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십자군 전쟁(1) - 신의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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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25회 작성일 16-02-07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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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케아 공방전. 십자군이 투석기로 적의 머리를 성 안으로 던져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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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표


십자군 전쟁 개요

전쟁주체


프랑스, 독일, 잉글랜드 등 서방 기독교 세력 vs 튀르크, 쿠르드, 이집트 등 중동 이슬람 세력(단, 시기별로 주체가 일정하지 않음)

전쟁시기


1096~1291

전쟁터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동지중해 연안(레반트), 아나톨리아, 이집트

주요전투


도릴라이온 전투, 예루살렘 전투, 다마스쿠스 근교 전투, 하틴 전투, 아크레 전투

이미지설명


1차 십자군의 아나톨리아 진격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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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위해, 또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위해



“예루살렘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아무 것도 아니오. ......하지만, 모든 것이기도 하지.”


2005년에 만들어진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서 주인공 발리앙의 질문에 살라딘(살라흐 알 딘)이 대답하는 장면이다. 2백 년 가깝게 지속되었다는 점에서는 역사상 최장의 전쟁이었던 십자군 전쟁은 또한 온갖 복잡성과 모순을 띠고 있어, 하나의 ‘전쟁’이라고 이해하기 어렵기도 하다. 한편으로 그것은 로마 말기의 유럽에 게르만 족이 쳐들어왔을 때처럼, 또는 고대 중국을 북방민족이 침략하여 5호 16국을 세웠을 때처럼, 서유럽 인들이 중동 땅을 침략하여 여러 나라를 세우고 할거하다가 결국 멸망한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일단 ‘성지’를 손에 넣은 유럽인들은 원정군을 초대한 비잔틴을 공격하기도 하고, 자기네끼리 싸우기도 하고, 일부 이슬람과 손을 잡기도 하는 등 영원한 적도 친구도 없는 전형적인 전국시대의 모습을 보였다. ‘예루살렘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게르만족의 로마 침입이나 5호 16국은 민족이동의 결과로 벌어진 사태였던 반면, 십자군은 일정한 사명을 띠고 벌인 의도적인 원정이었다(적어도 그렇게 시작했다). 수천 킬로미터를 마다하지 않고 낯선 땅으로 가서 수적으로 압도적인 적들과 싸우게 만들었던 원동력, 거기에는 단순한 물욕이나 정복욕을 넘는 신앙심이 있었다. 그런 점에서 십자군은 전례가 없는 놀라운 사건이었고, 예루살렘을 위해 ‘모든 것을 거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결정적으로 패퇴시킨 세력은 그들 못지않은 신앙심으로 전력을 다해 반격, 그들의 신앙에서도 소중했던 예루살렘을 되찾을 수 있었다.



만지케르트와 카노사



1071년의 만지케르트 전투, 1077년의 ‘카노사의 굴욕’. 이 두 가지 사건이 없었다면 십자군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비잔틴 제국(동로마 제국)은 11세기 초까지는 바실리우스 2세를 비롯한 용맹한 군주들의 지휘 하에 동유럽과 중동에서 막강한 세력을 떨쳤다. 그러나 1025년에 바실리우스 2세가 죽은 후 약 반세기 동안 13명의 황제가 난립하며 혼란과 쇠퇴를 가져왔고, 동쪽에서 셀주크 투르크가 노도처럼 밀려오면서 제국은 위기에 처했다. 만지케르트 전투에서는 술탄 알프 아르슬란이 이끄는 셀주크군이 로마누스 디오게네스가 이끄는 비잔틴군을 격파하고 로마누스를 포로로 잡았다. 이로써 니케아, 안티오크 등 아나톨리아의 대부분이 셀주크의 손에 들어갔고, 셀주크 투르크는 이집트를 제외한 중동을 장악하게 된다.

그 6년 뒤에는 유럽에서 ‘카노사의 굴욕’이 일어났다. 로마 교황과 독일 황제의 극한 대립을 상징하는 이 사건은 독일 지역 사제들의 서임권이 황제에게 있느냐, 교황에게 있느냐를 놓고 하인리히 4세 황제와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이 서로를 부정하면서 빚어진 충돌에 따라, 일단 하인리히 4세가 카노사에서 교황에게 머리를 숙인 사건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교황권이 최종 승리를 거둔 것은 아니어서, 하인리히 4세는 절치부심하며 클레멘스 3세를 대립교황으로 내세운 뒤 1082년에는 로마를 공격하여 그레고리오를 내쫓아 버린다. 원한 속에 숨진 그레고리오를 이어 1088년에 선출된 우르바노 2세도 클레멘스 3세와 대립하는 한편 하인리히 7세 황제와 프랑스 왕 필리프 1세를 파문하는 등 세속군주들과 치열한 싸움을 벌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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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생포된 로마노스 황제를 모욕하는 알프 아르슬란의 상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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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노사의 굴욕.



이처럼 동과 서의 로마가 모두 위기에 처한 가운데, 서로 힘을 합쳐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이미 1073년에 그레고리오 교황이 비잔틴에 사절을 파견하여 ‘이베리아 반도에서부터 일리리쿰, 팔레스타인에 이르기까지, 이교도들을 몰아내는 일에 협력하자’는 제안을 했다. 그 뒤 비잔틴에서는 1081년에 알렉시우스 콤네누스가 황제에 즉위했다. 그는 제국의 위기에 때맞춰 등장한 영명한 군주로서 나중에는 자력으로 셀주크를 물리치고 아나톨리아의 영토를 대부분 수복하게 되지만, 당시는 콘스탄티노플까지 위협을 받고 있던 처지였다. 그래서 그는 서유럽 쪽에서 ‘용병’을 얻자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알렉시우스가 보낸 사절이 1095년, 피아첸차 공의회에 참석하여 ‘이교도와의 전쟁에 힘을 빌려주기 바란다’는 뜻을 전하자, 우르바노 2세 교황은(그는 별도로 비잔틴 황제의 파병 요청서를 받은 상태였다) 이를 기회로 판단했다. 자신이 치켜든 깃발 아래 전 유럽의 봉건영주와 기사들이 움직인다면, 세속군주들과 대립교황의 압박으로 권력과 권위가 모두 위협받고 있던 교황의 입지를 단숨에 끌어올릴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8개월 뒤의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마침내 ‘십자군’을 제창한다.



“기독교를 위해 싸우는 자는 의복에 십자가를 표시하라. 그래서 내면의 신앙에서 일어나는 사랑을 표현하라. 주님의 은혜와 성 베드로의 후계자가 갖는 권한으로, 십자가의 전사들은 모든 죄를 면제받음을 선언한다. 이 사실이 그들의 원정길 수고를 위안해 주고, 그들이 죽은 후 순교자로 축복받으리라는 점에 만족하기를. 그리하여 기독교도들은 죄를 면제받고 이 나라에서 평화롭게 살 수 있으리라. 가라, 그리고 그대들끼리 다투는 데 써온 용기와 지혜를 고귀한 싸움에서 발휘하라. 가라, 전사들이여. 가는 곳마다 명성을 떨치고, 이 겁쟁이들의 나라를 정복하라. 선봉의 프랑스인의 용맹, 그 뒤를 따르는 나라들의 용맹은 단번에 세계를 공포에 떨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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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십자군을 제창하는 우르바노 교황.



실제 우르바노의 연설은 정확한 원문이 없고 오늘날은 기억에 의존해 재구성한 여러 가지의 판본으로 전해지지만, 그가 ‘이교도들이 성지를 빼앗고 그곳을 찾는 순례자들을 박해(이는 대체로 과장이었다)하고 있다’ ‘그곳의 이교도 군대는 유럽 군대에 비해 허약하며 땅은 유럽보다 풍요롭다’ ‘그곳에 넘치는 성유물을 얻고, 성전 참여의 공으로 이제까지의 죄를 면제받을 수 있다’는 점을 제시하여 십자군의 동기 부여를 한 점은 틀림없어 보인다. 교황이 굳이 클레르몽에서 십자군을 부르짖고, 프랑스인이 앞장설 것을 촉구한 것은 독일과 이탈리아에서는 황제의 영향력이 너무 강했기 때문이다.

만약 비잔틴이 아나톨리아를 잃지 않았다면 굳이 유럽을 끌어들이려 하지 않았을 것이고, 교황이 황제와 대립하고 있지 않았다면 비잔틴의 요청을 무시하거나 황제에게 일임했을 것이다(그러면 아마도 십자군보다는 훨씬 소극적인 대응이 있었으리라). 그렇게 만지케르트와 카노사가 2백년의 십자군 전쟁을 가져왔다.



예루살렘 함락



우르바노의 연설은 곧장 큰 반향을 일으켰고, 각국의 군주와 영주들이 출정 준비를 마치기도 전에 “은자 피에르”라 불리는 설교자의 선동에 따라 일반 농민과 유랑민 위주로 ‘민중 십자군’이 이루어져 동방으로 떠났다. 이들은 변변한 무기도 식량도 없이 출발했기에 현지에서 보급을 받아야 했는데, 헝가리에서 그 문제로 현지인들과 충돌을 일으켜 “십자군 사상 첫 싸움”을 같은 유럽 기독교도들과 치렀다는 불명예를 남기기도 했다. 어찌어찌 비잔틴의 경계로 들어가서부터는 제대로 된 보급을 받았으나, ‘용병’을 기대했던 알렉시우스 황제로서는 사실 당황스러웠다. 더구나 전쟁목표조차 이들(그리고 이후의 십자군들도)은 자신과 조금 달라서, “셀주크의 침략을 격퇴한다”라기보다 “성지를 탈환한다”가 주목표였다. 그래도 알렉시우스는 계속해서 십자군을 후원해 주었는데, ‘이이제이(以夷制夷)’ 식으로 서유럽인들이 이슬람을 물리치게 하고 보급을 미끼로 정복자들에게 종주권을 요구하거나, 이슬람인들의 주의를 분산시키는 동안 천천히 힘을 기를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는 단기적으로는 옳은 전략이었으나, 장기적으로는 제국에 재앙을 가져온다.

아무튼 민중십자군은 1096년에 허무하게 격파되었는데, 이것은 한편으로 이슬람 쪽에서 십자군을 우습게 보게 만듦으로써 이후의 전국에 영향을 미쳤다. 마침내 그 해 하반기에 부용의 고드프루아, 그의 동생인 볼로뉴의 보두앵, 툴루즈의 레몽, 블루아의 스테판, 타란토의 보에몽 등 주로 프랑스 출신의 영주들이 이끄는 군대가 보스포루스 해협으로 모여들고(제1차 십자군), 1097년에는 니케아를 점령한다. 허를 찔린 투르크군은 도릴라이온에 약 3만의 병력을 집결시켜 습격을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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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을 점령하는 십자군.



이번에는 십자군 쪽이 허를 찔렸으나, 약 1만을 이끌고 앞서 진군 중이던 보에몽은 침착하게 방어전을 전개했고 결국 고드프루아와 레몽의 군대가 도착해 셀주크군의 측면을 찌를 때까지 버텨냈다. 하나로 합친 십자군은 매섭게 역습했고, 투르크군은 완패하고 말았다. 이로써 십자군은 아나톨리아로 거침없이 진격할 수 있었고, 1098년에는 보두앵이 에데사를, 보에몽이 안티오크를 공략해 모두 점령했다.

마침내 1099년 6월, 성도 예루살렘의 성벽을 놓고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당시 예루살렘은 셀주크가 아니라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에 소속되어 있었고, 파티마는 ‘십자군의 이제까지의 획득 영토를 모두 인정받는 대가로, 팔레스타인을 건드리지 않는다’는 타협안을 제시했으나 헛소리에 불과하다고 치부되었다. 한 달 정도 계속된 공성전에서 보급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십자군은 고통이 심했으나 성서의 여리고 공성전을 흉내 내어 맨발로 예루살렘 성벽 주변을 돌며 찬송가를 부르는 퍼포먼스를 하며 사기를 북돋웠고, 제노바의 보급선이 도착하여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예루살렘 수비대는 ‘그리스의 불’까지 동원하며 악착같이 저항했지만, 7월 15일에 십자군의 공성기에서 처음으로 두 명의 기사가 성벽 안쪽으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홍수가 제방을 무너뜨리듯이 성스러운 도시는 십자군 군병들에게 함락되었다.

그리고 학살이 벌어졌다. 노인도, 여자도, 어린애도 상관하지 않았다. 무슬림은 물론 유대인들도 십자군의 칼부림에 쓰러졌다. 이슬람 최초의 사원인 알 아크사 모스크에도, 유대인들의 시나고그에도, 천 년 전쯤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넘었다는 길에도, 예외 없이 수없이 많은 무고한 사람들의 피가 쏟아지고, 넘쳐흘렀다. 낯선 땅에서 오랫동안 힘든 싸움을 하며 쌓인 울분과, ‘이들은 이교도다’라는 의식이 정복자들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광란의 학살극은 불과 몇 백 명의 생존자들을 남겨둔 채 일주일 만에 가까스로 멈춘 듯했으나, 그들은 도시를 뒤덮은 몇 만 구의 시체들을 치우는 일에 동원되었다. 일이 끝나자 그들 역시 시체더미 위에 쓰러졌다. “주님의 심판은 공정하며, 위대하시도다!” 현장을 지켜본 어느 성직자는 이렇게 기록했다.



십자군의 위력의 비밀



이렇게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손에 넣었고, 본래의 목적을 달성했다. 부용의 고드프루아가 “성묘의 수호자”라는 이름으로 예루살렘 왕국의 지배자가 되었다. 파티마 이집트가 성지 재탈환을 위해 공격해 왔으나, 아스칼론 전투에서 대패함으로써 십자군의 예루살렘 지배는 당분간 굳어지게 되었다.

그러면 어떻게 병력도 적고, 현지에 익숙하지도 않으며, 보급도 어려웠던 십자군이 거듭 승리할 수 있었을까? 먼저 이슬람 세력의 분열을 들 수 있다. 셀주크 투르크는 중동을 제패하며 대제국을 건설했으나 1092년에 말리크샤가 죽은 후부터는 여러 왕족들이 각자 술탄을 내세우며 할거하기 시작했다. 아나톨리아를 지배하던 룸 셀주크의 크르츠 아르슬란은 십자군이 처음 침공해올 때 다른 투르크족과 싸우느라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으며, 알레포의 리드완과 다마스쿠스의 두카크도 형제였지만 서로 견제하기에 바빠 안티오크를 제 때 구원하지 못했다. 또한 수니 파였던 셀주크에 대항하는 시아 파의 ‘아사신’ 세력이 알라무트에 버티고 앉아 수시로 자객을 보냈으며, 파티마 이집트 역시 시아 파로서 셀주크와 손잡을 생각이 없었다. 십자군 내부에서도 분열이 없지 않았지만 적어도 초기에는 전투 때만은 손을 잡는데 주저하지 않았던 것과 대조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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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에 재현된 중장기병의 전투 모습.



하지만 십자군의 전술과 장비도 한몫을 했다. 11세기 후반은 유럽 기사도와 전법이 완성된 시기였다. 그때까지 가벼운 가죽갑옷이나 사슬갑옷을 입고, 곧잘 말에서 내려 전투했던 유럽의 기사들은 차차 튼튼한 철판 갑옷으로 온 몸을 감쌌으며 말에게도 갑옷을 입히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런 장비는 단점도 있었는데, 몸이 무거워져 말에서 오르내리기도 힘들었을 뿐 아니라 낙마하면 그야말로 목숨이 위험해졌다. 또 그 무거운 몸으로는 제대로 다룰 수 있는 무기가 제한된다는 점도 문제였다.그러나 이런 단점을 덮을 만큼 방어력이 좋아졌으며, 말에 올라 창을 잡고 마치 작은 전차처럼 적진에 돌격하면 웬만해선 당해낼 수가 없었다. 방어력과 돌파력을 두루 갖춘 점에서 옛 그리스의 팔랑크스(중장보병대)와 비슷했는데, 중장기병이 중장보병보다 나은 점은 기동력까지 갖추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에 맞서는 이슬람 전사들은 대체로 경장기병과 보병이었다. 특히 본래 유목민인 투르크군은 능숙한 승마술로 적진 주변을 돌며 활을 쏴서 적진을 어지럽힌 다음 돌격하는 전법을 취했다. 그러나 말 위에서 날리는 가벼운 화살로 프랑크 기사의 철갑옷을 뚫을 수는 없었다. 당황하는 사이에 적은 질풍처럼 달려와 아군 진영을 쳐부순다. 십자군에 대항하는 전술은 퇴각과 반격을 반복하며 공격하기 유리한 지형으로 유인하거나, 그 측면(팔랑크스와 마찬가지로, 민첩성이 떨어지는 중장기병은 측면이 약했다)을 기습하거나, 아예 압도적인 숫자로 밀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십자군에서도 이에 대응해 측면과 후면을 경장기병과 보병대로 둘러싸서 기사들을 보호하는 전술을 구사했다. 1187년의 하틴 전투 때 예루살렘 왕 기 드 뤼지냥은 1200명의 기사와 2000명의 경장기병, 1만 명의 보병을 동원하고 있다.

이런 유리함에다 이교도를 무찌르고 성지를 되찾는다는 사명감과 열정이 더해지면서, 전쟁의 초기 국면에서 십자군은 불리한 조건에서도 수적으로 앞서는 적을 거의 매번 격파해냈다. 잔인한 학살자이자 침략자로 볼 수도 있지만, 적어도 제1차 십자군에 참여했던 기사들은 신의 정의를 실현한다는 믿음에 불타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래서 더욱 잔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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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규진 | 서울교육대학교 교수/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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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1.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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