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스페인 부르봉 왕가 - 민주주의 기적을 이끈 의회군주제의 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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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43회 작성일 16-02-06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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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민주주의의 시작은 역설적으로 군주로부터 시작되었다. 스페인 내전(1936~1939년) 이후 권력을 잡은 독재자 프랑코 장군이 부르봉 왕가의 후안 카를로스 왕자를 후계자로 지목하자 국민 대다수는 구체제의 왕정복고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프랑코 사후 즉시 국왕으로 즉위한 후안 카를로스 1세는 수아레스를 수상으로 임명하고 민주주의 정체(政體)로의 이행을 명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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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내전 후 권력을 잡은 프랑코 장군. 뒤에 있는 인물은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이다.



1978년 12월 29일, 모든 정치 주체들이 참여하는 서구식 의회민주주의와 입헌군주제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1978년 헌법’이 공표되면서 스페인은 단기간 내 기적적인 ‘민주적 이행’의 초석을 놓으면서 전 세계의 찬사를 받았다. 후안 카를로스 1세는 이후 1981년에도 군부 쿠데타 역시 좌절시키면서 스페인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다. 현재 스페인의 왕은 2014년 6월 19일, 후안 카를로스 1세에게 왕위를 물려받은 아들 펠리페 6세이다.




의회군주제 스페인



스페인 군주제의 특징은 의회군주제이다. 왕은 군림하나 통치하지 않으며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 즉 법을 만들고 민주적 방식으로 대표를 뽑는 주권자는 국민이다. 의회군주제에서 왕은 국가원수이지만 실제 권한은 행정부에게 있으며, 왕은 국가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역할에 머무른다. 왕은 자국 대사에게 임명장을 수여한다거나 스페인을 대표하여 외국을 순방하는 일을 하는데, 상징적인 역할은 국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국왕의 행위는 정부 수반이나 각 부 장관에 의해 제약을 받는다. 그러나 왕은 헌법에 명시된 신성불가침의 존재이다. 법적으로 고소당하거나 법정의 증인으로 출석한다거나 체포, 구금되지 않는 면책특권을 누린다. 법적으로 처벌하기 위해서는 국회 양원이 미리 왕의 자격을 박탈해야 가능하다.

스페인의 의회군주제는 입헌군주제를 채택한 대표적인 국가인 영국의 제도와 비교해보면 그 차이점을 더 잘 알 수 있다. 우선 스페인의 경우 군주가 헌법에 규정되어 있으나 영국의 경우 성문헌법이 부재하다. 그러나 스페인 의회군주제는 입헌군주제와 외견상 비슷하기 때문에 ‘의회군주제’와 ‘입헌군주제’가 혼용되어 쓰이기도 한다. 의회군주제와 입헌군주제 모두 군주의 법적 제한을 인정하는데, 근대적 자유주의에 입각할 때는 입헌군주제라고 하고, 의원내각제를 수반할 때는 의회군주제라고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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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국회의사당. 스페인은 의회군주제를 채택하고 있다.



즉 입헌군주제는 군주가 국가권력을 행사함에 있어서 입헌적 제약을 받지만 국가에 따라 군주가 항상 의회의 견제를 받는 것은 아니며, 헌법에 기반하여 군주는 실질적인 권력을 보장받기도 한다. 반면 스페인의 의회군주제는 왕이 명목상 국가원수이나 정부의 행정적 법적 권한은 의회에 있으며, 의회는 끊임없이 왕의 권력을 제한하고, 왕은 많은 경우에 국민의 주권을 위탁받은 법적 기구에 자신의 결정을 종속시켜야 한다. 따라서 스페인의 의회군주제 하에서 최종 권력은 국민의 의지에 있다.




민주주의 이행의 기적을 이룬 후안 카를로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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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부르봉 왕가 문장



현재 스페인의 왕가는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에서 기원한다. 그러나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가 1830년 샤를 10세가 퇴위하고 그의 손자 앙리 5세가 1883년에 죽으면서 직계가 단절된 데 반해, 스페인의 부르봉 왕가는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물론 격변하는 20세기 스페인 현대사의 흐름에서 부르봉 왕가의 단절은 짧지 않았다. 알폰소 13세가 1931년 지방선거 결과에 불만을 품고 프랑스로 망명한 후 제2공화국(1931~1936년), 스페인 내전(1936~1939년), 프랑코 독재(1939~1975년)가 이어지면서 스페인의 부르봉 왕가 역시 단절되었다.

그러나 프랑코 독재 기간에 알폰소 13세의 손자로 1938년 로마에서 태어나 망명생활을 하던 후안 카를로스는 프랑코 정권의 권유로 1948년 아버지와 함께 귀국하였다. 1969년, 프랑코 총독은 자신의 유고 시에 군주제를 복고할 것과 복고될 군주정의 왕으로 후안 카를로스를 추대할 것을 지정하고 이를 법으로 명문화하였다. 1975년 프랑코가 사망하면서 부르봉 왕가는 복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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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 카를로스 국왕 즉위식



국왕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즉위는 예정된 수순이었기 때문에 스페인이 공화정 이전의 왕정을 복고하고 군주제 체제로 돌아갈 것을 의심하는 국민은 많지 않았다. 타국의 언론과 정부도 같은 의견이었다. 프랑코 사후 17일 후 미국의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후안 카를로스 1세의 발언을 실었다. “나는 국가의 화해와 하나됨의 상징이 되고 싶다.”는 모호한 수사였다. 그러나 국왕이 된 후안 카를로스 1세는 프랑코 시대 자신의 순종적인 처신과 전혀 다르게 행동하기 시작했다. 자유주의적인 성향으로 프랑코의 견제를 받아 왕이 되지 못한 자신의 아버지 돈 후안보다 강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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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 카를로스 1세, 왕으로서의 첫번째 서명, ‘Yo, el Rey’ (짐 본인, 국왕)



후안 카를로스 1세는 왕실평의회 추천을 받아 수아레스를 수상으로 임명하고 민주주의 체제로의 이행을 지시하였다. 물론 이 모든 과정은 조용히, 그러나 과감하고 선명하게 진행되어야 할 일이었다. 젊은 국왕(37세)에 의한 젊은 수상(43세)의 임명 역시 예상치 못한 일이었고, 수아레스가 구성한 내각은 스페인 국내 정치 지형에서 중과부적으로 인식됐다. 프랑코 독재 체제는 프랑코 사후에도 공고했고, 군부 역시 여전히 정치적인 영향력이 막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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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포 수아레스 수상



그러나 수아레스는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전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는 사회노동당, 공산당 등 프랑코 시대의 모든 불법 정당 및 정치세력과 접촉하였으며, 프랑코 독재 체제의 유일 정당이자 자신도 당원으로 있던 국민운동과도 의견을 조율하였다.

정치적 스펙트럼은 넓고 투쟁적이었으나 수아레스는 명확한 정치 일정을 제시했고, 이에 대한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지지 또한 공고하였다. 그리고 정치적 입지가 공고하지 않았던 수아레스가 추진한 정치개혁법이 통과된 데는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절대적인 지지가 매우 중요했다.

왕은 프랑코 독재가 수반했던 모든 요소들을 빨리 제거하고자 했고, 새로운 스페인의 때가 왔다고 간주했다. 이 정치개혁 법안은 1976년 국민투표에 부쳐졌고 전국 77.7%의 투표율과 94.1%의 압도적인 찬성으로 통과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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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헌법



이듬해인 1977년 상하원 의원들이 1936년 공화국 이래 41년 만에 선거로 선출되었다. 1978년 11월 이들이 제정한 헌법 최종안이 발표되고, 12월 6일 국민투표에서 유권자의 87% 찬성표를 얻었으며, 국왕의 인가를 받아 12월 29일 ‘1978 헌법’이 최종 공표되었다. 이 헌법에는 의회군주제를 규정하고 있는데 헌법 제1조 제3항에 “스페인 국가의 정치 체제는 의회군주제다.”라고 적시하고 있다.

후안 카를로스 1세는 우선 프랑코 체제에서 벗어나 스페인을 다른 유럽 국가처럼 발전시키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민들의 신뢰를 얻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당시 스페인 국민들에게 국가 정치 체제는 큰 관심거리가 아니었다. 더 중요한 질문은 “어떤 조건이 민주주의를 안정화시킬 수 있느냐.”였다. ‘왕권의 안정화’ 역시 정치 시스템이 안정될 때만 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에 후안 카를로스 1세는 새로운 헌정 질서를 최대한 빨리 강화시키는 것에 관심을 두었다. 2011년 9월 27일 일부 개정되기는 했지만 이 1978년 헌법은 큰 변화 없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스페인 부르봉 왕가의 역사와 과제



2014년은 스페인 민주주의의 한 단락이 넘어가는 해였다. 스페인 민주주의 이행의 두 주인공이 동시에 스페인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했기 때문이다. 수아레스 전 수상이 3월 23일 사망하여 국민장으로 장례가 엄수되었고, 6월 19일에는 후안 카를로스 1세의 뒤를 이어 아들 펠리페 왕자가 펠리페 6세로 즉위하였다.

현재 스페인의 왕 ‘펠리페 6세’ 칭호는 18세기 스페인에서 부르봉 왕가를 시작한 펠리페 5세(1700~1746년)의 뒤를 잇고 있다.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카를로스 2세가 후사 없이 죽자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1702~1713년)이 일어났고, 결국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을 통해 프랑스는 스페인 왕위를, 영국은 영토적 실리를 얻었다. 이 조약은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세력 확대를 견제하기 위해 스페인과 프랑스의 왕위 겸직을 금지하는 조항을 포함하고 있다. 이 때문에 훗날 프랑스에서 앙리 5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여 부르봉 왕가가 단절됐을 때에도 스페인의 부르봉 왕가는 계승권을 얻지 못했다. 또한 이 조약으로 현재까지 영국과 스페인의 지브롤터 영토 분쟁이 지속되고 있는데, 지난 2013년에는 지브롤터의 영국령 편입 300주년을 맞아 양국의 갈등이 극에 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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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야가 그린 카를로스 3세



1700년 스페인에서 부르봉 왕가가 시작된 이래 계몽군주로 마드리드 시를 정비하고 알칼라 문, 넵튠 분수, 프라도 미술관, 국립도서관 등 수많은 건축물들을 착공, 보수, 완공하여 현재까지도 ‘최고의 마드리드 시장’이라는 칭송을 받는 카를로스 3세(1759~1788년)를 제외하면 스페인에서 부르봉 왕가 시기는 대체로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유럽에서 2류 국가를 면하지 못했다.

후진성을 극복하지 못한 스페인 부르봉 왕가의 완고한 보수성은 스페인 사회의 보수성을 더욱 공고화했다. 문화가 사회를 반영하는 것을 감안할 때, 오늘날까지도 스페인의 대표적인 전근대적인 이미지를 형성하는 투우와 플라멩코가 부르봉 왕가 시기인 18세기 즈음에 대중오락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도 우연이 아니다.

19세기 이후 제2공화정 시기까지 페르난도 7세의 딸로 왕위에 오른 이사벨 2세 치세를 제외하면, 카를로스 4세, 페르난도 7세, 알폰소 12세, 알폰소 13세까지 스페인 부르봉 왕가의 군주들은 자유주의에 호의적인 때도 있었으나, 정도의 차이를 제외하면 대체로 보수적인 입장을 고수하였다. 특히 1898년 알폰소 13세 섭정 기간에 미국과의 전쟁으로 스페인이 마지막 식민지인 쿠바를 상실하자 스페인의 보수주의는 과거 회귀 성향이 더욱 강해졌다.

따라서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스페인’을 이끈 카를로스 1세(1516~1556년), 펠리페 2세(1556~1598년) 시기, ‘영광의 가톨릭 절대왕정 시절’은 스페인 보수 우파의 이상향이자 부르봉 왕가의 지향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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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폰소 13세



더구나 19세기 중후반, 스페인에서도 뒤늦은 산업화가 이루어지면서 새롭게 등장한 노동자 ‘대중’은 그 존재만으로도 왕과 보수파에게 위협이었다. 열악한 노동환경에 항의하는 대중의 시위는 점차 과격해졌다. 알폰소 13세 치세 시기인 1909년 바르셀로나 ‘비극의 일주일’1)에, 보수주의자인 마우라 수상은 군대를 보내 수십 명의 노동자들을 학살했다.

사회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휩싸이자 노동자 대중에게 불안함을 느낀 군부의 프리모 데 리베라 장군이 1923년 쿠데타를 일으켰다. 알폰소 13세는 이 쿠데타를 승인하였다. 프리모 데 리베라 장군은 헌법을 정지하고 의회를 해산한 후, 1930년 사임할 때까지 왕, 교회, 군대를 정치의 중심에 두고 강력한 독재를 실시하였다. 대중들은 알폰소 13세에 대한 적개심을 품었고 알폰소 13세 역시 마찬가지였다. 양자 사이에 중간 지대는 존재하지 않았고 결국 알폰소 13세는 지방선거 결과를 보고, 자의로 국외로 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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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에 민주주의를 가져온 후안 카를로스 1세.



프랑코의 권유로 망명지에서 스페인으로 돌아온 알폰소 13세의 손자 후안 카를로스가 스페인 부르봉 가문의 보수적 전통에 따르지 않았을 뿐 아니라 모두가 예상한 구체제 왕정복고의 길과는 반대로 스페인에 서구식 민주주의를 정착시킨 사실은 실로 극적이다.

스페인의 역사에서 두 번의 민주주의 시도가 있었는데 첫 번째는 ‘군주’를 인정하지 않는 공화제였고, 한 세대 후의 두 번째 시도는 정반대로 의회 ‘군주제’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전자는 실패했지만 후자는 성공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스페인 사회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국민여론의 대다수가 스페인의 의회군주제와 민주주의가 상충되지 않을 뿐 아니라 반대로 의회군주제가 권위주의적 프랑코 독재 체제에서 민주주의 체제로 이행하는 데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

“국가의 화해와 하나됨의 상징이 되고 싶다.”는 40여 년 전의 후안 카를로스 1세의 모호했던 발언은 시간이 흐르면서 오히려 더 명확해졌다. 2014년 왕위를 계승한 펠리페 6세는 즉위식에서 (선왕 후안 카를로스 1세가 공표했던 1978년의) 헌법을 준수하고 스페인의 하나됨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다짐하고, 분리 독립운동이 활발한 지역 언어인 카탈루냐어, 바스크어, 갈리시아어로 각각 '고맙다'고 말하면서 취임사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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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일 행사에 참가한 펠리페 6세. 2015년.



과거 민주주의와 권위주의적 왕정 체제의 갈림길에서 ‘의회군주제’로 스페인을 구한 선왕 후안 카를로스 1세처럼, 스페인 지역 분리주의와 통합주의의 갈림길에서 펠리페 6세 역시 ‘국가의 화해와 하나됨의 상징’이 될 수 있을지, 현재 스페인 부르봉 왕가에는 새로운 시대적 과제가 부여되어 있다.




스페인 왕실의 평가



2014년 6월 2일, 후안 카를로스 1세가 전격적으로 퇴위선언을 하자 스페인 국민의 반응은 극과 극으로 나뉘었다. 특히 당일 저녁 마드리드 중앙의 솔 광장에서 2만 명(경찰 추산)의 시위대가 모인 것을 비롯해 스페인 전국 60여 개의 도시에서 시위대가 ‘군주제 폐지’와 ‘공화정 부활’을 외친 것은 불과 7년 전인 2007년과 비교해보면 상전벽해 같은 변화이다. 7년 전인 2007년, 스페인 지상파 방송사인 ‘안테나3’의 여론조사에서 ‘스페인 역사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 1위로 꼽힐 정도로 후안 카를로스 1세의 국민적인 인기는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이 여론조사에서 2위는 세르반테스, 3위는 콜롬버스가 차지했다. 스페인 민주화를 완성한 또다른 인물인 수아레스도 5위를 차지했다.)

물론 2015년의 조사에서도 지지율 41%를 차지한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지지도 자체가 낮은 편은 아니지만, 수년전만 하더라도 압도적 1위를 차지했던 것과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심지어 2014년 왕위를 계승한 펠리페 6세의 지지도인 66%보다도 낮다. 하지만 이는 왕가의 업적에 대한 국민의 평가가 달라졌다기보다는 왕과 왕실 가족의 과실에 대한 국민의 실망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스페인 국민들은 민주주의 이행기에서 후안 카를로스 1세가 행한 결정적인 정치적 역할뿐 아니라 ‘21-F’로 불리는 1981년 군부 쿠데타의 그날을 ‘망각’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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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제 폐지와 공화정 부활을 주장하는 2014년 6월 2일의 마드리드 시위



1978년 헌법으로 초석을 다진 스페인의 ‘민주주의 이행기’는 일반적으로 1975년 프랑코의 사망 이후 1982년 사회노동당의 집권 전까지의 기간을 일컫는다. 그러나 민주주의 이행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프랑코 사후에도 여전히 정치권력의 핵심에는 구체제 인사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민주화의 걸림돌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독재 기간의 정치범들에 대한 사면과 구체제 인사들의 부역에 대한 사면을 동시에 맞바꿔야 했다. 이것이 ‘망각협정’이다.

이 때문에 흔히 스페인과 한국의 민주주의 이행 사이의 유사성이 지적되고 있다. 양국 모두 자본주의 경제의 발전과 시민사회의 성장이 민주주의 이행에 사회경제적 토대가 되어 주었으며, 혁명 대신 정치 엘리트 간의 타협에 의해 민주주의로의 이행을 위한 순조로운 경로를 택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망각협정’이 구체제의 모든 불만을 잠재운 것은 아니다. 사회적 보수주의는 정치가 자신의 이익을 대변하지 못할 때 보수적이지 않게 된다. 그 핵심에는 스페인 군부가 있었다. 1981년 2월 23일, 테헤로 중령이 이끄는 일부 군인들이 총을 쏘며 국회를 점거하고 수상 수아레스를 비롯한 국회의원들을 인질로 잡고 국영방송과 기차역 등 기간 시설을 장악한 후 프랑코 시대로의 복귀를 요구했다. 이들의 쿠데타는 스페인을 구체제로 돌아가게 할 수 있는, 스페인 민주주의 이행기의 마지막 위협이자 스페인 현대사의 변곡점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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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헤로 중령의 쿠데타



스페인을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으로부터 구해낸 것은 당시 국왕 후안 카를로스 1세였다. 의회가 점거당한 당일, 1978년 헌법에 의한 의회군주제 체제의 국가원수로서 그는 손수 담화문을 작성하여 TV 카메라 앞에 섰다. 자신이 스페인 군 통수권자임을 알리는 총사령관의 군복을 입은 후안 카를로스 1세는 먼저 육군, 해군, 공군의 사령관들에게 자신이 명령을 하달했음을 밝혔다.

또한 자신이 민간정부와 군 총참모부에 현행 법 체계 내에서 헌정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모든 조치를 취할 것을 명령했다고 명시했다. 그리고 조국의 영속과 하나됨의 상징인 스페인 왕실은, 국민들의 투표로 제정된 이 헌법이 정한 민주주의 과정을 무력으로 중단시키려는 이들의 어떤 행위도 용납하지 않겠다고 침착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담화를 끝냈다.

국왕의 단호한 모습에, 구체제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던 쿠데타 세력은 명분을 잃고 쿠데타를 포기하고 저항없이 체포되었다.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민주주의로의 기적적인 이행을 성공시켰던 후안 카를로스 1세는, 다시 한번 스페인 민주주의의 수호자가 되었다. 스페인 국민들은 거리로 몰려나와 자유를 외치며 민주주의를 지켜낸 스페인의 의회군주제에 감사를 표했다. 그 감사는 현재까지 스페인에서 의회군주제를 지켜낸 여론의 기저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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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토 페레르 달모가 그린 후안 카를로스의 초상.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지지가 급락한 이유는 2008년 이후 스페인이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실업률이 25%까지 치솟고 많은 국민이 고통받는 상황에서, 비누를 닳을 때까지 아껴쓴다고 알려졌던 검소한 이미지의 국왕이 2012년 국민의 세금으로 아프리카 보츠와나에 코끼리 사냥을 간 것이 폭로되면서부터이다.

설상가상으로 2013년 국왕의 딸 크리스티나 부부가 600만 유로(83억)에 달하는 공금 횡령, 세금 탈루 등 부패 혐의로 검찰조사를 받으면서 왕실의 인기는 급락하였다.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한 카탈루냐 등의 지역독립운동 또한 ‘하나됨’을 강조하는 스페인 통합주의 상징인 스페인 왕실을 비판의 주요 타깃으로 삼고 있다.

연령별로는 상대적으로 40대 이하, 민주주의 이행기의 직접적인 경험이 없는 계층에서 군주제 자체를 폐지하자는 목소리가 높다. 이들을 정치적으로 대변하는 포데모스라는 신생 정당은 창당 4개월 만에 유럽의회 선거에서 5명의 당선자를 배출하고, 지방선거에서 제3당으로 약진하는 등 돌풍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들은 “우리는 시민이다. 신민이 아니다.”라며 군주제 폐지를 위한 국민투표를 제안하고 서명을 받는 등 군주제 폐지에 앞장서고 있다. 그러나 스페인의 양당제 체제 하에서 여당인 국민당과 제1 야당인 사회노동당에서 반대하고 있고, 현재 스페인의 왕인 펠리페 6세에 대한 국민 지지도도 상당하기 때문에 실제로 스페인에서 의회군주제가 폐지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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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리페 6세와 레티시아 왕비



펠리페 6세 역시 2014년 12월 24일 TV 연설에서 지도자들의 부패를 비판하고, 무료항공권 등 고액 선물도 금지시키면서 자신의 연봉도 20%를 자진 삭감하는 등 왕실의 이미지 개선을 위한 자구책을 마련하고 있다. 그는 전형적인 제왕 교육을 받고 성장하였으며, 사라고사의 군사종합학교를 졸업하고 마드리드 국립대학 법대를 졸업하였다. 최신예 전투기를 조정하고, 올림픽에는 스페인 요트 국가대표로 출전하는 등 대중과 어렸을 때부터 소통하여 이미 스페인 국민들에게 친숙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

왕비인 레티시아 역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EFE 통신 기자와 국영방송인 TVE 앵커로 활동하며 대중과 친숙해졌고, 왕자 시절의 펠리페와 비밀연애 끝에 2004년 결혼에 성공했다. 이혼 경력이 있는 연상녀이자 평민 출신이기 때문에, 그리스 군주제의 마지막 왕 파블로스의 딸이자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왕비였던 소피아 왕비와 종종 비교되곤 한다. 그러나 왕비가 된 후에도 대중교통을 이용해 콘서트에 가는 등의 소탈한 행동으로 오히려 현재는 왕실에 대한 국민들의 이미지 재고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펠리페 6세 부부는 슬하에 두 딸 레오노르와 소피아를 두고 있다. 레오노르는 펠리페 6세 이후 스페인의 왕위를 계승받으며, 2019년부터 본격적인 제왕 교육을 받을 예정이다.



‘비극의 일주일’(Semana Trágica)은 바르셀로나와 카탈루냐의 다른 도시들에서 1909년 7월 26일부터 8월 2일 사이에 일어난 사건을 일컫는다. 모로코의 노동자들 임금투쟁과 맞물려 바르셀로나 노동자들이 중앙정부에 맞서 총파업을 일으켰다. 이에 스페인 중앙정부의 안토니오 마우라 수상이 군대를 보내 약 일주일간 수십 명의 노동자들을 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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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철 | 한국외국어대학교 한-스페인 문화교류센터 부소장
글쓴이 김현철은 한국외국어대학교 스페인어과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교 사학과에서 석사과정을 마쳤다. 이후 스페인 국립 마드리드 콤풀루텐세 대학에서 스페인 제2공화국 우파 파시즘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에서 재직 중이다.


출처
세계의 왕가
현재 전 세계에는 29개의 국가가 군주제를 유지하고 있다. 과거의 유산이라고 여겨지는 군주제가 아직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일까. 그리고 현존하는 왕가는 어떤 모습일까. 지금까지 군주제가 유지되고 있는 29개국 및 20세기에 왕정이 폐지된 그리스, 21세기에 군주제의 막을 내린 네팔 왕가를 살펴본다. (안도라는 독립적인 군주제 형태가 아니라서 시리즈에서 제외되었다.)


발행2015.12.24.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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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일주일’(Semana Trágica)은 바르셀로나와 카탈루냐의 다른 도시들에서 1909년 7월 26일부터 8월 2일 사이에 일어난 사건을 일컫는다. 모로코의 노동자들 임금투쟁과 맞물려 바르셀로나 노동자들이 중앙정부에 맞서 총파업을 일으켰다. 이에 스페인 중앙정부의 안토니오 마우라 수상이 군대를 보내 약 일주일간 수십 명의 노동자들을 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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