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속클래식 노잉 - 인간의 운명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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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21회 작성일 16-02-06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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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의사 뒤퐁 씨가 환자로부터 긴급 호출을 받아 황급히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바로 그때 배관공 뒤브아 씨는 옆집 지붕을 수리하려고 하던 참이었다. 의사 뒤퐁 씨가 그 집 앞을 지나가는 순간, 배관공 뒤브아 씨가 실수로 들고 있던 망치를 떨어뜨렸다. 떨어지는 망치의 궤적이 마침 그 밑을 지나던 뒤퐁 씨의 동선(動線)과 한 지점에서 일치했다. 결국 의사 뒤퐁 씨는 머리가 박살이 나서 죽었다.

지난 봄, 프랑스의 분자생물학자 자크 모노가 쓴 [우연과 필연]이라는 책에서 읽은 이야기이다. 자크 모노는 이른바 ‘절대적인 우연’의 개념을 설명하면서 어느 날 아침 우연히 일어난 의사 뒤퐁 씨의 비극을 예로 들었다. 이 사건을 두고 사람들은 뭐라고 말할까? 당연한 인과응보라고 할까? 만약 뒤퐁 씨가 뒤브아 씨에게 평소에 나쁜 일을 했다면 이런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전혀 모르는 사이였다. 뒤퐁 씨가 환자의 호출을 받고 그날 아침 그 시간에 그 밑을 지나간 것과, 뒤브아 씨가 그날 아침 그 시간에 옆집 지붕을 수리하다 실수로 망치를 떨어뜨리게 된 것 사이에는 아무런 인과관계도 없다. 서로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행동이 우연히 한 장소에서 서로 겹치면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따라서 ‘우연의 일치’라는 말밖에는 달리 이 비극을 설명할 길이 없다.



음악리스트
No.아티스트 & 연주 
1홀스트 [행성들] 중 [목성]음악 재생

1분 미리듣기 / 음원제공: 소니뮤직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우연이 빚어낸 수없이 많은 사건, 사고들을 접한다. 우연히 횡단보도를 건너다 하필이면 바로 그 시간에 정지신호를 무시하고 달리는 음주운전 차량에 사고를 당하기도 하고, 출장 중 우연히 묵은 호텔에 하필이면 그날 화재가 발생해 목숨을 잃기도 한다. 세상을 살면서 이런 비극적인 우연의 일치는 너무나 많이 일어난다. 그렇게 우리 인간은 예측 불가능한 수많은 우연 속에 대책 없이 방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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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운명은 이미 결정되어있는 것일까? 숫자로 예견된 종말을 다룬 영화 노잉 <제공: 네이버 영화> 영화 정보 보러가기


[노잉]의 주인공 존 역시 이런 비극적 우연의 피해자이다. MIT 교수이자 천체물리학자인 그는 호텔 화재 사고로 아내를 잃었다. 그래서 지금은 아들 케일럽을 혼자 키우며 살고 있다. 어느 날, 그는 강의 시간에 학생들에게 우주 현상을 설명하는 두 가지 상반된 시각에 대해 얘기한다. 우주 현상에는 어떤 목적이 있으며, 그것은 이미 결정되고 있고, 예정되어 있다는 결정론과, 모든 건 단순히 우연의 일치일 뿐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복잡하고 피할 수 없는 화학적 사건과 생물적 변화의 결과일 뿐이지 거창한 의미도 없고 의도도 없다는 무작위론이다. 이 중에서 존은 무작위론을 신봉한다. 사고로 아내를 잃은 후 무작위론에 대한 그의 신념이 더욱 굳어졌다. 그가 목사인 아버지와 사이가 안 좋은 것은 이런 신념의 차이 때문이다.

이야기는 현재에서 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 시점에서 시작된다. 1959년, 매사추세츠 렉싱턴에 있는 윌리엄 도스 초등학교는 개교기념일을 맞아 학생들에게 미래의 모습을 그리라고 한다. 그것을 타임캡슐에 담아 묻은 다음 50년 후에 후배들에게 열어보도록 하려는 것이다. 모두들 신이 나서 미래의 모습을 상상하며 그림을 그리는데, 유독 루신다라는 소녀만 그림 대신 암호 같은 숫자들을 빽빽하게 적어 넣는다.

그로부터 50년 뒤인 2009년, 개교기념일을 맞아 50년 전에 묻은 타임캡슐을 개봉하는 행사가 열린다. 존의 아들 캐일럽은 루신다가 적어놓은 숫자들로 가득한 종이를 받는다. 캐일럽의 아버지 존은 종이에 쓰인 숫자들이 지난 50년 동안 일어났던 중요한 사건, 사고들의 발생 날짜와 사망자 수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숫자를 모두 확인하면서 그 속에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건이 세 개나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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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작위론을 신봉하는 천체물리학자 존은 50년 전 숫자로 미래를 예언한 종이를 보고 충격을 받는다.
<제공: 네이버 영화>


루신다가 종이에 직은 숫자를 통해 81명이 죽을 것이라고 예언한 바로 그날, 존은 케일럽을 데리러 학교로 향한다. 아직 81명이 죽은 사건이 일어나지 않은 사실에 안도하며 교통 체증으로 막혀 있는 도로에 서 있는데, 바로 그때 현재의 위치 정보를 알려주는 숫자 판이 눈에 들어온다. 어디서 많이 본 숫자라고 생각한 존은 서둘러 루신다의 종이를 찾아 숫자를 대조해 본다. 그리고 그 순간, 루신다가 81명이 죽는 사고가 일어난다고 예언한 장소가 바로 자기가 있는 곳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놀라서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존은 바로 눈앞에서 비행기가 추락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루신다의 예언이 맞는다는 사실을 확인한 존은 루신다의 옛 선생님을 찾아가 그녀가 이미 죽었으며, 그녀에게 다이애나라는 딸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그 후 존은 다이애나를 만나 루신다의 종이에 대해 얘기하지만 다이애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예민한 반응을 보이며 그를 강하게 거부한다. 다이애나로부터 도움을 거절당한 존은 루신다의 종이가 예언한 지하철 충돌 사고를 막으려고 노력하지만 실패한다.

그 후 다이애나는 존을 찾아와 어머니가 자기가 죽는 날을 예언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존은 종이에 마지막으로 쓰인 날짜가 다이애나가 죽는 날이라는 것과, 그날 33명이 죽을 것이라는 예언을 확인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사고가 일어날 장소에 대한 정보는 나와 있지 않았는데, 존과 다이애나는 루신다의 옛집을 조사하다 마지막 숫자 33이 사실은 EE이며, 이것은 Everyone Else 즉, 인류 전체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말하자면 인류 전체의 멸망, 지구의 종말이 임박했다는 것이다. 한편 그 사이에 존의 아들 케일럽과 다이애나의 딸 애비는 정체불명의 이방인과 대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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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은 루신다의 종이가 예언한 사고들을 막으려고 노력하지만 실패한다. <제공: 네이버 영화>


존과 다이애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임박한 재앙을 어떻게든 피해보려고 한다. 루신다의 숫자를 면밀히 검토한 존은 그녀의 옛집이 재앙을 피할 수 있는 곳이라고 하지만 다이애나는 다가오는 태양의 열기를 피해 동굴로 들어가자고 한다. 존이 자기 말을 듣지 앉자 다이애나는 애비와 캐일럽을 데리고 동굴을 향해 달린다. 하지만 그녀가 잠시 차에서 내린 사이 이방인들이 캐일럽과 애비를 태우고 가버리고, 다른 사람의 차로 이를 추격하던 다이애나는 대형 트럭과 충돌하면서 사망한다. 정확히 어머니 루신다가 예언한 그 날짜에 죽은 것이다.

한편 존은 루신다의 옛집에서 케일럽과 애비가 네 명의 이방인과 함께 있는 것을 발견한다. 하늘에서 거대한 우주선이 내려오고 이방인들이 두 아이를 데려가려 한다. 선택된 자들만 이방인과 함께 지구를 떠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존은 기꺼이 케일럽을 떠나보낸다. 그런 다음 부모 집을 찾아가 목사인 아버지와 화해한다. 그는 “이게 끝이 아니란다.”라는 아버지의 말에 “알아요.”라고 대답한다. 무작위론자가 결정론자가 되어서 돌아온 것이다. 존과 가족들은 서로 부둥켜안은 채 의연하게 지구 종말을 맞는다. 한편 이 시간, 이방인들은 케일럽과 애비를 우주의 알 수 없는 어떤 곳에 내려놓고 떠난다. 두 아이는 바람이 일렁이는 풀밭을 달려 환상처럼 서 있는 커다란 나무를 향해 달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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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신다의 종이가 최종적으로 예언한 것은 인류의 멸망이었다. <제공: 네이버 영화>


[노잉]에는 두 곡의 클래식 음악이 나온다. 홀스트의 관현악 모음곡 [행성] 중 [목성]과 베토벤의 교향곡 7번의 2악장이다. 이 중에서 영화의 내용과 직접적으로 부합되는 것은 물론 홀스트의 [목성]이다. 1959년, 윌리엄 도스 초등학교에서 개교기념일 행사의 일환으로 50년 후에 개봉될 타임캡슐을 묻을 때, 학생들로 구성된 관악 밴드가 연주하는 곡이다.

[행성]을 작곡한 홀스트는 본 윌리엄스와 더불어 20세기 영국을 대표하는 작곡가이다. [행성]은 모두 7곡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하늘에 떠 있는 일곱 개의 행성 즉, 화성, 금성, 수성,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의 이름을 각 곡의 제목으로 삼았다. 영화에 나오는 [목성]은 이 중 네 번 째 곡이다. 홀스트가 하늘에 떠 있는 별들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13년 무렵이다. 당시 그는 런던에서 출판된 알랜 레오의 [천궁도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읽었는데, 여기에 매료되어 점성술에 흥미를 갖게 되었으며, 일생 동안 친구들 앞에서 아마추어 점성술사 노릇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점성술은 믿음이지 과학이 아니다. 점성술은 별들이 하늘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가 인간의 활동에 영향을 미친다는 일종의 신념 체계인데, 그 기원은 멀리 고대의 피타고라스 학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학문 공동체라기보다 일종의 신앙 공동체로 여기에서는 온갖 믿음과 미신적인 생활 습관과 과학적 연구가 학문이라는 이름 속에 혼재되어 있었다.

이 학파의 창시자인 피타고라스는 우주에 음악이 가득 차 있다고 믿었다. 그는 현악기에 나타나는 줄 길이의 비가 태양계를 구성하고 있는 별들 사이의 거리의 비와 비슷하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음악에서의 비례 법칙을 조화의 근본 원리로 우주에 적용한 ‘천구의 음악’ 이론이 나왔다. 별들이 공전할 때, 이 거대한 우주의 악기는 별들이 위치한 거리의 비율에 따라 각기 다른 소리를 낸다. 이것이 바로 ‘천구의 음악’이다. 별들이 움직이는 속도는 중심으로부터의 거리에 따라 달라진다.중심에서 가까운 별은 느리게 움직이기 때문에 낮은 소리를 내고, 중심에서 먼 별은 빠르게 움직이기 때문에 높은 소리를 낸다. 중심에서 화성과 지구의 거리 비례는 약 2 대 3이 되는데, 따라서 두 별은 서로 5도 관계에 있는 음을 연주한다. 한편 그 자체가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우주 전체에서는 옥타브 소리가 난다고 주장했다. 인간의 귀에는 들리지 않지만 하늘에서는 거대한 우주의 하모니가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우주에 대한 피타고라스적인 믿음이 없었다면 점성술은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우주가 어떤 목적, 어떤 의도에 의해 만들어진 정교하고 완벽한 하모니가 아니라면, 그저 우연적인 어떤 요인에 의해 아무 의도도 없이 그렇게 생겨먹은 것이라면, 거기에서 어떻게 인간사의 모든 문제를 푸는 열쇠를 찾을 수 있겠는가. 별들에게 일정한 성격을 부여하는 일 또한 불가능했을 것이다.

[행성]의 작곡가 홀스트는 점성술사들처럼 별들에게 인격을 부여했다. 화성은 전쟁의 신, 금성은 평화의 신, 수성은 날개 달린 메신저, 목성은 쾌락의 신, 토성은 노년의 신, 천왕성은 마술사, 해왕성은 신비의 신이다. 이렇게 자기 나름대로 성격을 부여한 다음 그에 어울리는 곡을 작곡했다.

영화에 나오는 [목성]은 [쾌락의 신]이라는 부제에 어울리게 일곱 곡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구성의 변화가 다채로운 것이 특징이다. 초반에 나오는 다섯 마디의 도입부는 방송국 뉴스 프로그램의 시그널 음악으로도 널리 애용되고 있다. 곡은 3부 형식 안에서 장쾌하고 호방한 네 개의 주제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6대의 혼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데, 먼저 현악기 반주에 맞추어 혼이 환희를 예고하는 듯한 제1주제를 늠름하게 연주한다. 이것이 빠른 경과구를 거치고 나면 더욱 당당한 제2주제가 혼을 중심으로 현악기와 함께 씩씩하게 제시된다. 2부에서는 3박자로 바뀌어 역시 혼이 친근한 느낌을 주는 민요풍의 선율을 연주한다. 제4주제는 장대한 축전에서 울려 퍼지는 찬가를 연상시킨다. 홀스트 곡에서는 보기 드물게 정연한 악식을 가진 가곡풍의 선율로 후에 작곡가 자신에 의해 가곡으로 만들어졌다. 3부에서는 1부의 처음부터 제2주제가 나오는 부분까지 재현된다. 그다음에 금관이 연주하는 기상곡 풍의 팡파르를 끝으로 곡을 마친다.

[목성]은 우주의 시간으로 환원되는 ‘천구의 음악’이 아니라 20세기라는 유한한 시간적 배경 속에서 탄생한 ‘지상(地上)의 음악’이다. 그러나 별들을 자발성과 합목적성을 지닌 개체로 본다는 점에서 개념적으로 천구의 음악과 통한다. 별들이 아무 의미 없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필연적인 목적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다. 타임캡슐을 묻는 현장에서 연주되는 홀스트의 [목성]은 이런 신념의 음향적 현신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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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섭리, 역사의 필연, 인간의 존엄과 같은 말들은 어쩌면 자기 존재에 필연성을 부여하려는 인간의 필사적인 노력이 만들어낸 자기암시용 주술인지도 모른다. <제공: 네이버 영화>


그러나 루신다의 숫자판에 결정되어 있는 지상의 삶은 너무 비극적이다. 존의 아내 엘리슨의 죽음도 루신다의 숫자판에 이미 예고되어 있었다. 이것이 애초에 ‘즐겁고 조화로운 존재’로 결정되어 있는 홀스트의 행성과 다른 점이다. 아내의 죽음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존은 자신의 삶을 졸지에 비극으로 몰아넣은 우연의 일치, 결과는 무지막지하지만 그 자체는 아무런 감정이 없는 무색무취한 삶의 무작위성에 전율한다. 그때 듣는 음악이 베토벤의 교향곡 7번의 2악장이다.

영화에서 이 곡은 죽음의 행진곡과 같다. 마지막에 지구 종말이 다가온 것을 알고 거리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는 장면에서도 이 곡이 나온다. 모두들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지만 목적지가 어딘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니, 딱히 목적지가 없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이렇게 정처 없이 헤매는 인간의 모습과는 달리 음악은 일정한 지향점을 향해 서서히 나아간다. 미래에 다가올 불꽃같은 환희의 시간을 고대하며 죽음 같은 고행을 감내하는 순례자의 발걸음처럼 무겁지만 뚜렷한 상행 의지를 가지고 움직인다. 여기서 베토벤이 사용한 수사법은 점강법이다.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의 점진적인 고양. 그것은 지상에서 천상으로, 유한한 것에서 영원한 것으로의 이동을 의미한다. 루신다의 숫자판을 보고 무작위론자에서 결정론자로 바뀐 존은 이제 천상에서의 영원한 삶을 믿는다. 이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베토벤의 음악에 구현된 점진적인 고양은 인간존재에 필연성을 부여하는 결정론의 선물이다.

우리는 누구나 자기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 한다.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 같이 거창한 것은 아니더라도, 자기가 어떤 필연적인 이유에 의해 이 세상에 태어나고, 존재한다고 믿고 싶어 한다. 신의 섭리, 역사의 필연, 인간의 존엄과 같은 말들은 어쩌면 자기 존재에 필연성을 부여하려는 인간의 필사적인 노력이 만들어낸 자기암시용 주술인지도 모른다.

[노잉]이라는 영화도 그 필사적인 몸부림의 하나가 아닐까. 특히 지상의 모든 것이 전멸한 후, 우주의 어느 곳에서 새로운 행성이 시작된다는 것을 암시한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야말로 무작위적인 우연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어떤 곳에 우연의 법칙이 작동하지 않는 이상적인 세계가 있다고 믿고 싶어 하는 플라톤적 열망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관련링크: 통합검색 결과 보기14547455097244.jpg    홀스트 [행성] 중 [목성] 음반14547455097244.jpg


영화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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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잉 (2009)
    감독

    알렉스 프로야스
    출연

    니콜라스 케이지, 로즈 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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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회숙 | 음악 칼럼니스트
이화여대 음대 및 서울대 음대 대학원 졸업
현재 서울시립교향악단 월간지 SPO 편집위원이며, 서울시향 ‘콘서트 미리 공부하기’를 비롯한 여러 클래식 강좌의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평화방송 FM 음악공감 ‘진회숙의 일요 스페셜’의 진행자이다. 저서로 <모나리자. 모차르트를 만나다> 외 여러 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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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원제공

소니뮤직

http://www.sonymusic.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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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니뮤직 트위터 (http://www.twitter.com/SonyClassicalKr)


발행2013.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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