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유학에서 서학으로 - 서학의 전래와 실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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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47회 작성일 16-02-06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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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전파된 서학



조선 후기에 중국을 통해 이른바 ‘서학(西學)’이 전래되었다. 17세기부터 시작된 ‘Western Impact’로서 서학은 서양의 과학기술과 종교가 모두 포함된 용어이다. 그러나 18세기 말엽 이후 조선에서 서학이라 지칭할 때는 대개 서교(西敎), 즉 천주교 신앙만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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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활동한 예수회 선교사들은 현지 사정에 맞는 포교 방법으로 가톨릭 전파에 힘썼다.(왼쪽부터 마테오 리치, 아담 샬, 페르디난트 페르비스트)



천주교 신앙을 비롯하여 과학기술이 포함된 서학은 특이하게도 한문으로 쓰인 서책을 통해 조선에 전래되었다. 특히 조선에서 서학이 수용되는 과정에서 드러난 특징은 선교를 통하지 않고 조선인 스스로의 자발적 노력에 의해서 이뤄졌다는 사실이다. 세계사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서학의 자발적 수용은 명말청초 이래 중국에 입국하여 가톨릭을 전파하는 선교사들이 지은 한역서학서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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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의 대표적인 수도회인 예수회를 창설한 성 이냐시오 로욜라.



마테오 리치 등 당시 선교를 위해 중국에 온 예수회(Jesuite) 선교사들은 선교의 방편으로 그리스도교 교리와 함께 서양의 과학문화를 한역한 책을 발간하였다. 그런데 이들 선교사들이 전한 신앙은 근대가 아닌, 중세 스콜라 철학을 기반으로 한 그리스도교였다. 선교 1세대인 마테오 리치를 비롯한 예수회 선교사들은 그리스도교를 중국사회에 잘 전파하기 위해 중국의 주류사상인 유학에 주목하였고, 결국 보유론에 입각하여 그들의 신앙을 설명했다. 보유론은 중국의 유교와 서양의 그리스도교가 교리상 서로 충돌하는 것이 아니며,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은 유교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여 완성시켜 준다는 논리였다. 보유론은 유교사회에서 서양의 그리스도교를 거부감 없이 선교하기 위해 만들어낸 논리였다.

17세기 이래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전래되었던 서학 관련 한문서적들은 대부분 보유론의 입장에서 저술되고 번역된 것이었다. 당시 이 책을 읽었던 중국과 조선의 지식인들은 유교문화의 전통을 포기하지 않고도 천주교를 받아 들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조선 후기 지식인들은 서양 문물 중에서도 국가를 발전시킬 과학기술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수용에 긍정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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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경은 천리까지 볼 수 있다하여 이름이 붙여졌다. <실학박물관 제공>



처음 서양문물이 공식적으로 조선에 전래된 것은 1631년이다. 명나라에 사행사로 갔던 정두원이 귀국길에 천주교 서적과 함께 천문도, 천리경, 자명종 등 서양의 과학서적과 기기를 가져오면서부터이다. 이 무렵에는 실학자 가운데 일부가 서양의 과학문명에 대해 관심을 보였으나, 파급 정도는 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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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예수회 선교사인 마테오 리치는 중국에 최초로 선교했다.



서학에 대한 조선 지식인들의 관심은 18세기에 들어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북경에 가는 사신들은 서양의 서적과 문물기기를 살피고 천주교 성당을 둘러보는 것이 기본 코스였다. 이들은 서양 선교사들을 만났고, 한역서학서를 읽은 뒤라 이전보다 훨씬 심도 있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대화 주제는 주로 서양의 천문 역법과 과학기술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천주교 교리서인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는 중국에서 흔하게 사오는 책이었고 서학에 관심 있는 지식인들이라면 읽어 볼 수 있었다. 마테오 리치는 『천주실의』에서 그리스도교의 유일신을 유교의 상제에 결부시켜 ‘천주’라는 개념으로 중국에 소개하였다.

그러나 조선에 천주교가 수용될 당시 ‘천주’ 개념을 중심으로 한 보유론은 이미 중국 교회에서 비판받고 있었다. 때마침 조선에서도 1791년의 윤지충 사건(신해박해)을 계기로 서학을 탄압하는 길로 접어들었고, 이러한 과정에서 조선 교회 창설에 참여했던 양반 지식층들은 천주교를 떠나 자신이 원래 속했던 유교문화로 회귀해 갈 수밖에 없었다.




성호학파의 서학 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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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실의는 중국에 가톨릭을 전파하기 위해 보유론적 관점에서 저술된 책으로서, 출간 후 동북아시아에 널리 전파되었다. <출처: 박물관 포털 e뮤지엄 – 공공누리>





중국 명나라 말기의 이탈리아 선교사 알레니가 저술한 세례지리도지 『직방외기』의 일부 내용.




서학은 실학자들이 관심을 가졌던 조선 후기 외래사상이었다. 특히 성호 이익은 18세기 전반에 서학에 대한 인식을 지식인 사회에 심화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성호 이익의 부친 이하진은 사행으로 북경에 갔다가 수천 권의 서적을 구입해 왔는데, 그 가운데는 명말청초에 중국에서 활동하던 예수회 선교사들이 쓴 서학 서적이 상당수 있었다. 그가 당시에 읽었던 한문으로 번역된 서학서적으로는 『직방외기』 · 『천주실의』 · 『천문략』 등 천문 · 역법 · 수학 · 지리 · 기술 · 문물 · 종교 등을 망라했고 관련한 서적만도 20여 종이 넘었다. 서학에 대한 성호 이익의 관심은 지대하여 이때 읽었던 서학서적을 소개하기도 하고 논평하는 발문을 쓰기도 하였다.

성호 이익은 서학 전반에 대해 폭넓게 이해한 인물이었지만,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성호는 “천주는 곧 유교의 상제와 같다. 그런데 천주를 공경하여 섬기고 두려워하여 믿는 태도는 바로 불교의 석가와 같다.”라 하여 천주교를 불교와 동일시하였다. 서양종교로서 천주교의 신앙조목에 대해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것으로 본 성호 이익은 천주교의 천당지옥설 등은 불교와 마찬가지로 허황하기 짝이 없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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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 이익이 자신의 제자 안정복에게 보낸 편지. 안정복은 성호 이익의 수제자로서 성호학파의 주요 인물이었다. <연합뉴스 제공>



성호 이익은 천주교 신앙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지만, 서양과학에 대해서는 그 탁월성을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서양의 윤리적 인식도 유교와 소통할 수 있는 것으로 보는 등 서학에 대해 선택적이고 양면적인 자세를 가졌다. 결국 서학에 대한 성호 이익의 양면적 입장은 성호학파 안에서 서학에 대한 두 갈래의 입장 차이가 나오게 되는 양상을 초래하였다.

성호 문인들은 정통 유교 입장에서 천주교 교리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하는 공서파와 과학기술과 윤리적 해석을 수용하는 신서파로 분리되었다. 이익의 초기 제자들인 신후담 · 안정복 등 공서파의 대표주자들은 서양과학에 별다른 관심도 없었고 천주교 교리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 반응을 보였다.

반면, 성호의 후기 제자들과 그 계승자들인 권철신 · 이가환 · 이벽 · 정약용 등은 서양과학기술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졌고, 천주교 신앙에까지 빠져 들어갔다. 권철신을 중심으로 문인들이 모여들어 강학하던 천진암 · 주어사 강학회(1777~1779)에서는 당시 천주교 교리에 깊은 이해와 확신을 가졌던 이벽이 참여하면서 사실상 천주교 교리에 관한 토론이 일어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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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벽, 이승훈, 정약용 등 남인 학자들은 모여서 예배를 보기도 하였다. 이들의 대표적인 집회 장소가 바로 중인 출신의 김범우의 집인데, 현재의 명동성당이다. <출처: 문화재청 – 공공누리>



이가환은 이익의 종손으로 정조의 깊은 신임을 받아 공조판서에까지 오른 인물로 특히 수학과 천문학 등 서양과학에 해박했다. 이벽은 천주교 교리에 대해 가장 해박한 이론가였으며, 『성교요지』나 「천주공경가」라는 천주교 교리를 해설하고 찬양하는 가사를 저술하기도 하였다. 이벽의 저술은 유교와 천주교의 조화를 염두에 둔 예수회의 보유론적 논리를 계승한 것으로 천주교 신앙과 유교가 서로 보완할 수 있는 입장에서 쓰인 것이다.

이처럼 조선 후기 서학을 조선에서 처음으로 수용한 계층은 성호 이익의 문인들이었다. 이들은 대개 신분상 양반들이었고 정치사상적으로는 기호, 남인 출신으로 중소지주적 특성을 가지고 있던 인물이었다. 이들 가문은 남인들이 축출되는 ‘경신대출척’이후 정치적으로 소외되다가 정조 연간의 탕평책에 힘입어 다시 조정에 나갈 수 있었다. 그런데 서학을 수용한 성호 문인들은 학문연구에 전념하고 있던 지식인들이었다. 이들은 당시 청나라 학풍의 영향을 받아 육경 중심의 고학에 관심을 가졌고, 현실성과 실천성이 떨어져 버린 예학 중심의 성리학적 학문풍토에 비판적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더욱이 이들은 고학 연구를 통해 선진 시대의 유학을 연구하며 성리학 이외의 여타 사상, 즉 양명학에 대해서도 탄력적 입장을 가졌고 이는 결국 서학을 수용하는 데까지 이르게 하였다.




실학자들은 서학을 어떻게 인식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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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의 『삼봉집』. 불교에 대한 비판이 기준이 된 『불씨잡변』은 『삼봉집』 제9권에 수록되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실학자 중에서 천주교를 비판한 대표적인 인물은 신후담과 안정복이다. 신후담은 성호 문하에 나갔던 초기인 23세 때(1724) 『서학변』이라는 서학비판서를 저술하였다. 이 책은 조선 초기의 정도전의 『불씨잡변』이 불교 비판의 기준이 되었던 것처럼 천주교 비판의 유학적 기준으로 입지를 차지하고 있다. 신후담은 『서학변』에서 『영언려작』, 『천주실의』, 『직방외기』 등 한역서학서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신후담에게서 서학, 즉 천주교는 이단에 불과한 것이었다. ‘살기를 탐내고 죽기를 아쉬워하는 것’은 이단들의 공통점인데 이것이 천주교 교리에서도 발견된다고 했다. 현세가 아닌 사후세계에서 영원하고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이기적 마음이야말로 이단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신후담과 함께 서학을 비판한 안정복은 1784년부터 천주교 신앙운동이 성호문인들 사이에서 일어나자 이를 통탄하고 이듬해 서학 비판서로서 『천학문답』과 『천학고』를 저술하였다. 안정복은 신서파에 의해 신앙조직이 형성되어 가는 것을 막기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인 인물이었다. 안정복은 스승인 성호 이익에게 보낸 편지에 “서양의 설은 비록 정밀하다 할지라도 결국은 이단의 학문일 뿐입니다.”라고 언급했다.

안정복의 서학 비판의식은 당시 천주교회 창설운동의 중심인물의 하나이던 권철신에게 보내는 2,600여 자의 충고서한에 단적으로 잘 나타나 있다. 이 편지에서 그는 천주학을 요약 설명하고 “우리의 생은 현세에 있는데 천당지옥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라고 반문하였다. 안정복의 인식은 내세관이 없는 유학자의 견해로는 당연한 것이었다. 안정복은 이미 이익에 보낸 편지에서 서학의 영혼개념을 비판하는 등 서학 비판의 논리적 입장을 정립하고 있었다. 안정복은 서학의 영혼불멸설은 불교의 윤회와 다를 바가 없다고 보고, 천주교와 불교의 허황됨과 달리 유교에서는 이러한 말을 하지 않는 것이라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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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왕푸징 거리에 있는 동천주당(동당). 당시 북경에 가는 실학자들에게는 필수 코스 중 하나였다. <출처: BY smartneddy @Wikimedia Commons (CC BY-SA)>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실학자들과 달리 서학에 긍정적인 실학자들도 천주교에 대해서는 유학자적 입장에서 비판적이었다. 북학파의 대표인물인 담헌 홍대용은 서양과학지식과 기술의 도입 활용을 주장한 인물이지만, 천주교에 대해서는 적극적이지 않았다.

담헌 홍대용은 1764년 북경에 갔을 때 흠천감과 관상대, 동천주당 등을 견학하면서 당시 흠천감의 감정을 맡았던 유송령(劉松齡, August von Hallerstein)과 포유관(鮑友管, Anton Gogeisl) 두 예수회 선교사를 만나 서학과 관련한 필담을 나누었다.

담헌은 “유교는 오륜을 숭상하고 불교는 공적을 내세우고 노장청정을 주장하는데 서학은 무엇을 숭상하는 것입니까?”하고 이들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유송령은 “서학은 사랑을 가르치는 것이며, 천주는 만유의 위에 계신 분이며 사람 사랑하기를 내 몸 사랑하듯이 한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담헌은 “천주는 상제입니까 아니면 따로 그런 사람이 존재하는 것입니까?” 하고 반문하였다. 담헌은 천주교를 불가의 설을 차용한 이단으로 보고 “서양의 학문은 유가의 상제 이름을 도적질하여다가 불교의 윤회라는 말로 치장을 하였으니 가소롭다.”라고 언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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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교리를 담은 육도윤회도. 불교와 기독교의 사후 세계에 관한 관점은 확연히 다르지만, 사후 세계를 인정하지 않았던 당시 유학자들의 입장에서는 동일하게 보였을 것이다.



북학파의 좌장인 연암 박지원열하에 갔을 때 청의 석학 곡정 왕민호와 서학에 관한 문답을 하였다. 이때 박지원은 “서교에서 불가의 윤회설을 천당지옥설로 삼고 믿으면서도 불교를 헐뜯고 물리쳐 마치 원수와 같이 여김은 어째서인가?”라고 반문하였다. 천주교는 불교보다 하위의 종교이며 독설이 강한 종교로 인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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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1년 순조 1년 때 신유박해로 권철신, 이가환, 이승훈 등 천주교 신자들이 다수 처형되었다. 이때 많은 천주교도가 숨어서 살았던 대표적인 곳이 현재의 제천 구학리의 배론성지이다. <연합뉴스 제공>



한편,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 정약용은 23세 때 고향인 마현(현재의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에 사돈지간인 이벽으로부터 천주교에 대해 듣게 되었다. 물론 다산은 이보다 앞서 16세에 성호 이익의 저술을 읽어보았으므로 서학에 대한 이해와 관심은 십 대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청년시절 친밀하게 교류했던 이가환이나 이승훈, 이벽 등은 성호 문인들이면서 천주교운동을 일으킨 인물들이었다. 그런데 다산은 직접 천주교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신유박해연좌되어 배교를 천명하고 강진으로 유배되어 18년의 고초를 겪었던 다산은 천주교와 연좌될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경전 해석을 중심으로 한 다산의 실학적 세계관 속에는 천주교 교리에 의해 받았던 영향이 광범하게 녹아 있다.

18세기 서학을 수용했던 실학자들은 유교와 천주교의 조화, 즉 보유론에 기초한 ‘한역서학서’를 통해 서학을 접했고, 서양문물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에서 점차 신앙으로 발전해 나간 특징을 가지고 있다. 서학은 조선사회에 대한 비판의식과 시대정신을 치열하게 고민했던 조선 지식인들이 몰두했던 신사조였다. 그러나 학문적 관심에서 출발한 서학은 점차 신앙으로 옮겨갔고, 천주교 박해 이후에는 신앙은 물론이고 학문적 관심마저도 멀리하게 되었다.




정성희 | 실학박물관 학예연구사
정성희는 역사연구가로 ‘현재와 소통하는 살아있는 역사’를 발굴해 내는 일에 전념하고 있으며, 현재는 ‘21세기와 실학’이라는 주제에 관한 저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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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실학,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다
실학은 18세기 한국 역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이지만, 여전히 실체와 환상이라는 상반된 시각 속에서 실학을 바라보고 있다. 실학은 실패한 개혁의 꿈인가? 아니면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고자 했던 학문이었던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 찾아 17명의 전문가들이 다양한 시각으로 개혁사상이자 문화사조로서 실학을 조명해 본다.


발행2015.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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