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그리스 글뤽스부르크 왕가 - 망명과 귀환을 반복하다 사라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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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50회 작성일 16-02-06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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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왕에게 가장 중요한 도구는 여행가방이다.”라는 말을 남긴 그리스의 국왕 요르요스 2세처럼, 입헌군주제 아래 그리스의 국왕들은 강제 폐위와 망명, 귀환을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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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국회의사당. 원래는 바이에른의 왕 오톤을 위한 궁전으로 지어졌다.



그리스는 입헌군주제 실시로 단원제의 의회제도를 갖추었으며, 수시로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그러나 그리스 사회에서 전통적 가치와 비잔티움 후예로서의 자긍심은 다른 어떤 가치보다 우선하는 것이었고, 국왕의 역할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그리스의 자긍심을 수호하는 데 있었다. 그러므로 이를 충족하지 못했던 왕들은 모두 망명을 거듭하다가 불행한 생을 마감했다.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향수로 시작되었으나 단명한 왕정



그리스는 1863년부터 1973년까지 입헌군주제와 의회 민주주의를 운영했으며, 선거와 국민투표가 활발했다. 그러나 그리스의 의회주의는 그리스 국민이 자발적으로 얻어낸 굳건한 성과물이 아니라, 서구 열강과 외국 왕실의 결탁으로 반강제된 불안정한 것이었다. 게다가 그리스 국민에게는 그리스가 옛 비잔티움 제국의 명예를 회복해야 한다는 뿌리 깊은 소명 의식이 여전히 내재하고 있다. 이러한 소명 의식은 민족주의, 전통적 가치 수호, 자긍심 등과 결합하여 의회 민주주의를 선택했지만 전통과 권위에 대한 향수가 강렬한, 독특한 그리스만의 입헌군주제의 특징을 만들어왔다.

그리스의 왕정은 1974년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국민의 69%가 왕정 폐지에 찬성하면서 종료되었다. 그러나 독재정권하에서 국민투표는 사실상 공개 투표였다는 점, 국민투표에 의지하여 왕정의 복고와 폐지가 좌우될 정도로 왕정은 불안하게 유지되었다는 점, 1924년부터 잦은 정부 교체와 쿠데타로 정세가 불안했다는 점 등은 모두 왕정의 단명을 예고하고 있었다. 결국 불안정한 정세와 왕정의 유명무실한 권위로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그리스 왕정은 1974년 종료되었다.




그리스 입헌군주제의 불안한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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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후 초대 국왕을 지낸 오톤. 독일계로서 끝내 그리스에 동화되지 않았다.



그리스는 15세기 비잔티움 제국의 멸망 이후 오스만 튀르크의 통치를 받다가 이에 항거하여 19세기 중엽에 그리스 독립 전쟁을 벌였다. 1825년 4월 오스만 튀르크의 술탄은 이집트의 무함마드 알리와 연합하여 그리스의 반란을 진압하고 아테네를 수복했다. 그러나 그 당시 열강 3국이었던대영제국, 프랑스, 러시아제국이 각국 해군을 그리스에 파병하며 그리스-튀르크 전에 개입했고, 그 결과 그리스는 튀르크인들을 그리스에서 몰아내고 1832년 독립국으로 인정받았다.

독립 직후, 그리스는 열강의 추천으로 독일계 비텔스바흐 왕가의 오톤(1815~1867, 재위 1832~1862. 영문 표기는 ‘오토’이나 그리스어로 ‘오톤’으로 발음)을 초대 국왕으로 맞았다. 그러나 독일계 혈통인 그는 그리스 국왕이 된 후에도 그리스 정교회로의 개종을 거부했고, 그리스에 독일의 체제를 세우려고 시도하는 등 자부심이 강한 그리스인들의 정서를 이해하지 못했다. 게다가 후계도 없었던 그는 그리스에서 안정된 왕조를 구축해나가기에 적합한 왕이 아니었다. 그리스인들은 새로운 헌법 제정을 요구하며 아테네궁 앞에 집결했고, 1863년에는 오톤 국왕을 몰아내고 덴마크계 빌헬름 공을 요르요스 1세로 맞이하여 입헌군주제를 시작했다.




덴마크에서 수입된 왕, 그리스를 위해 헌신하다


요르요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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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입헌군주제의 초대 국왕 요르요스 1세



요르요스 1세는 덴마크계의 빌헬름 공으로서 원래 그리스인들이 열강에게 요구한 왕(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차남 알프레드 왕자)이 아니었으나, 1863년 열일곱 살의 나이로 즉위하면서 즉시 종교를 그리스 정교회로 바꾸고, 입헌군주제를 선포하여 스스로 왕권을 축소시키는 등 그리스의 국왕으로서 발 빠른 대처를 하였다. 그는 낙후된 그리스 경제를 재건하기 위해 열악한 농촌 환경과 교육 개선에 힘썼고, 덴마크 출신이었지만 그리스에서 민심을 얻지 못한 덴마크 섭정관을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의 열망은 무엇보다도 옛 비잔티움 제국의 영예 회복임을 알고, 재위 기간 내내 영토 확장에 가장 큰 관심을 기울였다. 그의 누이 알렉산드라와 결혼한 영국의 에드워드 7세를 통해 친영 정책을 펼쳤고, 즉위와 함께 영국의 답례로 이오니아 제도를 양도받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반대를 무릅쓰고 크레타 섬(오스만 튀르크령으로 그리스 주민이 많이 거주)을 회복하기 위한 전쟁을 감행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전쟁에서 지면서 권위가 많이 실추되었으나, 당시 실권을 장악한 의회 지도자 베니젤로스와 강력한 그리스 군대 육성을 공동의 목표로 삼아 재기하였다. 제1차 발칸 전쟁(1912~1913년)에서 오스만 튀르크에 다시 크레타 섬을 요구하며 전쟁을 벌이던 중 테살로니키에서 암살되었다.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출발했으나, 장악 능력이 부족했던 왕


콘스탄티노스 1세



요르요스 1세 이후의 왕들은 각기 1, 2차 세계대전에 휘말리면서 요르요스 1세 국왕만큼의 장악 능력을 갖지 못했다. 그러나 헌법상 상징적 통수권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몇몇 국왕을 제외하고는 정치력을 행사하길 원했으며, 무엇보다 군사력을 장악하고자 했다. 사실 그리스 국왕은 그리스의 명예 회복이라는 민심에 부응하지 못하면 존재 자체가 위협받는 상황에 늘 처해 있었다. 특히 주변국과의 영토 분쟁에서 패하여 그리스의 명예를 훼손시킬 경우, 입헌군주제하의 국왕은 폐위와 망명을 강요당했다. 그러므로 요르요스 1세 이후 그리스가 벌인 전쟁의 승패 여부에 따라 국왕들은 망명과 복위를 거듭하며 불안정한 생활을 이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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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노스 1세.



아버지 요르요스 1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왕은 콘스탄티노스 1세였다. 입헌군주제를 실시하고 있는 그리스에서 처음으로 세습에 의해 평화적으로 왕위를 계승한 의미 있는 왕이었다. 그는 요르요스 1세와 러시아 왕녀 출신 올가 왕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콘스탄티노스 1세는 탄생했을 때부터 고대 비잔티움 왕국의 영광을 재현할 왕이라는 국민적 기대를 한 몸에 받았으며, 비잔티움 제국의 옛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다시 세울 왕이라는 의미로 ‘콘스탄티노스’라는 이름을 받았다.

저명한 학자들이 차출되어 콘스탄티노스에게 고대 그리스 철학, 물리학, 역사학 등을 가르쳤다. 군 장교로 복무한 뒤 독일 황실 근위대에서 근무하였고, 독일 하이델베르크, 라이프치히 대학 등에서 정치와 경제학을 공부한 뒤 독일 프리드리히 3세의 딸 소피아 공주와 결혼하였다. 왕세자 시절, 권력자 베니젤로스와 함께 강력한 그리스 군대 재무장에 참여하였고, 제1차 발칸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영토 확장에 기여했다.

그러나 즉위 후에는 1차 세계대전 당시 그리스군 참전 여부를 두고 베니젤로스와 불화를 겪으면서 왕위 유지가 불안정해지기 시작했다. 열강이 1차 대전에 그리스군의 참전을 요구하자 베니젤로스는 ‘그리스는 열강과 적대할 수 없다’는 취지로 열강에 협조할 것을 주장했으나, 콘스탄티노스 1세는 중립 정책을 고집했기 때문이다. 결국 왕의 결단력 부족으로 그리스 민심이 돌아서자, 콘스탄티노스 1세는 폐위되어 가족과 함께 스위스로 망명했다.




거듭되는 폐위와 망명으로 불안정한 왕권


요르요스 2세



콘스탄티노스 1세가 폐위된 1917년, 왕위 계승 1순위는 콘스탄티노스 1세의 장남인 요르요스 왕자였으나, 요르요스 왕자가 독일에서 군 생활을 한 전력이 문제가 되었다. 그리하여 왕위는 콘스탄티노스 1세의 차남인 알렉산드로스 1세가 계승하게 된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 1세는 즉위하자마자 평민인 마노스를 왕비로 맞으려 하여 문제가 생겼다. 그는 결혼의 합법성 인정 문제로 재위 초반을 보내다가, 1920년 산책 중 원숭이에게 물려 생긴 합병증이 원인이 되어 급사했다.

때마침 베니젤로스가 선거에서 실각하면서 국민투표로 콘스탄티노스 1세의 복귀가 압도적인 찬성률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스 1세는 그리스-터키전(1919~1922년)을 주도했다가 그리스가 패하자 다시 폐위되고 말았다. 퇴위 후 콘스탄티노스 1세는 시칠리아 섬으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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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르요스 2세.



뒤를 이은 요르요스 2세(콘스탄티노스 1세의 장남)는 재위 기간 중 폐위와 망명을 두 차례나 반복한 왕이었다. 이미 아버지의 폐위로 1917년부터 망명 생활을 하던 중 왕위에 올랐던 동생 알렉산드로스가 사망을 하자, 그리스 정부는 장례식에 참석하려던 어머니 소피아 왕비조차 독일 출신이라는 이유로 입국을 불허했다.

요르요스 2세는 그리스-터키전의 실패로 부왕이 폐위되자 왕위를 계승했지만, 1923년 1차 세계대전 패전에 대한 국민적 반감 때문에 그 역시 폐위되어 망명했다. 1924년에는 그리스가 왕정 폐지 및 공화정을 선포하여 그리스 국적마저 박탈되고 루마니아로 망명했다. 그러나 1935년 콘달리스 장군이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뒤 국민투표를 통해 왕정복고를 선포하면서 그리스에 복귀했다.

그러나 이후 7년간 그리스는 강력한 군부 독재정권이 들어서면서 사실상 허수아비 왕에 불과했다. 유럽 대륙은 다시 2차 세계대전을 맞으며 불안한 정국에 휘말렸다. 1941년 독일이 그리스를 점령하자 요르요스 2세는 다시 망명 생활을 시작했으나, 전후 연합군의 통제하에 실시된 국민투표로 복위되었다. 그러나 복귀한 당시 왕궁은 약탈로 피폐했고, 왕궁 밖에는 시체가 즐비했으며, 그리스 공산당과 보수 왕당파 사이의 갈등으로 정치는 불안정한 상태였다. 요르요스 2세는 말년에 동맥경화 등 지병 악화로 목숨을 잃었다.




국제 정세와 왕권의 불안정 속에 즉위했으나 병마로 고생하다


파블로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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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스 1세.



요르요스 2세가 후계 없이 사망하자 차기 왕위는 동생인 파블로스 1세가 계승했다. 파블로스 1세는 다트머스의 해군사관학교를 거쳐 피레에프스(그리스의 항구 도시)의 그리스 해군학교를 거쳐 그리스 해군의 중위로 복무했고, 2차 세계대전 때 그리스와 이탈리아의 교전에 참여하는 등 해군 장교로서 그리스에 기여했다. 이미 왕자 시절 가족과 함께 아버지의 폐위와 망명을 경험했으며, 1924년 그리스가 공화정을 선포하여 요르요스 2세가 폐위되자 형과 함께 망명했다. 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이 그리스를 점령했을 때는 다시 망명하여 런던과 카이로의 망명 정부에서 지냈다.

파블로스 1세는 그의 형 요르요스 2세의 죽음으로 1947년 왕위를 계승한 이후, 요르요스 1세 이후 처음으로 폐위와 망명 없이 왕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재임 시기 민족주의 우파와 그리스 공산당 간의 내전이 격화되어 정치는 여전히 불안정했다. 그는 1949년 반군을 어느 정도 진압하고 그리스 경제를 재건하였으며, 외교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근대 그리스의 국왕으로서 최초로 오랜 적대관계였던 터키의 수도를 방문한 것은 일종의 유화정책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키프로스 공화국의 독립을 반대하여, 독립을 지지하는 영국과 긴장관계를 갖기도 했다. 사실 1947년 11월 20일에 영국 조지 6세의 장녀이자 왕위계승 서열 1위인 엘리자베스 공주(후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와 결혼한 에든버러 공은 그리스 앤드류 왕자(요르요스 1세의 4남)의 아들로서, 파블로스 1세와는 사촌간이었다.

그리스와 영국은 오랫동안 인척 관계를 맺고 우호관계를 유지했으나, 키프로스1)를 통합하여 그리스 왕국을 확장시키려는 계획은 열강인 영국의 지지를 받을 수 없었다. 한편 잦은 해외여행과 왕실의 과다 비용 지출로 국민들의 불만을 샀던 파블로스 1세는 말년에 온갖 병마와 싸우며 투병 생활을 하다가 사망했다.




그리스의 마지막 국왕


콘스탄티노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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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의 마지막 국왕 콘스탄티노스 2세



콘스탄티노스 2세는 파블로스 1세의 1남 2녀 중 외아들로서, 아버지가 즉위하자 차기 왕위계승자가 되었다. 그는 만능 스포츠맨이었으며 스무 살에 1960년 로마 하계올림픽에 참가, 요트 종목에서 그리스에게 48년 만에 올림픽 금메달을 안겨주기도 했다. 기숙학교 시절, 그는 주위로부터 ‘운동장에서 빛나는, 정력이 넘치는 젊은이’로 평가받기도 했다.

부왕의 사망으로 1964년 스물셋의 이른 나이에 즉위했고, 즉위 당시부터 정치의 불안정과 국론 분열로 그리스에는 위기감이 고조된 상황이었다. 결국 1967년에 발생한 쿠데타로 군부가 집권하게 되었다. 이에 콘스탄티노스 2세는 그해 12월에 역쿠데타를 시도했다. 왕정에 협조적인 군인들을 규합해 역쿠데타를 시도하면 모든 군인과 국민이 지지해 줄 것이라 기대한 것이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군인들은 분열되었고, 오히려 국왕은 체포될 위기에 놓여 가족과 함께 황급히 망명길에 올랐다. 왕권에 대한 국민의 향수를 과신한 탓이었다.

그는 1973년 그리스가 군부 독재를 청산하자 복위를 기대했지만, 1974년 실시된 국민투표를 통해 새로운 의원내각제형 대통령제가 출범함으로써 그의 복위는 무산되었다. 결국 파블로스 1세의 아들로서 왕위를 계승했던 콘스탄티노스 2세는 그리스의 마지막 국왕이 되었다.

1994년 새로 재정된 그리스 헌법에 따라 마지막 국왕의 시민권 및 재산권마저 몰수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콘스탄티노스 왕’이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현재는 그리스를 자유롭게 왕래하고 있으며, 2013년 이후로는 그리스 내 영지에 거주하고 있다.




그리스 왕가 평가



최근 그리스의 경제 위기를 두고 그리스의 총리(2009~2011년)였던 요르요스 파판드레우는 “부정부패와 탈세가 그동안 공공부문이 살아온 방식이었다.”라고 평가했다. 그리스에 만연한 탈세, 이로 인한 세금징수의 문제와 재정적자 증대가 국가부도 위기상황을 초래했다는 말이다. 부정부패와 탈세의 근본 원인에는 잘못된 수직적 통치 관행 및 국가의 극단적 분열로 인한 혼란 등이 있다.

사회의 분열과 혼란은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등 다른 유럽 국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리스의 혼란이 제대로 수습되지 않은 이유는 그리스인들의 전통에 대한 향수, 옛 영예에 대한 강한 자긍심, 주변국과의 경쟁심 등이 여타의 유럽 국가와 차별되었기 때문이다. 급변하는 현대사회의 환경에서도 전통적 가치를 중시하는 보수적 성향과 폐쇄적인 세계관은 잘 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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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그리스 총선에서 승리한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



그리스 사회는 법과 질서를 선호하며 일부 국민은 권위주의적 리더십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가 입헌군주제를 실시할 당시 왕들은 이러한 국민적 요구에 부응해야 왕위를 지킬 수 있었다. 이에 가장 잘 부응한 왕은 입헌군주제 초대 국왕이었던 요르요스 1세였으나 요르요스 1세 이후의 국왕들은 그리스의 옛 명예를 회복하는 전쟁에서 성공하지 못했으며, 이로 인해 잦은 퇴위와 망명 생활을 경험했다. 물론 이후의 왕들은 두 차례 세계대전이라는 예기치 못한 상황에 휘말렸으므로, 판단력 상실은 어느 정도 불가피했다.

그리스 국민이 기대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왕권 수호가 아니라 왕의 강력한 지도력이며, 이를 통해 그리스의 옛 영예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긍심이 강한 그리스 국민은 목표를 위해 때로는 권위적 통치를 지지하며, 정당보다 교회나 군대를 신뢰하기도 한다.

그러나 최근 오랜 세월 집권했던 보수 우파세력인 신민주주의 당을 패배시키고 급진 좌파연합의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 체제를 출범시켰다는 점은, 그리스의 민심이 요동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전히 전통적 가치를 중시하는 그리스 국민은 그리스의 추락한 국가 신용과 경제를 회복시킴으로써 그리스의 옛 영예를 회복시켜줄 새로운 지도자를 소망하는 것으로 보인다.



파블로스 1세가 그리스에 병합시키고자 했던 키프로스에서는 1974년 그리스와의 합병을 주장하는 그리스계 장교의 쿠데타가 발생했다. 그 이듬해에는 북키프로스의 대통령을 선출했으며, 현재는 분단되어 있다. 1983년에는 북키프로스가 북키프로스터키공화국을 선포했으나, 현재 유엔 및 주변국은 남키프로스공화국만을 정식 국가로 인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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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정인 | 현 경인여대 초빙교수 및 외국어대 강사
글쓴이 염정인은 <셰이머스 히니의 시 연구: 목소리의 기법과 전략>(2008, 외국어대)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공저인 <현대 영미 여성시의 이해>(동인, 2013) 등이 있으며, <셰이머스 히니 시의 여성 원리에 대한 고찰-모성과 포용력을 중심으로>(현대영미시연구, 2013), <셰이머스 히니 시의 반어법과 페이소스에 관한 고찰>(현대영미시연구, 2012), <셰이머스 히니의 스테이션 섬의 전략: 불편한 끼어들기>(현대영미시연구, 2008) 등이 있다. 현재 한국 현대 영미시 학회 연구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출처
세계의 왕가
현재 전 세계에는 29개의 국가가 군주제를 유지하고 있다. 과거의 유산이라고 여겨지는 군주제가 아직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일까. 그리고 현존하는 왕가는 어떤 모습일까. 지금까지 군주제가 유지되고 있는 29개국 및 20세기에 왕정이 폐지된 그리스, 21세기에 군주제의 막을 내린 네팔 왕가를 살펴본다. (안도라는 독립적인 군주제 형태가 아니라서 시리즈에서 제외되었다.)


발행2015.12.17.



주석


1


파블로스 1세가 그리스에 병합시키고자 했던 키프로스에서는 1974년 그리스와의 합병을 주장하는 그리스계 장교의 쿠데타가 발생했다. 그 이듬해에는 북키프로스의 대통령을 선출했으며, 현재는 분단되어 있다. 1983년에는 북키프로스가 북키프로스터키공화국을 선포했으나, 현재 유엔 및 주변국은 남키프로스공화국만을 정식 국가로 인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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