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속클래식 파리의 미국인 - 뒷골목에도 사랑이 피고, 예술이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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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09회 작성일 16-02-06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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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유행의 도시 파리. 예로부터 파리는 예술가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고 싶어하는 꿈의 도시였다. 수많은 화가, 음악가, 무용가, 작가, 디자이너 지망생들이 청운의 꿈을 안고 이 도시로 몰려 들었다. 그들은 화려한 불빛의 샹젤리제 거리와 에펠탑, 아름다운 세느 강과 미라보 다리를 거닐며 이 도시가 발산하는 자유롭고 낭만적인 분위기에 매료되었다. 하지만 이들이 명품점이 즐비한 샹젤리제 거리의 뒤편에 촉수 낮은 백열전구처럼 흐릿하고 어두운 뒷골목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초기의 치기 어린 자유와 방종의 시간이 지나고 난 후, 냉혹한 현실의 시간이 다가왔다. 하늘을 찌를 듯 충만하던 예술가의 자존심은 사라지고, 이제 일용할 양식을 걱정해야 하는 초라하고 비루한 일상만이 남았다.



음악리스트
No.아티스트 & 연주 
1조지 거쉰 - 파리의 미국인 (An American in Paris)음악 재생
2조지 거쉰 - 랩소디 인 블루 (Rhapsody in Blue)음악 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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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원제공 :
소니뮤직




파리에서 피어난 사랑




1951년에 개봉된 빈센트 미넬리 감독의 뮤지컬 영화 [파리의 미국인]은 청운의 꿈을 품고 파리로 건너갔으나 결국 뒷골목 화가로 전락한 한 미국인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 것이다.

미국 태생의 화가 지망생 제리는 미술공부를 위해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의 몽마르뜨르에 정착한다. 하지만 가난하고 배경 없는 미국 젊은이가 파리 화단의 주류 세계에 입성하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그는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 화가들의 거리 뒷골목에 자기 작품을 걸어놓고 오가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그림을 팔면서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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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개봉한 영화 [파리의 미국인]의 포스터.<출처: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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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그는 부유한 금발의 미국 여인 마일로를 만나게 된다. 제리의 작품을 높이 평가한 마일로는 높은 값으로 그의 작품을 구입하고, 그를 파리 문화계 인사들에게 소개한다. 마일로가 그림 보는 눈이 있어서 정말로 그의 작품을 높이 평가했는지 아니면 다른 속셈이 있어서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여하튼 그녀는 물심양면으로 제리를 돕고, 제리는 그녀의 도움으로 화가로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제리는 마일로에 대한 자기의 감정이 진짜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연히 향수 가게에 들렀다가 가게 점원으로 일하는 리사라는 아가씨에게 사랑을 느낀 후 마일로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돈 많은 여자와의 사랑은 세속적인 사랑, 가난하고 순박한 처녀와의 사랑은 진실한 사랑이라는 멜로드라마의 구태의연한 공식이 이 영화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후 역시 마찬가지로 구태의연한 공식에 의해 제리는 화가로서의 미래를 보장해주는 마일로와의 관계를 청산하고 진실한 사랑을 찾아 리사에게로 간다. 서로의 마음을 알게 된 제리와 리사는 세느 강 가를 거닐며 사랑을 속삭인다. 하지만 이런 행복도 잠시뿐. 제리는 리사가 자신의 친구 앙리와 이미 약혼한 사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친구와의 신의를 저버릴 수 없었던 제리는 리사와 헤어지기로 결심한다.

두 사람을 미국으로 떠나보낸 제리는 허탈한 마음으로 파리 시내를 내려다본다. 그러다가 어느 새 리사와 함께 춤을 추는 환상에 사로잡힌다. 그런데 바로 그때 그 앞에 리사가 나타난다. 앙리가 두 사람의 사랑을 알고 그녀를 보내준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제리와 리사의 사랑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는다.

줄거리만 보면 이 영화는 그렇고 그런 50년대식 로맨스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뮤지컬 영화사상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영화의 마지막에 펼쳐지는 환상장면 때문이다. 제리가 자기 곁을 떠난 리사를 그리워하며 환상에 잠기는 이 장면에서 미국 작곡가 조지 거쉰의 [파리의 미국인 An American in Paris]이라는 음악이 춤과 함께 펼쳐진다. 영화에 클래식 음악이 들어가는 경우 대개 곡의 길이를 줄여 사용하는데, 이 영화에서는 이례적으로 무려 20여분에 달하는 전곡이 모두 나온다.

[파리의 미국인]은 1952년 아카데미 작품상, 촬영상, 각본상, 의상상, 미술상, 음악상의 6개 부문을 석권한 뮤지컬 영화의 걸작으로 꼽힌다. 빈센트 미넬리 감독이 연출하고, 앨런 러너가 각본을 썼으며, 뮤지컬 배우의 전설 진 켈리가 주연과 안무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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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미국인]의 작곡가 조지 거쉰. <출처: Wikipedia>



[파리의 미국인]의 작곡가 조지 거쉰은 미국 문화의 기저를 이루는 여러 장르의 음악들 즉, 재즈, 블루스, 래그타임, 유대민속음악 등을 교묘히 융합해 이것을 유럽 클래식 음악 전통과 접목시킨 작곡가로 평가받는다. 20세기 초까지 미국에는 재즈와 같은 대중음악 장르를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클래식 음악의 전통이 없었다. 클래식 음악의 지휘자나 오케스트라들은 베토벤, 브람스 같은 유럽 작곡가들의 작품을 대중들에게 소개하는 것 외에 다른 일은 하지 않았다. 단순히 유럽 음악을 재생산하는 것이 전부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유럽 음악이지 미국 음악이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미국적인 정서의 정체성을 보여줄 수 있는 미국적인 음악이 필요했다. 거쉰은 바로 이런 미국인의 희망을 실현시킨 사람이었다.

거쉰이 이런 희망을 실현시킬 수 있었던 것은 아마 그가 정식으로 클래식 음악 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유럽 음악의 전통에 대해 완전히 무지했기 때문에, 자유롭게 자기 자신의 색깔을 보여주는,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음악을 작곡할 수 있었던 것이다.

거쉰은 1898년, 뉴욕의 브루클린에서 러시아계 유태인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12살 때 집에 피아노가 들어온 후, 개인교사에게 피아노와 화성학을 배우며 음악적 재능을 키웠다. 16살 때 고등학교를 중퇴한 그는 한 음악 출판사의 피아니스트로 취직해서 손님들에게 악보에 실려 있는 곡을 연주해주는 일을 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데모 테이프와 같은 역할을 한 것이다. 19살 때 극장 소속 피아니스트로 일하다가 21살 때 [스와니]라는 유행가를 작곡했는데, 이것이 크게 히트를 치면서 부와 명예를 거머쥐게 되었다. 당시 이 노래의 악보는 100만부 이상 팔렸다고 한다. 하지만 이 때까지만 해도 거쉰은 그저 ‘돈 잘 버는’ 대중음악 작곡가에 불과했다. 이런 그가 클래식 음악계를 포함한 세계 음악계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24년에 발표한 [랩소디 인 블루] 때문이다. [랩소디 인 블루]는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연주가 끝났을 때, 사람들은 재즈와 클래식을 성공적으로 결합시킨 이 곡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재즈를 귀부인으로 격상시켰다는 평을 들은 [랩소디 인 블루]는 그때까지 일개 유행가 작곡가에 불과했던 거쉰을 미국음악을 대표하는 작곡가로 부상시켰다. 그는 1928에는 파리 여행에서 받은 인상을 바탕으로 [파리의 미국인]이라는 관현악곡을 작곡했으며, 1935년에는 최초의 재즈 오페라 [포기와 베스]를 발표해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제리와 리사가 조지 거쉰의 관현악곡 [파리의 미국인]에 맞추어 춤추는 이 장면에는 다양한 요소들이 녹아 들어가 있다. 춤과 노래가 주축을 이루던 뮤지컬의 전통에서 벗어나 모던 발레, 음악, 색채, 장치, 무용, 미술 등이 하나로 융합되어 있다. 그림으로는 툴루즈 로트렉을 비롯해 라울 뒤피, 르누아르와 같은 프랑스 화가들의 그림이 나온다. 여기서 감독이 프랑스 화가들의 그림을 다룬 방식이 매우 독창적이어서 이 영화가 정말 50년대에 만들어진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다. 지금의 감각으로 보아도 이 정도이니 아마 당시 사람들에게는 훨씬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프랑스 화가들의 그림을 훌륭하게 번안한 환상적인 세트와, 오락성과 예술성을 갖춘 거쉰의 음악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이 장면은 50년대라는 시대적 한계를 훌쩍 뛰어넘어 우리를 놀라게 한다. 정말로 뮤지컬 영화 역사상 전무후무한 명장면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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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말, 파리의 밤문화를 그림으로 남긴 툴루즈-로트렉. <출처: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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툴루즈-로트렉 [물랭 루즈, 라 굴뤼] 1891. 판화, 193.5x119.5cm, 국립도서관, 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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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면에서 거쉰의 음악과 더불어 중요한 역할을 한 그림은 프랑스 화가 툴루즈 로트렉의 그림이다. 툴루즈 로트렉은 1864년 프랑스 명문 귀족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하지만 부모의 근친결혼으로 인한 유전적 결함으로 사지가 제대로 자라지 않는 병에 걸려 난쟁이가 된다. 어려서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었던 그는 1885년 예술가의 거리인 파리의 몽마르트르에 정착한 후 10년 동안 그 어느 유파에도 속하지 않는 자신만의 화풍을 가진 그림을 그렸다. 그 무렵 그가 자주 드나들던 곳은 물랭 루즈라는 캬바레였다. 지금도 파리 몽마르트르에 있는 이 캬바레는 여자 무용수들이 치마를 들고 다리를 위로 번갈아 들어 올리는 이른바 캉캉춤이 첫 선을 보인 곳으로 유명하다. 1889년에 개장해 파리 사교계 인사들 사이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로트랙은 이곳에 드나드는 가수와 무용수, 사교계의 신사, 숙녀를 그렸을 뿐만 아니라 물랭 루즈를 위한 포스터를 직접 그리기도 했다. 인상적인 색채와 날카로운 실루엣의 물랭 루즈 포스터는 당시 파리 시민들 사이에 아주 인기가 있어서 그의 포스터만 전문으로 수집하는 사람까지 생길 정도였다.

로트렉의 그림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대단한 사람들이 아니다. 캬바레의 무용수, 가수, 매춘부, 술집 점원, 바람난 여자, 사창굴의 포주 등 낮보다는 밤의 세계에 익숙한 사람들이다. 그는 자신의 그림에 이들의 저속한 일상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담았다. 화려한 조명 밑에 빛나는 밤의 환락뿐만 아니라 그 이면에 드리워진 일상의 고단함과 내면의 고독까지도.

로트렉은 우리가 소위 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도 의외로 매혹적인 부분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아무도 찾아내지 못한 추의 매혹, 그 저급취미를 통해 역설적으로 드러나는 삶의 진솔한 모습이 바로 로트렉이 추구했던 세계가 아니었을까. 그런 면에서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가차 없이 자학적(自虐的)이었다. 그는 그림 속에 자신의 모습을 그려 넣기도 했는데, 그 방식이 지극히 자조적(自嘲的)인 점이 눈길을 끈다. 그는 다른 사람의 눈에 비친 자기를 그릴 때 일부러 실제보다 훨씬 추하게 그림으로써 스스로 이방인 임을 자처했다. 이렇게 독창적인 화풍으로 19세기 말 파리 뒷골목의 사생활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던 로트렉은 카바레와 매음굴을 전전하며 무절제한 생활을 거듭하다 알코올 중독과 정신이상으로 결국 3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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툴루즈-로트렉 [아이리쉬 앤드 아메리칸 바에서 춤추는 쇼콜라] 1896. 종이에 과슈, 잉크, 65x50 cm <출처: Wikipedia>



영화 [파리의 미국인]에서 주류 예술계의 두 서자(庶子) 조지 거쉰의 음악과 툴루즈 로트렉의 그림이 만났다. 배우와 무용수들은 로트렉의 그림으로 설정해 놓은 가상의 세계 속에 기묘하게 얽혀 들어가 있다. 우리에게 친숙한 로트렉 그림 속의 인물들은 물랭 루즈의 포스터를 들고 있기도 하고, 동작을 멈춘 채 그림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가상의 세계 속에 죽은 듯 갇혀 있다가 어느 순간 그림 바깥으로 뛰쳐나와 격렬하게 춤을 춘다.

주인공 진 켈리 역시 로트렉의 그림 속에서 튀어 나온다. 이 장면에 쓰인 로트렉의 작품은 1896년 작인 [아이리쉬 앤드 아메리칸 바에서 춤추는 쇼콜라]이다. 파리에 사는 미국인이라면 누구나 한번 쯤은 향수에 젖어 아메리칸 바를 찾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바로 여기서 진 켈리는 자신의 50년대식 근육이 그대로 드러나는 옷을 입고 그림 속에서 빠져 나와 춤을 춘다. 유럽인의 감각으로는 다소 경박하다 싶은 바로 그 양키들의 음악 [파리의 미국인]에 맞추어서.

조지 거쉰의 음악이나 툴루즈 로트렉의 그림은 모두 ‘뒷골목’에서 태어났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뒷골목 정서가 영화 [파리의 미국인]에서 서로 만난 것이다. 미국 음악과 프랑스 미술의 만남은 얼핏 몰상식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근저에 깔린 비주류 의식, 뒷골목 의식은 이 넌센스가 때로는 환상적인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화려한 거리의 뒷골목은 아웃사이더들의 근거지다. 한때 거쉰과 로트렉이 ‘놀던’ 뉴욕의 뒷골목, 파리의 뒷골목에는 지금도 무수히 많은 아웃사이더들이 주류세계로의 진출을 꿈꾸며 살고 있다. 하지만 청운의 꿈을 품고 찾아온 도시는 어두침침한 뒷골목에서 볕 들 날을 기다리고 있는 아웃사이더들에게 좌절만을 안겨줄 뿐이다.

영화의 주인공 제리 역시 파리의 아웃사이더였다. 한때 잠시 주류 사회에 합류할 뻔 했지만 이 50년대식 로맨스는 그를 ‘진실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뒷골목으로 끌어들인다. 하지만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듯이 뒷골목에서도 사랑이 피고, 예술이 핀다. 거쉰과 로트렉이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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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회숙 | 음악 칼럼니스트
이화여대 음대 및 서울대 음대 대학원 졸업
현재 서울시립교향악단 월간지 SPO 편집위원이며, 서울시향 ‘콘서트 미리 공부하기’를 비롯한 여러 클래식 강좌의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평화방송 FM 음악공감 ‘진회숙의 일요 스페셜’의 진행자이다. 저서로 <모나리자. 모차르트를 만나다> 외 여러 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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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2.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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