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속클래식 리베라메 - 불길 속에서 나를 구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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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96회 작성일 16-02-06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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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12월 25일, 충무로에 있는 대연각 호텔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크리스마스 날, 평소보다 늦은 아침을 먹고 있던 우리는 TV로 생중계되는 화재 현장을 보면서 충격을 금치 못했다. 21층이나 되는 거대한 빌딩이 온통 검은 연기에 휩싸여 있었다. 화질이 좋지 않은 흑백 TV로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현장의 참혹한 상황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화재 그 자체보다 처참했던 것은 불길을 피해 필사적으로 탈출하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뜨거운 열기를 견디지 못해 죽음을 각오하고 뛰어내리는 사람, 물 적신 담요를 몸에 두르고 손을 흔들며 구해 달라고 외치는 사람, 휘청거리며 고가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는 사람, 침대 매트와 함께 몸을 던지는 사람 등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크리스마스 날 아침을 지옥으로 바꾸어버린 이 화재로 무려 163명이나 목숨을 잃었다.



음악리스트
No.아티스트 & 연주 
1가브리엘 포레, [레퀴엠] 중 [리베라 메]음악 재생

1분 미리듣기 / 음원제공: 소니뮤직




그로부터 몇 년 후, 고층 빌딩의 화재를 소재로 한 [타워링]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그런데 이 영화의 모티브가 된 것이 바로 대연각 호텔 화재였다고 한다. 지금은 너무 오래되어서 자세한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불이 났는데도 다른 층에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사람들이 파티를 즐기던 장면이 생각난다. 대연각은 21층이지만 [타워링]에 나오는 빌딩은 무려 140층이나 된다. 이렇게 높은 빌딩에서 화재가 발생하면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일반인뿐만 아니라 불을 끄려고 현장에 투입된 소방관들도 마찬가지다. 9.11 테러로 무너진 세계무역센터에서 얼마나 많은 소방관들이 목숨을 잃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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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을 무릅쓰고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소방관들의 투혼을 그린 영화 [리베라 메] <제공: 네이버 영화> 영화 정보 보러가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극한 상황에서 자기를 버리고 남을 구하는 희생정신을 발휘한다. 라틴어로 ‘나를 구하소서’라는 뜻을 갖고 있는 [리베라 메]는 위험을 무릅쓰고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소방관들의 투혼을 그린 영화이다. 불길 속에서 사람들은 ‘리베라 메’를 외치고, 소방관들은 목숨을 걸고 이들을 구한다. 하지만 ‘리베라 메’를 외치는 사람들이 비단 이들 뿐일까. 우리 사회 어느 구석, 아무도 관심 두지 않는 어떤 곳에서, 제발 구해 달라고, 제발 살려 달라고 외치는 또 다른 사람들이 있다. 영화의 주인공 희수도 그런 사람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무지막지한 학대로 고통받았던 희수. 아무리 도와 달라고 외쳐도, 아무도 그 말에 귀 기울여주지 않았다. 그래서 결심했다. 스스로 구원자가 되기로. 여기서 ‘불’은 희수가 보내는 구원의 메시지이다.

희수는 15살 때 방화범으로 교도소에 들어가 12년을 복역한 후 가석방된다. 12년 만에 바깥세상에 나온 희수. 겉으로는 개과천선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는 여전히 방화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한 상태다. 그는 자기가 교도소 문을 나서는 순간, 보일러실에서 불이 나도록 사전 조치를 해 놓는다. 계획대로 보일러실이 폭발해 큰 화재가 발생하고, 이 불로 교도관이 사망한다.

어려서 아버지의 학대에 시달렸던 희수는 7살 때 자기 앞에서 누나가 불에 타 죽는 장면을 목격한다. 이때의 충격으로 정신과 치료까지 받게 되는데, 하지만 그 상처를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그 후로 불만 보면 쾌감을 느끼는 이상 성격의 소유자가 된다. 출소한 희수는 한 병원의 어린이 정신과 병동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시작한다.

어느 날, 시내에 있는 한 약국에서 원인 모를 화재가 발생한다. 이 화재 현장에 소방 반장의 동생인 인수와 그의 작업 파트너인 상우가 투입되는데, 화재 진압을 하는 과정에서 인수는 상우를 위험에 빠뜨리지 않기 위해 자기가 대신 죽음을 맞는다. 그 때문에 상우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한편 정신 병동의 아이들을 돌보며 새로운 삶을 시작한 희수는 은밀하게 연쇄 방화를 계획한다. 자기가 돌보는 아이들 중에 부모로부터 학대를 받은 아이들을 골라내 그 집에 불을 지르는 것이다. 어린 시절 학대를 경험한 희수는 어린아이를 학대하는 사람들에 대한 증오심을 가지고 있다. 그는 아이를 학대한 사람을 죽이는 것이야말로 아이들에게 최고의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하나씩 학대의 가해자가 불속에서 죽도록 한다. 그렇게 아파트에도 불을 내고, 주유소에도 불을 낸다.

상우는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화재가 전기 누전 같은 사고가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고의로 이루어진 방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조사관인 민성과 함께 조사를 시작하는데, 그 과정에서 희수가 방화범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후 경찰은 희수를 담당했던 정신과 의사의 제보를 받는다. 의사는 경찰에게 화재가 난 집과, 학대의 후유증으로 정신 병동에 입원해 있는 아이들의 집이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병원에 있는 크리스마스 장식 구슬 안에 아이들의 이름이 적혀 있는데, 거기에 이름이 적힌 아이들의 집에 차례로 불이 났다는 것이다.

희수는 수사망이 점점 좁혀오자 상우의 후배 소방관인 현태와 정신과 의사를 죽인다. 그리고 나중에 민성을 인질로 잡고 상우와 결투를 벌인다. 그 과정에서 상우는 희수에 의해 목이 졸려 거의 숨이 끊어질 지경에 이르는데, 바로 이때 민성이 나서서 그만하라고 소리친다. 그 순간, 희수는 어린 시절, 자기 눈앞에서 불에 타 죽어가던 누나의 모습을 떠올린다. 누나 생각에 마음이 울컥해진 희수는 상우를 놓아주고 스스로 자기 몸에 불을 질러 목숨을 끊는다.

상우의 목을 조르면서 희수는 “내가 구원자야”라고 말한다. 그는 어린 시절 자기처럼 수도 없이 “리베라 메”를 외쳤던 어린아이들을 위해 스스로 구원자를 자처하고 나섰다. 조금치의 망설임도, 죄책감도 없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한테 구원을 요청했는지 알아요? 도와달라고. 살려 달라고. 모두 다 죽어야 해요.”

그래서 불을 지른다. 불을 지르고 돌아온 날이면, 희수는 음악을 듣는다. 포레의 [레퀴엠 Requiem] 중에 나오는 [리베라 메 Libera me]와 [진노의 날 Dies irae]이다.

주여. 하늘과 땅이 진동하는 무서운 그날에
영원한 죽음에서 나를 구해 주옵소서.
불로써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그때에
나는 두려움에 떨고 전율하며
다가올 진노의 심판 날을 기다리나이다.

[레퀴엠]은 가톨릭에서 죽은 자를 위해 치르는 미사를 말한다. ‘레퀴엠’은 라틴어로 ‘안식’을 뜻하는데, “주여. 저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라는 가사가 “레퀴엠‘이라는 단어로 시작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교회의 절기와 미사의 종류에 따라 일정한 텍스트를 일정한 순서에 따라 치른다. 죽은 자를 위한 레퀴엠 역시 일정한 라틴어 텍스트를 가지고 정해진 순서에 따라 치러지는데, 모차르트, 베르디, 베를리오즈, 케루비니, 포레 등 많은 작곡가들이 여기에 곡을 붙였다.

그런데 죽은 자를 위로하기 위해 만든 레퀴엠이 항상 위로가 되었던 것은 아니다. [리베라 메]와 [진노의 날]은 오히려 죽음과 최후의 심판에 대한 무시무시한 공포감을 심어준다. 여기서 진노의 날이란 바로 최후 심판의 날을 의미한다. 이날 전지전능한 신이 생전의 행적이 적힌 책자를 보고 인간을 심판한다. 착한 사람은 천당에 가지만, 나쁜 사람은 지옥으로 떨어진다. [리베라 메]와 [진노의 날]은 이 날의 광경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특히 베르디의 레퀴엠은 모골이 송연할 정도의 공포감을 느끼게 한다. 사방에서 나팔 소리가 들리는데, 죄인들에게는 그야말로 사면초가(四面楚歌)와 같은 것이다. 여기서 베르디가 부각시키려고 했던 것은 최후의 심판에 대한 공포와 그에 대한 인간의 무력함이 아닌가 싶다.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이 점은 모차르트의 [레퀴엠]도 마찬가지다.

최후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 그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원초적인 두려움일 것이다. 그런데 작곡가 중에서 이 장면을 아주 ‘순하게’ 그린 사람이 있다. 바로 프랑스의 작곡가 가브리엘 포레이다. 포레의 [레퀴엠]을 듣고 있으면, 최후의 심판이 그렇게 무서운 것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곡은 죽은 자나 산 자 모두에게 평화와 안식을 가져다주는 진정한 의미의 진혼곡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 작품을 가리켜 죽음의 자장가라고 했다. 여기에서 죽음은 비로소 그 어두운 장막을 벗고 포근하고 부드러운 날개로 인간의 영혼을 감싼다.

“나는 죽음을 행복한 구원으로 보고 있다. 나에게 죽음이란 고통스러운 경험이 아니라 피안의 세계에 존재하는 행복한 영감이다.”

포레는 이렇게 낙천적인 내세관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레퀴엠]은 이런 낙천적인 내세관을 그대로 음악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그래서 포레의 [레퀴엠]은 전곡이 모두 아름답고 평화롭다. 천상의 노래가 있다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천사의 합창처럼 순수하고 편안하고 아름다운 멜로디, 멀리 하늘로부터 들려와 지상의 우리를 인도하는 곡. 죽음이 어둡고 두려운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이 언제까지나 편히 쉴 수 있는 영원한 안식처라는 것. 포레의 [레퀴엠]은 우리에게 이런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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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천적인 내세관을 가지고 최후의 심판을 그려낸 작곡가 포레 <출처: topic/corbis>


포레가 죽음을 편안한 것으로 보았다는 사실은 [리베라 메]와 [진노의 날]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베르디의 [레퀴엠]에서는 이 대목이 확대되어 있지만 포레는 [진노의 날]을 [리베라 메]에 살짝 편입시켜서 한 곡처럼 취급하고 있다. 먼저 바리톤 독창이 [리베라 메]를 부르면, 이어서 금관악기의 짧은 팡파르를 앞세워 [진노의 날]이 등장한다. 이 부분은 합창으로 부르는데, 다른 작곡가의 '진노의 날'처럼 듣는 사람을 그렇게 두려움에 떨게 하지 않는다. 노래에 앞서 등장하는 금관악기의 팡파르가 오히려 심판의 날을 기대하고 자축하는 듯한 분위기마저 풍긴다.

왜 희수는 무시무시한 베르디나 모차르트가 아닌 포레를 선택했을까. 그는 스스로가 신과 같이 전지전능한 존재가 되어 약자를 구하고, 악한을 벌한다. 악한에게는 최후의 심판이 지옥으로 떨어지는 날이지만, 학대받는 아이들에게는 악마의 손길로부터 구원받는 해방의 날이자 축복의 날이다. 그러기에 그렇게 무시무시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그날은 정의가 승리하는 날. 모두가 소리 높여 악의 멸망을 축하해야 하는 날이다.

희수에게 타오르는 불길은 악한 자에 대한 응징을 상징한다. 그래서 그는 불을 볼 때마다 쾌감을 느낀다. 주유소가 거대한 불길을 쏟아내며 연쇄 폭발을 일으킬 때도 그는 장렬한 쾌감을 느낀다. 바로 이 장면에서 포레의 [리베라 메]와 [진노의 날]이 나온다. 불꽃과 폭발이 난무하는 장면의 배경음악치고는 너무 엄숙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희수가 행하는 최후의 심판이라는 제의적 의미가 더욱 부각된다. 나중에 경찰이 의사의 제보를 받고 희수의 거처로 들이닥쳤을 때도 이 곡이 흘러나온다.

“나는 두려움에 떨고 전율하며 다가올 진노의 심판 날을 기다리나이다.”

희수는 없고, 턴테이블의 음반만 돌아가고 있다. 그 순간 그는 어딘가에서 또 다른 최후의 심판을 주재하고 있을 것이다.


관련링크: 통합검색 결과 보기14547455152708.jpg    포레 [레퀴엠] 음반14547455152708.jpg


영화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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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회숙 | 음악 칼럼니스트
이화여대 음대 및 서울대 음대 대학원 졸업
현재 서울시립교향악단 월간지 SPO 편집위원이며, 서울시향 ‘콘서트 미리 공부하기’를 비롯한 여러 클래식 강좌의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평화방송 FM 음악공감 ‘진회숙의 일요 스페셜’의 진행자이다. 저서로 <모나리자. 모차르트를 만나다> 외 여러 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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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니뮤직

http://www.sonymusic.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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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니뮤직 트위터 (http://www.twitter.com/SonyClassicalKr)


발행2013.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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