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속클래식 블랙 스완 - 흑조, 잠자던 욕망을 깨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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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382회 작성일 16-02-06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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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발레의 명작 [백조의 호수]. 이 작품의 주역을 맡은 발레리나는 1인 2역을 해야 한다. 백조와 흑조이다. 그런데 백조와 흑조는 성격이 완전히 다른 배역이다. 백조는 청순하고 나약하며, 흑조는 사악하고 강렬하다. 따라서 백조가 흑조가 되려면 자기 속에 있는 백조를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 그런 철저한 자기부정이 전제되어야만 흑조로의 완벽한 변신이 가능하다.



음악리스트
No.아티스트 & 연주 
1차이콥스키 [백조의 호수] 중 [정경]음악 재생

1분 미리듣기 / 음원제공: 소니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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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조의 호수]의 백조는 철저하게 자기를 버려야 흑조로의 완벽한 변신이 가능하다. <제공: 네이버 영화>영화 정보 보러가기


[블랙 스완]의 주인공 니나에게 그것은 자기 살 껍질을 벗겨내는 것 같은 고통이었다. 뉴욕 발레단 소속으로 이제까지 한 번도 주연을 해 본 적이 없는 그녀는 다가오는 시즌의 개막작으로 공연될 [백조의 호수] 주연에 도전한다. 하지만 발레단의 예술 감독 토마스 리로이는 니나가 그 역할을 잘 해낼 수 있을지 염려한다. 그녀의 성격으로 보아 순수하고 나약한 백조 역은 잘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관능적이고 도발적인 흑조로 완벽하게 변신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기 때문이다. 니나로부터 오디션에 참가할 것이라는 얘기를 들은 감독은 백조를 아름답게 연기하는 것만으로는 안된다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흑조 역인데, 그 역할을 제대로 하려면 잠자던 본능을 깨우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내보여야 한다고 충고한다.

그런데 라이벌이 나타난다. 릴리라는 신입 단원이다. 그녀는 니나만큼 정교한 테크닉을 구사하지는 못하지만 무대를 압도하는 카리스마와 도전적인 관능미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니나는 가까스로 주연 자리를 따내지만 릴리가 호시탐탐 주연 자리를 노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연습 때마다 감독으로부터 본능적인 감정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는 바람에 늘 불안해한다.

니나는 흑조로의 완벽한 변신을 간절히 원하지만, 그녀 안에 있는 무의식적 기제가 그것을 거부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그녀의 어머니. 전직 발레리나 출신인 니나의 어머니는 딸을 통해 자신의 꿈을 이루려고 한다. 그녀는 보호와 지원이라는 미명 하에 딸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자기가 꾸며놓은 인형의 방에 딸을 가둔다. 니나는 그렇게 길들여져왔다. 하지만 그런 여린 감성으로는 아름답고 순진한 백조는 할 수 있을지언정 도발적이고 관능적인 흑조는 될 수 없다. 흑조가 되려면 어머니가 꾸며놓은 공주의 방으로부터 탈출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백조와 흑조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법이다. 니나도 아마 그럴 것이다. 다만 어머니로 인해 그녀 마음속의 흑조가 자기를 드러낼 기회를 갖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백조의 호수] 주연에 도전하는 그녀에게 주어진 과제는 바로 이 잠재된 흑조를 끄집어내는 일이다.

니나로 하여금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은 바로 릴리이다. 릴리는 니나를 술집으로 데려가고, 환각 효과를 일으키는 약을 먹여 그녀가 자기 본능을 숨김없이 드러내도록 한다. 약에 취한 니나는 비로소 본능에 따라 움직인다. 어머니가 이런 행동을 제지하지만 니나는 자기도 이제 어른이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그리고 자기 방에 있는 인형들을 모두 내다 버린다. 더 이상 슬프고 가녀린 백조에만 머물기를 거부한 것이다.

드디어 [백조의 호수]가 무대에 올랐다. 하지만 니나는 백조와 왕자가 이인무를 추는 장면에서 그만 실수를 한다. 감독의 질책을 받은 니나는 눈물을 흘리며 분장실로 가는데, 분장실에 흑조 의상을 입은 릴 리가 앉아 있다. 릴리는 니나의 실수를 비웃으며 니나 대신 자기가 흑조를 추면 어떻겠냐고 말한다. 이에 흥분한 니나는 릴리를 거울에 밀어 넘어뜨린다. 그리고 릴리가 자신의 목을 조르자 깨진 거울 조각으로 릴리를 찌른다. 릴리는 그 자리에서 죽는다. 니나는 릴리의 시신을 욕실로 옮겨 놓은 다음, 흑조를 추기 위해 무대로 나간다.

릴리를 죽인 후, 니나는 완전히 다른 인격체가 된다. 흑조로 완벽하게 변신한 것이다. 무대 위의 그녀는 사악한 미소를 띠고, 도발적인 눈빛으로 춤을 춘다. 그러는 동안 그녀의 몸도 변한다. 흑조처럼 몸에 돌기가 돋고, 털이 나고, 날개가 팔에서 돋아난다. 완벽한 흑조가 되고 싶다는 그녀의 열망에 몸이 부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몸이 점점 흑조로 변해가면서 동작도 격렬해진다. 그렇게 완벽한 한 마리의 사악한 흑조가 되어 춤을 춘다. 관객들은 그녀의 완벽한 연기에 압도된다. 본능이 부족하다고 늘 그녀를 질책하던 감독마저 눈물을 글썽인다.

흑조를 멋지게 연기하고 분장실로 돌아온 니나. 노크 소리가 나서 문을 열어보니 자기가 죽인 줄 알았던 릴리가 멀쩡한 얼굴로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니나는 놀라서 릴리의 시신을 치웠던 욕실 문을 열어본다.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그것은 환상이었을까?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니나는 북부에 통증을 느낀다. 내려다보니 하얀 발레복 사이로 피가 스며나오는 것이 보인다. 그녀가 찌른 것은 릴리가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었던 것이다. 흑조로의 완벽한 변신을 위해 그녀가 죽여야 할 것은 타자(他者)가 아니었다. 그녀가 죽여야 할 것은 분출하는 '이드(Id)'를 가로막는 자기 자신의 '에고(Ego)'였다. 니나는 늘 자신의 모습을 비추던 거울,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그 거울을 깨서 날카로운 조각을 자신의 에고 깊숙이 찔러 넣는다.

상처 입은 니나는 무대 위에서 죽는다. 왕자에게 배신당한 오데트 공주가 혼신의 힘을 다해 춤을 춘 후 죽는 것처럼. “내가 해냈다.”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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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나는 자기 자신을 찌르고 완벽한 흑조로 변신한다. <제공: 네이버 영화>


이 영화의 배경이 된 [백조의 호수]는 [잠자는 숲 속의 미녀] [호두까기 인형]와 함께 차이콥스키의 3대 발레곡으로 꼽히고 있는 작품이다. 음악적으로 차이콥스키의 [백조의 호수]는 발레 음악의 위치를 예술 음악의 경지로 격상시킨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그전까지 발레 음악은 무용에 적당한 멜로디와 리듬을 맞춰주는 말 그대로 반주음악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차이콥스키의 [백조의 호수]에 이르러 발레에서 음악의 위상이 달라졌다. 단순한 무용 반주음악을 넘어 연주회용 음악으로도 손색이 없는 그야말로 하나의 완벽한 예술 음악이 된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백조의 호수]가 초연에서 참담한 실패를 맛보았다고 한다. 무용수들은 박자를 맞추기 어렵다고 불평하고, 비평가들은 무용곡이 아니라 교향곡을 듣는 것 같다고 비판했다고 한다. 그때까지 이렇게 스케일이 크고 음악적 효과가 큰, 그리하여 발레 못지않게 청중을 압도하는 발레 음악을 들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오데트 공주가 죽는 마지막 장면의 음악은 청순가련한 백조의 죽음을 아름답고 장렬한 사랑의 비극으로 승화시키는 효과를 낸다.

확실히 차이콥스키의 [백조의 호수]는 드라마틱하다. 처음에는 서정적으로 시작하지만 점점 감정을 고양시켜 결국에는 장렬한 클라이맥스로 치닫곤 한다. 전막에 걸쳐 여러 번 나오는 이른바 [정경]의 음악도 그렇고, 1막의 왈츠처럼, 춤추기 편한 3박자의 가벼운 춤곡도 그냥 가볍게 흘려보내지 않는다. 그렇게 차이콥스키는 가벼운 춤곡에서조차 드라마를 구사한다.

[블랙 스완]에는 [백조의 호수] 중에 나오는 여러 음악이 배경음악으로 쓰였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곡은 우리 귀에 익은 주제음악 즉, [정경]이다. 이 곡은 [백조의 호수] 전막에 걸쳐서 여러 번 등장하는데, 내용이나 등장인물에 따라 변형된 형태로 나타난다.

성인이 된 지그프리트 왕자는 자신의 성년식을 축하하기 위한 파티에서 왕비에게 화살을 선물로 받는다. 파티가 끝날 무렵, 노을 진 저녁 하늘 위로 백조가 날아간다. 그것을 바라보며 우두커니 서 있는 왕자를 보고 친구가 백조 사냥을 가자고 한다. 왕자는 선물 받은 화살을 가지고 친구와 함께 숲으로 간다.

극이 1막에서 2막으로 넘어가는 사이에 [정경]이 연주된다. 먼저 하프가 미끄러지듯 전주를 하면 현악기의 트레몰로 반주를 타고 오보에가 아름다운 ‘백조의 주제’를 연주한다. 이 곡의 도입부는 환상적이고 서정적이다. 하지만 후반부에 가면 이 멜로디가 아주 강렬하고 극적인 분위기로 바뀐다. 백조를 쫓아 호수로 사냥을 떠나는 왕자를 암시하는 웅장하고 힘찬 선율과, 악마를 암시하는 셋잇단음표가 출현하기도 한다. 앞으로 전개될 백조의 사랑이 그렇게 순탄하지 않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 같다.

니나가 백조를 연기할 때, 음악은 환상적이고 서정적으로 흘러간다. 여기서 오보에가 연주하는 백조의 주제는 사춘기 소녀가 가슴 속에 품고 있는 동화 속 공주에 대한 로망, 슬퍼서 더욱 아름다운 사랑에 대한 선망 같은 것이다.

백조를 찾아 헤매던 왕자는 드디어 백조 한 마리를 발견하고 활을 겨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백조가 아름다운 공주로 변한다. 바로 오데트 공주이다. 공주는 왕자에게 애원한다.

“제발 쏘지 말아 주세요. 저는 백조가 아니라 원래는 공주랍니다. 다른 백조들은 저의 시녀들이에요. 마법사 로트발트의 마법에 걸려 낮에는 백조가 되었다가 해가 지면 다시 사람으로 돌아오지요.”

오데트 공주의 마법을 풀 방법은 단 한 가지. 한 남자의 진실한 사랑이다. 공주의 이야기를 듣고 모든 것을 알게 된 왕자는 그녀에게 사랑을 맹세한다. 백조들은 왕자가 공주의 이야기를 들어준 것을 기뻐하며 자기들의 마법이 풀릴 것이라는 희망을 가진다.

여기서 가장 주목할만한 장면은 오데트 공주와 지그프리트 왕자의 이인무이다. 이 장면의 음악은 달콤한 로맨티시즘의 극치를 보여준다. 영화에서는 니나와 왕자 역의 발레리노가 바이올린 독주와 관현악 반주에 맞추어 이인무를 연습하는 장면에서 나온다.목관악기의 화음이 배경으로 흐르는 신비로운 분위기 속에서 하프 혼자 화려하게 자유로운 멜로디를 길게 연주한다. 이렇게 환상적인 하프 전주가 끝나고 나면 독주 바이올린이 달콤하고 낭만적인 멜로디를 연주한다. 공주와 왕자의 애틋한 사랑이 애절한 바이올린 소리에 녹아있는 장면이다.

장면은 바뀌어 궁전의 무도회장. 왕자가 오데트 공주를 기다리고 있는데, 로트발트가 오데트를 닮은 자기 딸 오딜을 데리고 나타난다. 오딜은 백조가 아닌 흑조라는 것 빼고는 오데트와 완전히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그래서 왕자는 그녀가 오데트라고 생각한다. 왕자는 악마가 데려온 흑조 오딜을 오데트로 잘못 알고 그녀와 함께 춤을 춘다. 중간에 왕자를 보러 온 오데트의 모습이 창문에 비치지만 왕자는 로트발트의 방해로 이것을 보지 못한다. 춤을 추고 난 왕자는 왕비에게 오딜과 결혼하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오딜의 손에 입을 맞추려 하는데, 바로 그 순간 무대가 갑자기 깜깜해지고, 본색을 드러낸 로트발트와 오딜이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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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조의 주제 [정경]은 [백조의 호수] 전막에 걸쳐 여러 번 연주되는데, 내용이나 등장인물에 따라 다르게 변주되며 극적인 효과를 이끌어낸다. <제공: 네이버 영화>


바로 이 장면에서도 백조의 주제 [정경]이 나온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다른 형태다. 템포가 빨라지고 음악도 거칠어진다. 지고지순한 사랑을 상징하던 아련한 오보에 소리는 사라지고, 관현악 전체가 악마같이 거칠고 빠르게 질주한다. 이렇게 음악을 통해 백조와 흑조의 모습을 대비시킨다.

뒤늦게 왕자는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호숫가로 오데트와 백조의 무리를 찾으러 간다. 왕자의 배신으로 인간이 될 수 없게 된 오데트 공주와 왕자는 밀려드는 큰 파도에 빠져 죽는다. 바로 이 장면에서 ‘백조의 주제’가 비장하고 강렬하게 울려 퍼진다. 영화에서 죽어가는 니나가 혼신의 힘을 다해 마지막 춤을 추는 장면에 나오는 바로 그 음악이다.

[백조의 호수] 피날레에 나오는 백조의 주제는 단조에서 장조로 바뀐 다음 끝난다. 왜 단조이던 음악이 장조로 바뀌었을까. 하프의 하강하는 대위선율과, 현악기의 트레몰로로 연주되는 B장조의 으뜸화음. 그 단호한 으뜸화음으로의 종결 의지는 비극적 죽음을 천상의 영원한 사랑으로 승화시키려는 작곡가의 의도를 보여준다. [블랙 스완]의 니나도 죽는다. 하지만 그녀는 예술가로서 간절한 열망을 이루었다. 인생에 단 한 번, 무대 위에서 완벽한 기량을 보여준 것이다. 그런 다음 죽는다. 더없이 슬프지만 만족하며. 그런 의미에서 [백조의 호수]와 [블랙 스완]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장조의 으뜸화음은 지고의 사랑과 지고의 예술에 대한 장렬한 헤피엔딩인 셈이다.


관련링크: 통합검색 결과 보기14547454945607.jpg    차이콥스키 백조의 호수 음반14547454945607.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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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회숙 | 음악 칼럼니스트
이화여대 음대 및 서울대 음대 대학원 졸업
현재 서울시립교향악단 월간지 SPO 편집위원이며, 서울시향 ‘콘서트 미리 공부하기’를 비롯한 여러 클래식 강좌의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평화방송 FM 음악공감 ‘진회숙의 일요 스페셜’의 진행자이다. 저서로 <모나리자. 모차르트를 만나다> 외 여러 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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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3.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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