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로마 내전 (1) - 제국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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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17회 작성일 16-02-07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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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튀른의 죄수 마리우스 (플루타르크 영웅전: 마리우스의 삶), 제르맹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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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표


로마 내전 전쟁 개요

전쟁주체


1단계: 마리우스파 vs 술라파

2단계: 카이사르(평민파) vs 폼페이우스 (귀족파)

3단계: 옥타비아누스 vs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전쟁시기


기원전 91~기원전 31

전쟁터


이탈리아 반도, 시칠리아, 히스파니아(에스파냐), 그리스, 북아프리카

주요전투


콜리나 관문 전투, 일레르다 전투, 디라키움 전투, 파르살루스 전투, 문다 전투, 빌립보 전투, 악티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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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내전(2)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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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을 위한 진통- 초기의 내전



내전(內戰)은 일반적으로 같은 집단이나 국가내에서 분란이 생겨 무장투쟁으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정의된다. 문명시대 이전의 전쟁을 연구하는 미국의 고고학자인 로렌스 킬리(Lawrence Keeley)는 역사상의 전쟁을 살펴보면 대개 다른 집단간의 분쟁보다 같은 집단내의 투쟁이 훨씬 파괴적이고 잔인하다고 쓰고 있다. 내전은 해당 집단의 역량이 서로간의 투쟁에 동원됨에 따라 역량의 소모가 몇 배이상 심할 수 있으며 이 때문에 이를 틈탄 외부 집단의 개입을 불러올 수 있다는 점에서 해당집단의 빠른 소멸이나 멸망을 불러올 수 있다.

그러나 이와는 다른 경우도 있다. 해당 집단이나 국가가 한창 역량을 키우고 커질 때 내전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는 그 국가가 팽창을 하면서 들어오는 자원이 많아지고 부(富)가 쌓이면서 이를 배분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겨나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도 물론 해당 국가의 국력소모는 심하지만 만약 내전이 빨리 정리되는 경우 내전이 오히려 일종의 구조조정으로 작용하면서 국가가 쇄신되고 오히려 국가가 더욱 더 부강해지는 경우가 있다.

영국의 경우는 장미전쟁을 거치면서 귀족세력이 약화되어 왕권이 강해지고 왕당파-의회파간 내전을 통하여 왕권이 약해지면서 의회가 정국을 장악하고 정치의 안정을 이룬 후 해외팽창에 나섰다. 미국도 팽창을 시작하던 1800년대 중반에 남-북으로 갈려 내전을 치르는 과정에서 연방정부가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며 팽창주의적 국가로 거듭났다. 이는 근대가 아니라 고대에도 마찬가지였는데 로마는 지중해 지역의 다른 세력을 거의 일소(一掃)하면서 급격히 팽창하는 기간동안에 격심한 내홍을 겪고 이는 그치지 않는 내전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 내전기간이 끝이 났을 때 과거의 로마는 사라지고 로마는 새로운 체제로 다시 거듭났다.



로마의 급격한 성장과 그늘



BC 200년대와 BC 100년대에 로마는 급격히 팽창하고 있었다. 1차 포에니 전쟁을 통하여 시칠리아와 사르데냐를 차지하였고 포에니 전쟁에서의 승리로 이베리아 반도의 상당부분을 얻었다. 이에 야망이 있는 로마의 귀족들과 무장들은 정복을 통하여 부를 축적하고자 하였다. 이후 100년에 걸친 정복전으로 현재의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BC 2세기-BC 1세기)을 편입시켰다. BC 2세기 중반에는 알렉산드로스의 고향이던 마케도니아를 무찌르고 이를 로마영토로 만들었으며 BC 146년에는 코린토스군이 로마군에게 패하면서 선진문명이던 그리스 전역이 로마의 것이 되었다. 아울러 이때 3차 포에니 전쟁이 끝나면서 카르타고의 영토이던 현재의 튀니지와 알제리 북부, 그리고 모로코 지역 모두를 로마가 소유하게 되었다. BC 133년에는 현재의 터키 서부는 ‘아시아’라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로마의 정복욕은 멈추지 않아 BC 100년부터 0년까지 갈리아, 게르마니아 일부, 이베리아 전부, 팔레스티나, 시리아, 이집트등지가 모두 로마의 영토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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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을 선동하고 있는 가이우스 그라쿠스. <출처:wikipedia>



로마의 급격한 팽창은 엄청난 수의 노예와 엄청난 양의 황금(돈)을 로마에 가져다주었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기원전 167년 로마가 마케도니아를 점령한 후 획득한 마케도니아 왕실의 막대한 재산으로 인하여 로마인들에게는 세금이 면제되었다. 페르가뭄(Pergamum) 왕국을 병탄한 기원전 130년에는 로마의 국가예산이 1억에서 두 배인 2억 세스테르치우스(Sesterces)로 불었다. 기원전 63년 대(大) 폼페이우스가 시리아를 정복하면서 무려 3억 4천만 세스테르치우스를 로마에 가져다 주었다. 카이사르가 갈리아를 정복하고 얻은 금의 양은 엄청나서 로마에서 금의 가격이 36%나 폭락할 정도였다.

토지와 관련해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로마의 초기 팽창의 대상은 이탈리아 반도의 다른 족속들과 도시들이었다. 이들과 정복전을 벌여 승리하기는 하였지만 계속되는 전쟁은 토지를 황폐화시켰다. 로마정부는 황폐화된 토지에서 다시 생산활동을 촉진하기 위하여 생산되는 곡식의 10분의 1이나 과일의 5분의 1, 또는 목축하는 가축중 일정 부분을 ‘사용료’, 즉 세금으로 내면 누구나 경작/목축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정작 정복으로 인하여 가장 많은 이득을 취한 것은 돈이 있는 부자들이었다. 이들은 일단 약간의 토지를 확보한 후 돈으로 주변에서 경작하고 있던 사람들의 땅을 사들였고 그들이 팔지 않을 경우에는 무력으로 협박하여 거의 강제로 빼앗았다. 이리하여 이탈리아 곳곳에는 커다란 장원(莊園)이 생겨났고 이를 차지한 부자 귀족들은 자유민들을 고용하는 대신 정복전으로 유입되는 노예들을 부려서 대규모 농업활동을 개시하였다. 이로서 자신이 먹을 것을 자신이 생산하고 유사시에는 국가를 위하여 군인으로 봉사하는 시민군적 전통이 퇴색되기 시작하였다. 아울러 군대에서 열심히 싸워 땅을 늘리는데 기여했음에도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평민들의 불만이 높아졌다. 결국 많은 노예와 황금, 그리고 새로운 영토가 로마에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이에 그 유명한 그라쿠스 형제(형-티베리우스, 동생-가이우스)가 호민관(護民官, Tribunus plebis)의 권한으로 귀족들의 무제한적 장원팽창을 규제하고자 하였으나 귀족들과의 정치투쟁에서 패하고 암살당하였다. 아울러 마케도니아등 외부와의 전쟁에서 로마인들과 함께 싸운 이탈리아반도의 도시민들도 문제였다. 이들은 대개 라틴족으로서 로마의 초기 팽창단계에서 로마의 자발적인 동맹이 되거나 전쟁에 패한 후 로마에 복속된 자치령의 상태로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자치였지만 이들의 외교관계와 대외활동은 모두 로마의 승인을 얻어야 했다. 완전히 로마인도 아니고 ‘동맹’이라는 어정쩡한 상태로 있어 그들의 노고에 대한 별다른 혜택도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불만은 점점 쌓여갔다. 물론 로마군의 정복전쟁에 참여하는 대가로 어느 정도의 전리품을 받게 되어있었지만 BC 100년대에 이르러 로마는 정복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였다. BC 125년에 풀비우스 플라쿠스라는 인물이 집정관으로 재직하고 있을 당시 이를 해소하기 위하여 동맹도시민들에게 시민권을 주자는 주장을 하였고 이를 의회(Senate)에서 강력히 주장하였지만 의회는 그를 전쟁에 내보냄으로써 문제를 피하였다. 그는 전쟁후 호민관이 되어 가이우스 그라쿠스를 끌어들여 동맹도시민들을 위한 정책을 폈지만 플라쿠스와 그라쿠스가 둘 다 암살당하면서 그 정책들은 무산되었고 동맹도시들의 불만은 더욱 더 높아졌다.

동맹도시민들에게 시민권을 주어 로마의 정치체계에 완전히 편입하려는 노력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Marcus Livius Drusus)란 인물이 호민관으로 취임하면서 재개되었다. 드루수스는 사실 고위 귀족이었고 이 당시 귀족계급과 경쟁하고 있던 기사계급을 견제하기 위한 정책을 폈다. 이 때문에 귀족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동맹도시민들에 대한 시민권 부여를 주장하면서 그의 인기는 급락하기 시작하였고 결국 BC 91년에 암살당하자 그에게 시민권에 대한 기대를 걸고 있던 동맹도시들의 불만은 결국 폭발하였다. 로마의 동맹이었던 도시들은 서로간에 동맹을 맺고 로마에 반항하는 군대를 일으킨다. 이른바 동맹도시 전쟁(Bello Socii)가 발발한 것이다.



계속되는 내전 – 동맹전쟁과 정쟁



로마와 싸우는 도시의 족속들은 크게 마루비움의 마르시인들을 주축으로 하여 펠리니, 베스티니, 마루키니, 피켄티니, 프렌타니, 헤르피니人들로 이루어진 한 집단과 폼페이, 베누시아, 아풀리아, 루카니아, 삼니움등으로 이루어진 집단으로 나눌 수 있다. 이들은 보병-기병을 합하여 총 10만명에 이르는 병력으로 로마를 공격하였다. 로마는 자국의 시민과 동맹관계를 끊지 않은 도시들의 병력을 합쳐 역시 약 10만정도의 병력으로 이들과 맞서 싸웠다. 3년간에 걸친 전쟁에서 마르시인들이 주축이 된 집단은 로마에게 완전히 패하였고 삼니움 집단은 로마의 공격을 어느정도 버티어내기는 하였지만 수세에 몰려있었다. 이에 로마인들이 이 동맹반란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은 모든 도시민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법안(Lex Iulia de civitate Latinis et sociis danda)을 내놓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호민관인 실바누스와 카르보가 제정(制定)일로 부터 60일안에 로마의 치안관(Praetor)앞에 나와 등록한 모든 이탈리아인들에게 시민권을 주는 법안을 통과시킴으로 이탈리아 반도에 사는 모든 사람이 로마의 시민권을 얻게 되었고 동맹전쟁은 종식되었다.

그러나 이 동맹전쟁에서의 승리는 평화를 가져온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전쟁으로 이어졌다. 바로 동맹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가이우스마리우스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권력투쟁을 낳은 것이다. 동맹전쟁 발발 이전에도 마리우스와 술라는 이미 로마를 위하여 숱한 전쟁에 참여하였고 공을 세웠다. 특히 마리우스는 로마 공화정을 지탱하고 있던 시민군 제도를 개혁하여 후일 제정(帝政) 로마의 직업군 제도를 만든 인물로 유명하다. BC 100년도 말기에 수십만에 이르는 게르만족들이 고향인 유틀란트 반도(덴마크)를 떠나 남진할 때 로마군은 노레이움과 아라우시오에서 게르만족에게 대패하였다. 특히 BC 105년 아라우시오(현 프랑스 아비뇽 북부)에서의 전투에서 로마군은 정규병과 보조병을 합쳐 10만이 넘는 군사가 전멸당하는 로마 역사상 최악의 패배를 당하였다. 다행히 게르만족은 바로 이탈리아 반도를 향하여 오지않고 에스파냐쪽으로 향하였다. 이 몇 년간의 시간동안 마리우스는 소규모인 마니풀루스(120명)를 기본대형으로 하는 이전의 전투시스템을 뜯어고쳐 보다 대규모인 코호르스(480명)를 중심으로 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이후 로마군의 상징이 되는 은빛 독수리(aquilia)가 등장하는 것도 이때이다.

에스파냐의 켈트족들의 강력한 저항에 막힌 게르만족은 다시 이탈리아 반도로 방향을 틀었지만 마리우스의 개혁으로 인하여 다시 강력해진 로마군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이때 대이동의 한 축이었던 테우토니족이 BC 102년에 아쿠아 섹스티아(Aquae Sextiae, 현 프랑스 악셍-프로방스)에서 마리우스의 로마군과 격돌하였는데 마리우스의 유인전술과 매복작전에 걸려들어 9만이 죽고 2만이 포로로 잡히는 참패를 당하였다. 그리고 게르만 대이동의 다른 축이었던 킴브리족은 이듬해인 BC101년에 부족원 21만중 14만이 전사하는 대패를 당한 후 전멸하였다. 로마를 위협하던 게르만족을 두 번의 결정적인 승리로 전멸시킨 마리우스는 일약 로마의 구세주로 등장하였다. 마리우스는 자신의 인기와 군세(軍勢)를 바탕으로 독재적 권력을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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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우스(왼쪽)과 술라(오른쪽)의 흉상. <출처:wikipedia>



술라는 BC 111년에서 BC 104년에 로마와 누미디아(현 알제리)왕 유구르타간의 전쟁에서 마리우스의 재무관(財務官)으로 참전하였다. 원래의 로마군 지휘관이었던 메텔루스가 유규르타의 용병술과 게릴라 전술에 대한 해결점을 찾지 못하고 고전하자 메텔루스의 부관인 마리우스가 로마로 돌아와 집정관으로 선출된 후 전쟁을 지휘하게 되었고 술라는 마리우스의 명령에 의하여 지금 모리타니 지방으로 가서 그 왕인 보커스의 지원을 받아 유규르타의 배후기지를 없애고 유규르타를 패배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술라는 군사적인 재능을 십분 발휘하여 BC 97년에는 카파도키아(현 터키 중부)에서 아르메니아왕 티그라네스의 침략군을 격퇴하였고 동맹전쟁 때는 삼니움 집단에게 밀리던 남부 전선의 사령관이 되어 전세를 역전시키고 삼니움족을 수세로 몰아넣었다. 동맹전쟁 중 그는 로마지휘관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영예 중 하나인 코로나 그라미네아(草冠)를 수여 받았다. 이후 술라는 BC 88년에 집정관으로 선출되었고 폰투스(현 터키 동부 흑해연안) 왕 미트리다테스가 로마의 통치에 반발하여 일으킨 전쟁에서 집정관으로 선출되어 로마군의 지휘를 맡는다.

그러나 술라가 미트리다테스와 싸우기 전에 로마의 의회는 술라의 집정관직 선출을 무효로 돌리려 하였다. 이는 자신이 고령임에도 아랑곳없이 미트리다테스 정벌군의 지휘권을 원한 마리우스의 책동 때문이었다. 마리우스의 사주를 받은 호민관 술피쿠스 루푸스는 일부 의원들을 의회에서 쫓아내어 표결에 필요한 정족의원수가 채워지지 못하도록 하였다. 군을 지휘하는 집정관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지휘권을 유지할 수 있는 관례이자 권리는 무시되었다. 이 때문에 의회에서 폭력사태가 벌어지고 결국 로마의 시내 전체가 폭동에 휩싸였다. 술라는 로마에서 탈출하여 이탈리아 남부로 피신하였고 그곳에서 자신과 동맹전쟁에서 싸웠던 병사들을 모았다. 술라와 그의 병사들은 로마에서 자신의 집정관직 박탈을 알리려고 온 전령들을 모두 죽였고 총 6개 군단을 모은 술라는 로마로 진군하였다. 마리우스는 검투사였던 노예들을 모아 술라군과 싸웠으나 동맹전쟁을 겪은 술라의 정예병들에게 패하고 겨우 몸을 빼서 북아프리카로 피신하였다. 로마에서 권력을 잡은 술라는 마리우스와 전 호민관 술피쿠스등을 로마의 공적(公賊)으로 규정하고 마리우스의 추종자들을 처형하였다. 술라는 의회의 권력을 강화하는 조치를 취하여 권력기반을 다진 후 다시 군단병들을 이끌고 원래의 목표였던 미트리다테스를 정벌하러 떠나면서 내전은 진정되는 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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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로 돌아온 마리우스.



그러나 술라가 미트리다테스를 정벌하러 떠난 사이 마리우스는 집정관인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와 공모하여 로마로 돌아올 것을 획책하였다. 마리우스는 킨나와 동맹전쟁에서 공을 세운 또 다른 장군인 퀸투스 세르토리우스와 힘을 합쳐 로마를 점령하였다. 비록 마리우스를 돕기는 하였지만 세르토리우스는 그를 탐탁치 않게 여겼고 마리우스가 고용한 노예병들이 난동을 일으키자 세르토리우스는 정규병으로 노예병들을 처단하고 난동을 진압하였다. 마리우스는 스스로 집정관에 취임하고 키나 역시 집정관으로 재선출되었으나 로마귀환 불과 한 달 후에 마리우스가 사망하면서 로마의 정계는 키나의 독무대가 되었다. 키나는 동쪽으로 정벌을 떠난 술라와 싸우려고 군사들을 모집하여 남부 이탈리아로 갔다가 군사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무리하게 진압하려 하다가 살해당하고 말았다.

이때 폰투스왕 미트리다테스의 편에서 서있던 그리스의 ‘독립’ 세력들을 무찌르고 반란을 일으켰던 그리스를 다시 로마의 통치하에 편입시킨 술라는 군을 이끌고 브룬디시움에 상륙한 다음 로마로 진군하였다. 로마에 남아있던 마리우스와 킨나의 추종자들은 로마로 돌아오는 술라를 막으려고 하였고 이리하여 다시 이탈리아 반도에서 로마인들끼리의 싸움이 벌어진다. 술라군은 마리우스의 아들인 소(少)마리우스의 군을 맞아 이를 프라에네스타에(현 이탈리아 팔레스트리나)에서 격파하고 로마로 향하였다. 그리고 로마의 콜리나 관문(Porta Collina)에서 그를 막으려는 폰티우스 텔레시누스의 군을 맞아 이를 무찌르고 로마에 입성한다. 술라의 로마 재입성 과정에서 술라군의 우익을 맡은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란 인물이 텔레시누스군을 격파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술라와 더불어 그의 정치적인 입지가 급상승했다. 크라수는 후일 카이사르, 폼페이우스와 함께 제 1 삼두정(First Triumvirate)의 일원이 된다. 아울러 후일 로마 정계에서 거물로 등장하는 폼페이우스 역시 술라를 도와 마리우스의 잔당 중 한 명인 카르보를 아프리카 등지에서 격파하였다. 로마에 입성한 술라는 키나의 잔당들을 없애려고 하였고 그 중에는 키나의 사위인 율리우스 카이사르라는 젊은이가 있었다. 카이사르는 그의 외가의 강력한 변호로 겨우 살아남을 수 있었다. 로마역사가 수에토니우스에 의하면 술라는 카이사르를 변호하는 자들에게 젊은 카이사르에서 마리우스의 모습이 보인다고 말하였고 이후 카이사르를 죽이지 못한 것을 몹시 후회하였다고 한다. 이후 로마에서는 술라에 대적할 자가 없게 되었으며 술라는 독재관(dictator)으로 선출되어 로마의 군령권과 행정권, 입법권 모두를 장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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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사레 마카리가 그린 로마 의회. 키케로가 카틸리나를 성토하고 있다. <출처:wikipedia>





전제정치를 향하여



동맹전쟁으로 시작하여 술라의 집권으로 이어지는 시기는 이후 로마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첫 번째는 로마의 정치에서 군대가 상당히 중요한 변수로 등장하였다는 것이다. 공화정의 군대는 기본적으로 자유민 농민이 주축이 된 시민군 형태로 유지되었고 이들은 나라를 위하여 싸우는 것을 의무로 받아들였고 아울러 의무에 따르는 권리를 지키려고 애썼다. 이러한 시민군적 전통은 로마 공화정에서 의회의 귀족들에 맞서 평민의 권리를 유지하는 중요한 요소로서 작용하였다. 그러나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군제개혁으로 시민군이 직업군으로 바뀌면서 군인들의 충성대상은 ‘로마’라는 나라대신 그들을 이끄는 지휘관이 되었다. 군제개혁을 단행한 마리우스 스스로도 자신의 병사들의 힘을 배경으로 권력을 장악하려 들었다. 술라 역시 동맹전쟁에서 자신이 거느렸던 병사들의 힘으로 정적들을 물리쳤다는 점에서 군대가 정쟁에서 유력한 도구로 등장한 것이다. 이후 폼페이우스나 카이사르 역시 같은 방법으로 정권을 차지하고 유지하게 된다.

두 번째는 평민들과 귀족들의 이해가 첨예하게 대치되면서 민(民)을 기반으로 하는 세력(평민파, populares)와 엘리트 귀족에 주축으로 하는 세력(귀족파, Optimates)으로 로마의 정치계가 양분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평민파라고 하여 이들이 평민 출신이거나 평민의 이해를 진정으로 대변하였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평민파의 구분은 그들의 출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권력의 장악을 위하여 귀족들에 의한 의회정치보다는 평민들의 민의회와 평민/빈민들의 폭력성을 십분이용하는 세력이란 뜻이다. 가이우스와 술라의 정쟁역시 이러한 패턴의 연장이었으며 이후 로마역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역시 평민파와 귀족파로 나뉘어 서로 경쟁하게 된다.

세 번째는 정쟁이 격화되면서 귀족 엘리트끼리 정치권력을 나누어가지는 과거로 부터의 합의정치가 실종된다는 것이다. 유력가문들이 주도하는 의회(Senate)위주의 합의 정치는 왕정이 없어지고 공화정이 출범한 이래 크게 바뀐 일이 없다. 그러나 공화정 로마가 팽창을 거듭하고 많은 노예와 황금, 그리고 군사들이 넘치면서 이를 바탕으로 남을 견제하는 정도를 넘어 상대보다 더 많은 권력을 차지하고 심지어 독점하려는 경향이 심해진다는 것이다. 많은 자금과 군대, 또는 평민들의 폭력성을 배경으로 정치권력을 휘두르는 권력자들의 독재적 성향이 심해지면서 반대로 이를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는 의회의 상대적인 무능이 드러난 것이다. 이후 합의가 아닌 독점을 위한 정쟁이 더욱 더 격화된다.

술라가 정권을 독점하고 있을 때는 정쟁이 상대적으로 잠잠하였으나 이는 사실 술라의 무자비한 숙청작업때문이었다. 일설에 의하면 술라는 자신이 미트리다테스와 싸우고 있을 때 로마에 대한 적대행위를 하였다는 명목으로 거의 1만에 가까운 귀족과 기사계급 인물들을 처형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때 사형당한 인물들의 가족은 관직에 나아가는 것이 금지되었다고 한다. 그의 영향력은 사후에도 유지되어 BC 78년에 술라가 제정한 법을 무효화시키려고 하던 레피두스는 평민파의 편에서 술라가 빼앗은 땅들을 원주인들에게 돌려주려고 하다가 귀족파의 카탈루스에게 패하고 유배지에서 죽었다. 이로서 귀족파 위주의 엘리트 정치가 재현되는 듯 하였으나 술라의 예언이 들어맞았던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라는 정치가가 등장하면서 로마의 정계는 다시 내란의 혼돈 속으로 빠져든다.

참고문헌: Joseph Tainter, [The Collapse of Complex Societies]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8). Appian, [The Civil Wars]




김성남 | 안보·전쟁사 전문가
글쓴이 김성남은 전쟁이 인간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 UC 버클리 동양학과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국제학 석사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에 진학하여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전쟁으로 보는 삼국지], [전쟁 세계사] 등이 있으며 공저로 [4세대 전쟁]이, 역서로 [원시전쟁: 평화로움으로 조작된 인간의 원초적인 역사]가 있다.


발행2011.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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