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속클래식 마농의 샘 - 거대한 운명 앞에 선 나약한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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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18회 작성일 16-02-06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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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드라마는 출생의 비밀을 빼면 이야기가 안 되는 것 같다. 서로 사랑하는 두 남녀가 어느 날 알고 보니 아버지가 같은 남매였고, 한 여자를 동시에 사랑하는 두 남자가 사실은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형제였으며, 콧대 높은 회장 딸 밑에서 온갖 구박을 당하던 말단사원이 산부인과에서 뒤바뀐 회장의 친딸이었다는 등 출생의 비밀을 주제로 한 베리에이션이 그야말로 무궁무진하다.

그동안 서로의 존재를 모르고 살아가던 남매나 형제, 부모자식이 연인이나 라이벌, 원수로 만나게 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어쩌다 우연히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만 문제는 우리나라 드라마 속에서는 이런 우연의 일치가 너무나 빈번하게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딱히 줄거리가 재미있는 것도 아니다. 출생의 비밀을 둘러싸고 인간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지만 의외로 이야기 전개의 공식은 단순하다. 결말도 뻔하다. 나중에 출생의 비밀이 밝혀져 어렸을 때 헤어진 착한 딸은 부자 아버지를 만나 행복하게 살고, 반대로 그동안 온갖 악행을 일삼아온 못된 가짜 딸은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는다. 그렇게 제목만 다를 뿐 내용은 거의 비슷한 이야기가 끊임없이 반복 재생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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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리스트
No.아티스트 & 연주 
1베르디 [운명의 힘] 서곡 / 산타 체칠리아 오케스트라,몰리나리-프라델리 / Orchestra dell'Accademia Nazionale di Santa Cecilia, Fran음악 재생

1분 미리듣기 / 음원제공 : 유니버설 뮤직 / 앨범 정보 보러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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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농의 샘 2편 포스터. 마농의 샘 1편과 2편은 프랑스에서 1년의 시차를 두고 제작되었다. <제공: 네이버 영화>영화 정보 보러가기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런 드라마를 본다. “어떻게 저런 일이 있을 수 있어? 완전히 막장 드라마야.”라고 ‘욕하면서’ 본다. 왜 그럴까. 사람마다 이유가 다르겠지만 내 경우는 등장인물들이 인과응보의 법칙에 따라 자기 행동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는 것을 보면서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때문이다. 막장 드라마일수록 인과응보의 법칙은 예외 없이 지켜진다. 나쁜 사람이 벌을 받지 않으면 그것은 막장 드라마가 아니다.

세상 살이의 이치를 얘기할 때마다 사람들은 인과응보의 법칙을 들먹인다. 하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이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온갖 악행을 일삼아 온 사람이 떵떵거리며 살다가 죽기도 하고, 평생 정직하게 살아온 사람이 오히려 그 정직함 때문에 고통 속에 죽기도 한다. 현실 속에서 정의가 실현되지 않기에 우리는 드라마 속에서라도 ‘뿌린 대로 거둔다’는 공식이 실현되는 것을 보고 싶어 한다. 끌로드 베리 감독의 [마농의 샘]은 이런 갈증을 채워주는 영화다. 이 영화는 나쁜 짓을 한 사람을 철저하게 응징함으로써 불공평한 세상에 대한 내면의 분노를 잠재운다.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방. 군 복무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온 위골랭은 카네이션을 재배해 큰 돈을 벌 계획을 세운다. 그는 유일한 혈육인 삼촌 빠뻬 수베랑을 찾아가 자신의 계획을 얘기하고, 조카를 자식처럼 생각하는 빠뻬는 그를 적극적으로 밀어주기로 한다. 그런데 카네이션을 재배하는 데에는 많은 양의 물이 필요하다. 두 사람은 이웃에 사는 노인의 땅에 샘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를 찾아가 땅을 팔라고 설득한다. 하지만 노인은 땅을 팔 생각이 없다고 하는데, 그 과정에서 서로 옥신각신하다가 빠뻬가 실수로 노인을 죽인다. 당황한 두 사람은 시체를 나무 밑으로 옮겨 놓고 현장을 떠난다. 노인이 죽은 후, 땅은 그의 누이 플로레트의 아들 쟝에게 상속된다. 꼽추로 태어나 지금까지 세무공무원으로 일하던 쟝은 시골에 땅을 상속받자 도시생활을 정리하고 아내와 어린 딸 마농을 데리고 시골로 내려온다. 위골렝과 빠뻬는 쟝에게 그의 땅에 샘이 있다는 사실을 숨기고, 몰래 물길을 시멘트로 막아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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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생활을 하던 쟝은 아내와 딸과 같이 시골에 내려와 새로운 생활을 꿈꾼다. <제공: 네이버 영화>


평화로운 전원생활을 꿈꾸며 시골로 내려온 쟝은 농작물을 재배하고 토끼를 키우며 농촌에 정착하기 위해 애쓴다. 하지만 농사를 지으면서 물이 부족해 어려움을 겪는다. 빠뻬와 위골랭이 샘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지만 하루빨리 쟝을 내쫓고 땅을 차지하고 싶은 두 사람은 겉으로는 착한 이웃 행세를 하면서 정작 샘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말을 하지 않는다. 계속되는 가뭄으로 고생하던 쟝은 우물을 파려고 다이너마이트로 암벽을 폭파시키다 그만 사고로 목숨을 잃고 만다.

쟝이 죽자 그의 아내는 빠뻬에게 땅을 팔고 도시로 떠난다. 하지만 어린 딸 마농은 그대로 이곳에 남아 염소를 키우며 살아간다. 땅을 차지한 위골랭과 빠뻬는 자기들이 막아놓았던 샘의 물구멍을 다시 열고 그 물로 카네이션 농사를 지어 큰 돈을 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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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목욕을 하는 마농을 본 위골랭은 그녀에게 반해 버린다. <제공: 네이버 영화>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 마농은 이제 18살 처녀가 되었다. 30살 노총각 위골랭은 어느 날 마농이 목욕하는 것을 먼발치에서 보고 그녀에게 완전히 마음을 빼앗긴다. 하지만 마농은 마을 사람들이 하는 대화를 듣고 위골랭이 자기 삼촌과 짜고 물길을 막았고, 그것 때문에 자기 아버지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복수를 결심한다. 사실 두 사람이 샘을 막았다는 것은 마을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모두가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쟝이 외지 사람이라는 이유로 얘기를 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 후 우연히 샘의 원천을 발견한 마농은 옛날에 위골랭과 빠뻬가 했던 것처럼 물길을 막아버린다. 이 때문에 마을 전체의 샘이 말라버리고, 다급해진 마을 사람들은 성당에 모여 비를 내려달라고 기도한다. 그때 신부가 이 중에 죄 지은 사람이 있으면 회개하라고 한다. 이 말에 사람들은 빠뻬와 위골랭이 지은 죄 때문에 하늘이 벌을 내리는 것이라고 수군댄다. 이 자리에서 마농은 두 사람의 죄를 낱낱이 폭로하지만 마농에게 눈이 멀어버린 위골랭은 자신의 처지도 모르고 그녀에게 열렬하게 사랑을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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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골랭과 빠뻬가 아빠를 속이고 샘을 막아버린 것을 알게된 마농은 마을에 남아 복수를 다짐한다. <제공: 네이버 영화>


그 후 마농의 마음을 얻는데 실패한 위골랭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수베랑 가문의 마지막 혈육이었던 조카를 잃은 빠뻬는 살아갈 희망을 잃는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그는 수십 년 만에 만난 옛 친구로부터 쟝이 바로 그의 아들이라는 충격적인 얘기를 듣는다. 자기가 그토록 무시하며 파멸로 몰아넣었던 쟝이 자기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빠뻬는 심한 죄책감을 느낀다. 자기가 한 일을 생각하면 지옥조차도 과분하다고 자책한다. 결국 그는 손녀인 마농에게 전 재산을 남긴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발적인 의지로 죽는다.


출생의 비밀, 엇갈린 운명, 음모, 복수, 파멸, 회개.



[마농의 샘]는 우리가 익히 보아 온 막장 드라마의 상투적인 소재를 총망라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억지스럽다거나 황당하다는 생각은 전혀 안 든다. 이야기가 설득력 있게 전개되고, 등장인물들의 캐릭터도 있을 법한 현실 속에 녹아 있기 때문이다. 사실 막장 드라마에 나오는 사람들은 행동이나 멘탈리티가 너무나 비현실적이어서 보는 이의 공감을 끌어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에 [마농의 샘]의 위골랭과 빠뻬, 쟝은 현실 속에 살아있는 인간의 냄새를 풍긴다. 그래서 가슴이 아프다. 인과응보의 법칙에 따라 악인이 응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통쾌하지 않다. 쟝, 위골랭, 빠뻬 모두 운명의 횡포에 쓰러진 불쌍한 인간들 아닌가.

만약 전쟁터에 나간 빠뻬가 쟝을 임신한 플로레트의 편지를 받았더라면 빠뻬가 자기 아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빠뻬가 위골랭을 아들처럼 아꼈던 것은 그가 수베랑의 가문을 이을 유일한 혈육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만약 자기 아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위골랭에 그토록 집착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어리석은 그를 살살 꾀어 나쁜 일을 하도록 만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위골랭이 마농의 원한을 살 일도 없었을 것이고, 30살이 되어서야 찾아온 첫사랑이 성공할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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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죽음으로 몰아간 쟝이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안 빠뻬는 충격에 휩싸인다. 영화에서 빠뻬역은 세계적인 배우, 이브 몽땅이 맡고 있다. <제공: 네이버 영화>


영화를 보는 내내 느꼈던 아련한 연민의 감정은 인간이 결코 운명을 벗어날 수 없다는 깨달음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배경음악을 베르디의 오페라 [운명의 힘 ]을 쓴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일구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온 쟝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은 앞으로 자기들이 살아갈 허름한 농가의 2층 창가에서 꿈같이 아름다운 프로방스의 농촌 풍경을 바라본다. 완벽하게 평화롭고 아름다운 순간. 이 순간을 그냥 보내기 아쉬웠는지 쟝이 하모니카를 분다. 여기서 그가 연주하는 아름다운 멜로디는 [운명의 힘]에 나오는 것이다. 남편의 하모니카 연주에 맞추어 한때 오페라 가수였던 그의 아내가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베르디의 [운명의 힘]은 제목 그대로 인간이 아무리 발버둥 쳐보았자 결코 운명을 벗어날 수 없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칼라트라바 후작의 딸 레오노라는 알바로와 서로 사랑하는 사이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딸이 알바로와 결혼하는 것을 반대하고, 그래서 두 사람은 아버지 몰래 도망칠 계획을 세운다. 그런데 두 사람이 도망치려는 순간 후작이 들어오고, 세 사람이 옥신각신하는 사이에 알바로가 실수로 후작을 죽이고 만다.

아버지의 죽음에 분노한 레오노라의 오빠 돈 카를로스는 원수를 갚기 위해 알바로를 찾아 나선다. 카를로스와 알바로는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가명으로 군에 입대하는데, 이때 알바로가 위기에 처한 카를로스를 구해주면서 두 사람은 친구가 된다. 하지만 나중에 카를로스는 알바로가 자기가 찾던 아버지의 원수라는 것을 알고 결투를 신청한다. 알바로는 사랑하는 레오노라의 오빠인 카를로스와의 결투를 원하지 않지만 상황에 몰려 결국 카를로스의 결투 신청을 받아들인다. 이 결투에서 카를로스가 알바로의 칼에 찔린다. 그렇게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는데, 레오노라가 나타난다. 레오노라와 알바로가 한 통속이라고 생각한 카를로스는 자기를 부축하는 레오노라를 칼로 찔러 죽이고, 이것을 본 알바로는 절벽 위에서 몸을 던진다. 그렇게 세 명의 주인공이 모두 죽는 것으로 오페라가 끝난다.

베르디의 [운명의 힘]은 막이 오르기 전에 연주하는 서곡에서부터 운명의 가혹한 힘을 보여준다. 이것을 듣고 있으면 운명 앞에 무방비 상태로 서 있는 인간의 모습이 그려진다. 금관악기의 당당한 울림으로 시작하는 서곡은 처음부터 가혹하게 인간을 몰아붙인다. 인간은 때로는 저항하고, 때로는 호소하고, 때로는 발버둥 치지만 운명의 가혹한 타격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래서 결국 항복하고 만다. 바로 이 순간 어디선가 홀연히 들려오는 플루트와 오보에 소리, [마농의 샘]에 나오는 바로 그 멜로디이다. [서곡]에서 플루트와 오보에가 연주하는 이 멜로디는 4막에서 카를로스로부터 결투 신청을 받은 알바로가 그를 설득하면서 부르는 노래이다.

자네의 협박도 모욕도 바람에 흩어지길 바라네.
나를 용서하게나. 형제여. 나를 동정하게나.
불행하고 비참한 죄밖에 없는 자를 왜 해치려 하나
운명에게 굴복하세
불쌍히 여기게. 나의 형제여.

이렇게 간절히 애원하는 노래인데, 영화에서는 쟝의 하모니카 반주에 맞추어 그의 아내가 노래 부르는 장면 외에, 자살한 위골랭의 시신이 빠뻬의 집 테이블에 누워 있는 장면과, 빠뻬가 침대에 누워 한때 사랑했던 쟝의 어머니 플로레트가 준 머리핀을 손에 쥔 채 죽어 있는 장면에서 이 음악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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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뻬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 그의 손에는 사랑했던 플로레트가 준 머리핀이 있었다. <출처: 네이버 영화>


[운명의 힘] 서곡에서는 이 멜로디를 플루트와 오보에가 연주하지만 영화에서는 하모니카가 연주한다. 여리고 가냘픈 하모니카 소리가 거대한 운명의 횡포 앞에 스러져간 나약한 인간의 모습 같다. 가슴 저리게 어필해 오는 그 소리를 들으며 쟝, 위골랭, 빠뻬 모두에게 더없이 아련한 연민의 정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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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회숙 | 음악 칼럼니스트
이화여대 음대 및 서울대 음대 대학원 졸업
현재 서울시립교향악단 월간지 SPO 편집위원이며, 서울시향 ‘콘서트 미리 공부하기’를 비롯한 여러 클래식 강좌의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평화방송 FM 음악공감 ‘진회숙의 일요 스페셜’의 진행자이다. 저서로 <모나리자. 모차르트를 만나다> 외 여러 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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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3.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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