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속클래식 파라다이스 로드 - 전쟁의 광기를 잠재운 천상의 멜로디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댓글 0건 조회 424회 작성일 16-02-06 17:00

본문















14547456485584.png


1942년 2월 10일, 싱가포르의 라플즈 호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 소속으로 싱가포르에 살고 있던 서양인들이 흥겨운 파티를 벌이고 있다. 하지만 이 파티는 갑작스러운 일본 공군기의 공격으로 일시에 중단된다. 일본군의 공습이 시작되자 싱가포르에 거주하는 연합국 소속의 부녀자와 아이들은 모두 본국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여자들은 사랑하는 남편을 전장에 남겨둔 채 본국으로 돌아가는 배에 몸을 싣는다.

하지만 이들을 실은 배는 항해 중에 일본군의 폭격을 맞아 침몰한다. 구명조끼를 입고 침몰하는 배에서 바다로 뛰어든 여자들과 아이들은 대부분 일본군에게 잡혀 수마트라 섬에 있는 일본군 기지에 수용된다. 처음에 포로들은 자기들이 정확하게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지를 몰랐다. 그래서 일본군에게 자기들을 언제까지 이런 열악한 환경에 둘 것이냐 물어본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대답 대신 무지막지한 폭력. 그렇게 험하게 매질을 당하고 나서야 그들은 비로소 일본군에게 제네바 협약 같은 것을 들먹여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14547456492204






음악리스트
No.아티스트 & 연주 
1드보르작 [신세계로부터] 2악장 / LA 필하모닉, 크리스토프 에셴바흐/ Los Angeles Philharmonic, Christoph Eschenbach음악 재생

1분 미리듣기 / 음원제공 : 유니버설 뮤직 / 앨범 정보 보러가기








14547456503517




[파라다이스 로드]는 2차대전 말기 전쟁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제공: 네이버 영화>영화 정보 보러가기



수용소 생활은 지옥 그 자체이다. 여자들은 수시로 자행되는 일본군의 폭력 세례를 받으며 하루 종일 뙤약볕 아래서 중노동을 한다. 식량 부족과 물자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영양실조와 불량한 위생상태로 말라리아를 비롯한 각종 질병에 시달리지만 약은 턱없이 부족하다. 의사임을 자처하는 페어스탁이 일본군 군의관에게 말라리아 치료제인 키니네와 붕대, 모르핀, 아스피린, 청진기를 부탁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머큐로크롬 밖에 없다는 것이다. 말라리아에 걸린 로버츠 부인을 치료해야 하지만 약이 없어 그저 손을 놓고 지켜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날 밤, 포로 중 유일한 동양인인 윙이 몰래 숙소를 빠져나와 철조망 근처로 가서 현지인과 밀거래를 한다. 돈을 주고 그녀가 가지고 온 것은 말라리아 치료제인 키니네. 그 덕분에 로버츠 부인은 말라리아를 치료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문제가 터진다. 일본군이 전날 밤 윙이 현지인과 밀거래를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포로들에게 일종의 본보기를 보여주고 싶었는지 일본군 장교는 포로들이 보는 앞에서 윙을 공개 처형한다. 그것도 화형이라는 지극히 잔인한 방법으로. 포로들은 눈앞에서 산 사람이 불에 타 죽는 것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한다.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끔찍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수용소도 하나의 작은 사회인지라 그 안에 크고 작은 갈등이 없을 수 없다. 하지만 참혹한 일을 함께 겪는 사이, 포로들 사이에 끈끈한 유대감이 형성되어 간다. 그중에서 가장 마음이 잘 통하는 사람은 노처녀 선교사 마가렛과 영국 차 농장주의 아내인 애드리언이다. 두 사람을 맺어준 것은 음악이다. 어느 날 애드리언이 엘가의 첼로 협주곡 선율을 흥얼거리는 것을 듣고 마가렛이 작곡가를 알아맞힘으로써 두 사람 사이에 우정이 시작된 것이다. 애드리언은 왕립음악원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했고, 마가렛 역시 더럼에서 잠시 음악을 배운 적이 있었다. 두 사람은 모차르트의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위한 [신포니아 콘체르탄테]를 함께 흥얼거리며 음악과 함께 했던 젊은 시절을 회상한다.

그 후 애드리언과 마가렛은 의기투합해서 포로 합창단을 만들기로 한다. 종교집회도 허락하지 않는 일본군이 합창단을 허락하겠냐고 하면서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애드리언과 마가렛은 꿋꿋하게 자기들의 계획을 밀고 나간다. 마가렛은 예전의 기억을 더듬어 악보를 그리고, 애드리언은 희망자를 모집하고, 이들의 연습을 지휘한다.

이렇게 은밀히 합창단을 준비하고 있던 어느 날 밤, 애드리언은 일을 보러 갔다가 어둠 속에서 술 취한 일본군 병사의 공격을 받는다. 당황한 에드리언은 병사를 오물 속으로 밀쳐 간신히 위험에서 벗어나지만 그 때문에 다음 날 일본군 장교에게 갈빗대가 부러질 정도로 심한 폭행을 당한다.

그러는 동안 어느덧 시간이 흘러 포로들이 수용소 생활을 시작한지 2년이 되었다. 입소 2주년이 되는 날, 애드리언이 지휘하는 음성 합창단이 드디어 포로들 앞에서 처음으로 그동안 갈고 닦은 실력을 발휘한다. 여기서 합창단이 부른 노래는 드보르작의 [신세계 교향곡] 중 2악장. 포로들이 광장에 모이는 것을 보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달려오던 일본군들이 어느덧 아름다운 노랫소리에 매료되어 총을 내려놓는다. 소리가 얼마나 감동적인지 심지어는 난폭하기로 유명한 토마야시 상사마저 넋을 잃고 조용히 노래를 듣는다. 사실 토마야시 상사는 포로들 사이에 악명 높기로 유명한 사람이다. 툭하면 포로들에게 잔인한 폭력을 행사한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마치 순한 양이 되어 포로들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14547456515185




애드리언은 마가렛과 같이 수용소 내 음성 합창단을 만들어 처참한 환경 속에서도 음악을 통해 삶의 희망을 잃지 않으려 한다. <제공: 네이버 영화>



하지만 포로 합창단이 포악한 토마야시 상사를 비롯한 일본군을 감동시켰다고 해서 수용소 생활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 후로도 참혹한 일들은 계속해서 일어난다. 호주 출신 간호사 수잔은 일본 천황을 숭배하는 의식에서 잡담을 했다는 이유로 뙤약볕 아래에서 하루 종일 무릎 꿇고 앉아 있다가 참수를 당하기 일보 직전에 위기를 모면하기도 한다.

포로들이 그런 상황에서도 살아가는 것은 언젠가는 이 전쟁이 끝나 고향으로 돌아가 사랑하는 가족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군인인 남편을 전쟁터로 보내고, 자신은 포로가 된 로즈메리도 그런 희망을 품고 있다. 그녀는 어느 날 부근의 수용소에 잡혀있는 남편의 쪽지를 받는다. 동료들과 함께 탈출을 준비하고 있다는 남편의 쪽지를 읽은 로즈메리는 시드니에서 남편과 만날 날을 꿈꾸며 행복해한다. 하지만 그녀는 기차를 타고 다른 곳으로 호송되던 중 멀리서 탈출을 시도한 남편이 일본군에게 다시 붙잡혀 온 것을 보게 된다. 탈출한 자는 곧 처형된다는 것을 알고 로즈메리는 절망한다. 더 이상 세상을 살아갈 힘을 잃은 그녀는 그 후 시름시름 앓다가 남편을 따라 이 세상을 하직한다. 로즈메리와 함께 로버츠 부인도 세상을 떠나고, 곧이어 마가렛이 이들의 뒤를 따른다.

포로들의 이야기는 1945년 8월, 일본의 패망으로 끝을 맺는다. 일본군이 수마트라 섬을 떠난 지 2주 후 연합군이 섬으로 들어왔다. 섬에 있던 여자들과 아이들은 싱가포르와 자카르타에서 치료를 받은 후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수용소에서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간 후에도 평생 긴밀한 유대관계를 지속했다. [파라다이스 로드]는 이들의 기억과 회상을 바탕으로 만든 논픽션이다. 포로 합창단은 1943년에서 1944년까지 모두 30곡을 연주했으며, 단원의 절반이 사망한 후 해체되었다. 영화에서 포로 합창단이 부른 노래는 드보르작의 [신세계 교향곡] 2악장의 주제 선율과 라벨의 [볼레로], 아일랜드 민요 [아, 목동아]인데, 당시 이들이 사용했던 오리지널 악보를 그대로 사용했다고 한다.

고향을 떠나 낯선 땅에서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포로들의 처지를 생각해서 그런지 이들이 부르는 노래 중에서 가장 가슴에 어필해오는 것은 드보르작의 곡이다. [신세계 교향곡] 2악장의 주제 선율에서 따온 이 멜로디는 우리에게 [꿈속의 고향]이라는 노래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서양에서는 [귀향 Going home]이라는 제목으로 불리는데, 제목은 다르지만 ‘고향을 그리워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14547456522709




애드리언은 일본군에서 맞아가면서도 합창단 지휘를 이끌어 나간다. <제공: 네이버 영화>



내 고향으로 가리. 내 고향으로 가리. 근심 걱정 더 이상 없고
평온하고 조용한 날 저물어. 내 고향으로 가리 더 이상 방황도 없으리
머지않아 모든 일 끝내고 더 이상 시간을 헛되어 보내지 않고
열린 문 나서 새로운 삶을 시작되리
염려하지 않고 아직 삶이 끝난 것이 아니니
두려워하지 않으며 나 마음을 비우고
어머니 날 걱정하고, 아버지 날 기다리는 곳 진실된 삶으로 나는 가리다.
낯익은 얼굴들 모두가 친구인 그곳 내 고향으로 가리.
내 고향으로 가리.

영화에서는 이 멜로디를 가사 없이 보컬리스로 노래한다. 애드리언이 합창단을 음성 합창단 혹은 음성 교향악단이라고 부른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노래에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읽는다. 학창 시절 음악 시간에 부른 [꿈속의 고향]이 워낙 강하게 머릿속에 각인되었기 때문일까. 가사 없이 보컬리스로 불려짐에도 불구하고 유난히 가슴이 뭉클하다.

[신세계 교향곡]은 드보르작이 고향 보헤미아를 떠나 미국 뉴욕 음악원의 원장으로 있을 때 작곡했다. 20세기 기술문명의 약진국으로 부상하기 시작한 미국. 즉, 신세계에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드보르작은 보헤미아에 대한 그리움을 버리지 못하고 향수병에 시달렸다. 그래서 휴가 때마다 보헤미아 이주민들이 모여 사는 아이오와 주의 스필빌을 자주 찾았다고 한다.

드보르작은 이 느린 라르고 악장에 고향에 대한 향수를 표현했을까. 그것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신세계 교향곡]에서 이 멜로디는 잉글리시 혼이 연주한다. 잉글리시 혼은 생긴 모양은 오보에와 비슷하지만 오보에보다 더 어둡고, 더 깊고, 더 투박한 소리를 낸다. 아련한 음색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오보에와 비슷하지만 오보에에는 없는 계면의 그늘이 살짝 드리워져 있다는 점이 다르다. 그 계면의 그늘을 사람들이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해석한 것 아닐까.





14547456532118




난폭한 토마야시 상사는 합창단의 노랫소리를 듣고 나서 애드리언을 따로 불러 일본 가요를 들려준다. <제공: 네이버 영화>



이 노래가 일본군을 감동시킨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전쟁의 광기에 사로잡혀 포로들을 상대로 만행을 서슴지 않았던 일본군들이 무기를 내려놓고 음악을 듣는 장면이 나오니 말이다. 여기서 특히 주목할 것은 잔인함으로 악명 높은 토마야시 상사의 태도이다. 생긴 것이나 하는 행동이나 일본군 중에서도 가장 야만인처럼 보였던 그가 음악 앞에서 전혀 뜻밖의 행동을 한다. 어둠 속에서 포로들의 노래를 조용히 경청하고, 다음 날 애드리안을 숲 속으로 데려가 그녀 앞에서 직접 구슬픈 일본 가요를 부른다. 물론 그의 노래실력이 썩 좋은 것은 아니다. 게다가 그가 부르는 노래는 서양인에게는 몹시 낯선, 드보르작의 교향곡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일본 가요가 아닌가.

이 장면이 시사하는 것은 무엇일까. 비록 평소에 잔인한 행동을 일삼지만 토마야시에게도 음악에 대한 순정은 있다는 것일까. 포로들의 노래를 듣는 순간 그는 애드리언에게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공감대를 느꼈는지 모른다. 그리하여 그녀를 숲 속으로 데려가 일본 가요를 부르며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음악에 대한 순정을 드러냈던 것 같다. 그 발상의 단순무식함이 안쓰럽다. 음악은 힘이 세다. 척박한 환경에서 희망과 위안을 주고, 포악한 사람을 순한 양처럼 만든다. [파라다이스 로드]가 보여 주고자 했던 것도 바로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포로들에게는 음악이 곧 ‘천국으로 가는 길’이자 ‘고향으로 가는 길’이었던 셈이다.


관련링크: 통합검색 결과 보기14547456532747.jpg


영화정보








14547456539294

진회숙 | 음악 칼럼니스트
이화여대 음대 및 서울대 음대 대학원 졸업
현재 서울시립교향악단 월간지 SPO 편집위원이며, 서울시향 ‘콘서트 미리 공부하기’를 비롯한 여러 클래식 강좌의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평화방송 FM 음악공감 ‘진회숙의 일요 스페셜’의 진행자이다. 저서로 <모나리자. 모차르트를 만나다> 외 여러 권이 있다.

저자의 책 보러가기
|
인물정보 더보기


음원제공

유니버설 뮤직

http://www.universalmusic.co.kr/#/
14547456540246.jpg

유니버설 뮤직 트위터 / 유니버설 뮤직 페이스북


발행2013.06.17.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