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고구려-수 전쟁(2) - 거대 전쟁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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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42회 작성일 16-02-07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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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표


고구려-수 전쟁 개요

전쟁주체


고구려, 말갈, 거란, 백제 - 수, 돌궐, 신라

전쟁시기


598년∼614년

전쟁터


요서, 요동, 발해만, 평양 일대

주요전투


영주 전투, 요하 전투, 요동성 1차 전투,
패수 전투, 살수 전투, 요동성 2차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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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양제의 등장



수나라 문제(581〜604)는 중국 역사상 손꼽히는 뛰어난 군주로, 수나라 국력을 크게 향상시킨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들의 부하에 의해 암살되고 말았다. 아버지와 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양제(양광)는 중국 역사상 손꼽히는 폭군이었다. 하지만 양제는 개인적인 자질은 매우 뛰어난 인물로, 589년 진나라를 멸망시킬 때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문제의 업적 탓에, 당시 수나라의 국력은 최고조에 올라있었다. 609년 조사된 수나라 인구는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인 4,600만에 달했다. 수나라에게 늘 골칫거리였던 돌궐은 세력이 극히 약해져, 607년에는 동돌궐의 계민가한이 수나라에 와서 직접 양제에게 머리를 숙이기도 했다. 이때 수나라는 서돌궐과 토욕혼을 정벌하는 등, 영토를 크게 확장하고 있었다. 양제는 만리장성 수축, 대운하 공사, 낙양에 동경(東京) 건설 등 거대한 토목공사들을 일으켜 백성의 원성을 산 임금이었다. 하지만 대운하 공사는 오랜 세월 남북으로 갈라진 중원세계를 경제적으로 통일하고, 국력을 결집하는데 큰 도움이 되기도 했다. 또한 군량과 군수품의 이동 통로로 활용되기도 했다.

양제는 천하의 최고 지배자가 되기를 원하는 야심 찬 인물이었다. 그에게 고구려는 언젠가는 굴복시켜야 할 대상이었다. 605년 당시 요서지역에 수나라의 거점은 불과 751호(3,000명) 만이 거주하는 1개 군 1개현 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수나라는 돌궐군을 이용해 유성 인근의 거란족을 격파하여, 다시금 요서 지역에서 세력 확대를 시도했다. 고구려와 충돌이 불가피해 진 셈이다.

고구려 영양태왕은 수나라를 견제할 목적으로 607년 8월 돌궐에 사신을 보냈다. 그런데 돌궐 계민가한의 막사에서 고구려 사신과 양제가 만나고 말았다. 양제는 돌궐을 굴복시키고 한층 위세를 과시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는 고구려 사신을 향해 실질적인 선전 포고를 하였다. 내년에 자신이 탁군(북경)에 갈 때에 고구려 임금이 직접 조공하러 오되, 그렇지 않으면 직접 자신이 고구려를 정벌하겠다고 했다.



거대한 원정군, 거대한 부담



수나라의 전쟁 위협에 당연히 고구려는 굴하지 않았다. 양제는 자신의 아버지 문제 때 실패했던 고구려 정벌을 성공하여, 천하를 지배하는 최고의 통치자가 되려는 야심을 드러냈다. 611년 2월 그는 고구려 정벌을 위해 대대적인 전쟁 준비에 나설 것을 명했다. 산동반도 등주에서는 3백 척의 전함이 새로 건조되었고, 전국에서 군사들이 징발되었으며, 대운하를 통해 막대한 군량이 탁군으로 집결하게 되었다.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운반하기 위해 군용 수레 5만 승(承)이 새로 만들어졌다. 각지에서 모은 식량이 탁군으로 집결하기 위해 배가 서로 이어진 것이 1천리에 이를 정도였다. 병기와 갑옷, 공성용 무기, 장막, 갑옷 등을 싣고 길을 오가는 사람이 항상 수십만 명이나 되었다.

전쟁 준비만으로도 수나라 전체가 들썩거렸다. 물자를 운반하다가 죽은 자가 병사들 가운데 절반이나 되었고, 백성들이 농사를 못 지어 물가가 오르고 백성들의 생활이 힘들어졌다. 이때 수나라에서는 고구려 정벌에 참여해 괜히 죽지 말라는 ‘무향요동랑사가(無向遼東浪死歌)’란 노래가 널리 퍼졌다. 강제로 동원된 사람들 가운데 도망가는 이들이 속출했다. 당시 세계 최고의 국력을 자랑한 수나라였지만, 고구려 원정은 그들의 국력을 뿌리부터 흔들어 놓고 있었다.



강력한 방어력을 갖춘 성에 의지한 고구려



전쟁 직전 수나라의 상황에 대해서는 많은 기록이 남아있지만, 고구려는 그렇지 못하다. 하지만 고구려도 전쟁에 대비해 충분한 준비를 했음은 분명하다. 고구려는 550년대와 580년대에 2차례 걸친 돌궐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한 바 있었다. 거대한 유목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던 고구려의 자신감은 598년 1차 전쟁에서 승리를 한 경험을 바탕으로 다시금 고조되어 있었다. 당시 고구려 인구 전체와 맞먹는 마치 핵폭탄과도 같은 거대한 수나라 원정군의 침공에도 고구려가 주눅 들지 않았던 것은 오랜 전쟁 끝에 얻어진 자신감이었다. 고구려는 군사의 숫자는 적어도 방어하는 입장이었다. 성을 중심으로 방어하고, 적의 약점인 군수물자 보급에 타격을 주면 충분히 승산이 있는 전쟁이었다.

고구려는 수나라에 첩자를 보내 각종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다. 고구려는 요서지역에서 수나라 대군과의 충돌을 피하고, 요하에서 1차 방어선을 구축했다. 탁군에서 요하까지 긴 행군 끝에 3월 중순 요하 서쪽 회원진에 도착한 수나라 선봉대는 먼저 요하를 건너 교두보를 마련하고자 했다. 고구려 군은 요하를 건너려는 수나라 선봉대의 진격을 막았다. 첫 요하 전투에서 고구려는 수나라 좌둔위대장군 맥철장을 죽이는 등 승리를 거두며, 수나라 군대의 진격을 약 20여 일간 지연시켰다. 수나라 선봉대는 4월 중순 후속부대가 도착하면서 비로소 압도적 병력의 우위가 확보된 연후에야 요하를 건널 수가 있었다. 고구려는 시간을 지연시키는 작전을 성공한 후, 병력을 요동성으로 퇴각시켰다.

요동성은 고구려 요동방어의 중심 성으로, 성벽의 높이가 약 30미터에 달할 정도로 거대한 성이었다. 4월 하순부터 시작된 수나라 대군의 요동성 공격은 성공하지 못했다. 수양제는 직접 요동성 주변에 도착해 공격을 지휘했지만, 도리어 수나라 장군들의 자율적인 지휘 역량을 감쇄시켜 버렸다. 고구려는 장기적인 농성(籠城) 작전에 돌입하면서, 야음을 틈타 기습적인 공격을 하는 소극적인 전술로 구사하며 적의 지쳐 물러가기를 기다렸다. 수나라 대군은 요동성 한 곳을 점령하지 못한 채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다. 지나친 긴 보급선 탓에 군량 보급도 원활하지 못하고, 곧 닥칠 우기(雨期) 이전에 작전을 종료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가진 수나라는 속전속결을 노렸으나, 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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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성 해자.





살수대첩



수나라 원정군 30개 군 가운데 7군은 수군(水軍)이 맡고 있었다. 래호아가 이끄는 수나라 수군은 산동반도 등주를 출발해 바다를 건너 대동강 하구에 상륙하여, 평양으로 진공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이들의 임무는 수나라 육군에게 군량을 보급하고, 육군과 합세하여 평양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고구려는 이를 분쇄시키고자 수나라 수군을 꾀어내었다. 기습작전을 벌여 수나라 수군을 끌어들여 평양성 외곽 전투에서 수나라 수군을 대파하였다. 결국 이들은 대동강 하구로 돌아가 진을 치고 있다가, 아무런 역할도 못하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요동성에서 발목이 잡힌 수나라는 전략을 바꾸어, 별동대 30만 5천을 조직해 고구려 수도 평양을 향해 직접 진격했다. 대릉하 하류의 노하진과 요하 하구의 회원진을 출발한 별동대는 별도의 보급부대가 없이 군사들이 각자 식량과 무기, 장비 등을 들고 평양을 향해 진군했다. 그러자 군사들은 무거운 식량을 버리고 가기도 했다. 얼마 후 이들은 심각한 군량 부족에 처하게 되었다.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은 이들을 일방 타진할 계책을 준비했다. 그는 봉황성 주변에서 적의 후미에 처진 치중(輜重)부대를 공격했다. 각종 공성용 장비, 물자 등을 관리하는 치중 부대를 공격한 것은, 적들에게 고구려 성을 공격할 능력을 빼앗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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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문덕 장군.



을지문덕은 과감히 적진에게 들어가 적의 상황을 살피고, 적군을 더욱 고구려 내지 깊숙한 곳으로 유인했다. 이미 식량이 부족해 승리할 수 없는 상황임에도, 수나라 사령관 우중문은 고구려를 항복시켜 공을 세우겠다는 야심에 군대를 평양 부근까지 진격시켰다. 하지만 평양에는 거대한 대성산성, 장안성이 버티고 있었다. 포차, 운제, 충차 등 공성용 무기도 없이, 지치고 굶주린 병사들을 거느리고 성을 공격해 함락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비로소 그들은 함정에 빠진 것을 알고 퇴각하기 시작했다.

대오를 갖춘 보병은 기병이 정면이 맞서 싸워 이기기 어려우나, 퇴각이 결정되어 대오가 무너진 보병은 추격하는 기병의 창날 앞에 한낮 먹잇감에 불과하다. 수나라 군대가 살수를 건너 퇴각할 때 고구려 군이 총 공격을 감행하자, 수나라 군대는 규율이 완전히 무너졌다. 고구려군은 화살을 날리고, 경기병을 동원해 추격하면서 수나라 군을 살육했다. 최종적으로 요동성 주변에 위치한 본대로 돌아간 수나라 별동대는 겨우 2,700명에 불과했다. 나머지 30만은 포로가 되거나,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수나라에는 거대한 치욕이었고, 고구려에는 다시없는 큰 승리였다. 참혹한 패배를 당한체 수나라 군대는 서둘러 퇴각하고 말았다.



수양제의 미련



수양제는 자신의 실패를 참을 수 없었다. 그는 퇴각을 하면서 다시 전쟁을 준비했다. 군량을 다시 모으고, 공성용 무기를 더 준비했다. 613년 수나라는 다시 30만 대군을 동원해 고구려의 신성, 요동성을 공격했다. 특히 요동성 공격에는 비루당(飛樓撞), 운제(雲梯), 지도(地道), 충제(衝梯), 팔륜루거(八輪樓車), 어량식대도(魚梁式大道) 등의 공성무기를 총동원했었다. 요동성보다 높게 토성을 쌓아 성을 공격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때도 수나라군은 요동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수나라 내부에서 예부상서 양현감이 반란을 일으켰다. 양현감은 대운하를 통해 수나라 원정군의 군량 수송을 책임지는 자였다. 자칫 양제가 이끈 수나라 군대가 요동에서 고립될 위험도 있었다. 하지만 수양제는 2차 고-수 전쟁의 참패를 만회하여 실추된 자신의 위신을 회복하고자 했기에 철군을 쉽게 결정하지 못했다. 이때 요동성 공격작전을 지휘하던 병부시랑 곡사정이 고구려로 탈출하여 투항하는 사건마저 벌어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고구려군의 사기가 더 올랐고, 수나라 군대에 대한 정보를 더 자세히 알게 된 고구려의 반격이 예상되었다. 그러자 수나라 군은 6월 28일 긴급히 야음을 틈타 식량과 무기를 모두 버리고 퇴각했다. 고구려는 퇴각하는 수나라 군을 공격해 큰 승리를 거두었다.



수양제의 마지막 공격



요동에서 철수한 수양제는 돌아와서 양현감의 반란을 진압한 후, 다시금 고구려를 공격하고자 했다. 곳곳에서 반란사건이 일어나고, 고구려 정벌로 인해 엄청난 국부가 탕진되고 있었고 민심을 수습하는 것이 급한 상황이었기에, 신하들은 모두 고구려 원정을 반대했다. 하지만 수양제는 다시금 고집을 부렸다. 614년 3월 다시 대규모 원정군을 출동시켰다. 하지만 병사들은 이미 싸울 의지가 없었고, 도망가는 병사들이 속출했다. 수나라 군대가 요하 인근의 회원진에 도착한 것은 7월 중순, 이미 전쟁을 시작하기에 늦은 시점이었다.

전쟁은 소모전 양상이 되고 있었다. 고구려는 비록 거듭된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국력이 크게 낭비된 상황이었다. 인구가 부족한 고구려에게 장기전은 득보다 실이 컸다. 614년 전쟁에서 고구려는 얻을 것이 거의 없었다. 수나라가 혼란한 상황을 틈타 반격할 여력도 없는 상황에서, 전쟁을 지속할 이유가 없었다. 결국 고구려로 도망 온 곡사정을 되돌려 줌으로써 양제로 하여금 철군할 명분을 갖게 해 주었다. 양제는 이번 전쟁에서 국력만을 낭비한 체 아무런 실익 없이 퇴각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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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백암성.





전쟁의 여파



614년 8월 수나라 대군이 철수함으로써, 고-수 전쟁은 막을 내렸다. 하지만 전쟁의 여파는 매우 컸다. 가장 큰 변화는 수나라 통치 질서 붕괴였다. 수나라 각지에서 반란세력이 일어나, 마침내 618년 수나라는 멸망하고 말았다. 고구려는 4차례 전쟁에서 단 한 개 성도 함락당하지 않은 큰 승리를 거두었다. 고구려의 국제적 지위는 크게 향상되었고, 고구려인의 자부심은 크게 높아졌다. 고구려는 방어 전략을 취하며 전쟁을 치렀기 때문에, 국토의 상당수가 피폐해지는 피해도 입었다. 그러나 수십만의 포로를 얻어 인구가 늘면서 경제적 피해를 상쇄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고-수 전쟁의 가장 큰 수혜자는 고구려가 아닌 동돌궐이었다. 수나라 반란세력들은 돌궐의 지원을 얻기 위해 스스로 조공을 바쳤다. 돌궐의 국력은 크게 향상되었다. 반면 신라는 고구려가 수나라와 전쟁을 할 때에, 수나라 편을 들어 고구려 후방을 공격한 탓에, 고구려에게 미움을 받게 되었다. 반면 백제는 고-수 전쟁에서 중립을 지켰지만, 결과적으로는 고구려를 도운 셈이 되었다. 이로 인해 신라는 고구려-백제에 포위된 셈이 되었다.

전쟁은 614년에 끝나지 않았다. 수나라가 고구려에게 패배한 사건은 수나라를 계승하여 중화세계를 통일한 당나라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울 수 없는 것이었다. 당나라가 건국되고 혼란기를 지난 후, 수나라 때보다 더 강한 국력을 갖게 된 당나라로써는 다시금 고구려에 의해 좌절된 중화문명 중심의 일원적 국제질서의 확립하고자 했다. 고구려와 당나라의 전쟁이 또 다시 시작될 수밖에 없었다.

참고문헌: [資治統監], [隋書], [三國史記], 이성제, [고구려의 서방정책 연구], 국학자료원, 2005년, 김용만, [새로쓰는 연개소문전], 바다출판사, 2003년, 서인한, [高句麗 對隋, 唐 戰爭史],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91년, 김용만, [高句麗 後期 高句麗, 隋∙唐, 北方 諸國의 對立關係], [동북공정과 한국학계의 대응논리], 고구려연구회 편, 여유당, 2008년.




김용만 | 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
글쓴이 김용만은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국 고대사를 연구하고 있다. 현재는 삼국시대 생활사 관련 저술을 하고 있으며, 장기적으로 한국 고대 문명사를 집필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고구려의 그 많던 수레는 다 어디로 갔을까], [새로 쓰는 연개소문전] 등의 책을 썼다.


발행2011.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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