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여성 실학자 이빙허각과 『규합총서』 - 여성의 생활경제를 저술에 담다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댓글 0건 조회 576회 작성일 16-02-06 16:40

본문















14547444261650.png






14547444263361





호암생가 안채 안방내부. 규합은 안채의 안방을 의미한다. <연합뉴스 제공>



일반인들에게 다소 낯설 수도 있는『규합총서』는 이빙허각의 저술이다. ‘규합’은 여성이 머무는 거처 또는 여성을 의미하므로 『규합총서』를 다시 풀이하면 ‘가정학총서’가 된다. 그런데 당시 의식주에 대한 탐구는 여성이기에 갖는 관심이 아니었다. 성리학에서 출발해 실용 학문으로 외연을 넓혀가던 실학자들이 주의 깊게 연구한 대상 중 하나였다. 이빙허각이 『규합총서』에서 구축한 지식 속에는 당시 조선 사회의 지식들이 다양한 색채로 녹아있다. 그러므로 『규합총서』는 개인의 저술이자 19세기 초 조선 사회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생활경제는 실학의 탐구 대상





“돈이 있으면 위태로운 것을 편안하게 할 수 있고 죽을 사람도 살리는 반면, 돈이 없으면 귀한 사람도 천하게 되고 산 사람도 죽게 한다. 그러므로 분쟁도 돈이 없으면 이기지 못하고 원한도 돈이 아니면 풀지 못한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돈만 있으면 귀신도 부린다고 하는데 하물며 사람이랴.”





14547444264891





『규합총서』는 빙허각 이씨가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지식들을 모아 저술한 책이다. <국립한글박물관 소장>



돈의 위력에 대해 피력한 위 글은 『규합총서』에 나오는 대목이다. 돈이나 경제에 대해 무심해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긴 조선 사회에서 귀신도 부린다는 직설적인 표현이 파격적이거니와 이 글을 쓴 저자가 여성이라는 사실도 의외다.

『규합총서』는 총서라는 제목에 걸맞게 다섯 편으로 구성되었다. ① 주사의 - 술 · 음식 만들기 등, ② 봉임칙- 옷 만들기 · 물들이기 · 길쌈하기 · 수놓기 · 누에치기 등, ③ 산가락 - 밭일 · 꽃 심기 · 가축 기르기 등, ④ 청낭결 - 태교 · 육아법 · 응급처치법 등, ⑤ 술수략 - 좋은 방향 선택 · 길흉 · 부적 · 귀신 쫓는 법 · 재난방지법 등 다양한 주제들을 담았다.





14547444266422




빙허각의 시동생 서유구가 저술한 농업백과사전 『임원경제지』



빙허각이 이 책에서 다룬 주제들은 모두 일상생활에서 요긴한 지식들이다. 그래서 이 주제들은 이 책뿐만 아니라 『지봉유설』(1614년), 『산림경제』(1715년경), 『임원경제지』(1827년경), 『오주연문장전산고』(1856년경) 등에도 들어 있다. 새롭고 다양한 지식에 목말라 한 학자들의 탐구 대상으로서 실용의 학문을 추구하고자 한 의도와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빙허각은 『규합총서』이외에 저술이 더 있었다. 1939년 1월 30일자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따르면, 황해도 장연군 진서의 후손 집에서 『규합총서』(5책) 이외에 『청규박물지』(4책)와 『빙허각고략』(2책)이 발견되었다. 하지만 이 책들은 발굴한 연구팀에서 출간을 준비하다가 한국전쟁 중에 분실했다고 한다. 다행히 2004년에 일본 도쿄대학교에서 1939년 판본과 다른 『청규박물지』가 발굴되었고, 『빙허각고략』은 여전히 행방을 알 길이 없다.




불 같은 성격



이빙허각(1759~1824)은 본관이 전주이며 서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창수이며 어머니는 유씨 부인이다. 빙허각 집안은 세종의 열일곱 번째 아들인 영해군의 후손이었다. 아버지 이창수는 이조 판서를 비롯해 예문관 제학, 홍문관 제학 등을 거친 고위 관료 출신이었다. 그는 첫째 부인이 자식 없이 일찍 세상을 뜨자 유담의 딸과 다시 혼인했는데 빙허각은 그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딸이었다.

빙허각 집안은 당색을 가리자면 소론이었다. 증조부 이언강은 학자로 명성이 높았으며 예조․형조의 판서 등을 두루 지냈다. 숙부 이창의도 우의정까지 올랐다. 빙허각은 위로 오빠 이병정이 있었다. 그 역시 당대 이름이 높던 조재호의 사위로 이조 판서와 홍문관 제학 등을 지냈다. 이처럼 빙허각 집안은 아버지 이창수, 숙부 이창의, 오빠 이병정에 이르기까지 고위 벼슬을 지낸 명문가였다.





14547444268900





이사주당 부부 합장묘 <진주 류씨 집안 제공>



빙허각의 어머니 유씨의 오빠 유한규는 세 번 상처한 후에 네 번째로 이창식의 딸과 혼인했다. 이 여성이 『태교신기』를 지은 이사주당이다. 따라서 빙허각에게 이사주당은 외숙모가 된다. 지금 전하지 않지만 빙허각은 「태교신기발문」을 썼으며, 『규합총서』에도 태교에 관한 내용이 있어 빙허각이 이사주당의 영향을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빙허각은 어릴 때부터 총명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무릎에 앉혀놓고 『시경』이나 『소학』을 읽어주면 그 뜻을 바로 깨쳤다. 커서도 기억력이 뛰어나고 공부하기를 좋아해 여러 서적을 섭렵했다. 시나 여러 종류의 글도 잘 지어 주위 사람들로부터 여사(女士)라는 호칭도 받았다.

빙허각은 성격이 불같고 강해서 남에게 지는 것을 싫어했다. 간니가 날 무렵 자기 또래 아이들이 이를 가는 것을 보고 자기도 작은 망치로 아랫니와 윗니를 뽑아내 피를 흘린 적이 있었다. 부친 이창수는 빙허각의 강인한 성격을 좋아하면서도, 여자가 혼인하면 남편을 따라야 하는데 행여 고집이 세어 불화가 생길까 염려했다. 그래서 빙허각에게 매사에 거슬림이 없으면 괜찮지만, 만일 하나라도 어긋나면 오히려 자기 손으로 자기 몸을 상하게 할 수도 있다고 타일렀다고 한다.




열다섯에 서유본과 혼인하다



빙허각은 열다섯 살에 세 살 아래의 서유본(1762~1822)과 혼인했다. 양가가 오랜 친분이 있는데다가 정치 성향도 소론이어서 혼인을 맺게 되었다. 서유본은 본관이 달성이며, 선조의 부마 서경주의 후손이었다. 아버지는 서호수이며, 동생이 『임원경제지』(또는 임원경제십육지)의 저자 서유구다. 서유본의 할아버지 서명응은 영조의 탕평책에 적극 협조하면서 노론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서명응의 동생 서명선홍인한홍국영을 몰아내는 데 공헌해 영의정까지 올랐다.

서유본 집안은 이용후생의 학문에 큰 관심을 가졌으며 박지원·박제가·이덕무 등과 교유했다. 학풍은 금석·물·불·별·달·해·초목·짐승 같은 객관적 사물을 탐구하는 박물 즉 명물학에 뛰어났다. 그 일환으로 농학에서 눈에 띄는 연구 성과를 내놓았다. 서유본의 할아버지 서명응이 지은 『보만재총서』에는 농업 경제서인 『고사신서』(1771년)가 들어있다. 서호수도 농학 연구서인 『해동농서』(1799년)를 저술했다. 서유본의 동생 서유구도 『임원경제지』라는 방대한 농학 연구서를 내놓았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볼 때에 서유본의 학문도 집안의 학풍과 유사했으리라 짐작된다.





14547444270695





서명응이 사대부, 관리, 선비가 항상 기억해 두어야 할 사항을 기록한 『고사신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빙허각은 혼인 후 시가의 학풍에 영향을 받았다. 시아버지 서호수는 중국대륙에서도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희귀 서책을 소유했으며 남편 서유본도 마찬가지였다. 『오주연문장전산고』의 저자 이규경은 본인이 서울 마포에 살 때에 귀한 서책인 『명본석』을 서유본에게 빌려서 봤다고 한다. 그러므로 빙허각도 각종 서적을 접하는 데에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빙허각의 저서 중 동물과 식물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청규박물지』가 이 점을 잘 말해주며, 『규합총서』에서 인용한 서적에 시아버지의 『해동농서』가 들어있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남편 서유본은 과거 급제나 관직과 인연이 별로 없었다. 스물두 살에 생원시에 합격한 후 문과에 응시했으나 계속 낙방했다. 마흔세 살에 나간 동몽교관이 유일한 벼슬이었다. 더구나 1806년 숙부 서형수가 옥사에 연루되어 유배길에 오르면서 집안이 일시에 몰락했다. 당시 홍문관 부제학으로 있던 동생 서유구도 향리에 유폐되었다. 이때 빙허각의 나이 마흔 일곱이었다.

빙허각은 남편 집안이 몰락하고 가산마저 기울자 거처를 오늘날 마포 행정이라는 곳으로 옮겼다. 시동생 서유구도 옥사에 연루되어 1823년(순조 23)까지 벼슬에 나가지 못한 채 무려 여섯 번이나 주거지를 옮겨 다녔기에 형 집에 도움을 줄 형편이 아니었다. 따라서 1809년 빙허각이 쉰한 살에 완성한 『규합총서』는 이러한 생활과 무관하지 않다.

서유본은 평소 출입을 별로 하지 않고 독서에 몰두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빙허각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았고, 빙허각과 학문에 대해 토론하고 시를 주고받으면서 지우처럼 지냈다. 빙허각은 이 시절에 대해 『규합총서』 서문에서 “내가 삼호 행정에 집을 정하고 집안일 하는 틈틈이 남편이 있는 사랑으로 나가 옛글이 일상생활에 절실한 것과 산야에 묻힌 모든 글을 구해보고 오직 문견을 넓히고 적적함을 위로했다.”고 적었다. 서유본의 재야 생활은 본인에게 불행이었지만 빙허각에게는 학문을 넓힐 수 있는 받침목이 되었다. 『규합총서』라는 책이름도 남편이 지어주었다. 빙허각은 슬하에 모두 4남 7녀를 두었는데 8명은 일찍 죽고 아들 1명과 딸 2명만 살아남았다.




고증과 탐구로 쓰다



『규합총서』에는 조선 후기 새로운 학풍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빙허각이 이 책에서 인용한 저서만 80여 종에 달한다. “인용한 책이름을 각각 작은 글씨로 모든 조항 아래 나타내고 내 소견이 있으면 ‘신증’이라 썼다.”고 밝혔듯이 내용의 출처를 밝히는 연구 방법은 청에서 유행한 고증학의 영향이었다. ‘신증’이란 본인의 의견을 새롭게 보탰다는 의미다.





14547444272212





규합총서에 인용된 중국 명나라 때 본초학자 이시진이 엮은 약학서 『본초강목』



『규합총서』에서 인용한 서책들은 『산림경제』, 『지봉유설』, 『성호사설』, 『동의보감』, 『임하필기』, 『약천집』, 『동국여지승람』, 『해동농서』 등 우리나라 저서뿐만 아니라, 『능엄경』, 『예기』, 『맹자』, 『주역』, 『주례』, 『묵자요록』, 『서경』, 『여씨춘추』, 『한서』, 『사기』, 『한비자』, 『농정전서』, 『본초강목』 등 역대 중국 왕조에서 간행된 서적들도 인용했다.

빙허각은 『규합총서』를 한글로 썼다. 서문에서 “…마침내 이로써 서문을 삼아 집안의 여자들에게 준다.”고 했듯이 자신의 책이 여성들에게 유용하게 읽히고 쓰이기를 희망했다. 빙허각의 바람은 이 책이 완성되자마자 곧 이루어졌다. 『규합총서』는 빙허각이 살아 있을 때부터 친척들에게 알려져 필사되었고, 사후에도 계속 필사되어 19세기 후반에는 조리서 가운데 가장 널리 읽힌 책이 되었다.





14547444273986





조선시대 관복의 가슴과 등에 사각형의 문양으로 장식한 흉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빙허각은 서양 문물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 <기기목록>에서 외국의 여러 생소한 물건들을 소개하였다. 서양 그림의 원근감이나 온도계, 축음기, 선풍기, 돋보기, 천리경, 현미경, 음악 소리가 나지만 사람의 힘을 들이지 않고 저절로 연주가 되는 자동희(전축) 등 새로운 문화에 대해 호기심을 가졌다. 그러면서도 조선 문화의 우수성을 놓치지 않았다. 조선과 청의 흉배를 비교하면서 수놓은 솜씨[품질]는 우리의 수가 우수하다고 평했다. 고려청자의 자색은 천하제일이라 치켜세웠다.

또 전국에서 유통되는 물산에도 눈을 돌려 팔도에서 생산되는 다양한 물산도 기록했다. 빙허각이 밝힌 팔도 물산은 바로 조선 산업의 현주소였다. 예컨대, 경기의 경우 광주의 사기 그릇, 안산의 게와 감, 교동의 화문석, 양주의 생률, 남양의 굴, 연평도의 조기, 수원의 약과, 평택의 우황, 용인의 오이김치 등이 좋은 상품이었다. 이는 빙허각이 생활에 요긴한 물산들을 기록한 것으로 ‘우리’ 것에 대한 각성과도 연관되어 있다.




새로운 여성관과 관습 사이에서



빙허각은 『규합총서』에서 “부인 가운데 어찌 인재 없으리오!”라면서 「열녀록」을 덧붙였다. 여성의 이름과 주요 행적을 사자성어의 형식으로 적고 이를 다시 한글로 풀이하는 간략한 방식이다.

「열녀록」에는 어진 왕비(16명), 덕 있는 여성(11명), 예법에 맞는 행실을 한 여성(16명), 효녀(7명), 효부(9명), 열녀(28명), 충의(20명), 훌륭한 어머니(12명), 지식(18명), 의기(10명), 문장(16명), 재예(18명), 품계를 가진 여성(36명), 칼을 잘 쓴 여성(8명), 여자신선(38명), 마녀(3명), 여자부처(2명), 여승(3명), 글씨 잘 쓰는 부인(8명), 봉작을 받은 여성(7명), 정치를 한 여자(2명), 여장군(4명), 남자 임무를 대신한 여자(5명) 등 297명을 수록했다.





14547444276027





경기도 광주시에 있는 허난설헌묘. 허난설헌의 시 작품은 중국에 전해져 격찬을 받을 정도로 뛰어났고, 후대에 등장할 규방가사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 <출처: 문화재청 – 공공누리>



그중 논개 · 사임당 · 허난설헌 · 옥봉 이씨 · 황진이 등을 제외하고 모두 중국 왕조의 인물들이다. 그럼에도 효부나 열부 이외에 다양한 여성을 실은 점이 눈길을 끈다. 남자 못지않게 충의, 지식, 의기, 문장, 재예를 갖춘 여성이나 남자 소임을 대신한 여성들이 들어 있다. 심지어 여장군이나 칼 잘 쓰는 여성까지 기록했다. 곧 정절을 위해 목숨을 던진 여성뿐만 아니라, 그동안 잘 주목하지 않은 ‘비주류’ 여성에게도 눈을 돌려 이들의 삶을 인정하는 열린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빙허각의 죽음을 보면 사회 분위기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1822년(순조 22) 남편 서유본이 갑자기 앓아눕게 되었다. 그러자 빙허각은 음식도 끊은 채 남편 대신 아프게 해달라고 사당 앞에서 빌기도 하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였다. 남편이 죽자 「절명사」를 짓고 일상생활을 폐기한 채 누워 지내다가 1824년 2월 예순 여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평소 애틋한 부부애나 평생지기로 지낸 두 사람의 관계를 떠올리면 빙허각 행동에 공감도 간다. 그럼에도 빙허각의 죽음이 못내 아쉽다.





14547444278099





『삼강행실도』는 조선시대의 윤리와 도덕의 기본 바탕이 되었다. 이는 빙허각과 그 주변의 여성들의 행적과 무관하지 않다. <출처: 문화재청 – 공공누리>



빙허각의 주변을 살펴보면 빙허각의 증조부 이언강의 아내 권씨는 남편이 죽자 슬퍼하다가 병을 얻어 죽어 정려를 받았다. 숙부 이창의의 아내 윤씨도 남편이 죽자 음식을 먹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시할머니와 마찬가지로 정려를 받았다. 그러므로 빙허각의 죽음도 집안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이 점은 조선 사회에서 여성이자 아내로서 산 빙허각이 벗어던지지 못한 굴레이자 한계일 것이다.




『규합총서』다시 읽기



현재 빙허각이 지은 『규합총서』는 여성 생활 경제서 정도로 이해되고 있다. 『규합총서』가 주로 여성들에게 가정 실용서로 이용되었기 때문에 구체적인 검토 없이 내린 결론이자 편견이다.





14547444279646





조선 여인상. 19세기 후반 이후로 조선의 여성들은 겉으로 고요해 보이지만 안으로는 변화하는 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처해나갔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하지만 앞서도 소개했듯이 『규합총서』에 실린 내용은 조선후기 실학서로 불리는 책들에도 실려 있다. 그런데도 다른 실학서들은 경세치용의 실학사상으로 이해하면서 빙허각의 『규합총서』는 ‘가정학’으로 따로 분류하려는 태도는 공평하지 못하다. 여성들이 활용했다 하여 빙허각의 사상을 가정으로 한정하여 이해하려는 태도는 빙허각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막는 걸림돌이 되고 있다.

빙허각은 조선 후기 사회의 변화를 여성의 눈으로 관찰하고 분석하여 한글로 기록을 남겼다. 남성들이 한자로 쓴 방대한 지식을 일상생활의 담당자인 여성들에게 알기 쉽게 전달했다. 그야말로 실용의 학문을 추구한 것이다. 『규합총서』가 빙허각이 살아 있을 때부터 필사되고, 『간본 규합총서』(1869)나 『부인필지』(1915년) 등으로 재탄생한 것도 여성들의 지적 욕구를 반영한다.

빙허각은 18세기 후반 경제 또는 문화적으로 변화하는 여성의 모습을 대변한다. 정절과 열녀로 대표되는 부덕의 실행을 최고 가치로 추앙하는 사회 요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가 하면 다음 시대를 향한 진보적인 발걸음을 내딛기도 했다. 서양에서도 여성에 대한 각종 규제가 광범위하게 유포된 19세기에 오히려 여권주의가 싹텄듯이 조선 사회도 다르지 않았다. 우리도 이 양면성에 눈을 돌려 조선 후기 여성 실학자 빙허각이 쓴 『규합총서』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참고문헌



정해은 | 한국학중앙연구원
중앙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조선후기 무과급제자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조선의 무인과 전쟁사에 대한 연구와 함께 여성의 삶과 사유 방식을 다양한 시각으로 재구성해보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 『조선의 여성 역사가 다시 말하다』(2011), 『고려 북진을 꿈꾸다』(2009), 『한국 전통 병서의 이해(1,2)』(2004, 2008) 등이 있다.


출처
실학,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다
실학은 18세기 한국 역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이지만, 여전히 실체와 환상이라는 상반된 시각 속에서 실학을 바라보고 있다. 실학은 실패한 개혁의 꿈인가? 아니면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고자 했던 학문이었던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 찾아 17명의 전문가들이 다양한 시각으로 개혁사상이자 문화사조로서 실학을 조명해 본다.


발행2015.12.29.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