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속클래식 힐러리와 재키 - 자클린 뒤 프레의 엘가 첼로 협주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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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35회 작성일 16-02-06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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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87년 가을 어느 날, 신문을 뒤적이다가 다음과 같은 기사를 발견했다.



“영국 출신의 첼리스트 자클린 뒤 프레가 향년 42세를 일기로 사망하다.”

그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다발성 경화증이라는 불치의 병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얘기는 클래식 애호가들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얘기였다. 그녀가 걸린 병이 불치병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그녀의 쾌유를 빌었다. 음반에 담긴 그녀의 첼로 연주를 들으며 언젠가는 음반이 아닌 실제 연주로 그녀를 만나는 날이 오기를 빌었다. 그러나 그날은 끝내 오지 않았다. 온몸을 불사르는 듯 열정적인 음악만 남겨 놓은 채 그렇게 훌쩍 우리 곁을 떠나고 말았다. 20대 후반에 발병을 했으니 십수 년을 홀로 병마와 싸운 셈이다. 그 외로움과 고통의 시간을 생각하니 가슴 한구석이 시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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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리스트
No.아티스트 & 연주 
11악장 – Adagio – Moderato음악 재생
22악장 – Lento - Allegro molto음악 재생
33악장 – Adagio음악 재생
44악장 – Allegro – Moderato - Allegro, ma non - troppo-Poco più lento -Adagio음악 재생

1분 미리듣기 / 음원제공: 유니버설 뮤직 / 앨범 정보 보러가기




[힐러리와 재키]는 자클린 뒤 프레의 삶을 그린 영화이다. 영화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하나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자클린의 시점(視點)이고, 다른 하나는 이런 그녀를 바라보는 언니 힐러리의 시점이다.

어린 시절 두 자매는 피아니스트인 어머니 밑에서 음악을 공부했다. 자클린은 첼로를, 언니 힐러리는 플루트를 배웠는데, 처음에는 재키보다 힐러리가 더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재키의 재능이 힐러리를 앞지르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재키의 레슨을 담당했던 교수는 그녀의 뛰어난 암보력과 테크닉 그리고 천재적인 해석에 혀를 내둘렀다.

재키는 16살 때, 런던의 위그모어 홀에서 데뷔 무대를 가졌다. 연주회는 성공적이었다.

사람들은 천재적인 여류 첼리스트의 탄생에 열광했다. 그 여세를 몰아 자클린은 이듬해 로열 페스티벌 홀에서 BBC 심포니와 함께 엘가의 [첼로 협주곡]을 협연했다. 이 연주는 그야말로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당시 그녀의 연주를 들은 사람들은 이제 십대에 불과한 어린 소녀가 그토록 거장적인 연주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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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실제 모델인 자클린 뒤 프레의 연주 모습



영화의 초반부는 어린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해 20대 초에 이미 세계적인 첼리스트로 부상한 자클린의 성공 스토리를 보여준다. 이때까지만 해도 자클린은 신으로부터 특별한 은총을 부여받은 ‘행복한 천재’로 비춰진다. 하지만 그 후 힐러리의 시점에서 바라본 자클린의 모습은 이와 사뭇 다르다.

힐러리는 어린 시절 장래가 촉망되는 플루티스트로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동생의 그늘에 가려 존재감이 없어졌다. 결국 그녀는 대학 졸업 후 결혼해 평범한 가정주부가 된다. 그런데 어느 날, 자클린이 갑자기 연주 스케줄을 모두 취소하고 힐러리를 찾아온다. 힐러리는 정서적으로 불안 증세를 보이는 자클린을 안정시키기 위해 애쓴다.

힐러리의 시점에서 바라본 자클린은 전형적인 천재의 모습을 하고 있다. 지나치게 이기적이고 히스테릭하며 괴팍하고 심술궂다. 어렸을 때부터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에 익숙해져 있어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모른다. 그러면서 늘 애정과 관심을 요구하고, 그것이 조금이라도 소홀하다 싶으면 금세 상처를 입고, 주변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할퀴고 깨문다. 영화 속의 자클린도 이런 모습으로 나온다. 그녀는 평온한 힐러리의 일상에 갑자기 뛰어들어 부부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는다.

다음 이야기는 자클린의 시점에서 펼쳐진다. 자클린은 바쁜 연주 일정 중에도 수시로 힐러리에게 전화를 건다. 유럽 무대를 종횡무진으로 누비고 다니는 중에도 힐러리에게 연결된 정서의 끈을 놓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그녀의 정신은 점점 황폐해져 간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한 파티에서 지휘자이자 피아니스트인 다니엘 바렌보임을 만난다. 슈만의 [환상 소품집]을 함께 연주하며 음악적 교감을 나눈 두 사람은 마침내 부부가 된다. 당시 바렌보임은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로 한창 상승가도를 달리고 있었고, 자클린 역시 세계 최고의 첼리스트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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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클린 뒤 프레와 다니엘 바렌보임. 1967년



이렇게 음악과 사랑으로 부부가 된 두 사람은 그 후 삶의 동반자이자 음악의 동반자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다. 이 무렵 그녀는 첼로의 명곡을 거의 모두 연주하며, 대부분을 음반으로 남긴다. 그때마다 다니엘 바렌보임은 때로는 피아니스트로, 때로는 지휘자로 그녀의 음악적 동반자가 되어 준다.

어느 날 녹음이 끝나고 두 사람이 테이프를 들으며 서로의 연주에 대해 의견을 나눌 때, 자클린이 손이 조금 차갑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때부터 자클린은 눈에 띄게 피로를 느끼기 시작한다. 손가락이 저리고 차가울 뿐만 아니라 걸음을 걷는 것도 힘들어진다. 리허설이나 연주를 할 때 템포를 놓치거나 손가락을 잘못 짚는 일도 잦아진다.

결국 어느 날 하이든의 [첼로 협주곡] 1번의 3악장을 연주하다가 그만 활을 떨어뜨리고 만다. 그 후 병명이 밝혀진다. 다발성 경화증이라는 불치의 병이다. 이후 영화는 자클린의 몸이 서서히 마비되면서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병은 서서히 그녀의 몸을 마비시켜 갔다.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이 불가능해지면서 더 이상 첼로를 연주할 수 없게 되고, 그다음 걸을 수가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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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병 중일 때의 자클린 뒤 프레의 모습 1980년.



이 참혹한 병의 진행과정을 영화는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뻣뻣해진 손가락으로 전화 다이얼을 돌리고, 간신히 활을 잡고 첼로 줄을 벅벅 긁어대고, 경련이 일어나 온몸을 쉴 새 없이 떠는 자클린의 모습이 처절하다 못해 잔인하기까지 하다.

자클린이 이렇게 처절하게 병마와 싸우고 있는 동안 남편 다니엘은 세계 최고의 음악가로 성공가도를 달린다. 일이 많아지면서 그녀를 찾는 횟수가 점점 줄어든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했던가. 어느 날 다니엘에게 전화를 건 자클린은 전화기 너머로 어린아이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을 듣고 직감적으로 그가 다른 여자와 동거하고 있으며, 그 여자 사이에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영국 전역에 엄청난 폭풍우가 몰아치던 어느 날, 힐러리가 자클린의 병상을 찾는다. 침대에 누워 격렬하게 떨고 있던 자클린은 힐러리가 불러주는 노랫소리를 듣고 몸의 안정을 찾는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힐러리는 라디오 뉴스를 통해 자클린의 사망 소식을 듣는다. 소식을 들은 힐러리는 오열한다.

그다음, 영화는 다시 두 자매의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해변가에서 놀고 있는 어린 시절의 힐러리와 재키. 그리고 해변가에 서 있는 자클린의 실루엣을 배경으로 엘가의 [첼로 협주곡]이 흐른다. 생의 마지막에 자클린이 온몸이 찢겨나가는 심정으로 들었던 바로 그 음악이다. 사실 이 곡은 자클린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는 곡이다. 그녀가 한창 떠오르는 별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을 때, 한 독지가가 엄청나게 귀한 첼로의 명기를 그녀에게 주었다. 중후하면서도 섬세한 음색을 자랑하는 1712년 산 스트라디바리 다비도프이다.

스무 살이던 1965년, 자클린은 이 악기를 가지고 존 바비롤리 경이 지휘하는 런던 심포니와 함께 엘가의 [첼로 협주곡]을 녹음했다. 이 음반은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그 결과 그전까지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 했던 엘가의 [첼로 협주곡]이 명곡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자클린 덕분에 이 곡의 진가가 빛을 발하게 된 것이다. 그 후 이 곡은 자클린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그래서 엘가의 [첼로 협주곡]하면 자동적으로 자클린 뒤 프레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야말로 자클린에 의한, 자클린을 위한, 자클린의 협주곡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는 자클린의 트레이드 마크인 엘가의 [첼로 협주곡]으로 끝난다. 전반부에 힐러리의 시점에서 그려진 자클린의 모습이 다소 충격적이기는 하지만, 그 후에 이어진 자클린의 처절한 투병 과정과 외로운 죽음, 그리고 평화로운 해변가에서 어린 시절의 자기와 만나는 마지막 장면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제는 세상을 떠나고 없는 그녀, 자클린 뒤 프레를 가슴 아프게 추억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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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웠던 그녀와 그녀의 음악을 아직도 많은 이들은 그리워한다.



영화를 보고 난 후, 그녀가 연주하는 엘가의 [첼로 협주곡]을 다시 듣는다. 자클린의 연주는 첫 대목부터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깊고 강렬한 울림으로 시작하는 레치타티보풍의 서주는 앞으로 전개될 장대한 비극을 상징한다. 이 극적인 서주를 자클린은 몸을 활활 태우면서 연주한다. 격렬한 비브라토가 지나가고 나면, 첫 대목보다는 덜하지만 여전히 극적인 잠재력을 가진 멜로디가 호소하듯 밑에서 위로 상승한다. 이렇게 서주가 끝나고 나면 비로소 꿈속을 오가듯 명상적인 주제 선율이 연주된다.

2악장은 1악장의 서주를 피치카토로 연주하며 시작하는데, 이어 빠르고 화려하게 작렬하는 16분 음표들의 향연이 펼쳐진다. 그런 다음 곡은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3악장을 거쳐 4악장으로 들어간다. 4악장 역시 1악장과 같은 서주로 시작한다. 그런데 멜로디는 같지만 극적인 강도는 1악장보다 훨씬 강하다. 4악장에서 마지막 에너지를 불사르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이 악장에서 자클린이 발산하는 에너지는 거의 핵 폭탄급이다. 특히 혼신의 힘을 기울여 강렬한 일성(一聲)으로 곡을 끝내는 마지막 대목이 인상적이다.

자클린이 엘가의 [첼로 협주곡]을 연주하는 것을 듣고 있으면, 그녀가 자신이 평생 동안 써야 할 에너지를 모두 이 한 곡에 쏟아부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자신을 아낌없이 태웠기에 지금까지 살아남아 우리 가슴을 울리는지도 모르겠다. 앞으로도 한동안 엘가의 [첼로 협주곡]은 자클린의 연주로만 들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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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회숙 | 음악 칼럼니스트
이화여대 음대 및 서울대 음대 대학원 졸업
현재 서울시립교향악단 월간지 SPO 편집위원이며, 서울시향 ‘콘서트 미리 공부하기’를 비롯한 여러 클래식 강좌의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평화방송 FM 음악공감 ‘진회숙의 일요 스페셜’의 진행자이다. 저서로 <모나리자. 모차르트를 만나다> 외 여러 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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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Wikipedia, Gettyimages





발행2014.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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