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포에니 전쟁 (1) - 지중해의 패권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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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20회 작성일 16-02-07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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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에니 전쟁1) 당시 로마군의 해전도. 로마는 코르부스라는 장치를 사용해 해양 민족인 카르타고와의 해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포에니 전쟁


포에니 전쟁은 BC 3세기, 지중해의 패권을 놓고 로마와 카르타고간에 벌어진 세 차례의 전쟁이다. 그 명칭이 ‘로마-카르타고 전쟁’이 아닌 이유는 로마가 카르타고를 세운 ‘페니키아’인들을 ‘포에니쿠스(Poenicus)’라고 불렀고 ‘포에니’사람들과 싸운 전쟁이란 의미에서 포에니 전쟁이라 기록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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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표


포에니 전쟁 개요

전쟁주체


로마 VS 카르타고

전쟁시기


기원전 264 ~기원전 146

전쟁터


이탈리아 반도, 아프리카 북부, 에스파냐, 지중해 일대

주요전투


아그리겐툼 전투, 아에가테스 해전, 트레비아 전투, 트라시메노 전투, 칸나에 전투, 시라쿠사 공방전, 메타우로스 전투, 자마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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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에는 넓은 영토와 인구, 군사를 거느린 수많은 ‘제국’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 제국들이 처음부터 이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아주 작은 곳에서 시작해, 주변의 세력과 싸워 이겨가며 역사에 남는 ‘제국’이 된 것이다. 고대 서양 역사상 최대의 제국을 이룩한 로마도 마찬가지다. BC 7세기 티베리스강 하류 라티움에서 시작해 오랜 기간에 걸쳐 인접국가를 제패하며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다. 포에니 전쟁(Punic Wars)은 바로 이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를 넘어 지중해의 패권을 손에 쥔 ‘제국’으로 도약하게 된 계기가 된 전쟁으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BC 3세기 무렵, 지중해. 상당수의 문명국들이 치열하게 경쟁하던 지중해의 동부와 달리 서부는 비교적 ‘한산한’ 편이었다.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 펠로폰네소스 전쟁, 그리고 정복자 알렉산드로스(Alexandros the Great)가 벌인 정복전의 무대에서 살짝 벗어난 이탈리아 반도에서는, 라틴족의 조그마한 도시인 로마가 주변의 세력을 하나둘씩 정복하며 자신들의 세력권을 확보해나가고 있었다. 로마 북쪽의 에트루리아, 주변에 있던 삼니움 등이 로마에 무릎을 꿇었고 이탈리아 반도에 진출해 있던 그리스인들의 식민도시들도 로마와 잘 지내려고 무척 애를 썼다.

로마에 비하여 카르타고는 보다 일찍 역사에 등장한다. 카르타고는 배를 타고 지중해 각지를 돌아다니던 해양민족 페니키아인들이 건설한 도시였다.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페니키아인들은 현재의 레바논에서 BC 3300년대에 이미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BC 2000년대를 거쳐 1000년대에 이르면 이들은 지중해 전체를 아우르는 네트워크를 가지게 된다. 지중해 세계에 대한 페니키아인들의 영향력은 대단히 컸다. (페니키아의 문자는 그리스로 가서 그리스식 ‘알파벳’으로 재탄생하였다.)특히, 이들의 우수한 항해 능력은 각 제국들에게 매우 필요한 것이었는데, 페르시아 제국이 그리스를 침공할 당시 해군이 없어 페니키아의 함선들과 선원들을 동원할 정도였다. 거대한 나라를 세우는 것보다 ‘부(富)’의 축적에 관심이 많던 페니키아인들은 배와 선원들을 거대 제국들에게 빌려주는 대신 그들의 자치권을 보장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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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타고의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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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 최고의 해군력을 자랑하던 카르타고의 해군 기지 유적.





포에니 전쟁의 발발 원인



로마의 문인(文人)인 베르길리우스(Vergilius)의 장편 서사시인 [아이네이스(Aeneis)]에 의하면 카르타고는 현재 튀니지에 레바논의 티레(Tyre) 출신의 엘리사(디도라고도 한다)라는 여왕이 세웠다. (‘카르타고’라는 이름은 ‘새로운 티레’라는 뜻이다.) 새로운 도시에서도 해양 민족의 특성은 발휘되어 카르타고인들은 지중해는 물론 지중해 밖의 현재 모로코 해안, 그리고 일설에 의하면 현재 영국 해안까지 배를 몰고 장사를 했다고 한다. 아울러 카르타고는 북아프리카 해안의 넓은 지역은 물론 시칠리아코르시카까지 그 영향권 안으로 끌어들였다.

이즈음 이탈리아 반도를 장악한 로마는 시칠리아를 놓고 카르타고와 충돌하게 된다. 이미 카르타고는 시칠리아를 다스리고 있던 그리스계 세력과 네 차례(BC 480, BC 410, BC 397, BC 315)에 걸쳐 전쟁을 한 적이 있었다. 카르타고는 최후의 전쟁에서 시칠리아에서 가장 큰 도시국가인 시라쿠사아가토클레스(Agathokles)의 군을 무찌르고 시칠리아를 거의 점령하였다가, 아가토클레스가 카르타고 본국에 대한 기습공격을 하는 바람에 다 잡은 승리를 놓치고 본국으로 회군하였다. 이후 아가토클레스와 협상을 하여 시라쿠사를 내버려두는 대신 시칠리아 내의 카르타고 세력을 확고히 하였다.

카르타고의 시칠리아 진출은 로마와의 전쟁을 불러오는 원인이 된다. 아가토클레스는 이탈리아 반도 출신의 용병들을 고용하였는데 그가 죽은 후 일자리가 없어지자 용병들은 메사나라는 도시를 점령하고 해적질을 하면서 스스로를 마메르티니(Mamertini, 마르스의 아들들)라고 하였다. 이들의 횡포에 견디다 못한 인근 주민들은 시라쿠사의 새 왕인 히에로 2세(Hiero II)에게 구원을 청하였고 이에 마메르티니들은 시칠리아 남방에 있던 카르타고인들의 보호를 받고자 하였다. 이를 본 시라쿠사군은 물러났지만 카르타고인들은 마메르티니들을 ‘보호’하는데 별로 적극적이지 않았다.

결국 마메르티니들은 로마의 도움을 받고자 사절을 보낸다. 로마도 주민들로부터 도시를 빼앗은 도적집단을 돕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으나, 로마와 가까운 시칠리아에서 카르타고의 세력확장을 막아야 한다는 의견이 강력하게 제기되며, 마메르티니와 동맹을 맺는다. 시라쿠사의 왕인 히에로 2세는 이에 위협을 느끼고 시칠리아 남부의 카르타고 세력과 손을 잡는다. 로마와 카르타고가 본격적으로 시칠리아 쟁탈전에 나서면서 제1차 포에니 전쟁이 발발한다.



1차 포에니 전쟁: 로마, 해양 강국 카르타고를 바다에서 격파



전쟁에 돌입한 로마와 카르타고는 BC 265년에 메사나에서 충돌한다. 로마군은 카르타고·시라쿠사 동맹군과 싸워 승리한다. 그러나 로마군의 완전한 승리로는 볼 수 없는데, 피해를 두려워한 카르타고 지휘관 하노(Hanno)와 히에로 2세가 메사나를 포기하고 물러났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전투는 BC 262년에 로마군이 지금의 시칠리아 남부의 도시 아그리겐툼(현재 이름은 아그리겐토)을 포위하면서 벌어진다. 카르타고군은 아그리겐툼을 시칠리아 주둔군의 주요 거점이자 기지로 삼았고 이를 안 로마군이 아그리겐툼을 점령하려고 한 것이다. 이 싸움에서 한니발 기스코(Hannibal Gisco)와 그의 아들은 아그리겐툼을 포위하던 로마군을 멀리 유인하여 싸우려고 하였으나, 작전이 간파되는 바람에 앞뒤로 협공을 받게 되고 카르타고군은 다시 한 번 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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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부스.



아그리겐툼의 전투 이후 카르타고군은 육지에서 로마군과의 정면대결을 피하고 그들의 장기인 해전으로 전환하였다. 그러나 BC 260년의 리파라 군도 해전을 제외하고는 바다에서의 싸움도 역시 로마의 승리로 돌아갔다. 당시 지중해에서의 해전은 화살을 주고받다가 상대의 배를 들이받아 침몰시키는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리파라 해전에서의 패배 이후 로마는 배에 코르부스(corvus, 까마귀 부리)라는 것을 장착하는데 이것은 긴 나무판자 끝에 뾰족한 송곳이 박힌 장치이다. 로마 함선이 카르타고 함선에 접근하여 코르부스를 밀면 송곳이 내리꽂히며 카르타고 함선의 갑판에 박히게 된다. 카르타고의 배는 꼼짝하지 못하게 되고 동시에 로마병사들이 코르부스를 다리 삼아 적선에 건너가 카르타고 선원들을 도륙하였다. 카르타고는 코르부스를 장착한 로마군과의 해전에서 연전연패하고 만다.

이어 카르타고는레굴루스(Marcus Atilius Regulus)가 이끄는 로마군의 침공을 받게 된다. 로마군은 수차례 전투에서 승리하고 수도인 카르타고 본성(本城)에까지 들이닥친다. 그러나 카르타고가 고용한 그리스 출신의 크산티푸스(Xanthippus)라는 장군이 카르타고군을 맡으면서 전세가 역전되었다. 크산티푸스는 현재 튀니스의 전투에서 로마군을 대파하였다. 살아서 도망가던 소수의 로마군도 배가 폭풍을 만나면서 모두 익사하고 로마의 카르타고 본토 원정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후의 전투들은 해전을 포함하여 모두 로마의 승리였고 시칠리아에 재차 파견된 카르타고군을 지휘하던 대 한노(Hanno the Great)가 아에가테스 해전에서 로마에 완패하면서 카르타고는 로마와 휴전협정을 맺고 시칠리아를 포기하기에 이른다. 이로써 1차 포에니 전쟁은 로마의 승리로 끝났다.육전에 강했던 세력이 천년이 넘도록 바다를 넘나들던 해양세력을 바다에서 꺾어 버린 것이다. 그 당시까지 해전의 주된 공식이었던 충파, 즉 상대편 배를 들이받아 침몰시키는 방법 대신 코르부스를 이용하여 육상병력을 함상(艦上)에서 싸울 수 있게 한 로마인들의 전술적인 창의성이 빛을 발한 것이다. 반도에만 갇혀 있던 로마세력이 처음으로 이탈리아 본토 밖으로 진출하게 된다.




김성남 | 안보·전쟁사 전문가
글쓴이 김성남은 전쟁이 인간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 UC 버클리 동양학과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국제학 석사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에 진학하여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전쟁으로 보는 삼국지], [전쟁 세계사] 등이 있으며 공저로 [4세대 전쟁]이, 역서로 [원시전쟁: 평화로움으로 조작된 인간의 원초적인 역사]가 있다.


발행2011.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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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포에니 전쟁


포에니 전쟁은 BC 3세기, 지중해의 패권을 놓고 로마와 카르타고간에 벌어진 세 차례의 전쟁이다. 그 명칭이 ‘로마-카르타고 전쟁’이 아닌 이유는 로마가 카르타고를 세운 ‘페니키아’인들을 ‘포에니쿠스(Poenicus)’라고 불렀고 ‘포에니’사람들과 싸운 전쟁이란 의미에서 포에니 전쟁이라 기록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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