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고구려-당나라 전쟁(1) - 두 강대국의 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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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75회 작성일 16-02-07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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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안악 3호 고분의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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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표


고구려-당나라 전쟁 개요

전쟁주체


고구려, 거란, 백제, 설연타, 철륵 - 당, 신라, 돌궐, 고창국

전쟁시기


644년∼668년

전쟁터


요서, 요동, 발해만, 평양 일대

주요전투


요동성 전투, 주필산 전투, 신성 전투, 압록강 전투, 사수 전투, 부여성 전투

이미지설명


고구려-당나라 전쟁의 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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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당나라 전쟁(2)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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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정한 고구려-당의 평화



618년 수나라가 멸망하고, 중원의 새로운 지배자로 당나라가 등장했다. 고구려에서도 영류태왕이 즉위했다. 두 나라는 고구려와 수나라 전쟁에서 발생한 포로를 교환하는 등 한 동안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두 나라의 평화는 매우 불안정했다.

당나라 건국자 고조(李淵)는 624년에는 “명분과 실체는 일치해야 한다. 고구려가 당나라의 신하 나라가 되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상태다. 당나라 스스로가 존대하다면 고구려에게 신하를 강요할 필요가 있느냐”고 신하들에게 말했다. 그는 고구려와 수나라와의 갈등의 원인이 되었던 중화중심의 일원적 세계관을 고구려에게 강요할 생각을 버리고, 평화를 지속하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배구, 온언박 등 당나라 신하들은 당나라가 태양이며, 이민족의 나라는 뭇별이라는 화이론의 세계관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반박하였다. 결국 당고조는 자신의 말을 철회하였다.

당나라 지배층들은 당나라 중심의 일원적 세계를 구축하고자 하는 욕망이 가득했다. 단지 당장 돌궐과의 충돌, 내부 반란세력의 제거 등의 문제로 국력이 예전 수나라만 하지 못한 상태였기에 고구려와 평화를 유지했던 것이다. 당나라의 국력이 강해진다면, 양국 사이의 평화는 깨질 수밖에 없었다.

626년 당나라에서 ‘현무문의 변란’이 일어났다. 당고조의 차남 이세민이 형과 동생을 죽이고, 아버지를 핍박해 스스로 2대 태종이 되는 궁중쿠데타가 일어난 것이다. 그는 권력을 잡은 과정이나, 스스로에 대한 자만심 등에서 수양제와 많이 닮았다. 하지만 당태종은 신하들을 포용하는 능력만큼은 수양제보다 월등했다. 게다가 그에게는 큰 행운도 따랐다. 한때 당나라로부터 조공을 받던 동돌궐이 630년 당나라와 설연타의 협공으로 인해 멸망 당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대외 팽창에 자신감을 갖게 된 당태종은 631년 고구려에 사신을 보냈다. 고구려에 사신으로 온 장손사라는 자는 고구려에서 수나라와의 승전을 기념하는 기념물인 경관을 헐어 버리는 도발을 저질렀다. 강성해진 당나라가 언젠가는 고구려를 무력으로 굴복시키겠다는 신호였다. 그러자 고구려는 646년까지 16년간 요동 지역에 천리에 걸쳐 성을 쌓으면서 당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당태종과 연개소문



고구려가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는 사이, 당나라는 638년 토번, 서돌궐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639년에는 고창국을 멸망시키는 등 나날이 강성해져 갔다. 그러자 640년 고구려 영류태왕은 태자를 당나라에 사신으로 보내며, 평화를 위한 제스처를 취했다. 하지만 당나라는 641년 사신 진대덕을 보내 고구려 내부 정세를 염탐하는 등, 침략 의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다만 당나라 내부사정이 아직은 좋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고구려 공격을 미루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642년 고구려에서 소극적인 대외정책을 추구하던 영류태왕을 몰아내고 연개소문보장태왕을 옹립한 사건이 벌어졌다. 게다가 이때 고구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한 신라에서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와 도움을 요청해왔다. 당나라는 이를 기회로 삼았다. 신라는 당나라의 속방이니, 고구려에게 신라를 공격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이는 당나라의 노림수였다. 고구려의 대응 태도를 보고, 이를 전쟁의 명분으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고구려가 당나라의 요구를 들어주는 순간, 고구려는 당에게 굴복하는 결과가 된다.

신라는 약소국이었기에, 새로운 강대국이 등장할 경우 유연하게 머리를 숙이며 기존의 강대국을 견제해 달라고 요구할 수 있다. 하지만 기존의 강대국인 고구려는 새로운 강대국이 등장했을 경우 힘을 겨루어야지 먼저 굴복할 경우 고구려를 따르는 여러 세력들로부터 불신을 받아 강대국의 지위에서 떨어질 수 있었다. 연개소문은 당나라의 도발에 적극 대응하여, 당나라 사신 장엄을 굴에 가두어 버렸다. 그러자 당나라 사신 이의침은 고구려 태왕이 부르자 엎드려 기어가서 절하고 엎드렸다.

당나라에 소극적인 정책을 펼친 영류태왕을 죽이고 권력을 잡은 연개소문은 당나라에 대해 강경한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당태종은 명분을 만들어 고구려를 공격할 필요가 있었다. 643년 당시 그는 황제로서의 권위가 크게 떨어진 상태였다. 그는 후계자문제에 있어서 자신이 원하는 아들을 태자로 삼지 못하고, 장손무기 등 신하들이 추천한 이치를 황태자로 삼아야만 했다. 그래서 신하들 앞에서 자살 소동까지 벌여야 했었다. 따라서 실추된 자신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자신이 직접 전쟁에 나가 큰 공을 세울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결국 당태종은 많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644년 2월 고구려와의 전쟁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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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령성 장하현에 위치한 성산산성은 연개소문의 여동생에 관한 전설이 전해지는 곳으로, 당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성들 가운데 하나다.





당과 고구려의 전략



당태종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자신했다. 당나라는 고구려와 전쟁에서 수나라의 실패 원인을 면밀히 검토하고, 고구려를 이길 방도를 찾았다. 수나라가 패했던 가장 중요한 이유인 군수보급로의 단절을 해결하기 위해 당나라는 무모한 진격 작전을 펼치지 않았다. 따라서 당나라는 해군의 역할을 상대적으로 강조했다. 645년 당나라 수군은 비사성을 공격해 함락시킨 후, 요하 하구에 위치한 건안성 전투에 참여하며 요동 일대에 있는 육군에 군량을 보급하는 역할에만 충실했다. 평양을 수군 단독으로 공격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 수나라가 요동성 공략에만 치우친 것을 반성하고, 신성과 건안성, 요동성, 비사성 등을 동시 다발적으로 공격했다. 또한 요하를 건너는데 시간을 지체했던 수나라군과 달리, 고구려군의 눈의 피해 요하를 건너 빠르게 급습하는 작전을 펼치기도 했다. 수나라 기병은 중장기병인데 비해, 당나라는 돌궐족 경기병을 앞세워 스피드를 중요시했다. 또한 고구려의 강력한 성들을 공격하기 위해 공성무기를 강화했다. 특히 수나라의 발석차보다 성능이 뛰어난 포차를 신무기로 내세웠다.

고구려는 전쟁에서 승리만큼이나 중요하게 전쟁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전쟁터를 요동으로 제한하려는 전략을 펼쳤다. 16년간 지속된 축성공사를 통해 요동일대의 성들을 견고하게 수축한 탓에, 수성 방어 전략을 효과적으로 펼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또한 수나라와 전쟁에서와 마찬가지로,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해 선제공격, 첩자 활용을 마다하지 않았다. 아울러 설연타를 움직여 당나라의 후방을 공격하게 함으로써 적을 퇴각하게 하면서, 최종적으로 당나라군을 천혜의 늪지인 요택으로 몰아넣어 몰살시키려는 작전을 계획했다.



1차 고구려-당 전쟁



645년 4월 1일 당나라 요동도행군은 요하를 건넜다. 고구려는 요서 일대에서 당나라군의 진격로를 놓쳤다. 당나라군은 현토성, 개모성, 신성, 건안성, 비사성 등을 공격했다. 현토성, 개모성을 함락시킨 당나라군은 요동성에 도착했다. 5월 17일에는 수나라가 함락시키지 못했던 요동성을 함락시켰다. 이어 6월 1일에는 백암성도 함락시켰다. 당나라군이 고구려의 성들을 격파할 수 있었던 것에는 무거운 돌을 멀리까지 날려 보내서 성벽을 파괴하는 포차의 활약이 컸다. 개모성, 요동성, 백암성 전투에서 당나라군은 포차들은 열을 지어 성 앞에 정렬한 다음 300근이 되는 돌을 비처럼 성을 향해 쏟아 부을 수 있었다. 성벽이 무너지자, 고구려군은 목책을 세워 방어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고구려가 성을 잘 방어한다는 것을 알고, 이에 대비한 당나라 무기 기술의 승리였다.

하지만 당나라군은 백암성을 점령한 후,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다시 군량이 있는 요동성으로 돌아갔다. 천산산맥을 경계로 요동 일대에서 전쟁을 마무리하려는 고구려군의 반격이 차츰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동성 북쪽에 위치한 신성과 요하 하구에 위치한 건안성에서는 1차 고-당 전쟁의 3대 주요 전투에 포함되는 신성전투와 건안성전투에서 계속되고 있었다. 고구려군은 이곳에서 당군을 효과적으로 막아내며 당군의 발목을 잡았다. 당나라군은 요동성을 점령한 후, 백암성을 지나 천산산맥을 가로지르는 궁장령을 넘어 오골성ㅡ압록강ㅡ평양으로 이어지는 길로 진격을 할 계획이었지만, 국내성, 오골성 등에서 요동지역으로 이동한 고구려군의 저항을 받았던 것이다.

결국 당나라군은 진격로를 남쪽으로 돌려 6월 20일 요동성에서 안시성 방면으로 군대를 이동시켰다. 당태종 자신이 당나라군 총사령관을 맡았기에, 그는 요동 지역의 고구려성을 충분히 점령하지 않고서는 고구려 내지로 진격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당시 당군의 규모는 행군총관의 숫자가 40명 이상이 등장한 것으로 볼 때, 40만〜50만에 이르는 대군이었다. 안시성 주변의 한 야산에 당태종이 진을 갖추고 머물렀다. 이로 인해 이곳을 주필산이라고 한다. 안시성을 구원하기 위해 동원된 고구려군은 15만. 당군과 정면 대결하기 보다는 안시성과 연결해 당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며 시일을 끌면서 장기전으로 가는 것이 유리했다. 고구려의 대로 고정의는 지구전을 지시했으나, 젊은 북부욕살 고연수와 남부욕살 고혜진은 당나라 군의 유인전술에 넘어가 평원에서 정면대결을 펼쳤다. 돌궐족 경기병을 앞세워 고구려군을 유인한 당나라군은 고구려군을 3면에서 포위하는 작전을 펼쳐 큰 승리를 거두었다. 고연수와 고혜진은 포로로 잡혔고, 죽은 자가 약 3만 명이 넘었다. 말갈족 3,300명은 산채로 구덩이에 파묻혀 죽임을 당했다. 고구려군의 참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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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반도 끝에 위치한 비사성은 당군의 거듭된 공격을 받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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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택. 645년 퇴각하던 당나라 군대는 늪지대인 요택에서 참혹한 패배를 당하게 되었다.



하지만 고구려군은 남은 병사들을 추슬러 다시 지구전에 나섰다. 6월 22일 주필산 전투 이후 당나라 군은 주필산 일대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고구려군은 당군의 보급로를 수시로 공격했다. 요서지역을 통과해온 보급로가 끊기자, 당군은 비사성에 있던 당나라 수군을 불렀다. 이들은 요하 하구인 건안성 지역을 통과하다가, 고구려군에게 패했다. 당나라군은 한정된 공간에서 머물려 안시성 공략에 매달렸다. 하지만 안시성 공격은 요동성, 백암성과 달랐다. 산성이기 때문에, 포차를 다가가 공격하기가 어려웠다. 이미 고구려군의 공격에 당나라 포차의 숫자가 줄어들기도 했다. 성벽을 무너뜨릴 수가 없게 되자, 당군은 60일 간 토산을 성벽 높이만큼 쌓아 성을 공격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다 쌓은 토산이 무너졌다. 고구려군은 즉시 토산을 점령해버렸다. 그러자 당나라는 성을 함락시킬 최후의 수단마저 잃고 말았다.

어느덧 9월 18일이 되어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무려 3개월이나 당나라 대군은 주필산 일대에서 고구려군에게 포위된 상태였다. 곳곳에 산재한 고구려의 성이 네트워크 방어망을 구축하여, 한 곳을 치면 다른 곳에서 도와주는 작전을 펼쳐 당군의 진격을 막고 있었다. 당태종은 더 이상 고구려의 막강한 방어망을 뚫을 수 없음을 인식하고, 철군을 명했다. 2일 후, 요동성에 도착해 남은 10만석의 식량을 먹고, 다음날 요하를 건넜다. 처음 요하를 건널 때는 도하장비를 갖추고 있었지만, 퇴각시에는 그 마저도 없었다. 편하게 요하를 건너기 위해서는 더 상류로 올라가야 했지만, 고구려군이 당군의 퇴각로를 막고 있었다. 당군은 요하를 건넜지만, 10월 11일 영주에 도착할 때까지 20일 동안 요하 하류의 거대한 늪지대인 요택에서 생사의 기로에 서야 했다. 추격해온 고구려군의 공세를 막으며, 늪을 건너느라 살아있는 말의 10분의 9가 죽었고, 엄청난 수의 군사들이 죽었으며, 당태종도 병을 얻었다. 몇몇 성을 함락시켰지만, 당나라로서는 아무 성과를 얻지 못한 참패였다.

참고문헌: [資治統監], [舊唐書], [新唐書], [三國史記], [冊附元龜], [全唐文], 김용만, [새로쓰는 연개소문전], 바다출판사, 2003년, 서인한, [高句麗 對隋․唐 戰爭史],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91년, 노태돈, [삼국통일전쟁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9년, 김용만, [2次 高句麗 -唐 戰爭(661-662)의 進行 過程과 意義],<민족문화> 27집, 2004년 .





김용만 | 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
글쓴이 김용만은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국 고대사를 연구하고 있다. 현재는 삼국시대 생활사 관련 저술을 하고 있으며, 장기적으로 한국 고대 문명사를 집필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고구려의 그 많던 수레는 다 어디로 갔을까], [새로 쓰는 연개소문전] 등의 책을 썼다.


발행2011.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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