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속클래식 소피의 선택 -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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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27회 작성일 16-02-06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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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에게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비극을 꼽으라고 한다면 아마 누구나 주저 없이 나치에 의한 유태인 학살을 꼽을 것이다. 물론 그전에도 전쟁, 기근, 전염병과 같은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하지만 그것은 현재를 사는 우리와는 별다른 상관이 없는, 그저 역사책에나 나오는 먼 옛날의 이야기일 뿐. 이에 비해 나치에 의한 유태인 학살은 바로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다. 이는 나치가 몰락한지 수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악몽을 끊임없이 반복 재생하고 있는 영화 때문이다. [글루미 선데이] [쉰들러 리스트] [피아니스트] [인생은 아름다워] [소피의 선택] 등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다룬 영화는 너무나 많아서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하지만 그중에서 가장 끔찍한 것을 꼽으라면 알란 파큘라 감독의 [소피의 선택]이 아닐까 싶다. 처참한 학살의 현장을 생생하게 그려야만 끔찍한 것이 아니다. 그것보다 더 끔찍한 것도 있다.



음악리스트
No.아티스트 & 연주 
1슈만 [어린이 정경] 중 제 1곡 [미지의 나라에서]음악 재생

1분 미리듣기 / 음원제공: 소니뮤직




만약 당신이 두 명의 자식을 둔 어머니라고 치자. 그런데 당신 자식의 목숨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어떤 사람이 두 명의 자식 중 한 명만 살려줄테니 죽을 자식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어떻게 할까. 과연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을까. 어머니로서 이런 상황에 처한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둘 중 죽을 자식을 하나 고르라니. 어머니로서 이것이 가능한 일일까.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 할 수 없는 일이다. [소피의 선택]은 바로 이런 ‘잔인한 선택’에 대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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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에 의한 ‘잔인한 선택’을 그린 영화 [소피의 선택] <제공: 네이버 영화>영화 정보 보러가기


1947년 여름, 미국 남부 출신의 소설가 지망생 스팅고는 브루클린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그가 세 들어 살고 있는 집 2층에는 소피와 네이단이라는 커플이 살고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스팅고는 이들과 친구가 된다. 세 사람이 친하게 지내는 동안 스팅고는 소피에게 묘한 매력을 느낀다. 하지만 스팅고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종잡을 수 없는 네이단의 성격이다. 네이단은 평소에 친절하다가도 갑자기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하곤 하는데, 더욱 이상한 것은 이렇게 수시로 폭력적인 성향을 보이는 네이단을 소피가 떠나기는커녕 오히려 더 집착한다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또다시 발작을 일으킨 네이단이 소피에게 결별을 선언하고 집을 나간다. 네이단이 소피를 떠났다고 생각한 스팅고는 소피에게 청혼을 한다. 하지만 소피는 자기는 결혼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그동안 숨겨왔던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소피는 폴란드 출신이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 소피의 아버지는 반유태주의가 팽배했던 폴란드에서 유태인 말살 정책을 제안해서 유명해졌다. 하지만 이런 업적에도 불구하고 나치가 집권하자 그녀의 아버지와 아버지의 제자였던 남편은 나치에 끌려가 총살을 당하고, 소피는 아이들과 함께 아우슈비츠로 끌려가 딸은 가스실에서 죽고, 아들은 어린이 수용소로 끌려간다.

그 후 소피는 유창한 독일어 실력을 인정받아 아우슈비츠 사령관의 비서로 일하게 된다. 그녀는 어린이 수용소에 있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사령관을 유혹하고, 마침내 그로부터 아들을 살려 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낸다. 하지만 사령관은 약속을 지키지 않고, 소피는 사령관의 숙청과 함께 다시 수용소로 끌려간다. 아들의 생사도 확인하지 못한 상태에서 전쟁이 끝나고, 소피는 스웨덴의 난민 수용소로 보내진다. 더 이상 살아갈 희망을 잃은 소피는 그 후 여러 차례 자살을 기도한다.

소피가 스팅고에게 들려준 얘기는 여기까지이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가슴 속에 묻어둔 채 누구에게도 고백할 수 없는 또 다른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 스팅고에게 자기 과거에 대해 얘기할 때도 이 얘기만큼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를 들은 스팅고가 이제 아픈 기억을 모두 잊고 자기와 결혼해 아이를 낳고 기르며 행복하게 살자고 하자 그제야 비로소 그동안 가슴 깊이 묻어 두었던 얘기를 꺼낸다. 그 끔찍했던 ‘선택’의 순간에 관한 이야기이다.

아이들을 데리고 아우슈비츠에 도착했을 때, 소피는 아이들만큼은 살리고 싶다는 생각에 자기 곁으로 다가온 독일군에게 이렇게 애원한다.

“폴란드 인이예요. 크라카우 출신이고요. 유태인도 아니고요. 아이들도 기독교 신자예요.”
“공산당 아니야? 신자라고?”
“예, 그리스도를 믿어요.”
“그리스도를 믿는다? 예수께선 어린아이들을 내게 오라고 하지 않으셨지. 한 아이는 데려가도 좋다.”
“뭐라고 하셨어요?”
“두 아이 중 하나는 데려가도 좋아. 하지만 하나는 죽어야 해.”
“나보고 선택하라고요?”
“그래. 유태인이 아니라 폴란드인이니까 봐주는 거야.”
“선택할 수 없어요. 그렇게는 못해요.”
“해야만 해.”
“그럴 수 없어요.”
“못 하겠다면 둘 다 보내겠다. 어서 선택해.”
“못해요.”
“어서 선택해. 안 그러면 둘 다 보낸다.”
소피가 계속 거부하자 독일군이 아이 둘을 모두 데려가려고 한다. 그 순간 소피가 다급하게 소리친다.
“딸아이를 데려가요. 내 아기, 내 딸을”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독일군이 소피의 품에서 딸을 빼앗아간다. 공포에 질린 어린 딸의 울음소리가 점점 멀어져 가는 동안 소피는 단말마의 비명을 지른다. 그렇게 딸은 가스실로 끌려가고, 아들은 어린이 수용소로 보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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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는 끔찍했던 ‘선택’의 순간을 가슴에 품고 살아간다. <제공: 네이버 영화>


이야기를 한 후 소피는 스팅고에게 말한다. 자기에게 더 이상 결혼이나 아이 얘기는 하지 말라고. 자기는 그럴 수 없는 사람이라고. 그런 다음 그녀는 스팅고에게 작별의 편지를 남기고 네이단에게 돌아간다. 그로부터 얼마 후, 소피와 네이단은 늘 함께 사랑을 나누던 침대 위에서 죽은 채 발견된다. 독약을 마시고 함께 목숨을 끊은 것이다. 스팅고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두 사람이 누워있는 침대를 바라본다. 평온한 얼굴이다. 살아있을 때는 그토록 고통스러워하더니 죽음을 통해 비로소 그 고통으로부터 해방된 것이다. 창문의 커튼이 무심하게 바람에 휘날린다.

이 영화에는 바흐의 [예수는 나의 기쁨], 슈만의 [어린이의 정경] 중 [미지의 나라들, 미지의 사람들], 멘델스존의 [무언가] 제1번, 베토벤의 [합창교향곡], 요한 슈트라우스의 [봄의 소리 왈츠] 등이 나온다.

이 중 슈만과 멘델스존의 음악은 비슷한 의미 즉, 행복한 시절의 음악으로 쓰였다. 먼저 네이단이 피아노로 슈만의 [어린이의 정경] 중 [미지의 나라들, 미지의 사람들]을 연주한다. [어린이의 정경]은 슈만이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쓴 작품이다. 모두 13곡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술래잡기], [조르는 아이], [만족], [트로이메라이(꿈)], [난롯가에서], [약이 올라서]와 같이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해 본 어린 시절의 기억들을 담아낸 단순하고 소박한 작품이다.

영화에 나오는 [미지의 나라들, 미지의 사람들]은 [어린이 정경]의 첫 곡으로 멜로디가 자장가처럼 달콤하고 로맨틱하다. 네이단이 이곡을 피아노로 치자 소피가 어린 시절을 회상한다.

“어렸을 때 잠자리에 들면 아래층에서 피아노 소리가 들렸죠. 아빠 타자 소리도요. 완벽한 가정이었어요.”

어린아이가 이야기를 해 달라고 조르고 있다. 아이가 원하는 이야기는 자기가 잘 알지 못하는 먼 나라 이야기, 그리고 그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 이야기는 음악의 멜로디처럼 소박하다. 낮은 ‘미’에서 저 위의 ‘도’까지 6도 위로 우아하게 올라갔다가 부점음표로 미끄러지듯 내려온다. 이렇게 6도 위로 올라가는 음형은 낭만주의 작곡가들이 즐겨 썼던 것인데, 일종의 ‘그리움’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한다.

소피의 삶에 있어서 가장 완벽하게 행복했던 시절은 어린 시절 뿐인지도 모른다. 피아노와 함께 들려오던 아빠의 타자 소리. 그 시절에는 아빠의 타자 소리가 유태인을 향한 분노와 반감의 표현이었는지 몰랐다. 그렇기 때문에 완벽하게 행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는 소피는 그렇게 완벽했던 행복의 시간들을 그리워한다.

수용소에 끌려가기 전, 소피는 자신의 아이들에게 아마 이렇게 평화롭고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주었을 것이다. 아이들과 함께 음악처럼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누렸을 것이다. 여기서 슈만의 달콤한 멜로디는 소피의 참혹한 상황과 강렬한 콘트라스트를 이룬다.

친구가 된 스팅고, 소피, 네이단은 비록 짧지만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멘델스존의 [무언가(Lieder ohne Worte)] 제1번을 배경으로 세 사람이 보낸 잔잔한 일상의 장면들이 펼쳐진다. [무언가]는 ‘가사 없는 노래’라는 뜻이다. 멘델스존이 살았던 19세기에는 소박하고 서정적인 피아노 소품이 널리 유행했다. 이런 종류의 피아노 소품들은 멜로디가 아름다우면서도 연주하기가 상대적으로 쉽기 때문에 아마추어 피아니스트들 사이에 널리 사랑을 받았다. 멘델스존도 이런 피아노 소품을 많이 작곡했는데, 1829년에서 45년 사이에 작곡한 48곡의 피아노 소곡을 한데 묶어 놓은 것이 바로 [무언가]이다.

피아노가 부르는 짧고 소박한 노래.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음악적 단상들을 가벼운 터치로 그려 놓은 음악. [무언가]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비록 피아노 독주곡으로 작곡되었지만 [무언가]에서 낭만주의 독주곡 특유의 기교적인 화려함이나 감정의 기복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 깊은 정열이나 슬픔, 혁신적인 모험 같은 것도 없다. 오로지 하나의 악상을 짧고 소박하게 그려나간 노래와 같은 시적 분위기가 있을 뿐이다.

예술가들이 대개 불우한 환경에서 살았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멘델스존은 매우 유복한 환경에서 태어나 행복의 마취 상태 속에서 살았다. 그는 일용할 양식에 대한 걱정 없이 오로지 작품에만 몰두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작곡가 중에 한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일까. 그의 음악에서는 세상에 대한 과도한 반항 의식이나 병적인 자기 도착 증세가 보이지 않는다. ‘운명아. 내가 간다. 길을 비켜라‘하는 식의 투쟁 의지도 보이지 않는다. 비록 낭만주의 시대를 살았지만 그는 다른 낭만주의 예술가들처럼 자신의 감정을 과장하거나 낭비하지 않았다. 그저 사슴의 눈동자처럼 투명하고 순한 눈길로 세상을 바라보았을 뿐이다. 음악 속에서 무언가 심각하고 의미심장한 것을 기대하는 사람들 중에는 멘델스존의 음악이 인생에 대한 절실한 번민을 담고 있지 못하다고 불평하는 사람도 있다. 자신의 인생이 행복하니 음악도 행복할 수밖에 없다. 비록 짧지만 스팅고, 소피, 네이단도 한때는 멘델스존처럼 행복하게 살았다. 서로 장난치며 농담을 주고받고, 커다란 소리로 웃고 떠들고, 같이 뒤엉켜 뒹굴기도 하고. 그렇게 보통 사람들 같이 소소한 일상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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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와 네이단은 결국 죽음을 통해 평화를 찾게 된다. <제공: 네이버 영화>


하지만 그것은 구름 속에서 잠깐 모습을 드러낸 햇빛같이 찰라적인 것. 사실 소피와 네이단은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술을 마시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불러도 결코 지울 수 없는 끔찍하고 참혹한 기억들. 그것을 잊기 위해 두 사람은 격렬하게 사랑을 나누었다. 네이단이 발작을 일으켜 집을 나가면, 소피는 마치 엄마 잃은 새처럼 떨면서 하염없이 그를 기다렸다. 밤이 되면 네이단이 우울한 모습으로 집으로 돌아오고, 소피는 그런 네이단을 간절하게 껴안았다. 그때 네이단이 말했다.

“잊었어? 우리가 죽어가고 있다는 걸?”

그런 날이면 두 사람이 격렬하게 사랑을 나누었다. 절망의 쓰나미가 지나간 후, 마치 통과의례처럼 치러졌던 사랑의 의식. 그때 바흐의 음악이 흘러나왔다. 칸타타 147번에 나오는 [예수는 나의 기쁨 Jesus bleibet meine Freude]이다. 직역하자면 “예수는 내 기쁨 속에 머문다” 정도가 되는데, 바흐의 음악 중에서 대중적으로 가장 사랑받는 곡 중의 하나이다.

영화에서는 집을 나갔던 네이단이 소피에게 자기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장면 그리고 그 후에 서로 사랑을 나누는 장면에서 나온다. 사랑을 나누는 세속적인 일이 소피와 네이단에게는 일종의 종교의식 같은 것이었다. 육체적 욕망을 초극한 삶에 대한 신성한 갈망, 죽음을 떨쳐버리고 생명으로 가기 위한, 절망을 떨쳐 버리고 희망으로 가기 위한 통과의례 같은 것이었다. 이것이 아니면 이 세속적인 장면에 바흐의 신심(信心) 가득한 음악을 집어넣은 불경이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다.

영화에는 안 나오지만 원작인 스파이런의 소설에 보면 두 사람이 죽기 직전에 들었던 음악도 바로 바흐의 [예수는 나의 기쁨]인 것으로 나온다. 스파이런은 소피와 네이단의 죽음을 부활의 의미로 승화시키고 싶었다고 한다. 두 사람의 죽음이 비극이 아닌 축복이라면 바흐의 [예수는 나의 기쁨]은 가장 적절한 송가(送歌)라 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침대 위에 누워있는 소피와 네이단의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다. 살아있는 동안 누리지 못했던 완벽한 행복. 그 아름다운 평화의 시간을 에밀리 디킨슨은 이렇게 축복한다.

쓸쓸한 침상 위에
찬란한 빛이 비치게 하라.
심판의 새벽이 올 때까지
이 빛나는 아침
이불깃 똑바로 접고
베개도 두둑이 하여
아침 햇살 외 그 어떤 것도
감히 훼방 놓지 못하게 하리.


관련링크: 통합검색 결과 보기14547454628850.jpg    어린이 정경 음반14547454628850.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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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회숙 | 음악 칼럼니스트
이화여대 음대 및 서울대 음대 대학원 졸업
현재 서울시립교향악단 월간지 SPO 편집위원이며, 서울시향 ‘콘서트 미리 공부하기’를 비롯한 여러 클래식 강좌의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평화방송 FM 음악공감 ‘진회숙의 일요 스페셜’의 진행자이다. 저서로 <모나리자. 모차르트를 만나다> 외 여러 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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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원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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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sonymusic.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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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2.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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