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속클래식 솔로이스트 - 거리 악사와 베토벤 영웅 교향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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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21회 작성일 16-02-06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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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음악가 나다니엘은 한때 잘 나가는 음악학도였다. 그러나 학창 시절에 정신분열증에 걸린 후, 이제는 길거리에서 두 줄짜리 바이올린을 켜며 살아가는 신세가 되었다. 그에게는 따로 집이 없다. 길거리가 바로 그의 집이다. 이렇게 노숙자로 살아가던 그가 어느 날, 특종을 찾아다니던 LA 타임즈 기자 로페즈의 눈에 띄였다. 거리에서 나다니엘을 발견하는 순간, 로페즈는 뭔가 큼직한 것이 걸렸다고 예감했다. 잘 다듬으면 독자들의 관심을 끌만한 여지가 충분한 소재라고 생각한 것이다. 로페즈는 거리의 노숙자에 얽힌 감동적인 기사를 씀으로써 그동안의 부진을 만회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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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리스트
No.아티스트 & 연주 
1베토벤 교향곡3번 [영웅] 중 1악장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지휘)음악 재생
2베토벤 [삼중 협주곡] 중 2악장 / 안네 조피 무터(바이올린), 요요마(첼로), 마크 젤처(피아노),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음악 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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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다니엘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로페즈는 나다니엘이 줄리어드 음대에 다녔으며, 대학 시절에는 바이올린이 아니라 첼로를 전공했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노숙자로 전락해 버린 줄리어드 음대 출신의 천재 음악가. 기자로서 참으로 입맛 당기는 특종감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처음에 로페즈에게 나다니엘은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위한 새로운 특종의 대상일 뿐이었다. 하지만 취재를 하기 위해 그와 자주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어느새 로페즈는 나다니엘에게 우정을 느끼게 된다.

나다니엘의 집안은 가난했다. 하지만 이런 환경에도 불구하고 그는 첼로를 열정적으로 사랑했다. 앉으나 서나 오로지 첼로 생각뿐이었다. 잠자리에 누워서도 손가락으로 연습을 할 정도였다. 그렇게 노력한 결과 재능을 인정받아 세계 최고의 음악학교인 줄리어드 음대에 들어갔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환청이 들리기 시작했다. 처음에 그것은 작은 속삭임이었다. 남자와 여자가 번갈아가며 “나다니엘”, “나다니엘”하고 부르는 목소리였다. 그러다 학교 오케스트라의 일원으로 베토벤의 [영웅]을 연습하던 어느 날, 그 소리들이 본격적으로 들려오기 시작했다.



“나다니엘. 나다니엘. 거기에 네 고통이 있어. 그걸 노랗게 칠해. 그럼 고통이 사라질 거야. 나다니엘. 널 고통에서 지켜줄게. 널 그들의 눈과 귀에서 지켜줄게. 그들은 네 생각을 듣고 있어. 네가 생각하는 것을 들을 수 있어. 나한테도 들려. 생각을 멈춰. 도망가. 나다니엘. 구멍을 파고 숨어. 그들은 네가 흑인이라서 미워해. 네가 보여. 여기 숨어. 나다니엘. 네가 보여. 숨어도 소용없어.”

그 순간 나다니엘은 거의 머리가 터질 것 같은 지경이 되어 연습장을 뛰쳐나왔다. 그 후 그는 다시 학교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때부터 노숙 생활을 시작했다. LA의 한 터널 밑에서 두 줄만 남은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살아갔다. 로페즈가 처음 나다니엘을 만났을 당시 나다니엘의 소원은 네 줄을 모두 갖춘 바이올린을 갖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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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청으로 인해 학교 연습장을 뛰쳐나오는 나다니엘



로페즈는 이런 나다니엘을 정상인의 생활로 끌어들이려고 노력한다. 로페즈가 쓴 나다니엘에 대한 기사를 보고 감동한 한 독자가 자신의 첼로를 기증하자 로페즈는 나다니엘에게 첼로를 주려고 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다. 노숙자 생활을 청산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다니엘은 이를 거부한다. 그는 자신이 오랫동안 삶의 근거지로 삼고 있는 터널을 떠나는 것에 대해 엄청난 두려움을 느낀다. 그래서 격렬하게 저항한다. 정신분열증은 나다니엘로 하여금 ‘안’보다는 ‘밖’에서의 삶, 야인(野人)으로서의 삶, 아웃사이더로서의 삶에서 더 편안함을 느끼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그는 ‘정상의 삶’, ‘실내의 삶’, ‘방에 갇힌 삶’을 거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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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다니엘과 로페즈



하지만 로페즈는 포기하지 않는다. 나다니엘의 삶을 정상인의 그것으로 돌려놓기 위한 로페즈의 노력은 눈물겨운 것이었다. 그는 노숙자 쉼터로 그를 데려가고, 그에게 살 곳을 마련해 주고, 첼로 레슨을 받게 하고, 오케스트라의 리허설에 데려가고, 독주회를 주선해 준다. 무엇보다 그는 나다니엘에게 음악을 되찾아주려고 노력한다.

어느 날, 로페즈는 LA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리허설이 열리는 월트 디즈니 홀로 나다니엘을 데리고 간다. 무대에서는 LA 필하모닉이 베토벤의 [영웅]을 연습하고 있다. 베토벤의 [영웅]을 들으며 나다니엘은 황홀경에 빠진다. 어린 시절, 그는 이 교향곡의 1악장 첼로 파트를 연주하며 음악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다. 베토벤은 그가 가장 존경하는 음악가였다. 비록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지만 그는 여전히 베토벤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 음악을 듣는 나다니엘은 어느새 새가 되어 환상의 세계로 날아간다. 그 순간 화면 가득 아름다운 색의 향연이 펼쳐진다.

베토벤의 음악을 들을 때 숙연하고 진지해지는 것을 보고 로페즈는 나다니엘에게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로페즈의 착각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나다니엘을 정상의 삶 속으로 끌어들이려 하지만 나다니엘은 늘 한쪽 발만 들여놓을 뿐 완벽하게 정상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을 거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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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삶에 더 행복해 하는 나다니엘



나다니엘에게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이었을까. 그는 ‘안’보다는 ‘밖’에서의 삶에서 더 행복을 느꼈다. 그런 의미에서 나다니엘을 보통 사람의 일상 속으로 끌어들이려는 로페즈의 시도는 애초부터 무모하고 무의미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논픽션이다. 이야기의 실제 주인공은 에이어스라는 사람인데, 영화의 말미에 이에 대한 로페즈의 독백이 나온다.



“1년 전 나는 나락에 떨어진 한 남자를 만났다. 나는 그를 도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내가 도움이 됐는지는 모르겠다. 내 친구 에이어스씨는 이제 집 안에서 잠을 잔다. 열쇠도 있고 침대도 있다. 하지만 그의 정신 상태나 건강은 처음 만난 날과 마찬가지로 불안정하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도움이 됐다고 말한다. 정신의학 전문가들은 친구가 되어주는 것만으로도 두뇌의 화학성분이 바뀌고 더 잘 기능할 수 있게 한다고 한다. 이 점에 있어서 에이어스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우리의 우정이 도움이 됐을 수도, 안 됐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 자신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다. 에이어스씨의 용기와 겸손, 예술의 힘에 대한 그의 믿음을 보면서 자신의 믿음에 충실한 것이 얼마나 존엄한 것인지를 배웠다.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것 말이다. 한 치의 의심 없이 믿는 것.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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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동상 밑에서 대화를 나누는 나다니엘과 로페즈



이 영화에는 베토벤의 음악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나다니엘이 가장 존경하는 작곡가가 베토벤이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나다니엘이 즐겨 연주하던 음악은 [영웅 교향곡]의 1악장이다. 나다니엘은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을 때에도 이 음악에 대한 열정만큼은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다.

베토벤은 고전주의와 낭만주의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한 작곡가이다. 그는 선배 작곡가인 하이든, 모차르트로부터 잘 발달된, 그러면서도 무궁한 잠재력을 가진 고전주의 양식을 물려받았다. 베토벤은 교향곡 1번과 2번을 통해 선배들의 시대를 정리했다. 그리고 제3번 [영웅]에서부터 자기 자신의 길을 개척해나갔다. 새로운 교향곡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이 곡을 작곡할 당시 베토벤의 내면은 혁명의 이상으로 들끓고 있었다. 하지만 고전주의의 옛 방식으로는 그 불꽃을 생생하게 표현할 수 없었고, 그래서 과감하게 옛 시대의 알을 깨고 밖으로 나왔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바로 [영웅 교향곡]이다.

영화에 나오는 [영웅 교향곡]의 제1악장 알레그로 콘 브리오는 소나타 형식으로 작곡되었다. 먼저 오케스트라 전체가 스포르찬도로 강렬한 인상의 화음을 두 번 반복 연주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렇게 [영웅]은 첫 마디부터 사람들을 자극한다. 그런 다음 첼로가 주제 선율을 연주하는데, 처음에는 부드럽게 시작하지만 이어서 몰아치듯 분위기를 고조시켜 나간다. [영웅]이라는 제목에 어울리는 웅대하고 힘찬 악장이다.

영화에 나오는 또 다른 베토벤의 곡은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를 위한 [삼중협주곡]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오랫동안 연락을 끊고 지내던 누이가 나다니엘을 찾아온다. 이때 나다니엘은 거의 정상적인 사람과 다름없는 태도를 보인다. 그는 누이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한다.



“우리 삶이 참 파란만장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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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다니엘과 누이



바로 이 장면에서 베토벤 [삼중협주곡]의 2악장이 흐른다. 일반적인 협주곡에서는 독주 악기가 하나지만 이 곡에서는 독주 파트에 이례적으로 세 개의 악기 즉,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가 나온다. 그래서 ‘삼중협주곡’이라는 제목이 붙었다. 모두 3악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2악장은 1악장과 3악장 사이에 낀 간주곡과 같은 성격의 곡이다. 나머지 악장에 비해 길이가 짧고, 그래서 음악적인 비중도 그다지 크지 않지만 감동이라는 측면에서 보았을 때, 길이가 길고 스케일이 큰 1, 3악장보다 이 악장이 훨씬 깊이가 있다.

여기서는 첼로가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첼로는 중저음역의 음색이 매력적인 악기이고, 그래서 서정적인 선율을 노래할 때에도 중저음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곡은 다르다. 중저음이 아니고 높은 음역에서 움직인다. 먼저 바이올린을 비롯한 오케스트라 악기들이 조용히 반주를 시작하면, 어디선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답고 명상적인 선율이 홀연히 등장한다. 듣는 이의 마음에 깊은 영감을 주는 첼로의 노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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첼로를 연주하는 나다니엘



이 곡을 듣기 전까지 나는 첼로의 고음이 이토록 영감 어린 소리를 낼 수 있는지 몰랐었다. 바이올린과 비슷한 애수를 띠면서도 바이올린 특유의 히스테릭한 특성은 배제된, 짙은 음영과 애절함을 동시에 지닌 소리이다. 그 영감 어린 첼로의 노래가 마치 하늘로 올려보내는 기도와 같다.

영화는 나다니엘이 로페즈와 함께 음악회에 가서 베토벤 [합창 교향곡]의 3악장을 듣는 것으로 끝난다. 음악이 나오는 동안 슬로우 모션으로 다양한 모습의 노숙자들이 화면에 등장한다. 화면 속에 비친 노숙자들의 현실이 그렇게 녹록해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베토벤의 명상적인 음악과 슬로우 모션이 그들의 비천한 일상을 순화시킨다. 웃고, 노래하고, 춤추는 모습이 마치 집이라는 속박에서 벗어나 천상의 자유를 누리는 듯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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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회숙 | 음악 칼럼니스트
이화여대 음대 및 서울대 음대 대학원 졸업
현재 서울시립교향악단 월간지 SPO 편집위원이며, 서울시향 ‘콘서트 미리 공부하기’를 비롯한 여러 클래식 강좌의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평화방송 FM 음악공감 ‘진회숙의 일요 스페셜’의 진행자이다. 저서로 <모나리자. 모차르트를 만나다> 외 여러 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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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발행2014.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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