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속클래식 디 아워스 - 삶, 그 우울한 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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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15회 작성일 16-02-06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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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아주 디프레시브(depressive)한 영환데....”

[디 아워스]를 보았다고 하자 친구가 한 말이다. 그렇다. 참 우울한 영화, 병색이 완연한 영화다. 보는 동안 가슴이 영겁의 짙은 안갯속으로 깊이 침잠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디 아워스]는 1999년 퓰리처 상과 펜 포크너 상을 수상한 미국 작가 마이클 커닝햄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여기에는 세 명의 주인공이 나오는데, 1923년 영국 런던 근교의 리치몬드에 살고 있는 작가 버지니아 울프, 1951년 로스엔젤레스에 살고 있는 평범한 가정주부 로라 브라운, 그리고 2001년 뉴욕에서 출판 편집자로 일하고 있는 클라리사 본이다. 영화는 각기 다른 시대, 각기 다른 공간에 살았던 세 여인이 하루 동안에 겪었던 일을 보여 준다. 세 여인의 이야기는 서로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기에는 하나의 연결 고리가 있다. 바로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이다. 1923년 버지니아 울프는 이제 막 [댈러웨이 부인]을 쓰기 시작했고, 1951년 로라 브라운은 [댈러웨이 부인]을 읽고 있다. 그리고 2001년의 클라리사는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별명을 가진 채 살아가고 있다.



음악리스트
No.아티스트 & 연주 
1리하르트 슈트라우스 - [네 개의 마지막 노래] 중 제 3곡 [잠자리에 들 때]음악 재생

1분 미리듣기 / 음원제공: 소니뮤직




“댈러웨이 부인은 직접 꽃을 사겠다고 했다.”

버지니아 울프는 새 소설의 첫 구절을 이렇게 시작한다. 그런 다음 장면이 바뀌어 1951년의 로스엔젤레스. 침대에 앉아 소설책을 펼쳐든 로라가 이 문장을 읽는다. 그런 다음 다시 장면 전환. 이번에는 2001년 뉴욕. 클라리사가 친구 샐리에게 “꽃을 사야겠어.”라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영화에서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매개로 시공을 달리하는 세 여인의 이야기가 교차하며 전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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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디아워스]에서는 시공을 달리하는 세 여인의 이야기가 교차하며 전개된다. <제공: 네이버 영화>영화 정보 보러가기


1941년 영국의 리치몬드. 환상과 환청, 정신분열에 시달리고 있는 버지니아 울프는 복잡한 도시 생활을 청산하고 런던 근교의 호젓한 마을에서 남편 레나드의 헌신적인 보살핌을 받으며 살고 있다. 병은 호전되지 않고, 답답한 시골 생활에 염증을 느끼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창작열을 불태워 [댈러웨이 부인]을 쓰기 시작한다.

다음 장면은 1951년 미국의 로스엔젤레스. 둘째 아이를 임신한 만삭의 가정주부 로라 브라운은 침대에 앉아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읽기 시작한다. 그날은 남편의 생일. 로라는 아내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세 살 난 아들 리차드와 함께 남편의 생일을 축하하는 케이크를 만든다. 그녀는 미국의 전형적인 중산층으로 남들 눈에는 매우 성공적인 결혼 생활을 영위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남모르는 욕망이 불타고 있다. 그것을 억지로 숨긴 채 모범생처럼 살아가는 삶에서 로라는 고통을 느낀다. 결국 그녀는 남편의 생일날 자살을 결심하고 집을 나온다.

바로 이 시점에서 이야기는 버지니아 울프로 연결된다. 소설을 쓰면서 버지니아 울프는 주인공을 죽일까 아니면 그냥 살려 둘까 고민한다. 그러다가 살려두는 쪽을 택하게 되는데, 이런 버지니아 울프의 배려 덕분에 1951년 로스엔젤레스의 로라 브라운은 스스로 목숨 끊는 것을 포기한다. 그녀는 둘째 아이를 낳은 후 자신의 삶을 찾아 집을 떠날 것을 결심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장면은 또다시 바뀌어 2001년의 미국 뉴욕.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출판 편집자 클라리사는 옛 애인 리차드의 문학상 수상을 기념하는 파티를 준비하고 있다. 그녀는 파티장을 화려하게 꾸밀 꽃을 사야겠다고 생각한다. 리차드는 1951년 로스엔젤레스에서 [댈러웨이 부인]을 읽었던 로라 브라운의 아들이다. 로라 브라운은 자신의 결심대로 둘째 아이를 낳고 나서 가족을 떠났고, 그 후 리차드는 자신을 버린 엄마에 대한 상처를 가슴 깊이 묻고 살아왔다. 지금 리차드는 에이즈로 죽어가고 있다. 클라리사는 파티 준비를 마친 후 리차드를 찾아간다. 하지만 리차드는 그녀와의 행복했던 순간을 추억한 후, 그녀가 보는 앞에서 창밖으로 몸을 던져 자살한다.

리차드가 죽은 후, 로라 브라운이 클라리사의 집을 찾아온다. 그전까지는 세 여인의 이야기가 각기 다른 공간, 다른 시간 속에서 전개되었지만 바로 이 시점에서 공간과 시간의 일치가 이루어진다. 로라 브라운은 클라리사에게 자기가 리차드를 버렸다고 얘기한다. 세상에 어머니가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일을 했다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자기는 죽음 대신 삶을 택했다고.

영화는 버지니아 울프가 강물에 스스로 몸을 던지는 장면으로 끝난다. 남편 레너드는 서재에서 그녀가 남긴 유서를 발견한다.

삶을 회피하지 않고 과감하게 맞서 싸우면서 내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았어요. 마침내 그것을 깨닫게 되었고, 삶을 사랑하게 되었지만 이제 그 삶을 접을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레너드. 우리가 함께 한 세월, 소중한 시간들. 영원히 그 사랑과 함께 항상 간직할게요.

이 영화의 음악을 담당한 사람은 미니멀리즘 음악의 대가 필립 글래스이다. 미니멀리즘 음악의 특징은 단순한 패턴의 음이나 리듬을 무한 반복하는 것인데, 이 영화에서 필립 글래스는 이런 미니멀 음악의 특징을 매우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선율적인 요소를 최대한 배제한 단순한 음형, 음이라는 재료에서 정서적인 요소를 제거한 무미건조한 패턴의 무한 반복을 통해 세 여인에게 부과된 비인간적인 삶이 또 다른 삶에서 무한 재생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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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리사가 파티를 준비하는 장면에서, 유일하게 인간의 정서에 호소하는 음악이 나온다. <제공: 네이버 영화>


이런 필립 글래스의 비인격적(非人格的)인 음악은 영화 전편에 걸쳐 나타난다. 그러다가 중간에 딱 한번 이와는 완전히 성격이 다른 음악, 우리가 평상시에 음악이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런 음악, 말하자면 인간의 정서에 호소하는 음악이 나온다. 클라리사가 파티를 준비하다 리차드의 옛 애인 루이스를 맞는 장면에서 나오는데, 이것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네 개의 마지막 노래] 중 [잠자리에 들 때]라는 곡이다.

백조는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만 노래를 부른다고 한다. 그래서 위대한 작곡가의 마지막 작품은 흔히 백조의 노래에 비유되곤 한다. 작곡가들은 말년이 되면 자신의 온 생애를 불살랐던 위대한 창작의 에너지를 끌어모아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인 작품을 만들고 싶어 한다. 그들은 마치 죽음을 앞둔 백조가 사력을 다 해 생의 마지막 노래를 부르는 듯 꺼져가는 생명의 마지막 불꽃을 소진시켜 생의 마지막 작품을 만든다. [네 개의 마지막 노래]는 바로 이런 작품이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일생 동안 약 1500곡 정도의 가곡을 작곡했는데, [네 개의 마지막 노래]는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이 곡은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추어 부르는 소프라노 독창곡으로 곡 전체에 슈트라우스 특유의 자유로움과 시적 영감의 음악적 처리가 주옥처럼 빛나고 있다. 가히 슈트라우스 음악의 위대한 종결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슈트라우스는 아내와 함께 휴양을 하려고 스위스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1946년 말에 그는 자신의 창작욕을 자극하는 매우 지적인 시를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요제프 폰 아이헨도르프가 지은 [황혼에]라는 시였다. 한편 그 무렵 그는 새로 발간된 헤르만 헤세의 시집을 읽고 있었는데, 여기서도 마음에 드는 시를 몇 편 찾아냈다. 그 후 그는 자신의 기호와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이 시들을 가지고 오케스트라와 소프라노를 위한 곡을 만들었으니 그것이 바로 [네 개의 마지막 노래]이다.

이 작품은 제1곡 [봄], 제2곡 [9월], 제3곡 [잠자리에 들 때] 제4곡 [황혼에]로 되어 있는데, 1곡에서 3곡까지는 헤르만 헤세의 시에, 마지막 곡은 아이헨도르프의 시에 곡을 붙였다. 네 곡의 순서가 본래 작곡했던 순서와 다르지만 의미의 전개로 보면 이런 식의 배열이 훨씬 의미가 있다. 생성, 소멸, 휴식, 죽음의 순서로 배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 나오는 세 번 째 곡 [잠자리에 들 때]에서 노래하는 것은 영원한 안식과 잠으로 비유되는 죽음이다. 이 노래를 듣고 있으면 황혼의 들녘에 앉아 지나온 삶을 조용히 되돌아보는 노작곡가의 뒷모습이 떠오르는데, 여기서 ‘잠자리’는 휴식을 의미한다.

이제껏 낮은 나를 지치게 만들었으니
내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열망에 떨다 지쳐버린 아이처럼
편하게 별밤을 맞는 것이다.

손이여, 하던 일을 모두 멈추어라.
이마여, 생각들을 모두 잊어버려라.
내 모든 사고, 감각은
이제 잠으로 침잠하려 한다.

하여 내 영혼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밤의 마법 안에서 깊이 그리고 오랫동안
살기 위해 자유로이
공중을 떠돌려 한다.

이 시는 아내가 정신병에 걸린 것에 충격을 받은 헤르만 헤세가 자신도 신경쇠약으로 고생하던 중에 지은 것이라고 한다. “이제껏 낮은 나를 지치게 만들었으니”로 시작하는 시의 첫 구절이 인상적이다. 세상사에 지친 시인은 이제 일손을 멈추고, 생각도 멈추고, 밤의 깊은 휴식 속으로 침잠하고 싶어 한다.

이렇게 잠 속으로 침잠하고 싶은 시인의 심정을 슈트라우스는 구구절절한 음악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제 잠으로 침잠하려고 한다”의 끝자락을 혼으로 장식하고, 이어서 명상적인 바이올린 독주를 덧붙인다. 이 바이올린 간주 부분은 헤세의 시구(詩句)를 그대로 이어받은 슈트라우스의 음시(音詩)라고 할 수 있다. 처음에 애절하게 시작한 바이올린이 어느덧 하늘로 날아오르기 시작한다. 이 간주 부분에서 바이올린은 뒤에 나오는 노래의 멜로디를 미리 예시하는데, 이 부분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간주가 끝나고 나면 드디어 노래가 해방의 나래를 펴기 시작한다. 이 후반부, 그중에서도 특히 “내 영혼은 아무런 속박 없이 자유의 날개를 타고 날아오른다”의 음악적 표현이 그렇게 절묘할 수가 없다. 특히 ‘날개’라는 단어의 멜로디를 듣고 있으면 세상의 속박에서 벗어난 해방감의 실체를 청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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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슈트라우스의 노래는 고통을 뒤로한 휴식, 그 자유의 날개를 표현한다. <제공: 네이버 영화>


영화에서 클라리사가 리차드를 위한 파티를 준비하는 동안 바로 이 대목이 흘러나온다. 클라리사는 왜 이 노래를 틀어 놓았을까. 이 노래에서 삶은 낮이며, 죽음은 밤이다. 그런데 시인은 낮이 자기를 너무 지치게 했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제는 영원한 잠 속에 빠져들고 싶다는 것이다. 죽음으로 날개를 달고 아무런 속박 없는 자유를 맛보고 싶다고 노래한다. 클라리사와 리차드, 그의 어머니 로라 그리고 이들의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비지니아 울프는 모두 낮이라는 시간에 지친 사람들이다. 마지막에 클라리사와 로라는 살아남고, 리차드와 버지니아 울프는 죽음을 택한다. 하지만 살아남은 이들의 낮 시간이 죽은 자들의 그것보다 편안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클라리사 역시 리차드처럼 죽음이 더 편안하다고 생각했는 지도 모른다. 파티를 준비하는 즐거운 시간에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노래를 틀어놓은 것을 보면, 그녀 역시 살아 있는 낮, 환하지만 고통스러운 그 ‘시간들(the hours)’과 작별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관련링크: 통합검색 결과 보기14547454185664.jpg    네 개의 마지막 노래 음반14547454185664.jpg


영화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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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 아워스(2002)
    감독

    스티븐 달드리
    출연

    니콜 키드먼, 줄리엔 무어, 메릴 스트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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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회숙 | 음악 칼럼니스트
이화여대 음대 및 서울대 음대 대학원 졸업
현재 서울시립교향악단 월간지 SPO 편집위원이며, 서울시향 ‘콘서트 미리 공부하기’를 비롯한 여러 클래식 강좌의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평화방송 FM 음악공감 ‘진회숙의 일요 스페셜’의 진행자이다. 저서로 <모나리자. 모차르트를 만나다> 외 여러 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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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원제공

소니뮤직

http://www.sonymusic.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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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니뮤직 트위터 (http://www.twitter.com/SonyClassicalKr)


발행2012.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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