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모나코 그리말디 대공가 - 세상에서 가장 작은 군주국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댓글 0건 조회 430회 작성일 16-02-06 16:39

본문















14547443527734.png


모나코는 프랑스 영토로 둘러싸여 있지만 이곳의 군주를 역임하고 있는 그리말디 가문은 이탈리아 제노바 공화국에 기원을 두고 있다. 그리말디 가문은 13세기 말 이래로 모나코를 통치해 왔으며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군주 가문들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14547443539114





2014년 그리말디 대공가의 모습. 왼쪽부터 현재 모나코 대공인 알베르 2세, 카롤린, 카롤린의 아들인 안드레아 카시라기 부부. 알베르 2세와 카롤린은 그레이스 켈리의 자녀인 것으로 유명하다.



모나코는 프랑스 남부 지중해 연안 코트다쥐르에 위치한 공국(Principauté)으로 바티칸 시국을 제외하고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독립국이다. 면적은 2.02㎢로 여의도 면적(2.9㎢)보다도 작은 수준이지만 인구 밀도(18,292명/㎢)는 세계 최고를 기록하고 있다. 국가에 대한 세금은 전혀 없으며 군사적으로 프랑스의 보호를 받고 있기 때문에 군대 또한 없다. 실업률 또한 극히 낮은 편이어서 2005년에는 0%, 2012년에는 2%에 불과하다.

국가의 주요한 경제적 기반은 카지노와 휴양 산업, 금융업, 제조업 등이며 현재 군주는 알베르 2세로 어머니가 유명한 미국 출신 영화배우인 그레이스 켈리이다. 최근 그리말디 가문은 각종 스캔들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긴 했지만 경제 기반의 다각화를 통해 성공적으로 모나코를 이끌어 나가고 있다.




모나코 정치 체제의 특징



흔히 ‘군주(prince)’라고 하면 보통 왕을 생각하지만 군주란 한 지역을 독립적 또는 준독립적으로 통치하는 일인 지배자(monarch)를 의미한다. 따라서 중세 이래로 군주의 범위에는 왕은 물론 공작이나 백작과 같이 일정한 영토를 다스리는 고위 귀족들도 모두 포함된다. 이는 왜 입헌군주정을 취하고 있는 모나코가 왕이 아닌 대공(大公; prince)인가를 설명해 준다.

중세 이래로 제노바 출신의 고위 귀족 가문으로 이 지역을 다스려 왔던 그리말디(Grimaldi) 가문은 대내적, 전통적으로는 절대군주제를 취하다가 1911년부터 입헌군주정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대외적인 차원에서는 역사적으로 주변 강대국들의 보호령 신세를 면치 못했고 현재까지도 국방을 비롯한 다양한 측면에서 프랑스에 의존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1962년에 제정된 헌법에 따르면 정부는 현 국무장관을 포함한 5명의 국무위원으로 구성되어 있고, 구성이나 활동에 있어서 의회가 아닌 대공의 심의나 견책만을 받는다. ‘국가위원회(Conseil national)’라고 불리는 의회는 총 24명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입법권을 지니지 못하며, 법안 발의권 및 대공이 제시하는 법안과 예산안에 대한 의결권만을 지니고 있다.

독립국이라고는 하지만 자체적인 군대가 없기 때문에 국방은 전적으로 프랑스에 의존하고 있다. 예전에 국무장관은 대공이 임명하긴 했지만 의무적으로 프랑스 국적 소유자여야 했다. 그러나 2002년부터는 유럽평의회 가입 기준에 따라 이러한 의무 사항은 폐지되었다. 전 국민 대다수(80%)가 로마가톨릭 신자인 모나코는 ‘프랑스어권 국제기구’ 가맹국이기도 하다.




그리말디 대공 가문의 역사



몬테카를로 카지노, 그랑프리 자동차 경주, 대공비가 된 영화배우 그레이스 켈리, 그리고 축구선수 박주영이 활약했던 AS모나코. 화려한 명품 관광지인 모나코를 한국 사람들에게 알려 주고 있는 대표적인 키워드들이다. 그리고 이 모든 키워드들이 수렴되는 원천에는 바로 이곳의 대공을 대대로 역임했던 그리말디 가문이 있다.

몬테카를로 카지노는 1856년 샤를 3세(재위: 1856~1889년)의 주도로 건립되었으며 가장 오래된 자동차 경주인 모나코 그랑프리 대회는 루이 2세(재위: 1922~1949년)의 후원아래 1929년에 최초로 조직되었다. 1955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과 골든 글로브 여우주연상에 빛나는 그레이스 켈리(1929~1982년)는 1956년 레니에 3세(재위: 1949~2005년)와 결혼하여 대공비(재위: 1956~1982년)가 되었으며, 축구팀 AS모나코의 주경기장 또한 1985년 레니에 3세가 자신의 할아버지이자 선대공인 루이 2세의 이름을 따서 건립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화려한 수식어와 달리 모나코 그리말디 가문의 역사는 주변 강대국의 병합 위협에 맞서 힘겹게 자신들의 모나코에 대한 지배를 유지한 고난의 행군으로 점철되어 있다.





14547443546213





모나코궁 입구에 장식된 그리말디 가문 문장



그리말디 가문은 본래 중세 이탈리아의 제노바 공화국을 구성하고 있는 유력한 가문들 중의 하나였다. 역사적으로 이 가문은 모나코 이외에도 프랑스 남동부와 이탈리아 북서부에 걸친 수많은 지역의 토착 귀족 가문으로 이름을 널리 알렸다. 공위 계승은 남계가 중단되더라도 여계 남성 대공들을 통해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때 후왕들은 어머니의 성씨인 그리말디를 계승하고는 했다. 이러한 전통은 사실 모나코만 예외적인 것은 아니며 중세 이래로 부계와 모계 중 더 유명한 가문명을 선택하는 남부 지중해 지역의 선계제(選系制) 또는 양계제(兩系制)의 전통에서 유래되었다.

그리말디 가문의 후손들은 12세기부터 지중해 지역 각지에서 지역 패권을 장악해 나갔다. 하지만 프랑스 및 교황파(구엘포파)와 손잡은 그리말디 가문은 친신성로마제국 황제 노선을 채택한 제노바 공화국에서 정치적 입지를 상실해 나갔다. 이렇게 해서 1215년 6월 10일 친황제파(기벨리노파)와 갈라서기 시작한 그리말디 가문은 제노바 서쪽 암벽 지대를 장악해 성채를 세우면서 세력을 확장해 나가기 시작했다. 14세기부터는 프랑스 카페 왕조 방계인 앙주 가문이 다스리고 있던 프로방스 백작과 긴밀한 동맹 관계를 맺었다.

16세기에 그리말디 가문의 모나코는 서부 지중해의 패권자였던 카를 5세 제국과 에스파냐의 보호령이 되기도 했지만 대공 오노레 2세(1597년 출생, 재위: 1604~1662년)와 프랑스왕 루이 13세가 조인한 1641년 페론 조약을 통해 프랑스의 영향권 아래 있는 독립공국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하지만 1793년에서 1814년까지 군주제 폐지와 통합적인 시민 정부를 내세운 프랑스 혁명 정부는 물론 팽창주의적인 나폴레옹 정부는 모나코를 프랑스에 합병하였고, 이로 인해 그리말디 가문은 20여 년 동안 모나코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고 만다.

나폴레옹의 패배 이후 1814년부터 그리말디 가문의 모나코 영지는 사르데냐 왕국의 보호령이 되었으나 1861년 프랑스-모나코 조약을 통해 그리말디 가문은 모나코에 대한 주권을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그리말디 가문의 모나코 통치와 관련하여 획기적인 전환점은 주변 강대국에 의한 보호령 체제보다도 사르데냐 왕국의 보호령으로 있던 시절인 1848년에 발생한 지역 봉기였다. 현재의 모나코에서 동쪽으로 이어진 로크브륀과 망통 지역은 과거 모나코의 영지였으나 그곳 주민들은 대공 플로레스탕 1세(1785년 출생, 재위: 1841~1856년)가 부과하는 과중한 조세에 저항하며 사르데냐 왕국 직속의 ‘자유시’로서 독립을 선언했다.

1848년 혁명과 맞물린 이 봉기 때문에 과세 시도는 백지화되었고, 이후 즉위한 샤를 3세(1818년 출생, 재위: 1856~1889년)는 새로운 수입원을 모색하기 위해 1857년 모나코에 대규모 카지노 도박장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이 도박장은 크게 성공하지 못했고 1861년 모나코에 대한 그리말디 가문의 주권 보장과 막대한 재정적 지원을 대가로 로크브륀과 망통 지역은 자체 투표를 거쳐 프랑스(보나파르트 3세의 프랑스 제2제국)에 병합되었다. 이렇게 해서 그리말디 가문은 24㎢의 영토에서 90%에 달하는 농촌 지역을 상실하고 현재의 영토만을 유지하게 되었다.





이미지 목록




14547443553588





14547443562793







‘샤를의 산’이라는 이름의 몬테카를로를 개장한 샤를 3세와 몬테카를로 카지노 건물.




영토 상실에 이은 세원의 축소는 샤를 3세로 하여금 새로운 재원을 모색하도록 하였다. 1863년 샤를 3세는 유능한 사업가였던 프랑수아 블랑을 모나코 해양사업회사 사장직에 임명하면서 재차 카지노 사업을 활성화시키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해서 1866년에 개장한 카지노 도박장 지구를 자신의 이름을 따서 프로방스어로 그 유명한 ‘몬테카를로(샤를의 산)’라고 명명하였다.

모나코 인들에게는 엄격하게 금지된 몬테카를로 카지노는 해외 갑부들에게 인기 있는 휴양지가 되었고 이 성공 덕택에 샤를 3세는 모나코 내에서 각종 세금들을 철폐하도록 하였다. 더욱이 19세기 말에 시작된 철도노선 건설 붐으로 인해 모나코에는 유럽 내에서 가장 화려한 호텔과 휴양지들, 박물관과 수족관 등이 속속 들어서게 되었다.

경제적 부흥을 이룬 샤를 3세의 뒤를 이은 알베르 1세(1848년 출생, 재위: 1889~1922년)의 치세는 무엇보다도 정치 체제의 변화가 가장 두드러졌다. 1910년 모나코 민중들은 20세기 초에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던 절대군주정에 대항하여 입헌군주정을 요구하는 혁명을 일으켰다. 인민들의 요구 사항을 받아들인 알베르 1세는 1911년 1월 5일 모나코 최초의 헌법을 마련하였고 모나코는 이제 입헌군주정 체제를 채택하였다. 이외에도 학문과 탐험에도 열정적이었던 알베르 1세는 19세기 말에 해양탐험 및 과학 탐사에도 큰 관심을 표명하면서 수족관과 다양한 연구기관, 재단 등을 설립하였다.





이미지 목록




14547443571789





14547443581813







입헌군주정을 채택하고, 정치와 문화면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인 알베르 1세와 그가 1910년 건립한 수족관.




1911년에는 몬테카를로 자동차 경주가 처음 시작되기도 하였고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점점 격렬해져 가는 국제 관계를 걱정하며 프로이센 황제 빌헬름 2세의 전쟁 포기를 설득하기도 하였다. 동시에 점점 호전적이 되어 가는 프로이센에 대항하고 유일한 후계자인 루이 2세의 사망을 대비하여 프랑스와의 정치, 경제, 군사적 협력을 더욱 강화해 나갔다.

그러나 알베르 1세가 1918년에 프랑스와 맺은 파리 조약은 프랑스에 의한 모나코 공국의 보호를 보장했지만 동시에 모나코의 대프랑스 종속성은 더욱 심화되었다. 특히 이 조약에는 모나코 공위가 샤를 3세의 사위 가문인 독일의 뷔르템베르크 가문으로 이전될 것을 염려하여 공위 계승자가 없을 경우 모나코가 프랑스에 병합된다는 조약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알베르 1세 이후에 즉위한 루이 2세(1870년 출생, 재위: 1922~1949년)는 즉위 전까지 프랑스군 장교로 복무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위축된 해양사업회사의 사업과 카지노 산업을 부흥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에게는 두 가지 과업이 주어졌는데 하나는 공위 계승에 관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탈리아의 파시즘과 독일의 나치즘에 대응하는 것이었다. 첫째 문제는 루이 2세가 정실 후손을 보지 못했다는 데에서 기인했다. 이 때문에 그는 결국 1919년 프랑스 제3공화정의 양해 아래, 젊은 시절 군복무 중에 태어난 혼외자식인 샤를로트를 자신의 정식 왕위 계승자로 삼았다.





14547443592047





프랑스군 장교로 복무했던 루이 2세



후계 문제와 더불어 루이 2세를 괴롭힌 문제는 1930년대 이후로 점점 팽창해 나가는 파시스트 무솔리니가 이끄는 이탈리아의 침략 위협이었다. 그는 이를 위해 1940년 페탱이 이끄는 프랑스 비시정부에 협력하였으나 모나코는 끝내 1942년에는 파시스트 이탈리아에 의해, 1943년에는 나치 독일에 의해 점령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 기간 동안 모나코는 이들의 반유대주의 정책에 동조하게 되었고, 연합군의 금수조치를 피해 나치가 운용하는 막대한 자금의 이동 경로로 이용되었다.

루이 2세가 친독일적 정책을 펼쳐야 했던 그 시절, 그의 외손자로서 영국과 프랑스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던 공자(公子) 레니에는 외국인 의용군으로서 반독 투쟁을 전개하는 프랑스군에 입대하여 아프리카 및 알자스 전선에서 활약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그는 미국 정부로부터 ‘브론즈스타’ 훈장을, 프랑스 정부로부터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받았다. 전장에서 용감하게 활약하던 레니에(1923년 출생, 재위: 1949~2005년)는 1949년 루이 2세가 사망하자 공위를 계승하고 레니에 3세라는 호칭을 얻는다.

이미 1944년에 어머니인 샤를로트는 성년이 된 레니에에게 공위 계승권을 양도한 바 있다(한편 레니에 3세의 아버지는 프랑스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인 폴리냑 가문 출신인 피에르 드 폴리냑(1895-1964)으로 유네스코 및 올림픽 위원회에서 모나코 대표로 활동하였다). 모나코의 실질적인 독립적 지위를 원했던 레니에 3세는 모나코에 대한 프랑스의 특권들을 재협상에 붙이고 미국 정부와 점점 가까워지려고 하였다.





14547443599310





레니에 3세와 그레이스 켈리



이러한 와중에 레니에 3세는 1955년 칸 영화제에 참석한 미국 영화배우 그레이스 켈리를 사귀게 되었고 1956년에 결혼하게 된다. 그레이스 켈리와의 결혼마저도 프랑스 정부의 승인을 받아야 했던 정치 현실은 레니에 3세의 실질적인 독립주권 회복 의지를 더욱 강화시켰다. 동시에 그리스 선박왕 아리스토텔리스 오나시스(1906~1975년)와 협력하여 모나코의 경제 발전에 박차를 가했다.

모나코의 경제 발전과 급속한 도시화는 인근 프랑스 농촌 지역에 여러 가지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공공연하게 부호들의 조세 피난처였던 것은 물론이거니와 모나코가 자체적으로 세운 라디오 및 텔레비전 방송국의 전파는 인근 프랑스 지역의 라디오·텔레비전 등의 전파 흐름을 방해하였다. 더군다나 전통적으로 체제의 보편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프랑스 입장에서 20세기에, 그것도 프랑스 영토 한 귀퉁이에 민주공화국 체제와 전혀 다른 19세기적 입헌군주정이 존재한다는 것은 점점 용납하기 힘든 일이 되었다.

1962년에 들어와 샤를 드골 대통령이 이끄는 프랑스와 정치적·경제적 긴장은 보다 첨예화되었다. 결국 10월에 프랑스는 교통과 통신, 교역과 관련한 모나코 봉쇄를 실시하였다. 모나코의 모든 경계가 프랑스에 의해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프랑스가 그때까지 허용하던 국경 지역의 무관세 정책을 폐지하고 육상과 해상 모든 길목에 군대와 세관을 설치하자 모나코의 경제는 삽시간에 모두 정지할 수밖에 없었다.

곤경에 처한 모나코는 12월 7일 프랑스의 압력 아래 군주권의 축소와 보다 근대화된 정치 제도의 확립을 골자로 한 새로운 헌법을 발표하였다. 이로써 사형 제도가 폐지되고 여성에게도 선거권이 주어졌으며, 기본적인 자유권을 지키기 위한 최고법원이 설치되었다. 1963년 5월 18일에 조인된 프랑스-모나코 조약에서 국가로서의 모나코는 정치적인 주권들과 프랑스에 대한 여러 특권들을 회복할 수는 있었지만 재정적인 차원에서 프랑스에 유리한 조치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서 모나코에 거주한 지 5년이 되지 않은 프랑스인들에 대해 프랑스 정부는 모나코 영토 내에서까지 세금을 부과할 수 있었다.





14547443607550





현 모나코 대공 알베르 2세



그 이후 그리말디 가문에는 1982년 대공비 그레이스 켈리가 자동차 사고로 사망하는 불행한 사건이 벌어졌다. 그레이스 켈리의 죽음은 그녀의 자식들에게 깊은 정신적 상처를 남겼다. 2005년에 레니에 3세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알베르 2세(1958년 출생, 재위: 2005년~현재)가 즉위하였다. 레니에 3세와 그레이스 켈리 사이에는 알베르 2세 외에도 하노버 대공비인 카롤린(1957년 출생)과 폴리냑 여백작인 스테파니(1965년 출생)가 있다.

알베르 2세는 현재 전통적인 군주의 모습이라기보다는 모나코라는 거대 기업을 지휘하는 사업가로서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2011년 현재 세계에서 부유한 군주들 중 9위를 차지했으며 같은 해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 수영선수 샤를린 위트스톡(1978년 출생)과 결혼하였다. 2014년 샤를린 대공비는 가브리엘과 자크라는 이름의 쌍둥이 남매를 출산하였다.




그리말디 대공 가문의 평가



그리말디 가문은 중세 이래로 모나코에 뿌리 내리고 수많은 강대국들의 병합 위협을 이겨낸 오랜 전통을 지닌 가문이다. 그렇지만 혼인 문제나 자식 문제와 관련한 스캔들에 있어서 전통적으로 많은 부적절한 이야기들을 남기고 있다. 알베르 1세는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의 사촌인 메리 빅토리아 해밀턴과 결혼했지만 1870년 알베르 1세가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 참가하고 있는 도중 대공비는 아들 루이 2세를 출산한 후 영국으로 돌아가 버리고 이후 10년이 지난 1880년에 이혼하였다. 1889년 알베르 1세는 알리스 엔느(독일식으로는 엔느를 ‘하이네’라고 발음하는데, 실제로 그녀의 아버지는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와 사촌지간이었다.)와 결혼하지만 자식을 낳진 못했다.

루이 2세는 정실 후손을 얻지 못하여 군복무 기간에 마리-쥘리에트 루베르라는 유부녀와의 관계에서 태어난 혼외자식을 후계자로 지명해야 했는데 그 사람이 바로 레니에 3세의 어머니인 샤를로트였다. 샤를로트는 루이 2세의 정실 자식이 없는 상황에서 어렵사리 후계자 자격으로 왕실에 입양될 수 있었다.

샤를로트의 아들 레니에 3세는 1982년에 대공비 그레이스 켈리를 1982년에 잃는 큰 슬픔을 안고 살아야만 했다. 그레이스 켈리는 운전 중의 갑작스러운 발작으로 차가 산비탈로 굴러 떨어져 사망하고 말았다. 하지만 레니에 3세를 더 괴롭힌 것은 대중매체와 파파라치의 표적이 되곤 했던 그의 세 자녀들이었을지도 모른다.





14547443616707





레니에 3세의 막내딸인 스테파니.



첫째 딸인 카롤린은 세 번의 결혼과 두 번의 이혼으로 유명하며, 현 남편인 하노버 대공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와도 별거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막내딸인 스테파니는 어머니 그레이스 켈리의 사고 당시 함께 있다가 살아남았는데 이 당시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아서인지 많은 기행을 저지르고 다녔다. 수많은 남성 편력과 두 번의 결혼, 한 명의 사생아로 언론을 장식했다.1)

이러한 스캔들은 대공 알베르 2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젊은 시절 알베르 2세는 당대의 유명한 여배우들인 브룩 쉴즈, 기네스 팰트로는 물론 장쯔이나 공리와 같은 중국 여배우들과도 진지한 관계를 발전시켰다. 그 외에도 알베르 2세에게는 1992년과 2005년에 만난 두 명의 여인들과의 관계에서 낳은 두 명의 혼외자녀들이 있다. 특히 프랑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세 번째 사생아 친자 확인검사 소식에 질려 2011년 알베르 2세와 결혼을 앞두고 있던 위트스톡이 고향으로 도망치려고 했다고 한다.2)





14547443623910





알베르 2세와 그레이스 켈리.



그러나 2011년 알베르 2세의 결혼 이후로 그리말디 가문은 큰 스캔들 없이 세상에서 가장 작지만 부유한 공국인 모나코를 큰 문제없이 이끌어 가고 있다. 국가의 세금이 없기 때문에 전 세계 부유층들이 몰려드는가 하면 전통적인 카지노 및 휴양 산업은 여전히 건재하다. 단, 알베르 2세는 모나코 경제의 다양성 확보를 위해 금융업과 다양한 제조업에도 자본투자를 확장해 나가고 있어 현재 카지노 산업에 대한 모나코 재정의 의존도는 그리 크지 않은 편이다.

그리말디 가문의 유명한 대공들의 업적이나 언론 보도를 장식한 다양한 사건·사고들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 대중들에게 모나코 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누구보다도 현 대공 알베르 2세의 어머니인 그레이스 켈리이다.

모나코의 대공비가 된 그레이스 켈리의 생애는 2014년 프랑스 출신 감독 올리비에 다앙에 의해 <그레이스 오브 모나코> 라는 제목으로 영화화 되었다. 그레이스 켈리 역에는 니콜 키드먼이, 레니에 3세 역에는 팀 로스가 분했다. 영화 개봉 전 알베르 2세를 비롯한 그리말디 가문 인사들은 영화에 나온 사실관계가 부정확하고 왜곡되어 있다고 비판했다.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감독은 이 영화는 어디까지나 픽션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자신의 가족과 남편, 직업을 화해시키고자 했으나 또 다른 역할을 창조하기 위해 그 직업을 포기한 현대 여성의 초상화”를 그리고자 했다고 지적하고 그리말디 가문 사람들과도 충분한 소통으로 오해를 풀었다고 전했다.3) 이 영화는 그레이스 켈리의 모나코 생활 외에도 1962년에 벌어진 프랑스와 모나코의 위기 사태를 다루고 있다.





14547443637364





그리말디 로열 패밀리의 1973년 모습. 왼쪽부터 레니에 3세, 캐롤린, 스테파니, 알버트 2세, 그레이스 대공비



그리말디 가문이 통치하고 있는 모나코. 아직도 프랑스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지 못한 상황이지만 모나코는 1990년대 이후에 들어와 여러 국제기구에서 독립국가로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더욱 힘차게 내고 있다. 1993년에는 국제연합(UN) 회원국이 되었고 2004년에는 유럽평의회 회원국이 되었다(하지만 아직 유럽연합에 가입되어 있지는 않다). 그 밖에도 2002년에 레니에 3세는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과 1918년 조약을 갱신하면서 그리말디 가문의 공위 계승자가 없더라도 모나코가 독립국 지위를 유지하기로 결정하였다.

현재 대공인 알베르 2세의 정력적인 활동과 더불어 모나코는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면에서 안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어 그리말디 가문은 국민들의 신뢰를 듬뿍 받고 있다. 세계적인 경제 위기 속에서 경제 정책에 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면 21세기에도 그리말디 가문과 모나코는 꾸준히 살아남을 것이다.



“Monaco: Le tragique destin amoureux des Grimaldi(모나코: 그리말디가 사람들의 비극적인 사랑의 운명)”, <France soir> (2011년 6월 27일자) [http://archive.francesoir.fr/people-tv/tapis-rouge /monaco-tragique-destin-amoureux-des- grimaldi-113311.html].
주석 레이어창 닫기


“[취재파일] 알베르 2세의 못 말리는 여성 편력!”, <SBS 뉴스>(2011.07.04) [http://news.sbs.co.kr/ news/endPage.do?news_id=N1000941998].
주석 레이어창 닫기


“Olivier Dahan : "Je revendique le droit à la fiction"(올리비에 다앙: “나는 픽션에 대한 권리를 요구한다”)”, <Le Journal du dimanche(Le JDD)>(2013년 1월 19일자) [http://www.lejdd.fr/Culture/ Cinema/Actualite/Exclu-JDD-Olivier-Dahan-sur-la-polemique-autour-du-film-Grace-de-Monaco-Je-revendique-le-droit-a-la-fiction-586978].
주석 레이어창 닫기



홍용진 | 서울시립대학교 도시인문학연구소 HK 교수
글쓴이 홍용진은 고려대학교 서양사학과를 졸업한 후, 동 대학원에서 「중세 말 프랑스 왕정과 ‘국가’ 이데올로기」로 석사를 받고, 파리1대학에서 「왕과 정치사회: 1315-1360년 프랑스 군주정과 정치적 의사소통체계」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시립대학교 도시인문학연구소 HK교수로 재직중이다.
저서로 <지적 권위와 정치권력 - 중세 말 파리대학과 정치>, <13세기 말∼14세기 초 프랑스 왕권 이미지 생산>(2014년도 역사학회 우수논문상 수상작), <중세 말 프랑스 국가발생과 폭력의 역사 - 필리프 4세와 필리프 5세 시기를 중심으로>가 있고, 공저로 <교육과 정치로 본 프랑스사>가 있다.


출처
세계의 왕가
현재 전 세계에는 29개의 국가가 군주제를 유지하고 있다. 과거의 유산이라고 여겨지는 군주제가 아직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일까. 그리고 현존하는 왕가는 어떤 모습일까. 지금까지 군주제가 유지되고 있는 29개국 및 20세기에 왕정이 폐지된 그리스, 21세기에 군주제의 막을 내린 네팔 왕가를 살펴본다. (안도라는 독립적인 군주제 형태가 아니라서 시리즈에서 제외되었다.)


발행2015.12.10.



주석


1


“Monaco: Le tragique destin amoureux des Grimaldi(모나코: 그리말디가 사람들의 비극적인 사랑의 운명)”, <France soir> (2011년 6월 27일자) [http://archive.francesoir.fr/people-tv/tapis-rouge /monaco-tragique-destin-amoureux-des- grimaldi-113311.html].

2


“[취재파일] 알베르 2세의 못 말리는 여성 편력!”, <SBS 뉴스>(2011.07.04) [http://news.sbs.co.kr/ news/endPage.do?news_id=N1000941998].

3


“Olivier Dahan : "Je revendique le droit à la fiction"(올리비에 다앙: “나는 픽션에 대한 권리를 요구한다”)”, <Le Journal du dimanche(Le JDD)>(2013년 1월 19일자) [http://www.lejdd.fr/Culture/ Cinema/Actualite/Exclu-JDD-Olivier-Dahan-sur-la-polemique-autour-du-film-Grace-de-Monaco-Je-revendique-le-droit-a-la-fiction-586978].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