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속클래식 리플리 - 초라한 현실보다 멋진 거짓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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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07회 작성일 16-02-06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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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탕달의 소설 [적과 흑]은 얼핏 보면 남녀 간의 사랑을 그린 연애소설 같지만 사실 프랑스 혁명 이후 왕정복고 시기의 시대상을 다룬 사회소설이다. 여기서 스탕달은 주인공 줄리앙 소렐을 통해 왕정복고 시기의 가난하지만 능력 있는 젊은이가 어떻게 몰락하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야심만만 한 줄리앙은 타고난 능력으로 신분의 벽을 깨고 상류사회로의 진출을 꿈꾸지만 목표가 바로 코앞에 다가온 시점에서 좌절을 맛본다. 절망한 그는 자신의 꿈을 좌절시킨 레날 부인에게 총을 쏘고, 그 죄로 젊은 나이에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다. 스탕달은 이 소설을 통해서 프롤레타리아가 성공할 수 있는 길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던 19세기 프랑스 사회를 고발했다.



음악리스트
No.아티스트 & 연주 
1바흐 – 이탈리아 협주곡 1악장음악 재생
2비발디 – 스타바트 마테르 : Stabat Mater Dolorosa음악 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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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원제공 :
소니뮤직


비록 시대가 바뀌고, 표면적으로 신분의 차이가 없어졌다고 하나 지금도 여전히 출신 배경의 차이에서 오는 불공정한 현실이 존재한다. 태어날 때부터 출발점이 다르니 어차피 공정한 게임은 불가능하다. 이런 부류의 사람이 출세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편법을 쓰는 것이다. 그들은 거짓과 위선으로 자신을 포장한다. 목표한 바를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작은 거짓말이 큰 거짓말을 낳고, 이렇게 거짓말을 계속하는 동안 자기 자신마저 속이고 어느새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모르는 상태가 된다. 출세욕은 강하지만 사회적으로 꿈을 실현할 수 있는 통로가 봉쇄되어 있을 때, 사람은 현실에 없는 가공의 세계를 만들어 그곳에서 살게 되는데, 이런 유형의 인격 장애를 ‘리플리 증후군’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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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플리 증후군’은 영화 [리플리]의 원작 소설 [재능있는 리플리]의 주인공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출처: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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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플리 증후군은 1955년 패트리샤 하이스미스가 발표한 [재능있는 리플리 The Talented Mr. Ripley]라는 연작소설 주인공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톰 리플리는 20대 중반의 고아로, 절도와 남 흉내 내기가 특기이며, 어떤 일에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전형적인 악인이다. 그는 부자 아버지를 둔 덕분에 무위도식하며 방탕한 생활을 하는 친구를 죽이고 신분을 위조해 그 친구 행세를 하면서 산다. 1960년에 나온 알랑 드롱 주연의 영화 [태양은 가득히]는 바로 이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앤소니 밍겔라 감독의 1999년 작 [리플리] 역시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능력도 있고 야망도 있지만 고아라는 미천한 신분 때문에 변변한 직업조차 갖지 못한 리플리는 낮에는 피아노 조율사, 밤에는 호텔 보이로 일하며 손님들이 던져주는 동전 몇 닢에 감지덕지하는 비루한 삶을 살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 기회가 찾아온다. 사실 그 기회는 그저 찾아온 것이 아니다. 그가 한 작은 거짓말이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사건의 발단은 그가 피아노 반주를 위해 빌려 입은 프린스턴 대학 재킷이었다. 그것을 보고 선박 재벌 그린리프가 자기 아들도 프린스턴 출신이라고 하면서 그에게 호의를 보인 것이다. 졸지에 프린스턴 출신이 된 리플리. 얼떨결에 한 거짓말에 그린리프가 반색을 하자 그는 한술 더 떠서 그의 아들 디키를 잘 알고 있는 척한다. 이 말을 들은 그린리프는 그에게 이탈리아에서 무위도식하고 있는 아들을 데려오면 돈을 주겠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이탈리아로 가기 전 리플리는 디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다. 디키가 재즈를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재즈 음반을 계속해서 들으며 재즈에 대한 감각을 익힌다. 야망에 대한 도전이 시작된 것이다.

드디어 이탈리아로 떠나는 날. 그는 그린리프가 보낸 최고급 차를 타고 항구로 향한다. 이렇게 최고급차를 타고, 이탈리아로 가는 호화 유람선의 일등석에 머물면서 그는 처음으로 상류사회의 일원이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어렴풋이 느낀다. 배 안에서 그는 유명한 섬유 재벌의 딸인 매러디스를 만나는데, 바로 이때부터 그의 위장 행각이 시작된다. 그녀에게 자기를 그린리프의 아들인 디키라고 소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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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한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을 부르고, 리플리는 어느덧 상류사회의 일원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진다. <출처: 네이버 영화>



이탈리아에 도착한 그는 디키가 있는 몽지로 향한다. 디키는 해변가 마을 몽지에서 애인 마지와 함께 지내고 있다. 리플리는 프린스턴 대학 동창이라며 디키에게 접근하고, 그런 그를 디키와 마지는 자신들의 숙소로 데려온다. 이 자리에서 리플리는 자기가 여기에 온 이유를 실토한다. 하지만 디키는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버틴다. 디키의 거절로 할 일이 없어진 리플리. 미국으로 돌아가겠다며 작별 인사를 하는데, 바로 이때 일부러 재즈 음반들을 떨어뜨린다. 리플리가 자기처럼 재즈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디키는 그를 주저앉힌다. 리플리의 계략이 성공한 것이다.

리플리는 디키와 같이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는 동안 어느덧 상류사회의 일원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진다. 하지만 실제로 그는 부자 친구에 기생해서 사는 빈대일 뿐. 디키의 친구 프레디가 그에게 현실을 깨우쳐 준다. 프레디는 디키 집에 얹혀살면서, 디키가 주는 음식을 먹고, 디키 옷을 입고, 디키 아버지가 주는 돈으로 사니 참 팔자 편하겠다고 빈정거리고, 리플리는 이 말에 모멸감을 느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디키의 아버지로부터 우리의 계약은 이것으로 끝이라는 편지를 받는다. 톰은 디키와 계속 지내고 싶지만 디키 역시 이제 그만 헤어지자고 한다. 마지막으로 함께 바다에 배를 타고 나간 리플리와 디키. 여기서 디키는 찰거머리, 가난뱅이 빈대라는 말로 리플리의 자존심을 건드린다. 이에 화가 난 리플리는 디키를 죽인다.

그 후 리플리는 본격적으로 디키 행세를 하기 시작한다. 디키의 서명을 위조해 은행에서 돈을 인출하고, 신용카드를 마음대로 쓰면서 호화스러운 생활을 즐긴다. 멋진 집을 사서 크리스마스 장식을 하고, 그랜드 피아노와 각종 예술품을 들여놓는다. 오랫동안 꿈꾸어왔던 상류층의 삶을 누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경험이 너무나 짜릿했기에 다시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 살인도 서슴지 않았다. 그는 디키를 찾아온 친구 프레디를 죽이고, 마지막에는 그에게 친절을 베풀던 친구 피터마저도 죽인다. 피터를 죽이면서 리플리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영영 창고에 갇힐 거야. 그 어둡고 무섭고 외로운 창고. 난 거짓말을 했어. 내가 누군지.
내가 어디 있는지. 나는 늘 생각했지. 초라한 현실보다 멋진 거짓이 낫다고.


리플리는 ‘초라한 현실’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멋진 거짓’을 꾸며냈다. 배경 없는 그에게 현실은 ‘어둡고 무섭고 외로운 창고’일 뿐이었다. 그는 제목 그대로 ‘재능이 많은’ 젊은이였다. 특히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다. 비록 피아노 조율사로 일하지만 만약 부모를 잘 만났다면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음악에 재능 있는 그에게 상류사회로의 진입이란 곧 클래식 음악을 마음껏 향유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르는 것을 의미했다. 턱시도를 차려입고 음악회에 가서 베토벤의 음악을 듣고, 피아노 앞에 앉아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곡을 치는 것 말이다.

영화에서 한 실내악단이 베토벤의 [피아노 5중주] E 플랫 장조 작품 16을 연주하는 장면이 나온다. 리플리는 2층 발코니의 커튼 뒤에서 반쯤 얼굴을 내밀고 무대를 훔쳐본다. 비록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음악을 듣고 있지만 객석에 앉아 음악을 듣는 관객과, 커튼 뒤에 서서 음악을 몰래 듣는 리플리 사이에는 극복할 수 없는 신분의 차이가 있다. 그는 커튼 뒤에서 상류사회의 삶을 훔쳐보는 아웃사이더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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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베토벤과 바흐의 음악은 주인공 리플리가 마음껏 향유하고싶어했던 상류사회의 삶, 그 자체를 의미한다.



모두의 주목을 받는 무대 위의 주인공이 되고 싶었던 것일까. 리플리는 관객이 모두 돌아간 텅 빈 연주 홀 무대에서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이탈리아 협주곡]을 친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뿐. 곧 경비에게 발각되면서 자신의 초라한 현실로 돌아온다.

여기서 베토벤과 바흐의 음악은 상류사회를 상징한다. 피아노 조율사로 일할 때, 이 음악들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 커튼 뒤에서 몰래 훔쳐 듣거나, 밤중에 몰래 숨어들어 연주해야 하는, 저 높은 분들의 전유물이었다. 그러기에 더욱 간절했는지도 모른다. 디키의 돈으로 멋진 집을 산 그는 제일 먼저 그랜드 피아노를 들여놓는다. 그리고 피아노 앞에 앉아 바흐의 [이탈리아 협주곡]을 연주한다. 남의 피아노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의 피아노로. 이것은 그가 그토록 동경하는 상류사회 사람이 되어 이제 온전히 이 음악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앞에서 얘기한 베토벤과 바흐의 음악이 상류사회를 상징하는 것이라면 영화의 다른 장면에서 나온 차이콥스키와 비발디의 음악은 리플리가 처한 초라한 현실에 대한 자각 혹은 그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죄책감을 상징한다.

디키 행세를 하는 리플리는 로마에서 섬유 재벌의 딸 매러디스와 함께 오페라를 보러 간다. 차이콥스키의 오페라 [에프게니 오네긴]이다. 러시아의 문호 푸시킨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이 오페라에는 주인공 에프게니 오네긴이 친구인 렌스키를 총으로 쏘아 죽이는 대목이 나온다. 눈 덮인 벌판에서 결투를 벌이기 직전, 젊은 시인 렌스키는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듯 마지막 노래를 부른다. [내 황금 같은 젊은 날은 어디로 갔는가]라는 유명한 테너 아리아이다. 이 노래를 부른 다음, 렌스키는 오네긴의 총에 맞아 눈밭에 쓰러진다. 오네긴이 쓰러지는 장면을 보며 리플리는 눈물을 흘리고, 리플리의 죄책감을 드러내고 싶었던 감독의 의도 역시 그의 눈물을 통해 뚜렷하게 드러난다.

리플리의 초라한 현실이 애잔한 감동으로 다가오는 장면은 그가 피터와 이야기를 나누며 피아노로 비발디의 [스타바트 마테르]를 치는 장면이다. 피아노를 치며 리플리는 이렇게 말한다.



사랑하는 사람에겐 창고 열쇠를 주고 싶어. 문을 열고 들어가 보라고. 하지만 안 돼. 그 안은
어둡고 더러우니까. 그 추잡함을 들키면 우울한 기분이 더 우울해져. 난 늘 그러고 싶어. 문을
활짝 열고 모든 걸 드러내고 싶다고. 큰 지우개가 있다면 모든 걸 지우고 싶어.


이 장면에서 나오는 [스타바트 마테르(Stabat mater)]는 중요한 교회음악 양식 중 하나이다. 우리말로 ‘눈물의 성모’ 혹은 ‘슬픔의 성모’라고 하는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가는 예수를 바라보는 성모 마리아의 고통을 그린 노래이다.



비탄에 잠긴 어머니 십자가 옆에 눈물 흘리며 서 계셨네.
당신의 아들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을 때,
고통스럽고 비탄에 찬 그녀의 영혼은 비수에 찔리셨네.
오! 그토록 슬프고 고통스러운 독생자의 어머니.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가는 아들을 바라보아야 하는 어머니의 심정은 어떨까. 그 처참한 고통을 그녀는 혼자 감내해야 한다. 그것을 상징하듯 비발디의 음악도 독창자 혼자 ‘고독하게’ 노래한다.

리플리의 피아노 연주는 성당에서의 연주 장면으로 이어진다. 한 소년이 피터의 오르간 반주에 맞추어 [스타바트 마테르]를 부르고, 리플리는 한없이 고뇌에 찬 표정으로 음악을 듣는다. 음악이 발산하는 애잔함 때문일까. 이 장면에서는 리플리가 피 흘리고 상처 입은 불쌍한 영혼처럼 느껴진다. 소년이 “눈물의 날에”를 의미하는 “라크리모사”를 반복할 때는 그에 대한 연민에 목 놓아 울고 싶은 기분마저 들 정도다.

이 영화는 [태양은 가득히]와 달리 확실한 결말을 보여주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에 나오는 차이콥스키와 비발디의 음악은 리플리의 앞날이 결코 순탄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죄책감을 느낀다는 것은 이미 정신적인 파멸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와는 달리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에서는 리플리의 살인이 완전범죄로 끝난다. 하이스미스는 리플리를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는 완전한 악인으로 그렸지만 정의의 이름으로 그를 응징하지는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는 소설보다 잔인하다. 마지막에 주인공을 파멸로 몰아넣음으로써 프롤레타리아인 주제에 감히 상류사회를 넘본 죄가 어떤 것인지 확실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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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회숙 | 음악 칼럼니스트
이화여대 음대 및 서울대 음대 대학원 졸업
현재 서울시립교향악단 월간지 SPO 편집위원이며, 서울시향 ‘콘서트 미리 공부하기’를 비롯한 여러 클래식 강좌의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평화방송 FM 음악공감 ‘진회숙의 일요 스페셜’의 진행자이다. 저서로 <모나리자. 모차르트를 만나다> 외 여러 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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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2.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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