정, 외교 등 국정 전반에 걸쳐 막강한 권한을 지닌다. 2003년에는 헌법을 개정해 의회를 해산할 권리와 법안을 거부할 권한까지 손에 넣었다. 다수당으로 구성된 단원제 의회에서 열띤 토론을 거쳐 법안이 만들어져도 대공이 서명을 거부하면 6개월 후에는 효력을 상실한다. 거센 반대가 일어나자 2003년 3월 16일 국민투표가 실시되었고 64.3%의 찬성표를 얻어 권력을 유지했다.

리히텐슈타인 국민들이 한스 아담 대공의 권한 확대에 반대하지 않는 것은 크게 세 가지 이유로 좁힐 수 있다. 첫째로 국가의 독립과 중립 유지를 위해 원수 가문이 헌신적으로 노력해 온 점을 높이 평가하고, 둘째로 국가 재정 전체를 대공 가문의 재산으로 충당해서 일반 국민은 한 푼의 세금도 내지 않으며, 셋째로 한스 아담 대공이 “나의 뜻이 관철되지 않으면 현재의 영토를 처분하고 오스트리아로 이주하겠다.”라며 공공연한 협박을 하기 때문이다.

경제 수준이 높고 세금과 병역 의무가 없는 중립 국가에서 살아가는 입장인지라 국가의 생존을 책임져 온 수장에게 좀 더 많은 권한을 주어도 나쁠 것 없다고 생각하는 셈이다. 2012년에도 대공의 법안 거부권을 폐지하자는 국민투표가 실시되었지만 76%에 달하는 투표자들이 한스 아담 대공의 편에 섰고 막강한 권한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대공 가문은 국민들에게 조세, 교육, 인프라 등에 있어 많은 혜택을 제공하지만 생활의 세세한 부분까지 공개하지는 않는다. 파두츠 궁성은 일반인들이 출입이 금지되고 있으며 한스 아담 대공은 “다른 곳으로 이주하고 궁성은 박물관으로 개조하고 싶다.”면서도 “국민들이 원하지 않고 반대의 목소리가 많다”는 점잖은 이유를 대며 현재 상황을 유지하고 있다.

국가 경영자로서 냉철함을 무기로 사용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국가 전체의 효율을 높여야 한다며 공공 개혁을 시작했다. 성과가 시원찮은 공공 기관에 대해서는 “시스템 개선에 저해가 되는 일부 조직을 살리겠다고 보조금을 쏟아붓는 것이 국가의 역할은 아니다.”라며 지원을 거절하고 있다. 유럽 왕실 중에서 가장 많은 재산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부채 비율이 높은 편이라며 위기를 강조하기도 한다. 대공 가문의 재산은 8조 원 수준으로서 2위인 모나코 그리말디 가문의 5배에 달하며 가장 가난한 노르웨이 왕실보다 400배나 부유하다.




굳건히 유지되고 있는 리히텐슈타인 대공가의 통치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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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작은 나라이지만 최상위 국민소득을 유지하고 있는 리히텐슈타인. Sergei Gussev/flickr



유럽 지역은 중세 때부터 수많은 소국들이 생겨났다 사라졌으며, 대공이 다스리는 국가로서 현재까지 명맥을 유지하는 나라는 리히텐슈타인, 모나코, 안도라 정도에 불과하다. 국가의 규모가 작으면 주변국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내수 시장이 협소하다는 약점이 있다. 리히텐슈타인은 우리나라보다 1,400배나 작은 영토로도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부유함을 유지하고 있다. 국제연합(UN), 세계무역기구(WTO),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등 국제 무대에서도 독립국가로서 영향을 발휘하고 있다.

세계 최상위의 국민 소득 비결은 중립국으로서 유리한 경제 조건을 갖췄다는 이유도 있지만 강력하고 효율적인 통치 체제로 낭비와 분열을 줄인 것도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국가 전체의 재정을 감당하는 리히텐슈타인 대공 가문은 국민에게 많은 혜택을 주면서 강력한 권한을 소유하는 당근과 채찍 전략으로 지배 체제를 굳건하게 유지하고 있다.




이종오 | 프랑스 언어와 문화 전문가
글쓴이 이종오는 프랑스 고전수사학과 유럽 문화콘텐츠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다. 프랑스 엑스-마르세이유 1대학 언어학과에서 수사법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프랑스어교육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문체론>, <소통문화의 지형과 지향>(공저), <문체론사전>(공저), <유럽의 말(馬) 문화>(공저) 등이 있다.


출처
세계의 왕가
현재 전 세계에는 29개의 국가가 군주제를 유지하고 있다. 과거의 유산이라고 여겨지는 군주제가 아직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일까. 그리고 현존하는 왕가는 어떤 모습일까. 지금까지 군주제가 유지되고 있는 29개국 및 20세기에 왕정이 폐지된 그리스, 21세기에 군주제의 막을 내린 네팔 왕가를 살펴본다. (안도라는 독립적인 군주제 형태가 아니라서 시리즈에서 제외되었다.)


발행2015.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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