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고구려-수 전쟁(1) - 거대 전쟁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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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373회 작성일 16-02-07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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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표


고구려-수 전쟁 개요

전쟁주체


고구려, 말갈, 거란, 백제 - 수, 돌궐, 신라

전쟁시기


598년∼614년

전쟁터


요서, 요동, 발해만, 평양 일대

주요전투


영주 전투, 요하 전투, 요동성 1차 전투,

패수 전투, 살수 전투, 요동성 2차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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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를 뒤흔든 거대 전쟁의 시작



612년 1월 수나라 113만 3,800명의 군대는 고구려에 대한 총 공격을 감행했다. 수나라 원정군에게 군량미를 수송하는 자들은 그에 두 배나 되었다. 수양제가 이끄는 6군을 포함해 30군은 탁군(북경 지역)에서 출발하는 것만 무려 40일이나 걸렸다. 각 군(軍)은 서로 40리 간격을 유지하며 출발했는데, 이들의 행렬이 무려 1040리(416㎞)에 걸쳐 있었다. 20세기 이전까지 세계 역사상 보지 못했던 엄청난 규모의 원정군이었다.

수나라 대군이 출동하자 주변 국가들도 긴장했다. 돌궐은 수나라의 빈틈을 엿보았고, 신라는 고구려의 후방을 칠 준비에 나섰고, 백제는 신라의 허점을 찾기 바빴다. 고구려와 수 두 거인의 틈에 낀 거란은 숨을 죽이며 정세를 살피기 바빴고, 말갈은 고구려의 강력한 통제를 받아야만 했다. 왜국과 서돌궐 등 주변나라들은 이 전쟁의 추이를 예의주시했다. 동아시아 세계를 뒤흔든 거대 전쟁은 어떻게 왜 시작된 것이었을까?




고구려 전성기를 가져온 국제질서



5〜6세기 동아시아는 화북지역에 자리한 북조(북위-동위:서위-북제:북주), 화남지역에 위치한 남조(송-제-양-진), 몽골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떨친 유목제국(유연-돌궐), 만주와 한반도 중북부를 차지한 고구려가 서로 세력균형을 이룬 가운데 안정적인 국제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

고구려는 유연과는 평화로운 관계를 맺었고, 바다 건너 남조와는 거리가 떨어져 있어 대립할 상황은 아니었다. 고구려와 가장 많은 긴장관계를 유지한 것은 4대 강국 가운데 가장 인구가 많은 북조였다. 북조는 유목제국과 사이가 나빴고, 남조와는 중화(中華) 문명의 정통성을 다투었다. 따라서 동쪽에 위치한 고구려와는 무력 충돌을 할 여력이 없었다. 다만 자신을 천하의 지배자라고 여긴 남조와 북조의 황제들은 인접국가의 임금들을 제후왕으로 책봉하고, 그들의 사신을 조공사신으로 여겼다. 북위 황제가 고구려 임금을 책봉하였지만, 고구려 문자명왕은 북위 사신의 접견을 거부하기도 했다. 하지만 5〜6세기 남북조 중심의 조공-책봉 관계는 실질과 명목 사이에 큰 괴리가 있었다.

북위는 고구려를 만리장성 동쪽의 세계를 마음대로 통제하는 나라로 인정하였고, 남조에서도 고구려를 국력이 막강하여 통제할 수 없는 대상으로 여겼다. 고구려에 파견된 북위 사신의 관위(官位)는 남조에 보낸 사신과 동등한 고위급 관리였다. 북위가 외국 사신에게 주는 저택에서도 고구려 사신은 남조 사신에 이어 2위로 대접받았다. 489년 북위는 남조(제나라)사신과 고구려 사신을 동등하게 대접하여, 남조의 항의를 받기도 했다. 남북조로 나뉜 상태에서 중화문명 중심의 일원적 천하질서는 통용될 수 없었다. 고구려는 유연과 남조(송)를 연결해 북위를 압박하는 등 5〜6세기 동아시아 세계의 다원적 국제질서를 유지하는 것에 힘을 쏟으며, 4대 강국의 하나로서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요동치는 국제질서



581년 북주의 외척이던 양견이 개창한 수나라가 589년 남조의 진나라를 멸망시켜 중화세계를 통일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는 동아시아의 다원적 국제질서의 종언을 알리는 거대한 변화의 시작이었다. 550년 이후 유목세계의 지배자였던 돌궐은 북중국을 나누어 다스렸던 북위와 북주로부터 한때 조공을 받으며 강력한 국력을 자랑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582년 동돌궐과 서돌궐로 분리된 후, 북중국을 지배한 수나라와의 관계가 역전되고 말았다. 두 나라의 관계는 584년 이후 대체로 수나라의 우세가 지속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590년(또는 597년) 수나라 문제(양견)는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위협해왔다. 고구려가 진나라 보다 인구가 많은가 영토가 큰가를 물으며, 고구려에게 제후국으로서의 충성을 요구했다. 증대된 국력을 바탕으로 고구려에 대한 명목상의 정치적 우위를 실제적인 우위로 확인받고자 했던 것이다. 다원적 세계질서의 지속을 원하는 고구려에게, 수나라는 일원적 세계질서를 강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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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나라 초대 황제 수문제(좌)와 2대 황제인 그의 아들 수양제(우). 각 고구려-수 1차 전쟁과 2차 전쟁을 지휘했다.






거란 지배를 둘러싼 고구려와 수나라의 갈등



수 문제는 고구려가 요서지역의 말갈과 거란에 대한 수나라의 통제를 고구려가 막지 말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당시 요서지역에 위치한 거란의 지배권을 놓고 수나라와 고구려는 첨예한 갈등관계에 놓여 있었다. 거란은 돌궐, 고구려, 수나라 3대 강국이 충돌하는 요서지역에 위치한 부족연맹체다. 거란족 가운데 일부 부족은 돌궐에 지배를 받기도 하고, 일부는 고구려에 통제를 받기도 했고, 일부는 수나라에 귀부(歸附)하는 등, 이들은 형세의 변화에 따라 수시로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며 생존을 모색하고 있었다. 고구려는 392년 이후 지속적으로 거란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고구려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요서일대에서 거란에 대한 통제는 필수불가결한 요소였다. 고구려는 거란에 철을 공급하며, 저들을 달래고 그들의 기병을 이용해 북위를 공격하기도 했었다. 고구려는 거란 지역에서 돌궐군대를 격파하는 등, 거란 통제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436년 북연이 멸망한 후, 북위는 요서지역에 영주를 설치하고 6개군 13현을 두고 다스렸다. 하지만 고구려와 거란의 활동무대가 넓어질수록 요서지역에서 중원세력의 영향력을 줄어들었다. 요서지역에 수나라의 행정단위는 1군 1현에 불과했다. 수나라는 유성(조양시)에 총관부를 설치하고, 거란과 말갈 부족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해나갔다. 수나라는 유목제국과 고구려의 관계를 끊고, 동방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며, 모피와 인삼 등의 무역루트를 장악하고자 요서지역에 대한 세력 확장을 꾀했던 것이다.

수나라가 중화세계를 통일하며 국력이 강해지자, 고구려를 배반한 속말말갈의 추장 돌지계가 무리를 이끌고 수나라에 투항해 버렸다. 또 거란의 한 부족인 출복부도 고구려를 배반하고 수나라에 내부(內附)해 버렸다. 그러자 고구려는 더 이상 수나라의 팽창을 바라만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고구려 영양태왕은 598년 말갈의 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요서를 공략했다. 요서 지역에서 수나라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목적과, 장차 벌어진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적의 보급기지를 파괴하고자 하는 2가지 목적을 달성하고자 함이었다. 그러자 수 문제는 즉시 자신의 4남 양량을 원수로 삼아 30만 대군을 동원해 수륙 양면으로 고구려를 공격하게 하였다. 1차 고-수 전쟁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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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군의 제 1차 침공상황.






1차 고-수 전쟁의 결과



598년 2월부터 4개월간 준비기간을 거쳐 6월에 수나라의 고구려 원정군 30만은 탁군을 출발해 영주의 치소인 유성에 도착했다. 수나라 육군은 요하를 향해 행군을 하였지만, 기후 불순과 전염병, 군량 보급이 문제 등이 겹쳐 병력 손실이 커지자, 행군원수 양량의 부대는 요하 부근에서, 왕세적의 부대는 유성에서 퇴각하고 말았다. 산동반도 동래를 출발한 수군총관 주라후가 이끈 수나라 수군은 요동반도 남단에서 폭풍을 만나 대다수의 선박이 침몰함으로써 퇴각하고 말았다. 수나라는 80〜90%의 대규모 병력의 손실한 채 아무런 성과 없이 전쟁을 마무리했다.

최근 중국학계에서는 1차 고-수 전쟁에서 고구려 군과 직접적인 전투를 보여주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는 이유로 1차 고-수 전쟁은 없었다는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자치통감] 611년 기록에 두건덕(竇建德)이란 자는 “문제 시절 수나라가 강성하여 1백만 명의 무리를 징발하여 고구려를 정벌하였는데도 오히려 패배하였다. 이제 다시 군사를 내어 고구려를 공격하면 수나라가 크게 어지러워질 것이다.”고 하였다. 1차 고-수 전쟁은 수나라의 명백한 패배였다.

수나라가 고구려와 전쟁을 일으키자, 돌궐은 수나라의 빈틈을 노려 침략을 해왔다. 수 문제는 더 이상 고구려를 공격할 수 없었고, 고구려도 수나라와 화친을 청했다. 이 전쟁으로 수나라의 요서 지역 지배는 큰 타격을 받았다. 고구려는 유성에서 돌궐과 수만 명의 상인이 거래하는 시장을 개설할 정도로 요서지역에서 기반을 보다 확고히 구축하는 승전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참고문헌: [資治統監], [隋書], [三國史記], 이성제, [고구려의 서방정책 연구], 국학자료원, 2005년, 김용만, [새로쓰는 연개소문전], 바다출판사, 2003년, 서인한, [高句麗 對隋, 唐 戰爭史],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91년, 김용만, [高句麗 後期 高句麗, 隋∙唐, 北方 諸國의 對立關係], [동북공정과 한국학계의 대응논리], 고구려연구회 편, 여유당, 2008년.




김용만 | 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
글쓴이 김용만은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국 고대사를 연구하고 있다. 현재는 삼국시대 생활사 관련 저술을 하고 있으며, 장기적으로 한국 고대 문명사를 집필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고구려의 그 많던 수레는 다 어디로 갔을까], [새로 쓰는 연개소문전] 등의 책을 썼다.


발행2011.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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