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속클래식 멜랑콜리아 - 지구 종말에 대한 아름다운 판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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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09회 작성일 16-02-06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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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과 지구 종말.

이 두 가지 소재를 가지고 영화를 만든다면 어떤 영화가 될까. 생각만 해도 마음이 무겁다. 우울증은 인간 내면의 파멸을, 지구 종말은 그 인간을 둘러싼 외부 세계의 파멸을 의미한다. 당연히 암울한 영화가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멜랑콜리아]는 이런 우리의 상식을 배반한다. 그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우울증과 지구 종말이라는 무거운 소재를 아름다운 판타지로 승화시켰다. 영화의 제목이 된 ‘멜랑콜리아’는 지구와 충돌하는 거대한 행성의 이름인데, 다른 한편으로 우울증을 의미하기도 한다. 서로 전혀 연관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우울증과 지구 종말은 이런 방식으로 서로 연결된다.



음악리스트
No.아티스트 & 연주 
1바그너 [트리스탄과 이졸데] 중 [Prelude and Love-Death]음악 재생

1분 미리듣기 / 음원제공: 소니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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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과 종말이라는 주제를 아름다운 판타지로 그린 영화 [멜랑콜리아] <제공: 네이버 영화>영화 정보 보러가기


영화는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진 저스틴과 클레어 자매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시작은 저스틴의 결혼식 피로연 장면이다. 광고 회사의 카피라이터로 일하는 저스틴은 신랑 마이클과 함께 언니 클레어와 형부 존이 마련해 준 호화 피로연에 참석한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저스틴은 시종일관 행복한 표정을 짓지만 사실 그것은 그녀의 본 모습이 아니다. 지독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는 언니 부부가 베풀어준 호화로운 피로연도, 신랑이 자기를 위해 마련해준 과수원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가슴을 짓누르는 절망감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을 뿐이다. 저스틴에게 이런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어떻게든 결혼을 성사시켜보려고 애쓰던 신랑 마이클은 결국 이 모든 것이 부질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가족과 함께 그녀 곁을 떠난다.

영화의 후반부는 언니 클레어의 이야기이다. 결혼식 피로연 이후 저스틴의 우울증은 더욱 심해진다. 걷는 것도, 숨 쉬는 것도 어려울 정도가 된다. 클레어는 이런 동생을 극진히 보살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멜랑콜리아'라는 거대한 행성이 지구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클레어는 멜랑콜리아가 지구와 충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워하지만 과학자인 그녀의 남편은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며 그녀를 안심시킨다.

하지만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우려하던 일이 벌어진다. 멜랑콜리아가 지구와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다. 클레어의 남편은 지구 종말이 다가왔다는 사실을 알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클레어는 어린 아들 레오와 함께 시내로 도망치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부질없다는 것을 알고 절망한다. 그런데 이런 클레어의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저스틴은 멜랑콜리아가 다가올수록 오히려 더 침착해진다. 우울증으로 고통받고 있던 저스틴에게 지구 종말은 차라리 축복인지도 모른다. 저스틴은 공포에 떠는 언니와 어린 조카를 안심시킨다. 그리고 두 사람의 손을 잡고 의연하게 지구 종말의 순간을 맞는다.

지구 종말을 다룬 영화를 보면 최후의 순간은 대개 아비규환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도대체 그럴 이유가 없다. 지구 자체가 멸망하는데, 지구의 어디로 도망간다는 말인가. 지구 종말처럼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는 어떤 상황과 맞닥뜨렸을 때,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방법은 그 상황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저스틴은 얼마 남지 않은 생의 마지막 시간을 의연하게 맞기로 했다. 지구와 함께 그야말로 산산이 부서지는 것이다. 아름답고 찬란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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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멜랑콜리에]는 종말을 통한 해방, 절대적 환희에 도달하는 과정을 탐미적 판타지로 펼쳐보인다. <제공: 네이버 영화>


[멜랑콜리아]를 만든 트리에 감독도 이와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지구를 향해 서서히 다가오는 ‘우울’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행성. 우울증으로 고통받던 저스틴은 역설적이게도 ‘우울’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축복으로 그 고통에서 해방된다. 죽음을 통해 지상에서는 이루지 못한 절대적인 환희에 도달하는 것이다. 영화의 프롤로그는 이 과정을 탐미적인 판타지로 펼쳐 보인다.

헝클어진 머리, 창백한 표정의 저스틴. 그 뒤로 죽은 새들이 떨어진다. 피터 브뤼겔의 명화 [눈 속의 사냥꾼]. 그림의 배경으로 검은 파편들이 떨어진다. 거대한 행성이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낸다. 레오를 안은 클레어가 필사적으로 도망간다. 달리던 말이 더 이상 앞으로 가지 못하고 주저앉는다. 초록의 들판 한 가운데 저스틴이 서 있고, 그 주변에서 무수한 나비들이 현란하게 하늘로 날아오른다. 대저택 앞에 웨딩드레스를 입은 저스틴과 클레어, 그리고 그녀의 아들 레오 세 사람이 서 있고, 하늘에는 두 개의 달이 떠있다. 그 광경이 마치 초현실주의 그림 같다. 그다음 우주 공간을 유영하는 지구와 멜랑콜리아. 저스틴의 손가락과 가로등에서 나뭇가지 같은 빛이 솟아오른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저스틴이 그물을 뚫고 달린다. 점점 가까워지는 지구와 멜랑콜리아. 웨딩드레스를 입은 저스틴이 밀레이의 명화 [오필리아]를 연상시키는 자세로 물위에 떠 있다. 지구가 거대한 멜랑콜리아에 서서히 빨려 들어간다. 그리고 마침내 산산이 부서진다.

슬로 모션으로 처리된 이 초현실적이고 몽환적인 장면에 나오는 음악이 있다. 바그너의 음악극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1막 [전주곡]이다.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영국 기사 트리스탄과 아일랜드 공주 이졸데의 사랑을 그린 오페라이다. 트리스탄은 자기 숙부인 마르케 왕의 신붓감인 이졸데를 이송하는 임무를 맡지만 중간에 사랑의 묘약을 먹어 이졸데와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두 사람은 왕의 눈을 피해 사랑을 나누지만 나중에 왕에게 들키고 만다.이 자리에서 트리스탄은 마르케의 신하 멜로트의 칼에 맞아 쓰러지고, 트리스탄의 부하 쿠르베날은 부상당한 트리스탄을 고향으로 데려와 정성껏 치료한다. 하지만 트리스탄은 이졸데가 배를 타고 그를 만나러 왔을 때 숨을 거둔다. 이졸데는 사랑의 죽음을 찬양하는 마지막 노래를 부르고, 그와 함께 죽음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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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종말의 장면은 마치 한장의 초현실주의 그림 같이 연출되었다. <제공: 네이버 영화>


[트리스탄과 이졸데] 1막의 [전주곡]은 몽환적으로 시작해 사랑의 엑스터시로 절정에 이르는 곡이다. 처음에 우주를 유영하듯 떠도는 짧은 멜로디가 무엇인가에 이끌리듯 하나의 화음으로 귀결된다. 몽롱한 느낌의 이 화음은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쓰였다고 해서 ‘트리스탄 코드’라고 불린다. F―B―D♯―G♯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통적인 화성학에서 보자면 일종의 변종에 해당된다. 정체불명의 이 화음은 전체적인 곡의 조성을 불분명하게 만든다. 그래서 학자들 중에는 이것을 무조(無調) 음악의 효시로 보는 사람도 있다.

‘트리스탄 코드’는 바그너가 추구했던 음향적 탐미주의의 상징이다. 딱히 어떤 조(調)에 속한다고 할 수 없는 화음. 으뜸음으로 귀환해야 하는 의무로부터 해방된 화음. 마치 꿈을 꾸듯 비현실적으로 흘러가는 화음. 이 화음이 만들어내는 애매모호하고 감각적인 음향이 트리에의 탐미적인 영상과 만나 에로틱한 판타지를 만들어낸다. 그 세계는 매우 낯설지만 한편으로는 달리의 초현실주의 그림처럼 신비롭고 황홀하다.

[멜랑콜리아]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전주곡]은 단순한 배경음악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영화 전편에 걸쳐 오로지 [전주곡] 하나만 나온다. 이렇게 영화 한 편에 단 하나의 곡만 쓰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경우인데, 여기에는 음향적 고려 이외의 이유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트리에 감독과 바그너는 현세(現世)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강렬한 열망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현세는 불완전한 것, 극복해야 할 그 무엇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현세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을까. 죽음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죽음을 현세에서는 이루지 못한 절대적인 사랑, 천상의 엑스터시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바그너는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장대한 오케스트레이션과 장황한 수사를 통해 불륜의 사랑과 연인의 죽음을 영원불멸의 우주적 사랑으로 격상시키는 놀라운 재주를 보여준다.

부드럽고 조용하게 그가 미소 지으며
다정한 눈길을 보내는 것이
여러분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나요?
점점 밝아지면서 광채를 내며
별빛에 싸여 하늘로 높이 오르는 것이
여러분들에겐 보이지 않나요?
그의 가슴은 지혜와 고귀함으로 가득하고
그의 입술엔 향기와 포근한 입김이
조용하고 평화롭게 오가는데
여러분! 그것을 느끼지 못하나요?
제게만 그 멜로디가 들리는군요
오로지 그 기쁨을 전하고
모든 것을 속삭이며 다정하게 위로하는 듯,
울려 퍼지며 내 안으로 들어와
부드러운 음색으로 속삭입니다
그보다도 청아한 울림으로
나를 에워싸고 출렁이는 것은
잔잔한 파도일까요?
아니면 향기가 피어나는 파도일까요?
그 파도들이 밀려와
내 몸을 휘감고 꿈틀대는 것을
들여 마실까요?
귀로 듣기만 할까요?
그냥 마시고 몸을 맡겨 버릴까요?
향기에 취해 숨을 거두어 버릴까요?
파도치는 물결 속에, 바다의 소리 속에
세계가 숨 쉬는 그 맥박 속에 빠져들어
나를 잊어버리려 합니다.
오! 다시없는 이 기쁨이여!

[사랑의 죽음 Liebestod]이라는 이졸데의 노래는 죽음을 통한 완벽한 합일(合一)의 경지를 보여준다.

[멜랑콜리아]에 이를 연상시키는 장면이 나온다. 지구와 멜랑콜리아가 서서히 가까워지다가 마침내 지구가 거대한 멜랑콜리아와 충돌하는 장면이다.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서로의 육체를 탐닉하다가 쾌락의 절정에 이르는 것처럼, 지구가 멜랑콜리아라는 난자의 벽을 뚫고 안으로 빨려 들어갈 때 바그너의 음악도 절정에 다다른다. 그 장면을 보면 어딘가에서 트리에와 바그너가 이렇게 외치는 것 같다.

오! 그토록 찬란한 파멸이여!

오! 그토록 황홀한 죽음이여!


관련링크: 통합검색 결과 보기14547454696016.jpg    트리스탄과 이졸데 음반 14547454696016.jpg


영화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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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회숙 | 음악 칼럼니스트
이화여대 음대 및 서울대 음대 대학원 졸업
현재 서울시립교향악단 월간지 SPO 편집위원이며, 서울시향 ‘콘서트 미리 공부하기’를 비롯한 여러 클래식 강좌의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평화방송 FM 음악공감 ‘진회숙의 일요 스페셜’의 진행자이다. 저서로 <모나리자. 모차르트를 만나다> 외 여러 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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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3.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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