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노르웨이의 글룩스부르그 왕가 - 525년 만에 독립 왕국의 위상을 회복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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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535회 작성일 16-02-06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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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는 바이킹 시대 중반인 872년에 이미 통일 왕국을 형성하였으나 1380년 이후 동군연합(同君聯合)1)의 형태로 덴마크에, 1814년부터는 스웨덴에 복속되었다. 1905년 스웨덴-노르웨이 동군연합의 해체와 함께 덴마크 글룩스부르그 왕가의 왕자를 노르웨이 왕으로 추대하면서 노르웨이의 독립 글룩스부르그 왕가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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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오슬로에 있는 왕궁. 19세기 초에 지어졌다. <출처: (cc) Bjørn Erik Pedersen at Wikipedia>



1814년에는 입헌군주제를, 1884년에는 의회민주주의를 도입하면서 국왕의 위상은 상징적 존재로 머물러 의회와 수상을 중심으로 하는 내각이 실질적으로 국가를 통치하고 있지만, 노르웨이가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국왕은 국가 및 국민 통합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노르웨이의 글룩스부르그 왕가는 정치에 일절 관여하지 않고 국민과의 소통에 높은 가치를 두고 있으며, 문화 및 스포츠, 아동 및 환경문제 등에 깊은 관심과 역동적 활동을 보이면서 국민 속에 자리 잡고 있다.




노르웨이의 정치체제



노르웨이는 이미 1814년에 당시 가장 근대적인 내용의 헌법을 제정했고, 1905년 스웨덴으로부터 독립하면서 명실상부한 입헌군주국이 되었다. 의회민주주의 제도의 정착으로 의회와 내각이 국가통치의 중심이며, 왕은 상징적 존재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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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글룩스부르그 왕가의 왕실 문장 <출처: (cc) S. Solberg J. at Wikipedia>



1814년 헌법에는 왕의 권한이 상당히 포괄적으로 규정되어 있어 수상 및 내각에 대한 지명권이 왕에게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총선 결과에 따라 각 정당 및 정파 간의 협상에 의해 내각이 구성되며, 국왕은 이를 형식적 절차에 따라 승인할 뿐이다. 국왕의 정치 관여가 헌법으로 제한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국왕이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오랜 관행으로 자리 잡고 있다.

단원제인 노르웨이 국회는 19개의 중대 선거구에서 4년 임기의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에 의해 선출되는 169명의 의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국회의 일부가 내각을 구성하는 일원론적 의원내각제를 실시하고 있다. 노르웨이 국회는 장관, 수상, 내각 전체에 대해 불신임할 수 있으나 국회는 어떠한 경우라도 해산될 수 없다. 따라서 내각이 국회의 신임을 얻지 못하는 경우 국회는 그대로 유지된 채 내각의 구성만 바뀌게 된다.




노르웨이의 독립과 글룩스부르그 왕가의 탄생



바이킹 시대였던 872년에 노르웨이는 이미 통일 왕국을 확립하였으나 동군연합의 형태로 1380년부터 1814년까지는 덴마크의 지배를 받았고, 1814년부터 1905년까지는 스웨덴의 지배를 받았다. 스웨덴으로부터 1905년 독립하면서 독립 왕국의 위상을 다시 회복하였다.

노르웨이는 스웨덴의 지배를 받던 시기에도 외교권을 제외한 입법, 행정, 사법 등의 분야에서 독립적 자율성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1905년 초반부터는 외교권에서도 독자적인 행사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공동 국왕이었던 오스카르 2세가 이를 단호하게 거절하자 노르웨이 국회는 1905년 6월 7일 오스카르 2세의 칙령을 거부하고 일방적으로 스웨덴과의 동군연합 해체안을 통과시켰다.

양 국가는 첨예한 의견대립으로 일촉즉발의 상황에 이르렀으나 동군연합의 해체 여부에 대한 국민투표를 결정함으로써 평화적으로 해결되었다. 1905년 8월 13일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노르웨이 국민의 99.95%가 동군연합의 해체에 찬성함으로써 노르웨이는 스웨덴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었다.

스웨덴으로부터 독립한 노르웨이는 입헌군주제와 공화제 중 어떤 정치체제를 선택할 것인지, 이와 함께 입헌군주제로 할 경우 누구를 국왕으로 추대할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덴마크에 이어 스웨덴과도 동군연합의 형태로 있었던 노르웨이에서는 입헌군주제 지지 세력이 우위를 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왕 추대의 문제가 최대 쟁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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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노르웨이 동군연합의 마지막 왕 오스카르 2세



그 당시 노르웨이의 일방적 동군연합 해체에 격노한 스웨덴의 오스카르 2세는 이미 스웨덴의 베르나도테 왕가 어느 누구도 노르웨이의 왕위에 오르지 않을 것임을 선언한 상태였다. 노르웨이는 오랜 숙고 끝에 당시 덴마크 글룩스부르그 왕가의 왕세자 프레데릭의 둘째 왕자 칼을 적임자로 보았다. 당시 33세였던 칼 왕자는 영국 왕 에드워드 7세의 모드 공주와 혼인하여 영국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유리한 조건에 있었으며, 두 살짜리 아들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왕위 계승 또한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러나 노르웨이의 정치권과 내각, 그리고 군부에도 공화주의자 세력들이 상당수 포진하고 있음을 간파하고 있었던 칼 왕자는 노르웨이 국민들의 입헌군주제 지지 여부를 확인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입헌군주제 도입에 대한 찬반 국민투표(1905년 11월 12~13일)에서 79%의 찬성으로 입헌군주제가 채택되었다.

노르웨이 국회는 11월 18일 압도적 다수의 지지로 덴마크 글룩스부르그 왕가의 칼 왕자를 노르웨이 왕으로 추대하기로 결정하였다. 칼 왕자에게는 노르웨이 왕가의 전통에 따라 호쿤 7세의 왕명이 부여되었다. 11월 27일 호쿤 7세의 즉위 선서와 동시에 독립 왕국 노르웨이의 글룩스부르그 왕가가 시작되었다.




나치에 맞선 노르웨이 글룩스부르그 왕가의 시조 호쿤 7세



호쿤 7세는 즉위 이전부터 입헌군주제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존재함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입헌군주제 하에서 왕의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내각의 의견을 따르려고 노력하였고 특정 정당에 경도되지 않도록 극도로 조심하였다.

해군장교 출신이었던 호쿤 7세는 노르웨이의 외교정책과 군사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그가 보여준 노르웨이 국사에 대한 깊은 관심, 그 스스로의 능력과 자세, 민주주의 원칙에 대한 존중 등을 통해 입헌군주국인 노르웨이에서 국왕의 위상을 제고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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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글룩스부르그 왕가의 시조 호쿤 7세



1940년 4월 9일, 나치 독일이 노르웨이를 침공하자 왕과 내각, 그리고 대부분의 국회의원들은 노르웨이 동부의 엘베룸으로 피신하였으며, 여기에서 소집된 노르웨이 국회는 전쟁 기간 중 노르웨이 통치에 대한 모든 권한을 왕과 내각에 일임하였다.

나치 점령군은 호쿤 7세와 내각에게 친나치주의자 퀴슬링을 수반으로 하는 내각을 임명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호쿤 7세는 노르웨이가 처해 있는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나치의 요구에 응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이와 함께 호쿤 7세는 뉘고르드스볼드(Nygaardsvold) 내각의 결정을 존중하겠지만 만일 내각이 나치의 최후통첩에 응하게 된다면 왕위에서 물러날 것임을 천명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뉘고르드스볼드 내각은 노르웨이가 겪어야 할 국가적 대재앙을 인식하면서도 호쿤 7세와 함께 나치에 대항하여 끝까지 싸울 것을 의결하였다. 나치 점령군은 호쿤 7세와 뉘고르드스볼드 수상을 체포하기 위해 국왕과 내각의 피난길을 추격하면서 폭격을 계속하였다.

결국 1940년 6월 7일 호쿤 7세와 내각은 영국으로 망명하여 런던에 망명정부를 수립하고 나치 점령군에 대한 저항을 지휘하였다. 망명정부 시절 호쿤 7세는 노르웨이 국민들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투쟁의 구심점이었으며, 영국에서 방송되는 호쿤 7세와 망명정부의 라디오 방송은 노르웨이 국민 모두에게 노르웨이의 해방과 반(反)나치 투쟁에 대한 열망을 북돋아주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울라브 5세, 망명정부의 영웅에서 국민의 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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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아 ‘국민의 왕’으로 추앙된 울라브 5세



울라브 5세는 1957년 9월 21일 노르웨이 글룩스부르그 왕가의 두 번째 왕으로 54세의 나이에 즉위하였다. 그는 왕세자 시절부터 부왕 호쿤 7세의 든든한 지지자이자 조언자의 역할을 자처했다. 1940년 호쿤 7세와 내각이 영국으로의 망명을 결정하자 왕세자 울라브는 노르웨이에 남아 나치 점령군에 대항해 최전선에서 싸우겠다고 주장했으나 당시 내각은 왕세자를 설득하여 결국 망명길에 오르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달하던 1944년 6월 30일 런던의 노르웨이 망명정부는 왕세자 울라브를 노르웨이 국방 총사령관에 임명하였으며, 왕세자 울라브는 노르웨이 군의 최고통수권자로서 연합군과의 협력을 추진하였다.

런던에서의 망명 시절 왕세자 울라브는 고통받고 있는 노르웨이 국민들을 생각하며 일체의 단 음식과 후식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1945년 5월 13일 왕세자 울라브는 망명정부 내각의 일부 장관과 함께 해방된 조국 노르웨이에 돌아왔으며, 호쿤 7세가 귀국한 6월 7일까지 노르웨이의 실질적인 통치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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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쿤 7세와 모드 왕비, 올라브 왕자(1913년)



실질적인 국가수반의 역할을 수행했던 왕세자 울라브는 호쿤 7세가 서거함에 따라 울라브 5세로 노르웨이의 왕위를 물려받았다. 울라브 5세는 재위 기간 동안 의회민주주의 원칙을 고수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뛰어난 소통 능력, 타고난 따스함, 그리고 철저히 현실적인 자세로 노르웨이 국민들의 많은 사랑과 존경을 받아 ‘국민의 왕’으로 추앙되었다.

울라브 5세는 뛰어난 크로스컨트리 스키선수였으며 젊은 시절에는 홀멘콜렌 스키점프 대회2)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는 또한 70년 이상 요트경주에 몰입하여 국내는 물론 국제경기에서 입상하였으며, 왕세자 시절인 1928년 암스테르담 하계올림픽의 6인조 요트경기에서 자신의 요트 노르나를 타고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울라브 5세는 스포츠 이외에 예술과 문화에도 관심을 보였으며 특히 문학에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노르웨이에서 태어난 글룩스부르그 왕가의 첫 번째 왕 하럴드 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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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역사상 567년 만에 노르웨이에서 태어난 첫 번째 왕 하럴드 5세 <출처: (cc) Sámediggi Sametinget at Wikipedia>



1991년 부왕 울라브 5세에 이어 하럴드 5세가 노르웨이 글룩스부르그 왕가의 세 번째 왕으로 즉위하여 2016년 현재까지 재위하고 있다. 하럴드 5세는 노르웨이 역사상 567년 만에 노르웨이에서 태어난 첫 번째 왕이었으며, 어린 시절부터 노르웨이 국민들의 사랑과 기대 속에 성장하였다.

나치 독일이 노르웨이를 침공한 1940년 세 살이었던 하럴드 5세는 모친 매르타 왕세자빈과 두 명의 누나와 함께 스웨덴으로 피신하여 수개월간 머물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1945년 해방될 때까지 미국 워싱턴에 거주하였다.

하럴드 5세는 왕세자 시절인 1968년 8월 29일 노르웨이 왕위 승계자로는 처음으로 평민이었던 소냐 하럴드센과 결혼하였다. 왕세자의 결혼을 위해 부왕 울라브 5세는 노르웨이 국회의 의장단, 각 정당의 당수, 그리고 내각과의 자문 및 협의 과정을 거쳐야 했다.

노르웨이 왕가 역사상 최초의 평민과의 결혼은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전국에 걸쳐 대다수 국민들의 뜨거운 축하를 받았다. 하럴드 5세와 소냐 왕비는 매년 노르웨이의 광역자치구 중 한 곳과 5월 17일 오후에 오슬로 지역 중 한 곳을 선정하여 방문하는 것을 전통으로 하고 있으며, 최근 들어 복지 관련 사안이나 아동들의 사회적 여건 등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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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관에서 부시 전 미국 대통령 부부의 영접을 받고 있는 하럴드 5세 부처. 맨 오른쪽이 소냐 왕비.



요트광인 하럴드 5세는 왕세자 시절 1964년 도쿄올림픽 개막식에 노르웨이 기수로 참여하였으며, 1987년 자신의 1톤급 요트 프람 10호에 올라 세계 요트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하럴드 5세는 또한 노르웨이 국왕으로 2005년 68세의 나이에 왕실 요트 프람 15호를 타고 유럽 요트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며 노익장의 저력을 과시하였다.

하럴드 5세는 방광암과 동맥협착증으로 두 번에 걸쳐 국왕의 임무를 수행할 수 없는 상황을 겪기도 했는데, 두 차례 모두 왕세자 호쿤이 국가수반의 역할을 대행하였다. 54세의 나이에 즉위한 하럴드 5세는 2016년 현재 79세로 25년간 재위하고 있으며, 왕세자 호쿤은 43세이다.




노르웨이 국왕의 위상 및 공식 임무



노르웨이는 1814년에 헌법을 제정하여 절대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 전환하였고, 1884년에는 의회민주주의의 원칙을 확립하였다. 노르웨이 글룩스부르그 왕가가 출범한 1905년에는 이미 국왕의 정치적 역할은 실질적으로 봉쇄된 상태였으며, 국왕의 위상은 국가의 상징적 존재로서 헌법에 명시된 형식적 역할의 수행에 국한되어 있었다.

1905년 이후 국왕의 권한은 더욱 제한되어 현재의 노르웨이 국왕은 정치에 일절 관여하지 않고 있으며 국가수반으로서의 상징적 역할만을 담당하고 있다. ‘국왕은 존재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것이 관행으로 확립되어 있는 것이다.

노르웨이의 국왕은 수상과 내각의 임면권, 주요 법안에 대한 서명권, 노르웨이 군의 최고통수권 등을 헌법상 권한으로 가지지만 형식적이고 의전적인 절차에 불과하며, 국회와 내각이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하고 있다. 노르웨이의 국왕은 매주 금요일 왕궁에서 중추원 회의를 주재하고 매년 10월 노르웨이 국회의 개원을 선언한다. 국왕과 왕비는 국가수반으로서 해외를 국빈방문하며, 노르웨이를 국빈방문하는 외국의 국가수반을 접견한다. 국왕은 내각이 승인한 재노르웨이 외국 대사들의 신임장을 접수하며, 수상이 천거한 해외 주재 노르웨이 대사들을 파견한다.




국왕으로서의 의무 이행과 국민과의 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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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기념일에 군중의 환호에 답례하는 노르웨이 왕실 <출처: (cc) Ernst Vikne at Wikipedia>



노르웨이를 비롯하여 스웨덴과 덴마크 등 스칸디나비아 왕국의 국왕들은 왕위에 즉위하면서 국왕 고유의 표어 설정을 오랜 전통으로 하고 있다. 호쿤 7세는 ‘모든 것을 노르웨이를 위하여’를 국왕 표어로 설정하였으며, 울라브 5세와 하럴드 5세는 별도의 고유 국왕 표어를 설정하지 않고 호쿤 7세의 표어를 따르고 있다.

‘모든 것을 노르웨이를 위하여’라는 국왕 표어는 노르웨이의 국왕으로서 노르웨이와 노르웨이 국민들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다 바치겠다는 일종의 국민과의 약속을 하나의 구절로 표현한 것이다. 이 국왕 표어는 일반 국민에게 친근하게 여겨지고 있으며, 노르웨이 국영 텔레비전에서 2010년부터 매년 한 시즌씩 방송되고 있는 한 리얼리티쇼는 국왕 표어인 ‘Alt for Norge’를 프로그램명으로 채택하여 현재까지 인기를 모으고 있다.

노르웨이의 글룩스부르그 왕가는 국민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하여 왕실 가족들을 일반 학교에서 교육시키는 것을 철칙으로 하고 있다. 물론 왕실의 일원으로서 지켜야 할 품위와 예절 등 일반 학교에서는 받을 수 없는 교육은 왕궁에서 개인 교습을 통해 이루어진다. 또한 왕실의 가족들은 어떠한 형태를 거치든지 국방의 의무를 수행해야 하며, 대개의 경우 노르웨이의 각종 군사학교에서 장교 교육을 받는다.

노르웨이의 국왕은 군의 최고통수권자이기 때문에 왕세자는 필수적으로 군사교육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이러한 전통은 왕실 가족들이 일반 국민과 다를 바 없기 때문에 일반 학교에서 동등한 교육을 받고, 국방의 의무를 수행함으로써 노르웨이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한다는 근본적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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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사관학교 생도 시절의 하럴드 5세



호쿤 7세는 왕실에서 개인 교습을 받았으나 특별한 예우 없이 해군장교 교육 과정에서 다른 장교들과 동등한 교육과 진급의 과정을 거쳤으며, 해군 중위로 제대하였다. 울라브 5세는 초기에는 왕궁에서 개인 교습을 받았지만 이후 일반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노르웨이 왕실 전통에 따라 노르웨이 왕립국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하럴드 5세는 노르웨이 왕가 중 최초로 초등학교부터 일반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나 경호원이 학교에 배치된 것을 제외하고는 일반 학생들과 별반 다를 게 없는 학교 생활을 했다. 그는 노르웨이 기마장교 훈련과정을 거쳐 국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1959년 의무 복무를 마쳤으며, 옥스포드 대학의 발리올 대학에서 정치학, 역사학, 경제학을 공부하였다.

노르웨이의 국왕 부처와 왕세자 부처, 그리고 왕실 가족은 노르웨이 방방곡곡을 순회하는 것을 의무이자 전통으로 여기고 있다. 전국 순회를 통해 국왕 및 왕실 가족은 국민들을 직접 만나 노르웨이 각지에서 국민들이 어떻게 살고 있으며,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를 파악할 수 있는 소통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광역자치구 순회’라 불리는 이 전통은 일반적으로 노르웨이의 19개 광역자치구 중 매년 2개의 광역자치구를 선정하여 2~3일에 걸쳐 국왕 부처가 한 곳을, 그리고 왕세자 부처가 다른 한 곳을 방문하는데, 4~6개 기초자치구 방문이 포함된다.

국가의 수반으로서 전국 각지의 국민들과 소통하고 국민들의 삶의 모습과 지역의 실상을 파악함으로써 국왕 또는 왕세자로서 국민에 대한 임무를 수행하는 한편 낮은 자세로 국민들에게 다가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오래된 전통이다. 이 시기 국왕 또는 왕세자가 방문하는 지역은 그야말로 축제의 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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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헌군주제로 전환한 1814년의 헌법 제정을 기념하는 헌법기념일에 노르웨이는 전국적으로 축제를 벌인다.






노르웨이 왕실에 대한 대중적 평가



노르웨이의 글룩스부르그 왕가는 1905년 출범하여 양차 세계대전을 겪었으며, 특히 호쿤 7세와 당시의 왕세자 울라브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보여준 영웅적인 모습은 노르웨이 국민들로 하여금 왕실에 대한 존경과 지지를 향상시키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하였다.

호쿤 7세와 울라브 왕세자는 런던 망명정부에서 내각과 함께 대(對)나치 레지스탕스 운동을 지휘했을 뿐만 아니라, 울라브 왕세자가 망명정부에 합류하지 않고 노르웨이에 남아 최전선에서 독일군과 싸우겠다고 고집했던 일과 런던 망명정부 시절에 노르웨이 국민들과 고통을 같이 하기 위해 단 음식과 후식을 일절 먹지 않았던 일들은 모든 노르웨이 국민들이 왕실에 대해 높은 자부심과 신뢰를 쌓게 하는 중요한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료 후에도 노르웨이 글룩스부르그 왕가는 노르웨이와 노르웨이 국민들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동시에 항상 낮은 자세로 국민들에게 다가가 소통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노르웨이를 실질적으로 통치하고 있는 국회와 내각에서 노동당이 항상 다수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노르웨이에서 입헌군주제가 유지되고 있는 것은 국왕이 정치에 일절 관여하지 않으면서 시대와 사회가 국왕과 왕실에게 요구하는 임무와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려고 부단히 노력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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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침공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귀국하는 노르웨이 왕실. 맨 왼쪽 소년이 하럴드 5세, 짙은 제복이 호쿤 7세, 그 오른쪽이 울라브 5세



그 결과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시기에 노르웨이 국민들의 국왕에 대한 지지도는 90%를 유지했으며, 현재에도 대략 80%를 유지하고 있다. 대체적으로 보아 노르웨이의 입헌군주제 자체와 국왕, 그리고 왕실 가족에 대한 신뢰도와 지지도는 유럽의 왕가 중 상당히 높은 편이라고 평가될 수 있다.

그러나 언론의 자유가 완벽하게 보장되어 있는 노르웨이에서 국왕 및 왕실 가족이 왕가의 품위와 전통에 어긋나는 일을 하게 되면 비난의 화살이 쏟아지곤 한다. 하럴드 5세는 왕세자 시절 평민이었던 소냐 하럴드센과 9년간 비밀리에 교제하였는데 1968년 이 사실이 알려지자 왕실은 물론 전국이 술렁거렸다.

왕세자 하럴드는 부왕에게 소냐와의 결혼을 승낙하지 않으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하럴드 왕세자가 외아들이었기 때문에 이는 곧 글룩스부르그 왕가의 혈통이 끝나게 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노르웨이 헌법에는 왕실 가족의 결혼은 국왕의 승인을 받아야 된다고 명시되어 있지만 그동안 왕가 간의 결혼이 관행처럼 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치권의 양해가 필요했다.

이에 울라브 5세는 노르웨이 국회의 의장단, 각 정당의 당수, 그리고 내각과의 자문 및 협의 과정을 거쳐 정치권의 양해를 구했다. 사회 일각에서는 입헌군주제의 폐지까지 거론되었지만 왕세자 하럴드는 평민 소냐 하럴드센과 결혼하였고, 대부분의 국민들은 뜨거운 축하를 보냈다.

2001년에는 하럴드 5세의 외아들인 왕세자 호쿤이 부왕과 같이 평민과의 결혼 문제로 노르웨이를 들끓게 했다. 호쿤 왕세자의 경우에는 국민들의 반응이 부왕의 경우와는 사뭇 달랐다. 왕세자 호쿤은 평민의 신분인데다, 헤어진 전 남자와의 사이에 네 살 난 아들까지 두고 있던 메테-마리 체셈 회이비와의 결혼을 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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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테-마리 왕세자비 <출처: (cc) Frankie Fouagnthin at Wikipedia>





호쿤 왕세자 <출처: (cc) Frankie Fouagnthin at Wikipedia>




이 사실이 알려지자 노르웨이는 발칵 뒤집혔으며, 하럴드 5세는 곤란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게다가 언론에 의해 메테-마리가 마약복용의 전력이 있으며 그녀의 동거남은 마약사범으로 복역한 경력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입헌군주제에 대한 지지도는 59%까지 곤두박질쳤다. 하럴드 5세는 결국 이 결혼을 승낙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들끓었던 여론 또한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위의 두 경우 모두 쟁점에 따라 언제든지 폐지 위기에 처할 수 있는 입헌군주제의 취약성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의 왕가에 대한 뜨거운 지지를 동시에 볼 수 있었던 일대 사건이었다.

간헐적으로 터져 나오는 왕실 가족의 부적절한 처사는 항상 여론의 뭇매와 함께 입헌군주제 폐지론에 불을 붙이게 된다. 노르웨이의 좌파 군소정당인 사회주의 좌익당은 정기적으로 입헌군주제 폐지 및 공화제 도입에 관한 법안을 국회에 상정하지만, 이 법안은 매번 기각되는 일이 되풀이되고 있다. 노르웨이 글룩스부르그 왕가의 국왕 및 왕실 가족들이 보여주는 국민과의 소통과 국민들의 왕실에 대한 신뢰 등으로 인해 노르웨이의 입헌군주제는 대략 80% 안팎의 높은 지지를 받고 있다.

참고 자료


서로 독립된 2개 이상의 국가가 동일한 군주를 모시는 정치 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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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슬로 외곽의 홀멘콜렌에서 세계 최초로 시작된 스키점프 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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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호 | 한국외국어대학교 스칸디나비아어과 교수, 국제지역대학원장
글쓴이 박노호는 한국외국어대학교 스웨덴어과를 졸업한 후 스웨덴 스톡홀름대학교 경제학과에서 공공경제학을 전공하고 1992년 경제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조세연구원을 거쳐 1994년부터 한국외국어대학교 스칸디나비아어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입학처장, EU연구소장 등을 역임하고 현재 국제지역대학원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연구업적으로는 <스칸디나비아 3국의 조세제도: 스웨덴을 중심으로>, <스웨덴 국회의 구조와 기능>, <EU 회원국 간 경제적 이해관계 상충의 원인 및 사례 분석>, <정권교체와 정책변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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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세계의 왕가
현재 전 세계에는 29개의 국가가 군주제를 유지하고 있다. 과거의 유산이라고 여겨지는 군주제가 아직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일까. 그리고 현존하는 왕가는 어떤 모습일까. 지금까지 군주제가 유지되고 있는 29개국 및 20세기에 왕정이 폐지된 그리스, 21세기에 군주제의 막을 내린 네팔 왕가를 살펴본다. (안도라는 독립적인 군주제 형태가 아니라서 시리즈에서 제외되었다.)


발행2016.02.04.



주석


1


서로 독립된 2개 이상의 국가가 동일한 군주를 모시는 정치 형태

2


오슬로 외곽의 홀멘콜렌에서 세계 최초로 시작된 스키점프 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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