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십자군 전쟁(2) - 신의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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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40회 작성일 16-02-07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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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는 제 4차 십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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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표


십자군 전쟁 개요

전쟁주체


프랑스, 독일, 잉글랜드 등 서방 기독교 세력 vs 튀르크, 쿠르드, 이집트 등 중동 이슬람 세력(단, 시기별로 주체가 일정하지 않음)

전쟁시기


1096~1291

전쟁터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동지중해 연안(레반트), 아나톨리아, 이집트

주요전투


도릴라이온 전투, 예루살렘 전투, 다마스쿠스 근교 전투, 하틴 전투, 아크레 전투

이미지설명


1차 십자군의 아나톨리아 진격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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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정쟁(1)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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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반트의 전국시대



적을 격파하기에 유리했던 십자군의 중장기병이었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격파에만 유리할 뿐이기도 했다. 적의 경장기병이 퇴각하면 중량에 따른 속도 차이와 소진된 체력, 그리고 지형에 밝지 못한 점 등으로 끝까지 추격하여 섬멸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십자군은 한동안 여러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적의 총 병력은 그다지 줄이지 못했다. 승리하고 바로 귀환할 게 아니라 빼앗은 성지를 지켜야 하는 한, 그것은 큰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그 고민을 십자군은 성을 쌓는 것으로 일부 해결했다. 아직까지도 일부 남아 있는 십자군 당시의 성들은 요충지마다 빠짐없이 들어서서 적의 대규모 공격을 요격하고 필요할 때는 힘을 모아 반격하는 보루가 되었다. 본래 유럽의 성들은 영주의 최종 근거지로서 견고하고도 방어에 유리하게 지어졌는데, 우트르메르(‘바다 건너의 땅’이라는 뜻으로, 십자군 시대에 유럽인들이 중동의 정복지를 가리켜 부르던 말)에서는 그것을 요새로 활용했다. 유럽식 성곽 공략에 익숙하지 않던 이슬람 측에서는 한동안 애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가령 툴루즈의 레몽이 1104년에 완성한 요새는 180년 동안 한 번도 함락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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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에 남아 있는 십자군의 성 크락 드 슈발리에.



또 하나의 해결책은 십자군의 본래 대의와는 많이 동떨어지지만, 정복한 왕국을 지키려면 어쩔 수 없게도, 외교술을 발휘해 이슬람 세력끼리 서로 견제하게 하고, 때로는 그들 중 일부와 손을 잡기도 하면서 십자군판 전국시대를 살아나가는 것이었다. 1108년에는 보두앵 뒤 부르(고드푸르아와 보두앵 왕의 사촌)가 모술의 자왈리와, 안티오크의 탕크레드가 알레포의 리드완과 각각 손을 잡고 텔 바시르에서 격돌했다. 1115년에는 바그다드에서 칼리프가 보낸 군대에 프랑크인과 시리아의 무슬림 지도자들이 힘을 합쳐 맞섰다. 1140년에는 모술의 지도자 장기의 공격에 프랑크 예루살렘과 이슬람 다마스쿠스가 함께 대응했다. 또 초기에는 대학살을 벌이기도 했지만, 대다수가 이슬람교도인 땅에서 뿌리를 내리려다 보니 십자군 출신의 군주가 무슬림 주민들도 ‘백성’으로 여기고 통치하는 것이 불가피했다. 세월이 지나며 ‘풀라니’라 불리는 프랑크인과 아랍인의 혼혈아들도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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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기의 우트르메르.



이런 현지적응과 세력균형 유지 전략으로 우트르메르가 200년 가까이 유지될 수는 있었지만, 한편 그에 따른 한계도 있었다. 초기의 종교적 열정과 단합이 스러지면서, 일부 이슬람과 제휴해 다른 이슬람의 공격을 막아내기도 했지만, 반대로 기독교 세력끼리의 불화 때문에 이슬람의 공격을 막지 못하기도 했다. 1144년에 장기가 에데사를 공격했을 때 지도자인 조슬랭은 다른 왕국들에 구원을 청했지만, 평소 조슬랭과 사이가 나빴던데다 스스로의 방어가 중요하다고 여긴 이들이 팔짱을 끼는 바람에 에데사가 덧없이 함락되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듣고 유럽에서 제2차 십자군이 결성되었으나, 그 지도자들인 독일 황제 콘라트 2세와 프랑스의 루이 7세는 시종 반목했으며 비잔틴의 마누엘 황제 및 우트르메르의 지도자들과도 계속 삐걱거렸다. 그래서 1148년, 이들은 압도적인 병력을 가지고서도 다마스쿠스를 점령하지 못하고 장기의 후계자인 누르 알 딘에게 참패했다. 십자군을 일으킨 두 기획자 중 하나인 비잔틴과의 불화는 아주 일찍부터 빚어졌는데, 1108년에 유럽에 돌아가 있던 안티오크의 보에몽이 비잔틴을 공격하다가 패배했으며 그 직후에는 알렉시우스 황제 쪽에서 안티오크를 공격하려고 바그다드의 칼리프와 동맹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런 내부분열과 통일된 리더십의 부재 때문에, 유럽 세력은 알렉산드로스의 영도 아래 중동 전역을 제패했던 역사를 재현할 수가 없었다. 십자군의 정복지는 내내 레반트의 해안지대에 한정되었으며, 1124년에 티레를 점령한 이후에는 계속 수세에 몰리기만 했다. 이슬람 쪽에서 볼 때 이런 이방인들의 왕국들을 몰아내는 데는 두 가지가 필요했다. 십자군 못지 않은 종교적 열정에 힘입은 감투정신, 그리고 여러 갈래로 갈라진 이슬람 세력을 하나로 묶어 우트르메르에 정면충돌하도록 만들 통일된 리더십이었다.



동방에서도 성전의 불길이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듣도 보도 못한 학살이 벌어졌을 때부터, 이슬람 민중들 사이에는 신의 이름으로 이교도 침략자들을 물리쳐야 한다는 의식이 꿈틀거렸다. 다마스쿠스의 카디 알 하라위가 바그다드에 달려가 예루살렘의 소식을 전하며 ‘지하드(성전)’를 촉구했을 때도 운집한 민중은 눈물과 함성으로 이에 호응했으나, 바그다드뿐 아니라 다른 여러 이슬람 도시의 지도자들은 별 반응이 없었다. 십자군이 당장 쳐들어오지 않을 바에는 눈앞의 이슬람 세력들끼리의 분쟁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1111년에 바그다드에서 카디인 이븐 알 카샤브가 다시 한 번 지하드를 부르짖었을 때는 어느 정도 효과가 있어, 이듬해 벌어진 십자군의 티레 공략이 이슬람 세력의 단결된 힘으로 좌절될 수 있었다. 1125년에 아사신파가 이븐 알 카샤브를 암살하지 않았다면, ‘이슬람의 은자 피에르’라고 할 수 있었던 그의 영향 아래 이슬람의 반 십자군 결집이 더 빠르게 이루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이슬람의 힘을 하나로 모아 우트르메르를 쳐부술 지도자 후보가 잇달아 나타났다. 다니슈멘드 튀르크의 일 가지, 모술의 일 부르수키 등이 잠깐 주목을 받았다면 모술의 이마드 앗 딘 장기는 에데사와 알레포를 탈환하고 예루살렘 왕 풀크를 한때 사로잡음으로써 단연 유력한 후보가 되었다. 하지만 잔혹하고 야심적이어서 우트르메르만이 아니라 이슬람 도시들도 가리지 않고 공격했고, 그래서 오히려 프랑크와 이슬람의 단결까지 초래했다. 그리고 1146년에 부하에게 암살되고 말았다. 그 다음은 장기의 후계자, 누르 알 딘이 떠올랐다. 그는 제2차 십자군을 격퇴하고 1154년에 시리아를 병합했으며, 1169년에는 이집트로 시르쿠를 파견해 카이로를 점령, 사실상 중동 세계를 하나로 묶어 기독교 세력에 대항할 수 있는 전선을 구축해냈다. 장기처럼 정복 사업을 펼치면서도 잔인하지 않았고, 공정하고 경건하다는 평가로 두루 인망을 모았으나 1174년에 병사하고 만다. 그의 뒤를 이어 마침내 ‘이슬람의 재정복’을 제대로 성취할 지도자가 바로 살라딘이었다.



살라딘의 승리



쿠르드족 출신의 살라딘은 열네 살 때부터 누르 알 딘의 군대에서 복무했으며, 1169년에 삼촌인 시르쿠를 따라 카이로를 점령했다가 두 달 만에 시르쿠가 죽자 그를 대신해서 파티마 왕조의 와지르(재상)가 되어 이집트의 실권을 쥐었다. 2년 뒤에는 파티마 왕조를 폐하고 아이유브 왕조를 세웠으며, 다시 3년 뒤인 1174년에 누르 알 딘이 죽자 1186년까지 시리아와 이라크를 병합하여 중동을 제패했다.

살라딘이 중동을 통합하는 동안 우트르메르의 사정은 점차 나빠졌다. 1176년에는 비잔틴의 마누엘이 미리오케팔론 전투에서 대패하면서 당분간 우트르메르를 도울 힘이 없게 되었고, 예루살렘에서는 보두앵 4세와 5세가 잇달아 숨지고 보두앵 4세의 매제인 기 드 뤼지냥이 왕위를 계승하는 과정에서 지도부의 혼란이 있었다. 살라딘은 1175년에 예루살렘과 휴전협정을 맺었으나, 본격적 전쟁만 자제했을 뿐 서로 적대행위를 그치지 않아 오던 중 1187년 초에 자신의 누이까지 포함된 대상(隊商)이 약탈되는 일이 벌어지자 마침내 그 해 3월 지하드를 선언한다.

1187년 7월, 살라딘이 갈릴리 호숫가의 티베리아스를 공략하자 기 드 뤼지냥은 대군을 동원하여 원정에 나섰다. 이는 중대한 실수였는데, 병력 집결지인 아크레에서 티베리아스까지의 길은 불과 30킬로미터 정도였지만 한여름에 사막을 가로질러야 했기 때문이다. 십자군 특유의 전술대로 요새에 진을 치고 적의 침공을 막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곧 프랑크군은 살인적인 더위와 갈증 때문에 진이 빠지고 말았다. 길가에 매복해 있던 살라딘군은 덤불에 불을 붙여 연기를 뿜고, 화살을 날리며 그들의 고통을 가중시켰다. 더위과 갈증에 견디다 못해 말이 쓰러져 죽고, 나동그라진 기사는 갑옷을 벗어던지고 허우적거리며 달아나다가 이슬람 병사들의 칼에 쓰러졌다. 결국 프랑크군은 북쪽으로 길을 돌아 ‘하틴의 뿔’이라 알려진 고원 지대의 샘물에서 한숨을 돌리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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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틴 전투에서 기 드 뤼지냥을 사로잡은 살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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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틴 전투도.



하지만 이를 내다보고 있던 살라딘은 구릉지에서 프랑크인들을 사방팔방으로 포위했으며, 하늘이 보이지 않을 만큼 화살을 퍼부었다. 전의를 상실한 기 드 뤼지냥의 군대는 와해되고 말았다. 오직 트리폴리의 레몽이 이끌던 병력만이 대열을 허물지 않고 포위를 뚫으려 했는데, 살라딘은 그들에게는 일부러 길을 열어준 다음 남은 주병력에 총공격을 가했다. 이 하틴 전투로 우트르메르의 전력은 결정적으로 파멸했고, 살라딘은 거침없이 진격하여 9월에는 예루살렘을 에워쌌다. 수비대는 완강히 저항했으나, 결국 10월 2일에 항복했다. 성도는 88년 만에 다시 이슬람의 소유가 되었고, 살라딘은 항복한 기독교인들이 자유롭게 도시를 떠나게 둠으로써 88년 전의 악몽 같던 학살극과 대조를 이루었다.



우트르메르의 황혼



예루살렘 함락에 놀란 유럽은 다시 십자군을 일으킨다(제3차 십자군). 그러나 주동자인 독일의 프리드리히 1세(프리드리히 바바로사)가 살레프 강에서 익사해 버리고, 다른 지도자들인 영국의 리처드 1세(사자심왕 리처드)와 프랑스의 필리프 2세는 1191년에 아크레를 탈환하는 등 전과를 세웠으나 상호 불화와 본국 사정 때문에 살라딘과 협정을 맺고 귀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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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루크 왕조의 경장기병.



그 뒤로도 십자군은 계속 이어졌지만, 이제 본래의 대의와 열정은 사라지고 ‘십자군’이라는 이름은 ‘세속적 목적을 위해 기사들을 모집해서 벌이는 원정 프로젝트’처럼 되어갔다. 1202년의 ‘제 4차 십자군’이 순전히 돈과 권력을 노린 용병으로서 동유럽의 자라를, 이어서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해 비잔틴 제국의 명맥을 일시적으로 끊었을 뿐 아니라, 1209년의 ‘알비주아 십자군’은 남프랑스의 기독교 분파인 알비 파를 섬멸하는 데 동원되었다. 1224년의 ‘튜튼 십자군’은 튜튼 기사단에 의한 북동유럽 슬라브족의 정복에 다름 아니었다. 그리고 십자군 최대의 불명예라는 1212년의 ‘소년 십자군’은 철모르는 소년들을 선동해서 해외로 끌고 가 노예로 팔았다는 이야기인데, 이는 믿을 만한 기록의 부재 등으로 오늘날에는 대체로 과장과 전설이 섞여 있다고 본다.

제5차(1217)와 제6차(1228) 십자군은 아이유브 이집트와 대결했고, 이 중 제6차에서는 독일 황제 프리드리히 2세와 술탄 알 카밀의 협상으로 예루살렘이 다시 기독교도들에게 넘어가기도 했으나(1229) 일종의 해프닝과 같은 일이었다. 1244년에 아이유브는 다시 한 번 예루살렘을 점령했으며 이후 20세기에 이스라엘이 세워지기까지 성도는 내내 이슬람에 손에 있었다. 제7차(1248)와 제8차(1270) 십자군을 이끈 프랑스의 루이 9세는 “성인 왕”으로 불릴 만큼 돈독한 신앙심의 소유자로서 십자군의 불꽃을 되살리려 했으나 실패했고, 그 사이에 이집트는 맘루크 왕조로, 나머지는 중동은 몽골의 일한국으로 판이 바뀌어갔다. 최후의 그리고 무익한 십자군(제9차)은 1272년에 끝났으며, 맘루크는 1268년에 안티오크를, 1289년에 트리폴리를, 그리고 1291년에 최종적으로 아크레를 함락시켜 우트르메르를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했다.



끝나지 않은 전쟁



전쟁사의 이면에서 십자군은 많은 유산을 남겼다. 특히 무역과 국제교류에서 아시아와 유럽의 교류는 십자군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활발해졌으며, 우트르메르가 멸망한 뒤에도 그런 흐름은 이어졌다. 동방의 문물이 유럽으로 퍼져가면서 철학과 과학, 예술의 발달에 영향을 주었고, 교황의 권위와 기독교의 맹목적 신앙은 하향세를 탔다. 무역의 중심에 선 베네치아, 제노바 등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부흥하고, 전쟁 도중 수립된
성전기사단
이나
구호기사단
등 기사단은 근대 유럽의 상비군의 원형이 되었다. 이런 점에서 십자군은 서양이 중세에서 벗어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고도 할 수 있다.

동과 서의 길고도 처참했던 이 전쟁을 놓고 두 세계의 지식인들은 반성하는 모습도 보였다. 일찍이 볼테르나 루소 등이 십자군의 의미를 폄하했을 뿐 아니라, [로마제국 쇠망사]를 쓴 에드워드 기번은 십자군을 “광신에 따른 야만행위”로 평가했다. 아랍 쪽에서도,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을 쓴 아민 말루프는 십자군을 기본적으로 서구의 아랍 침략전쟁으로 보면서도 결론 부분에서 ‘아랍은 반성해야 했다. 우트르메르의 도시들은 전제정치가 행해지던 아랍세계에 비하면 개인의 자유와 합리주의가 살아 있었다 (…) 십자군 치하의 무슬림 백성은 아랍 사회의 동포들보다 재산권 등에서 훨씬 보호받고 있었다.’라고 했다.

하지만 정치인들은 쉽게 반성하지 않는다. 이미 묻힌 광기와 원한을 파헤쳐내어 오늘날의 정치에이용한다. 십자군 이후 이슬람 제국의 지도자들은 자신과 자신의 왕조야말로 이슬람을 침략하는 이교도들을 물리치는 지하드의 중심이라고 선전하며 권력을 키웠다. 최근에도 1981년에 교황을 암살하려 한 범인은 “십자군의 우두머리를 없애려 했다”고 말했으며, 2001년에 오사마 빈 라덴은 사우디아라비아에 주둔하는 미군을 “십자군”이라 부르며 지하드를 촉구했다. 그리고 그런 비난의 대상이 되는 서방에서도 기독교는 아닐지라도 인권과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불량국가를 쓰러트리자”는 주장을 종종 하는 것을 보면, 그런 비난이 아주 어이없지는 않다. 결국 [아집과 실패의 전쟁사]를 쓴 에릭 두르슈미트의 말처럼, 십자군 전쟁은 “엄밀하게 말하면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다.”

참고문헌: W. B. 바틀릿, [십자군 전쟁, 그것은 신의 뜻이었다!](한길사, 1999), 아민 말루프,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아침이슬, 2002), 존 줄리어스 노리치, [비잔티움 연대기](바다출판사. 2008), 버나드 몽고메리, [전쟁의 역사](책세상, 2004), 존 키건, [세계전쟁사](까치, 1996), 에릭 두르슈미트, [아집과 실패의 전쟁사](세종서적, 2001), 스탠리 레인 풀, [살라딘](갈라파고스, 2003), 김병용, “유럽 11~12세기 교회개혁과 사회변화에 대한 연구”(건대사학. 제10집. 2003. 8), 홍양표,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종교적 갈등 원인론”(한국중동학회논총. 제16집. 199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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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규진 | 서울교육대학교 교수/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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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1.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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