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고구려-당나라 전쟁(2) - 두 강대국의 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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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51회 작성일 16-02-07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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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강서대묘 널방 북벽에 그려진 현무의 모습을 재현한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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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표


고구려-당나라 전쟁 개요

전쟁주체


고구려, 거란, 백제, 설연타, 철륵 - 당, 신라, 돌궐, 고창국

전쟁시기


644년∼668년

전쟁터


요서, 요동, 발해만, 평양 일대

주요전투


요동성 전투, 주필산 전투, 신성 전투, 압록강 전투, 사수 전투, 부여성 전투

이미지설명


고구려-당나라 전쟁의 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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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당나라 전쟁(1)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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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고-당 전쟁 이후의 상황



당나라군의 철수에는 설연타의 동향도 영향을 미쳤다. 설연타는 당군이 철수할 무렵인 9월말에 당나라 하주를 공격했다. 고구려의 외교적 노력이 성공한 셈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고구려군이 주필산 일대에서 당나라군을 오랫동안 포위하며 차츰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었기 때문에 설연타가 당나라를 공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고구려가 당나라를 물리친 사건은 신라에게는 악재였다. 신라는 당나라를 돕기 위해 고구려 남부를 공격해 몇몇 성을 함락시킨 바 있었다. 이때 백제는 신라의 빈틈을 노려 공격해 신라를 견제하고 있었다. 당나라군이 철수한 후, 고구려는 백제와 합동으로 신라를 공격했다. 신라는 이를 국가적 위기로 여기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결국 신라는 당나라와 더 긴밀한 동맹관계를 맺고, 먼저 백제를 멸망시키고, 고구려를 멸망시키자는 제안을 하게 되었다.

당나라의 침략을 격퇴하면서, 고구려에서 연개소문 정권의 권력은 매우 강해졌다. 이는 곧 연개소문에게 독재권력을 향해 가는 길을 열어주었다. 646년 고구려 사신은 당나라를 방문했다. 이때 고구려 사신이 어떤 말과 행동을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당나라에서는 고구려 사신의 말을 궤탄(詭誕)하다고 분개했다. 고구려가 당의 사신을 대우하는 데도 거만하고, 당나라 변경의 틈을 엿보고, 또 신라를 거듭 공격하는 것을 보자, 당태종은 다시금 고구려를 공격할 것을 계획했다.

하지만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고 해도 당태종은 수양제처럼 무모하지 않았다. 그는 고구려의 막강한 요동방어망을 쉽게 뚫을 수 없음을 절감하고, 647년과 648년 요동반도 남부에 대한 기습 공격을 감행해 고구려 후방을 공격하며 고구려의 방어력을 약화시키고자 했다. 그리고 649년 대규모 원정군을 동원해 고구려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649년 당태종이 죽어, 649년 전쟁은 실행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단지 당나라의 고구려 총공격 시점만을 늦췄을 뿐이었다.



거란과 백제



고구려가 수, 당과의 전쟁에서 방어 전략을 고수한 것은, 인구, 병력, 경제력 등 전체적인 국력에서 적에 비해 부족했기 때문이다. 세계 최강대국 수, 당이 고구려에게 패했던 가장 중요한 원인은 보급의 문제였다. 당나라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647년부터 거대한 배 수천 척을 만들기 시작해, 663년까지 계속했다. 해상으로 고구려를 공격하기 준비를 한 것이다. 아울러 거란족을 포섭하는 일에 매달렸다. 요서지역에 거주한 거란족은 고구려가 유목제국들과 통하는 입구에 위치하기 때문에, 고구려의 안보를 위해 반드시 포획해야만 하는 부족이었다. 거란족이 점차 물량 지원을 앞세운 당나라의 세력권에 편입되어가자, 마침내 고구려는 654년 당나라에 귀부한 거란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후 660년까지 홍산, 토호진수 등 요서북부 일대에서 고구려군은 당에 반기를 든 거란의 일부 부족과 함께 당나라군과 치열한 전쟁을 했다. 하지만 거란족에 대한 고구려의 통제력은 점점 약화되고 말았다.

고구려가 거란 문제로 당나라와 전쟁을 하는 사이, 한반도 남부에서 사건이 벌어졌다. 고구려에 우호적이었던 백제가 660년 7월 당나라-신라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그만 의자왕이 항복을 선언한 것이었다. 고구려는 왜국 등과 연계해 백제 부흥군을 도왔지만, 한계가 있었다. 당나라가 갑자기 백제를 공격한 것은, 고구려를 공격할 때 우월한 위치에 서기 위함이었다. 당나라는 백제를 공격하기 위해 13만 대군을 바다를 건너 보냈다. 그리고 이들은 고구려 공격을 위해 대부분 다시 백제 땅에서 철수했다. 백제의 멸망과 거란 지배력 약화는 양쪽 날개가 꺾이는 것과 같은 타격을 고구려에게 주었다.



2차 고-당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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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고구려-당나라 전쟁 상황도



661년 8월 당나라는 6개 행군 35군을 동원해 고구려를 공격했다. 보병 1군이 약 1만∼1만 2,500명, 기병 1군이 4천명임을 감안하면, 이때에도 30∼44만 정도의 대군이 동원된 셈이었다. 그런데 당나라는 특이하게도 패강도행군, 옥저도행군, 평양도행군을 바다를 통해 직접 평양을 공격하게 했다. 또한 요동도행군은 고구려 요동지역과 평양지역을 잇는 압록강 일대를 공격하여 고구려의 군대를 요동과 평양 두 군데로 분산시키는 역할을 했다. 루방도행군, 부여도행군은 고구려 요동 일대에서 변죽만 울렸다. 고구려의 강력한 요동지역의 군대를 묶어두고, 고구려 심장부를 직접 공격하려는 전략이었다.

고구려의 외교적 노력 탓인지, 북방 초원의 유목민인 철륵족이 때마침 당나라에 대해 반기를 들었다. 그 결과 부여도행군과 요동도행군이 철수했다. 하지만 평양일대는 수개월간 당나라군에게 포위를 당했다. 하지만 바다를 통해 건너온 이들은 공성무기와 기병이 부족했기 때문에 평양성을 제대로 공략하지 못했다. 요동방어망에 있던 고구려군이 루방도행군을 격퇴한 후, 고구려 중앙군과 합세하자 상황이 변했다. 662년 2월 연개소문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패강도행군을 괴멸시키고, 이어서 평양 부근 사수전투에서 옥저도행군을 전멸시키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자 마지막 남은 평양도행군은 서둘러 퇴각했다. 당나라는 오랜 준비 끝에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또 다시 실패를 하고 말았다.



연개소문의 죽음과 고구려의 내분



고구려는 오랜 전쟁에 시달렸다. 2차 전쟁에서 비록 당군을 격퇴했지만, 고구려는 잃은 것이 너무 많았다. 철륵, 거란, 백제, 왜국 등 고구려의 협조세력들이 하나 둘 떨어져 나가, 외교적인 고립 상태에 빠졌다. 그리고 전쟁터가 된 평양일대의 농업 기반시설이 파괴되는 등 경제력이 크게 약해졌다.

물론 당나라의 피해도 컸다. 대규모 원정군을 동원한 탓에 경제가 크게 파탄났다. 당나라도 서둘러 내치에 치중할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663년 8월 당고종은 전쟁 준비를 포기할 것을 선언했다. 양국 모두 전쟁 피해로부터 얼마나 빠른 시간 내에 국력을 회복하느냐가 관건이 시기였다. 그런데 고구려에 먼저 불행이 찾아왔다. 강력한 카리스마로 고구려 사람들을 일치단결하여 적과 싸우도록 만들었던 독재권력자 연개소문이 사망한 것이었다. 문제는 그의 죽음 이후에 벌어졌다. 그의 권력을 이어받은 맏아들 남생과, 동생들인 남건, 남산 사이에 틈이 벌여져 내란이 일어난 것이었다. 게다가 권력싸움에서 패한 남생은 최고급 정보를 들고 666년 6월 당나라로 도망쳐 버렸다.



3차 고-당 전쟁과 고구려의 멸망



남생의 투항은 당나라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었다. 당나라는 다시금 원정군을 조직해 667년 여름 100만 대군을 동원해 고구려를 공격했다. 당나라 가언충이란 자는 ‘당태종이 고구려 공격에 실패한 원인은 고구려에 틈이 없어서 인데, 지금은 고구려에서 내응하는 자(남생 등)이 있으므로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고구려는 크게 분열되어, 배신자가 속출했다. 667년 9월 고구려 요동방어의 핵심성인 신성(新城)이 배신자의 손에 의해 성벽이 열리며 함락되고, 주변 16개 성이 함락당했다. 또한 고구려 북부 지역의 중심성인 부여성이 668년 2월에 함락되면서, 당나라군은 요동성 등을 통과하지 않고 우회길로 압록강까지 진격할 수 있었다. 고구려군은 압록강 방어선에서 적과 맞섰지만, 수적 열세를 만회하지 못했다. 마침 신라도 남쪽에서 고구려를 향해 공격해왔다.

결국 668년 9월 21일 당-신라군에 의해 포위되었던 평양성에서 보장왕이 항복을 선언했다. 남건이 계속해서 항전을 했으나, 9월 26일 마침내 배신자에 의해 성문이 열리면서 고구려는 당나라에 의해 멸망 당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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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멸망





고구려-당 전쟁의 의미



평양일대가 함락당하고, 왕과 최고 권력자가 당나라에 포로가 됨으로써 고구려 정부가 무너졌지만, 지방에서는 아직도 당나라에 저항하는 세력이 남았다. 안시성 등에서는 673년까지 줄기차게 당나라와 항쟁을 했다. 수십만의 고구려인이 당나라로 끌려갔고, 국토는 황폐해졌다. 이 때문에 698년 발해가 건국되어 고구려를 계승하였지만, 고구려만큼 강한 국제적 영향력을 갖추지는 못했다.

고구려-당 전쟁의 최종 결과는 당나라의 승리와 고구려의 멸망이었다. 1차, 2차 전쟁에서 고구려가 승리할 수 있었던 원인은 고구려인의 자부심, 단결력, 신뢰가 주원인이었다. 여기에 적의 약점인 보급로를 차단하고, 외교력을 발휘해 설연타, 철륵 등이 당나라에 저항하도록 한 것도 중요했다. 하지만 3차 전쟁에서는 고구려에게 도움을 줄 외부세력이 전혀 없었다. 수성방어전략을 고수하다 보니, 국토가 전쟁터로 변해 경제력을 회복하는데 당나라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 점도 불리했다. 무엇보다 고구려가 3차 전쟁에서 패배하여 마침내 멸망하게 된 원인은 내부 분열과 배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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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마지막 수도 평양은 668년 마침내 함락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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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장안성의 해자였던 보통강이 말없이 흐른다.



고구려-당 전쟁의 종료를 계기도 동아시아에는 새로운 질서가 열렸다. 당나라는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봉선(封禪)행사를 개최하는 등 최고 전성기를 구가하는 듯했다. 하지만 지나친 과잉팽창으로 인해 토번의 강성해짐과 돌궐의 부흥을 막지 못했다. 그 결과 동방에서 신라를 막을 힘을 상실했고, 신라는 676년 당군을 몰아내고 삼국통일의 업적을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신라는 고구려처럼 당나라에게 지속적으로 대항할 수 있는 의지는 없었다. 신라는 이후 중국화의 길을 선택했고, 그것은 곧 이후 한국사의 중요한 흐름이 되어 버렸다.

고구려의 멸망으로 인해 5〜6세기 다원적 국제질서가 종언되고, 동아시아에는 당나라 중심의 일원적 국제질서가 구축되었다. 토번과 돌궐도 오래 지속되지 못하면서, 동아시아에는 거대한 당제국만이 문명의 중심으로 남았다. 중국문화는 동아시아 여러 나라에 널리 전파되며 동아시아에는 중국 중심의 단일 문명권이 성립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資治統監], [舊唐書], [新唐書], [三國史記], [冊附元龜], [全唐文], 김용만, [새로쓰는 연개소문전], 바다출판사, 2003년, 서인한, [高句麗 對隋․唐 戰爭史],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91년, 노태돈, [삼국통일전쟁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9년, 김용만, [2次 高句麗 -唐 戰爭(661-662)의 進行 過程과 意義],<민족문화> 27집, 2004년 .





김용만 | 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
글쓴이 김용만은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국 고대사를 연구하고 있다. 현재는 삼국시대 생활사 관련 저술을 하고 있으며, 장기적으로 한국 고대 문명사를 집필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고구려의 그 많던 수레는 다 어디로 갔을까], [새로 쓰는 연개소문전] 등의 책을 썼다.


발행2011.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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