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로마 내전 (2) - 제국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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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30회 작성일 16-02-07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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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renzo A. Castro, 1672, 악티온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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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표


로마 내전 전쟁 개요

전쟁주체


1단계: 마리우스파 vs 술라파

2단계: 카이사르(평민파) vs 폼페이우스 (귀족파)

3단계: 옥타비아누스 vs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전쟁시기


기원전 91~기원전 31

전쟁터


이탈리아 반도, 시칠리아, 히스파니아(에스파냐), 그리스, 북아프리카

주요전투


콜리나 관문 전투, 일레르다 전투, 디라키움 전투, 파르살루스 전투, 문다 전투, 빌립보 전투, 악티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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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을 향하여 –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



르네상스 시대의 정치철학자 마키아벨리는 군주의 덕목을 이야기하면서 ‘함정을 피할 수 있는 여우의 꾀와 늑대들을 벌벌 떨게 하는 사자의 힘’을 갖추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여우의 꾀’와 ‘사자의 힘’의 출처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아니라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로마 정치가 카르보(Gnaeus Papirius Carbo)가 동맹전쟁 이후의 내전에서 승리하고 집권한 술라를 두고 한 말이라고 플루타르코스는 적고 있다. (카르보가) 자신은 술라와 겨루면서 여우와 사자를 동시에 상대하여야 했다고 하는데 ‘사자’보다는 ‘여우’가 오히려 더 싸우기가 힘들었다고 하고 있다. 즉 술라는 장수로서의 힘을 지님과 함께 모략에도 능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대단한 인물이었던 술라조차 ‘이 카이사르라는 젊은이에게서 마리우스의 모습이 많이 보인다‘고 하고 있다. 술라는 정계에 제대로 진출하지도 않은 젊은이에게서 자신의 최대의 라이벌이었던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모습이 보인다고 하는 것이다. 술라는 1만명에 가까운 정적들을 죽이던 대숙청 과정에서 카이사르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유력가문들이 카이사르를 적극적으로 변호하는 바람에 죽이지 못하였는데 이후 죽이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술라의 예언은 현실로 드러나게 된다.

카이사르의 집권과정은 비록 군대의 힘과 때로는 민중의 폭력을 권력획득에 이용하는 당시 로마정치의 패턴을 따르기는 하였지만 얼핏 보면 술라의 집권과정과 비슷하다. 외지에 대한 정복전쟁을 통하여 명성을 획득하고 군대의 지지를 얻은 것도 그러하고 그의 정적들에 의하여 ‘공적’으로 규정된 것도 같고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군하여 그의 정적들을 내어 쫓은 것도 닮아있다. 그러나 술라와 카이사르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술라가 비록 전권을 장악하고 독재정치를 하기는 하였지만 그는 독재관으로서 할 것을 다하였다고 여기는 순간 권력을 내려놓고 로마의 정치를 이전의 집정관/의회중심체제로 돌려놓았다. 비록 독재를 행하기는 하였지만 의회중심의 합의정치를 전통이라고 생각하는 보수적 로마 정치인으로서 어찌 보면 당연한 행동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술라가 예언하였듯이 야심이 남달랐다. 카이사르 역시 이후 독재관이 되기는 하였지만 권력을 내려놓을 마음이 없었다. 수에토니우스의 [12황제 열전]에 의하면 카이사르는 술라가 권력을 내려놓은 것을 두고 ‘A, B, C’도 모르는 행동이라며 마구 비웃고 있다. 카이사르는 단순히 권력을 누리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는 로마의 권력이 다른 형태로서 행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독재관으로서의 임기를 무시하고 이후 종신 독재관으로 선출된 것만 해도 그러하다. 이러한 야심은 로마에 대격변을 불러왔으며 이후의 로마역사를 바꾸어놓았다.



카이사르 vs 폼페이우스



술라의 퇴임 후에도 로마 정치의 혼돈은 계속되었지만 이전부터 진행되고 있던 로마의 팽창 역시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술라의 미트리다테스 정벌로 로마는 터키와 아시아방면으로 본격적인 진출을 하였다. 그리고 지금의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지역을 영향권으로 확보하였다. 이후 카이사르는 지금 스위스에 살고 있던 헬베티족의 갈리아 침공을 막는다는 명분하에 군대를 이끌고 갈리아로 갔다. 이후 십여 년간 벌어진 갈리아 원정에서 수에비족, 벨게이족, 그리고 아베르니족이 주축이 된 갈리아족의 대동맹을 모두 격파하고 갈리아 대부분의 지역을 로마의 판도로 확실히 편입시킨다. 이후 브리타니아로 원정군을 이끌고 지금의 영국 남부에 친 로마파 군장을 세우고 귀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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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좌)와 폼페이우스(우)의 흉상.



카이사르의 라이벌이 되는 인물들도 가만있지만은 않았다. 이 당시 권력을 획득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군대를 이끌고 군공(軍功)을 세우는 것이었다. 폼페이우스 역시 이탈리아에서 동맹전쟁이 끝나자 시칠리아의 마리우스파들을 일소(一掃)하고 아프리카로 건너가서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와 그 지역의 왕인 히아르바의 연합군을 제압하였다. 이후 술라는 폼페이우스가 아직 공식적인 직함이 없음에도 마그누스란 호칭으로 불렀다. 폼페이우스는 아직 어려 당장 호칭을 사용하지 못하였지만 나이가 든 후에는 대(大) 폼페이우스로 행세하였다. 아프리카에서 돌아온 후 히스파니아에서 마리우스의 추종자인 세르토리우스가 군대를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려고 출전하였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폼페이우스의 활약(?)은 신통치 못하였다. 거의 10년이 가도 세르토리우스를 쳐부수지 못하고 오히려 세르토리우스의 유격 전술에 고전하였다. 폼페이우스는 세르토리우스가 그 밑의 부관에게 암살당하자 그 부관을 쳐부수고 겨우 전쟁을 이길 수 있었다. 이후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 등의 지원을 얻어 로마의 해군에 대한 전권을 장악하고 로마의 지중해상 식량수송로를 위협하던 해적들을 없애면서 다시 명성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이후 다시 폰투스에서 반항하는 미트리다테스를 BC 65년에 쳐부수고 폰투스를 아예 로마의 속주로 편입시켰다. BC 64년에는 시리아의 왕 안티오쿠스를 폐하고 시리아를 로마의 영토로 만들었으며 유대왕국의 내전에 개입하여 유대왕국을 사실상의 속국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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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에게 항복하는 베르킨게토릭스.



술라를 도와 콜리나 관문에서 삼니움군을 쳐부수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크라수스는 그 유명한 스파르타쿠스가 일으킨 노예군에 맞서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BC 71년 실레루스강의 전투에서 노예군과 격돌한 크라수스군 3만은 노예군을 무찌르고 노예전쟁을 종식시켰다. 그러나 로마근처에서 일어난 대규모 반란임에도 ‘겨우’ 노예들을 무찔렀다는 이유로 대규모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들에게 주어지는 개선행진을 거부당하였다. 사실 크라수스의 공이 대단한 것이 아니라며 크라수스의 개선행진을 거부하는데 앞장 선 것은 폼페이우스였고 크라수스는 이 때문에 ‘건방진’ 폼페이우스에게 적개심을 품게 되었다.

비록 서로를 잠정적으로 ‘정적’으로 여기고 경쟁하고 있었지만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그리고 크라수스는 BC 59년에 삼두체제를 형성한다. 물론 공식적인 체제는 아니고 서로의 이해와 견제에 의하여 유지되는 비공식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BC 59년 카이사르의 집정관 임기가 다했을 때 로마 의회는 카이사르가 군대를 지휘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총독직 대신 국유림을 감독하는 한직(閑職)을 맡겼지만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의 도움을 받고 민의회의 동의를 얻어 총독직을 거머쥐었다. 카이사르는 일리리아(구 유고슬라비아), 이탈리아 북부와 갈리아 남부지방의 총독을 맡게 되었고 4개의 군단을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을 얻었다. 이와 더불어 크라수스는 새로이 생긴 시리아의 총독이 되었다. 돈 많은 동방의 속주를 얻음으로써 상당한 부를 축적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지만 동방을 평정한 폼페이우스, 갈리아를 정복한 카이사르 등에 비하여 위명이 떨어진다고 생각한 크라수스는 파르티아를 정복하여 자신의 위상을 높이려는 생각에 BC 53년에 파르티아의 영역으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파르티아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크라수스군은 카르헤에서 수레나가 이끄는 파르티아군의 치고 빠지는 전술에 말려 대패하고 크라수스 자신도 전사하고 말았다. 그리고 일설에 의하면 크라수스의 잘린 머리는 이후 파르티아의 왕궁연회에 등장하여 조롱거리가 되었다고 한다.

크라수스의 전사로 삼두체제가 무너지자 그 이듬해인 BC 52년에 로마의회는 폼페이우스를 유일 집정관으로 추대하였다. 카이사르 역시 총독의 임기가 끝나면 집정관이 될 계획이었지만 막강한 군대의 힘을 등에 업은 독재자의 출현을 두려워한 의회는 카이사르에게 휘하 군단의 지휘권을 포기할 것을 종용하였다. 술라가 독재관직을 내놓은 것을 비웃을 정도로 권력에 대한 집착에 강했던 카이사르가 의회의 ‘권고’를 받아들일 리가 만무하였다. 카이사르는 의회에 서신을 보내어 만약 폼페이우스 역시 그 휘하 군단의 지휘권을 포기한다면 자신도 그러할 것이라고 하였다. [로마사]의 저자인 아피아누스는 카이사르는 귀족들 모두가 군권을 내려놓을 것을 주장한 것이라며 카이사르의 제안은 매우 합리적인 것이라고 하여 카이사르를 사실상 옹호하고 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만약 자신이 집정관이 되지 못한다면 총독임기가 끝난 후 자신의 총독직 수행에서 발생하였다는 ‘비리’와 갈리아에서의 ‘범죄’에 대한 의회의 추궁을 받고 처벌당할 수도 있기에 자신의 안위가 보장되지 않는 한 군대의 지휘권을 내려놓을 수 없다는 정치적인 판단을 한 것뿐이었다.

카이사르의 서신을 받은 의회는 카이사르의 ‘오만’에 분노하여 카이사르에게 즉시 군단을 해산할 것을 요구하였고 카이사르가 군대를 해산하지 않으면 공적(公賊)으로 선포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에 대한 법안을 통과시켰다. 호민관이었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카시우스 롱기누스는 법안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하였지만 의회로부터 축출당하고 말았다. 사실 법적으로는 총독임기가 끝날 때까지 총독은 휘하 군단의 지휘권을 유지할 수 있기에 법적인 정당성은 카이사르에게 있었다. 그러나 카이사르를 두려워한 의회가 다소 무리수를 두었고 설상가상으로 카이사르의 총독임기가 다하자 의회는 카이사르에게 로마로 즉시 돌아올 것과 함께 그 군사들을 해산하고 카이사르의 집정관 출마의 길을 막아버렸다. 이에 카이사르는 로마에서 도망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롱기누스와 함께 거병을 하였고 제 13군단을 이끌고 자신의 영지인 남부 갈리아를 떠나 로마로 향하였다. 이때 카이사르는 그 유명한 “주사위는 던져졌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아피아누스의 [로마사]에는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기록이 있는데 카이사르가 자신의 행동이 어떠한 결과를 낳을 것인지를 몹시 고심한 후 떨쳐 일어나면서 자신의 군병들에게 “나의 벗들이여, 만약 내가 이 강을 건너지 않으면 나 자신에게 많은 재앙이 닥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건넌다면 만인(萬人)에게 우환이 닥칠 것이다”라고 전제한 뒤, “주사위는 던져졌다. 이제 어쩔 수 없다”라고 하며 진군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카이사르를 따르는 병력은 1개 군단뿐이었지만 로마의 의회는 당장 쓸 수 있는 병력이 없었고 세불리(勢不利)를 깨달은 폼페이우스는 그를 따르는 귀족들과 함께 카푸아로 후퇴하여 병력을 모았다. 카이사르는 로마에 들어갈 때 마치 개선장군처럼 입성하였다. 그러나 폼페이우스에게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하여 오래 머무르지 않고 폼페이우스를 추격하였다. 폼페이우스는 이때 이미 2개의 군단을 모았고 그의 부하인 도미티우스가 추가병력까지 거느리고 있었다. 폼페이우스는 좀 더 안전한 곳을 찾아 브룬디시움(현 이탈리아 브린디시)으로 떠나면서 도미티우스에게 싸울 것을 종용하였지만 도미티우스는 싸우기를 주저하였고 카이사르에게 패하고 말았다. 결국 폼페이우스는 이탈리아 반도를 떠나 아드리아해를 건너 그리스로 피신할 수 밖에 없었다. 폼페이우스가 그리스로 떠나기 전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에게 사절을 보내어 예전의 동맹을 다시 맺자고 하였지만 폼페이우스는 현임 집정관으로서의 정당성을 내세우며 카이사르가 의회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주장을 되풀이하였다. 결국 어느 한 쪽이 포기하지 않는 한 둘은 칼과 창으로서 결판을 낼 수밖에 없었다.



일레르다, 파르살루스, 문다 – 카이사르의 승리와 죽음



카이사르는 전격적인 진군으로 로마를 차지하기는 하였지만 전국에 널려있는 폼페이우스의 추종자들을 완전히 진압하지 않고는 승자가 되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일단 당장 폼페이우스가 있는 그리스를 치기보다 다른 지방의 추종자들을 치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한 카이사르는 히스파니아로 가서 폼페이우스의 부하였던 아프라니우스와 페트레우스과 대결하였다. 카이사르의 히스파니아 원정은 카이사르가 이동 중이던 적군을 추적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고 큰 전투는 없었다. 카이사르군은 한 때 비가 많이 오면서 물이 불어난 두 개의 강 사이에 갇히면서 식량이 떨어져 위기를 맞기도 하였으나 결국 아프라니우스와 페트레우스의 군을 일레르타 근처에서 포위하는데 성공하였다. 아프라니우스와 페트레우스는 탈출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결국 카이사르를 찾아가 항복하였다. 카이사르는 적군을 죽이는 대신 해산을 요구하였고 히스파니아의 폼페이군은 전부 해산되어 더 이상 카이사르에게 위협이 되지 못하였다. 카이사르는 그의 관대함을 과시하여 히스파니아의 시민들 사이에서 정치적인 입지를 높이는 동시에 자신의 군대를 상하지 않게 하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것이다.

히스파니아를 무력화하여 배후를 안정시킨 카이사르는 브룬디시움에 병사들을 집결시켜 폼페이우스가 도망한 에피로스로 향하였다. 15000의 병사를 이끌고 아드리아해를 건넌 카이사르는 사실 상당히 불리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폼페이우스의 부하 비불루스가 함대를 거느리고 배들이 오가는 것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카이사르가 비불루스의 봉쇄를 용케 피하여 에피로스에 도착하기는 하였지만 비불루스는 카이사르군이 상륙한 곳을 찾아 배를 거의 모두 불태웠다. 그리스 지역은 대부분 폼페이스파의 영역이었고 카이사르군은 식량과 병력을 막론하고 어떠한 지원도 기대할 수 없었다. 카이사르는 협상을 시도하였지만 자신이 우위에 있는 것을 안 폼페이우스는 이를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로마에서 폼페이우스를 몰아낸 카이사르는 거꾸로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탈리아에 남아있던 카이사르의 부하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비불루스의 후임인 리보의 해상봉쇄를 뚫고 디라키움(현재 알바니아의 뒤레스)에 원군을 상륙시키는데 성공하였다. 폼페이우스는 안토니우스군을 공격하기 위하여 움직였으나 카이사르군도 그 뒤를 쫓아 움직였고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 사이에서 협공을 당할 것을 우려한 폼페이우스는 디라키움 요새에 입성하여 농성하였다. 안토니우스와 군을 합친 카이사르는 디라키움을 포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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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살루스 전투에서의 양군(兩軍) 배치도.



그러나 정작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보다 폼페이의 농성군이 오히려 그 수가 많았다. 한동안 항구를 통하여 보급을 받았지만 자신의 대군이 필요한 마초(馬草)와 식수를 구하기가 점점 어려워지자 폼페이우스는 포위군을 공격하였다. 카이사르군에서 폼페이우스쪽으로 투항한 투항병들에 의하여 포위망의 약점이 드러났고 수적으로 월등한 폼페이우스군의 공격에 포위망이 뚫렸다. 예비병력을 투입하고도 폼페이우스군의 공격을 버틸 수 없게 되자 카이사르는 자기 군사들의 무질서한 도주를 막기 위하여 후퇴를 명령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폼페이우스는 매복을 염려하여 카이사르군을 추격하지 않았고 카이사르는 인근의 곰피란 도시를 공격한 후 군을 쉬게 하였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는 디라키움 전투 약 1개월 이후 파르살루스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폼페이우스의 군은 여전히 카이사르군보다 숫자가 많았다. 폼페이우스의 군대는 총병력 44,000명. 그 중 약 7천이 기병이었고 이에 맞서는 카이사르의 군은 22,000명. 그 중 1000명이 기병이었다. 만약 정면대결을 한다면 카이사르가 불리할 것임은 자명하였다. 아울러 파르살루스 평원은 약간의 경사가 있었고 폼페이우스군이 높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또한 폼페이우스는 그리스 지역과 아시아, 레반트 지역의 군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카이사르군은 이미 보급품도 떨어진 상태에서 “최후의 결전”을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전투에 임할 수밖에 없었다. 객관적인 상식으로는 폼페이우스군이 승리하여야 했지만 인간의 심리란 워낙 예측불허여서 절대절명의 위기에 처해있을 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절망하는 자들도 있는가 하면 몇 배의 힘을 발휘하며 발악적으로 싸우는 자들도 있다. 중국 고대에서 초-한전쟁 중 한신(韓信)이 조나라를 공격할 때 일부러 강을 등 뒤에 둔 배수지진(背水之陣) 전법으로 병사들의 적극성을 이끌어낸바 있다. 카이사르도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이 상황을 병사들에게 주지시키며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상황임을 역설하였다.

이 전투는 카이사르의 우익(폼페이우스의 좌익)에서 결정되었다. 카이사르군 보병이 진격을 시작했을 때 폼페이우스는 그들이 먼 거리를 뛰느라 지치고 대오가 풀어지기를 기다려 반격하려 하였지만 카이사르의 군병들은 스스로 대오가 풀어지는 것을 깨닫고 돌격을 멈추어 대오를 재정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와중에서 폼페이우스의 기병대장인 라비에누스가 카이사르군의 우익에 포진된 기병을 공격하였다. 카이사르의 기병은 밀리는 듯 하였으나 이는 유인작전이었다. 카이사르는 미리 숨겨둔 예비대로 하여금 폼페이우스 기병대를 공격하게 하였다. 특히 창병들에게 (로마군의 관습대로) 창을 던지는 대신 기병들을 찌르는 공격을 하였다. 뜻밖의 공격을 받은 폼페이우스 기병대는 무질서하게 후퇴하였고 폼페이우스군의 왼편이 비게 되었다. 카이사르의 기병대와 매복부대는 폼페이우스군의 왼편으로 돌아 뒤에서 공격을 시작하였고 양면 공격을 받은 폼페이우스군은 붕괴되었다. 폼페이우스는 전장을 이탈하여 군진으로 돌아가 황금을 챙겨 달아났다. 카이사르군이 절대적인 수적 열세에도 아랑곳없이 폼페이우스의 대군을 격파한 것이다.

파르살루스 전투는 카이사르-폼페이우스간 내전의 분수령이 되었다. 이 전투로 인하여 카이사르 못지 않은 전쟁영웅이었던 폼페이우스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다. 이전에 폼페이우스편에 섰던 모든 속국의 군주들과 로마의 귀족들이 모두 카이사르편으로 돌아섰다.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도망갔다가 파라오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명으로 암살당하였다. 로마의 사실상의 최고 권력자가 된 카이사르의 환심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정작 폼페이우스를 죽일 마음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오히려 그의 숙적을 생포한 후 용서하는 ‘퍼포먼스’를 통하여 다시금 관대함을 과시하고 정치적인 위상을 드높일 생각이었다. 이집트에서 도착한 카이사르는 비록 진심인지의 여부는 불투명하지만 폼페이우스의 잘린 머리를 보면서 통곡하였다 한다. 그리고 그의 ‘친구’를 죽인 프톨레마이오스와 환관 포티누스를 증오하게 되었다. 카이사르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아내이자 누나인 클레오파트라 7세와 연합하여 프톨레마이오스를 내쫓고 클레오파트라를 이집트의 새로운 임금으로 세운다.

폼페이우스가 죽었다고 하여 전쟁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폼페이우스의 아들 소(少) 폼페이우스와 라비에누스를 비롯하여 폼페이우스의 잔당들이 아직 히스파니아와 아프리카에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는 BC 46년에 귀족파인 카에킬리우스 메탈루스와 이전에 히스파니아에서 놓아주었던 아프라니우스, 페트레우가 버티고 있는 아프리카(튀니지)로 향하였다. 아프리카의 귀족파는 누미디아 왕 주바의 증원을 받아 코끼리 60마리를 포함하여 7만이 넘는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카이사르가 동원한 병력은 6만이었다. 이 전투에서 카이사르군 궁수들은 상대의 코끼리들을 겨냥하여 활을 쏘았고 화살에 맞아 놀란 코끼리들이 귀족파 군대를 짓밟는 바람에 대혼란이 일어났다. 카이사르군은 이들을 공격하여 다시 대승을 거두었다.

아프리카를 평정한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아들과 라비에누스가 있는 히스파니아로 향하였는데 소 폼페이우스의 귀족군과 카이사르군은 지금의 에스파냐 남쪽에 있는 문다에서 격돌하였다. 소 폼페이우스는 그동안 무려 13개 군단에 해당하는 병력을 모아놓고 있었다. 이에 비하여 카이사르의 병력은 8개 군단이었으니 비록 파르살루스만큼은 아니지만 다시 열세상태에서 싸우게 된 것이다. 귀족파 군대는 파르살루스에서와 마찬가지로 경사지의 높은 곳에 위치하였다. 카이사르는 귀족파 군대를 유인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결국은 정면대결을 하게 되었다. 전투는 여러 시간 치열하게, 그러나 그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상태로 진행되었다. 카이사르는 그의 우익이 힘에 부치는 듯하자 직접 지휘를 맡았고 이로서 힘을 얻은 우익이 귀족군의 좌익을 밀어붙였다. 자신의 좌익이 밀리는 것을 본 소 폼페이우스는 우익의 일부를 이동시켜 좌익을 보충하려 하였고 카이사르는 이를 놓치지 않고 기병대로 기습을 하였다. 라비에누스가 이를 보고 기습군을 막으려고 하였으나 라비에누스 부대의 움직임을 후퇴로 잘못 안 폼페이우스 부대가 뒤돌아 달아나기 시작하였고 이는 전군의 붕괴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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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 사망 당시(BC 44년)의 로마영토.



문다에서의 승리는 그야말로 결정적이었다. 더 이상 로마의 영내 그 어디에도 카이사르를 막을 자는 없었다. 카이사르는 로마로 돌아가 종신 독재관으로 선출되었다. 독재관은 원래부터 국가의 위기 시에 한 사람에게 전권을 몰아주는 제도여서 견제가 어려웠던 데다 임기가 없었기에 사실상의 왕이나 다름없었다. 카이사르는 당시에는 ‘총수(總帥)’의 의미였지만 후일 황제들이 스스로를 칭할 때 사용하게 되는 ‘임페라토르(Imperator)’라는 호칭을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며 아울러 선출직 관료들을 늘려 귀족들의 관직진출기회를 축소함과 동시에 그의 지지자 수를 늘릴 수 있는 방안을 시행하였다. 군권을 장악하고 독재관 지위를 통하여 정치권력을 독점한데다가 민중(Populares)의 지지까지 받고 있던 카이사르를 견제할 방법은 사실상 없었다. 이에 로마 귀족 의원들은 그의 암살을 공모하였고 카이사르는 BC 44년에 의회 건물 안에서 약 60여명의 귀족 의원들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이는 여담이지만 카이사르가 23차례 칼에 찔려 생명이 다하는 순간에 자신이 자식처럼 아꼈던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를 보면서 “브루투스, 너도?”라는 말을 하고 죽었다고 하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러나 로마시대 사서 어디에도 카이사르가 그 말을 하였다는 증거는 없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중 ‘카이사르 전기’에서는 카이사르가 찔린 상태에서도 도망가다가 칼을 든 브루투스를 보고 옷을 뒤집어 쓴 다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었다고 되어있다. 수에토니우스의 [12황제 열전]에서도 다른 사람들이 카이사르가 ‘아이(브루투스)야, 너도?’라고 하였다고 기록한 일이 있다고 할 뿐, 정작 카이사르는 말없이 죽었다고 쓰고 있다. “브루투스, 너도(Et tu, Brute?)”라는 말이 등장하는 곳은 로마의 사서가 아니라 셰익스피어의 비극인 ‘율리우스 카이사르’이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들어있던 말이 영어권에서 자주 인용이 되면서 마치 카이사르가 한 것처럼 재가공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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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레옹 제롬므(Jean-Leon Gerome)의 ‘카이사르의 죽음’





제국의 완성



비록 카이사르는 그의 권력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었지만 그에게는 걸출한 정치력을 지닌 양아들 옥타비아누스가 있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 사망 당시 불과 19세였다. 그는 일단 로마로부터 몸을 빼서 카이사르의 군단병들의 신임을 얻고 이들을 앞세워 로마로 돌아갔다. 로마에서는 카이사르를 살해한 자들이 거의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하였으며 오히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많은 귀족들을 로마에서 몰아낸 상태였다. 옥타비아누스는 별로 미덥지 못했지만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일종의 동맹을 맺고 동시에 키케로의 지지도 얻어 그를 어리다고 무시하는 안토니우스를 견제하였다. 옥타비아누스는 BC 43년에 의원으로 선출된 후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와 함께 제 2차 삼두정을 형성한다. 그리고 BC 42년에는 죽은 양아버지인 카이사르를 공식적으로 ‘신(Divi)’으로 격상시키고 자신은 ‘신의 아들’이라고 하였다.

이때 그리스에서 군세를 모으고 있던 브루투스와 카시우스가 도전해오자 옥타비아누스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힘을 합쳐 적을 빌립보에서 무찔렀다. 이 전투에서 패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자살하였다. 옥타비아누스는 정치에 전념하기 위하여 그의 군대에 대한 지휘권을 친구였던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에게 넘겼다. 사실 빌립보의 승리는 안토니우스의 역할이 결정적이었기에 안토니우스는 이를 두고 옥타비아누스가 군사적으로 미숙하다며 드러내놓고 무시하였다. 이후 삼두정의 삼인은 로마를 나누어 옥타비아누스가 서부, 안토니우스가 동부, 그리고 레피두스가 아프리카를 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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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 像.



이후 안토니우스는 이집트로 가서 클레오파트라를 만나 사실상의 부부로 살았다. 이 와중에서 파르티아를 정벌하여 이를 기반으로 로마를 도모하려 하였으나 그는 많은 병력과 돈을 낭비하고 별 소득 없이 정벌을 마무리 지었다. 한편 이때 옥타비아누스는 대 폼페이우스의 차남인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시칠리아에서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고 있었다. 아그리파의 도움으로 시칠리아 반란을 평정한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파르티아 원정을 실패하고 이집트에서 돌아오지 않는 것을 꼬투리 잡아 그가 더 이상 로마인이 아니라고 공격하였다.

안토니우스가 아르메니아를 정벌하고 이를 그의 아들에게 주자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로마의 위상을 떨어뜨리고 있다고 주장하며 그를 로마인들의 마음에서 멀어지게 하였다. 이 때 옥타비아누스는 정치적인 책략의 일환으로 안토니우스가 삼두정의 일원을 사임한다면 자신 역시 사임할 것을 제안하였지만 안토니우스는 그의 예상대로 거부하였다. 사실 이는 옥타비아누스가 자신을 보다 관대하기 보이기 위한 술책이었으며 이 때문에 안토니우스를권력욕에 불타는 악당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의회를 움직여 BC 32년에 공식적으로 안토니우스의 집정관직을 박탈하였고 그와의 전쟁에 돌입하였다. 이윽고 BC 31년에 옥타비아누스와 아그리파의 함대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함대를 악티움에서 격파하였고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로 도망간 후 옥타비아누스의 군대에 잡히기 전 자결하였다. 그리고 BC 27년에 옥타비아누스는 ‘제 1시민’을 뜻하는 프린켑스(Princeps)의 지위와 함께 ‘영광된 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Augustus) 칭호를 획득하였다. 비록 명목상으로는 아직도 집정관의 권위로 로마를 다스렸지만 의회가 무력화된 상태에서 옥타비아누스는 전제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다. 로마의 ‘공화정’이 끝나고 ‘제정’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제국은 다르다



제정에서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단순히 의회가 약해지고 황제가 서는 것으로 간단히 설명될 수가 없다. 국가의 체제 자체가 달라지는 것이다. ‘제국’들의 체제를 전문적으로 연구해온 미국의 정치학자 마이클 도일(Michael Doyle)은 아우구스투스의 등장과 체제변혁은 단순히 로마에만 국한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합의정치를 하던 국가가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면서 생기는 일반적인 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하였다. 즉 이전의 정치체(Political body)가 제국(Empire)이라는 다른 정체체제로 바뀌는 과정을 보여주는 가장 좋은 사례가 아우구스투스의 등극과 로마제정의 출현이라는 것이다.

권력이 중앙에 집중이 되면 각 지역을 다스리는 귀족(Lords)들이나 지방관리들이 자신들의 독자성이 훼손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이를 반대하기 마련이다. 이들은 인적관계와 모략을 통하여 중앙 조정(朝廷)관리들로부터 그들의 독자성을 지키려고 한다. 중앙권력(특히 군주)은 이에 대응하여 지방권력의 분배자가 되어 지방권력을 기득권 세력으로부터 독립시키려 한다. 로마가 공화정(共和政)에서 제정(帝政)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아우구스투스는 변방 속주의 총독들을 직접 임명함으로써 자신의 직접적인 통치하에 두었다.

아우구스투스는 뒤이어 관제를 정비하고 전국의 군대를 장악하여 제국의 권력을 귀족 의원, 중급 귀족, 그리고 민의회(民義會, popular assemblies)들로부터 떨어뜨려 놓았다. 이를 통해 내부정쟁의 주체들, 즉 기득권 세력으로부터 제국의 통치권을 분리시켜 제국의 통치권을 황제에게 집중시킬 수 있었다. 지방관의 존재는 ‘제국’의 발전에서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Doyle은 아우구스투스의 이름을 차용하여 합의 정치체가 제국으로 바뀌는 순간을 ‘아우구스투스 경계선(Augustan Threshold)’라 명명하였다. 이후 로마에는 제국적 관료체제(Imperial Bureaucracy)와 ‘제국 군대’가 생겨났고 이로 인하여 장기적인 체제유지가 가능하였다고 하고 있다. 이는 제국이 새로이 확보한 영역이 개인 영지화하는 것을 막고 중앙의 권력이 광대역의 영토를 통치하는 것을 가능케 한다.

광대역으로 팽창한 로마의 영토와 인민은 ‘공화정’이란 형태로는 더 이상 다스려질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전의 정치가 계속되기를 원하는 세력들은 변화를 거부하였다. 결국 변화가 불가피하다고 생각하는 세력과의 충돌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고 로마에서는 그 결과가 내전으로 이어졌지만 로마는 내전으로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다 강력한 정치체제로 거듭날 수 있었다. 로마내전으로 인하여 공화정은 죽었다. 그러나 공화정이 쓰러진 그 자리에는 ‘로마제국’이라는 거목이 섰다. 우리가 알고 있는 찬란한 로마문명이 완전히 거듭난 것이다.

참고문헌: Joseph Tainter, [The Collapse of Complex Societies]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8). Appian, [The Civil Wars]




김성남 | 안보·전쟁사 전문가
글쓴이 김성남은 전쟁이 인간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 UC 버클리 동양학과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국제학 석사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에 진학하여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전쟁으로 보는 삼국지], [전쟁 세계사] 등이 있으며 공저로 [4세대 전쟁]이, 역서로 [원시전쟁: 평화로움으로 조작된 인간의 원초적인 역사]가 있다.


발행2011.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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