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칭기즈칸 정벌 (1) - 푸른 이리의 후예들, 대제국을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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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15회 작성일 16-02-07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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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호령 전투에서의 몽골군과 금군(金軍): 집사(集史) 중 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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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표


칭기즈칸 정벌 전쟁 개요

전쟁주체


몽골 제부족, 몽골 울루스, 금(金), 서하(西夏), 코레즘

전쟁시기


1190년대~1227년

전쟁터


현재의 몽골, 남부 시베리아, 중국 북부, 신강성, 중앙아시아

주요전투


야호령, 중도 포위전, 오트라르, 부하라, 사마르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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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제국(Mirror Empires)



서력으로 13세기 초반. 중국에서는 한(漢)족의 송나라와 여진족의 금(金)나라가 각축전을 벌이고 있을 시기. 유럽은 십자군 원정을 통한 새로운 문물의 유입으로 서서히 변화가 일어나고 있을 시기. 인도에서는 이슬람을 믿는 투르크가 북부 인도를 점령하면서 힌두교 중심의 브라만세력이 위협받던 시기. 이슬람 문화가 융성하기는 하였지만 정치적으로는 분열되어있던 시기.

금나라의 북쪽. 현재의 몽골과 고비사막, 바이칼호 인근의 남부 시베리아, 그리고 알타이 산맥 북부를 아우르는 넓은 지역에서는 각축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주변의 나라들은 각축전이 늘 있는 북방 유목민들의 세력다툼이라고 여겨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어차피 강력한 세력이 등장할 것도 아니었고 좀 힘센 인물이 나오더라도 황금과 보물로 적당히 구슬리면 문명국 임금의 말을 고분고분 따를 것이라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유목기마족들이 노리는 것은 농경민이 소중하게 여기는 ‘영역’과 ‘농토’가 아니라 약탈물이었기 때문에 이들이 원하는 것만 손에 쥐어주면 얌전해질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을 변경에 일종의 용병세력으로 세워 그 밖의 다른 ‘야만인’들을 견제할 수 있으면 문명국의 관점에서는 꿩먹고 알먹기, 일거양득이었다.

보물과 약탈물, 그리고 군사적 부용(附庸)을 매개로 하는 공존관계에 대하여 미국 인류학자인 토마스 바필드(Thomas Barfield)는 “거울제국(Mirror Empires)”이란 개념을 제시하였다. 어느 지역에 강력하면서도 규모가 큰 국가(제국)가 세워지면 이에 상응하여 변경너머에서 다른 강력한 정치체제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이 가장 잘 드러난 사례가 중국과 북방유목민들의 관계라는 것이다. 즉 중원에서 강력한 제국이 등장하면서 정권과 물자의 집중이 이루어지고 북방의 유목민들이 이를 약탈하는 과정에서 많은 부를 축적하고 이를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하나의 지도자나 부족이 등장할 경우 제국의 규모에 준하는 제국적 연맹체(Imperial confederacy)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유목연맹은 중국 같은 정착형 제국에 준하는 관료시스템이라던가 고도의 행정체제를 만들지는 못한다. 그러나 제국적 유목연맹의 지도자는 군사력과 대외교섭권을 독점하여 일사불란한 지휘체계를 구축하고 휘하의 제 부족들에게 물품을 분배할 권리 역시 독점하는 경우가 많고 휘하 부족들은 약탈물을 분배가 보장되는 한 지도자를 거스르지 않는다. 유목연맹의 지도자는 이러한 역학관계를 통하여 정착제국의 제왕들 못지않은 힘을 휘두르는 경우가 많다.

서력(西曆)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전/후 전환기까지 흉노와 중원을 지배하였던 한나라의 관계가 이러하였으며 역시 초원에서 강력한 세력을 이룬 단석괴(檀石槐)의 선비제국, 유연(柔然) 제국, 제1 돌궐 제국 역시 이러하였다. 이와는 반대로 변경의 유목집단이 정착문명의 가치를 받아들이고 정착문명의 근거지로 들어가 이를 점령하고 왕조를 세우는 일이 있다. 이를 보통 ‘정복왕조’라 하는데 중국사에서는 척발씨의 북위, 모용씨의 연(燕), 전진(前秦), 거란족의 요(遼), 여진의 금(金), 그리고 만주족의 청(淸)등이 있다. 넓은 의미에서는 남북조의 혼란기를 수습하고 등장한 수(隋), 중앙아시아에서 출발하여 인도를 차지한 무굴제국, 오스만투르크 제국 등이 있다. 이는 유목민이 그들의 우수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다수의 정착민을 하층민으로 두고 이를 다스리는 형태이다. 그러나 ‘정복왕조’의 건설이 아니라 유목민이 정착에 성공하여 반농반목이 아닌 온전한 정착국가를 건국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약탈과 기습을 하던 유목사회에서 정착국가로 전환한 마쟈르 의 헝가리는 유목민이 온전히 정착국가를 건설한 몇 안되는 사례이다.



초원의 제국, 해양 제국, 영역형 제국의 차이



몽골이 제국을 세우고 그 영토가 14세기 초 절정에 달하였을 때 그 면적은 2350만 평방km. 현대국가 중 가장 영토가 넓었던 소비에트 연방(2240만 평방km)보다 크다. 육지로만 그 전 영역이 연결된 연육제국(連陸帝國, contiguous land empire)으로서는 가장 컸고 세계 역사상의 제국 중 대영제국(3550만 평방 km)에 이어 2위이다. 몽골제국은 사실 초원/스텝지역에 형성이 된 많은 제국 중의 하나이다. 초원과 정착국가의 특성이 다른 만큼 몽골제국은 중원의 제국들이나 우리 역사상의 고구려, 중동 등에 세워진 제국과는 다르다. 제국이란 어떠한 세력이 광대한 지역에 영역을 설정하고 광대역을 통제하고 통치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정치적인 시스템이라고 정의되어있다. 지역이 광대한 만큼 이질적인 집단들이 많이 포함되어있고 이들을 통섭하여 시스템에 순응을 하게 만들어야 한다. 이는 초원, 해양, 영역형 제국을 막론하고 공통의 사항이다. 그러나 각 집단을 통섭하여 제국에 붙들어두는 역학관계, 즉 메커니즘은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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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이전 몽골 제부족.



영역형 제국(Territorial empire)은 일단 영역을 차지하면 관리를 파견하여 다스리고 세금을 걷는 식으로 행정력을 확보하려 한다. 이를 행하는 총독이나 지사, 군수 등은 모두 중앙정부의 대리인(Representative)으로서 해당지역에 나가있는 것이다. 역사상 제국들의 대부분은 이러한 영역형 제국이다. 해양제국의 경우 어떤 넓은 영역을 고집하기 보다는 해안과 연안지역에 거점을 마련하여 거점간에 하나의 네트워크를 만들어 연결시키고 이러한 거점간의 물자유통망을 유지하는데 중점을 둔다.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 제국이나 대항해 시대 초기의 포르투갈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에 비하여 유목제국은 거대 정착제국의 곁에서 ‘거울제국’으로 생겨나는 경우가 많다. 정착제국을 약탈하거나 약탈의 위협을 바탕으로 한 협약, 또는 정체제국의 변경시장에서 거래할 권리를 독점하여 물자를 축적하고 이를 바탕으로 제국을 유지한다. 정착제국은 관리들이 백성들로부터 거두어들이는 세금으로 유지되지만 유목제국의 경우는 지도자의 군사력으로 획득한 재물을 구성원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줌으로서 유지가 된다. 즉 물품분배의 대가로 집단에 대한 충성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만약 정착제국이 멸망할 경우, 단기적으로는 혼란으로 인하여 약탈이 쉬워지지만 정착국가로부터의 물품공급이 끊기면 장기적으로는 유목집단을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하여진다. 바필드의 거울제국 개념은 이러한 역학관계에 그 근본을 두고 있다. 유목민들이 원하는 것은 약탈의 대상이 되는 정착국가의 멸망이 아니라 정착국가의 생산력이 매개가 되는 일종의 공생관계다. 몽골제국 역시 초기에는 이러한 “거울제국”적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칭기즈칸이 12세기와 13세기에 유라시아 전역에 걸쳐 제국을 구축한 후 그의 후손대에서는 그 모습이 달라진다.



테무진과 몽골부족의 통합



서력 12세기 중반에 지금의 몽골 어딘가에서 태어났을 것으로 여겨지는 칭기즈칸의 몽골통합과정은 명조(明朝) 초기에 한인(漢人) 사관들이 각종 사료를 집대성하여 저술한 원조비사(元朝秘史)와 페르시아의 라시드 알-딘 함마단이 쓴 집사(集史)에 잘 서술되어있다. 칭기즈칸의 아버지인 예수게이는 몽골제국 등장이전에 몽골초원에서 큰 세력을 형성하였던 하마그 몽골연맹을 세운 보르지긴 씨족 카불칸의 방계 손자이다. 카불칸이 초원의 부족들을 하나의 동맹 하에 묶는데 성공하고 ‘울루스(나라)’를 세웠다. 그러나 그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하던 금(金)나라가 새로운 울루스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이에 금나라는 인근의 타타르족과 손을 잡고 몽골 울루스를 견제하려 하였다. 이후 카불칸이 죽고 타이치우트 씨족의 암바하이가 칸이 되었는데 혼인문제 때문에 타타르를 방문하였다가 타타르에게 잡혀 죽고 카불칸의 아들인 쿠툴라가 칸 자리를 이어받는다. 쿠툴라는 타타르에게 복수하기 위하여 전투를 벌였다가 1160년경 크게 패하고 죽는다. 이후 하마그 몽골연맹은 상당히 약화된 상태에서 예수게이에게 지도권이 넘어갔다. 금나라가 뒤에서 조종하는 타타르-하마그 몽골 전쟁은 변경민족들을 이간질하여 그 통합을 방해하는 정착국가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만약 변경민족들의 세력이 하나로 뭉치면 군사력 증강을 위하여 많은 비용이 소요됨은 물론 중대한 안보상의 위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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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칸은 토그릴과 자무카를 상대로 승리하여 결국 몽골을 포함한 북방초원을 통일하게 된다.



예수게이는 선조가 타타르에게 당한 것을 복수하기 위하여 타타르와 전쟁을 벌이다가 타타르의 군장 한 명을 사로잡게 되고 그 군장의 이름을 따서 아들에게 ‘테무진’이란 이름을 주었다. 그러나 예수게이는 이후 타타르에게 독살당하고 아내 호엘룬과 그 자식들은 갖은 고생을 하게 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테무진은 주변 부족의 기습으로 잡히게 되고 아버지의 키야트-보르지긴 씨족과 라이벌 관계를 형성한 타이치우트의 포로가 된다. 타이치우트에게 잡혀있던 테무진은 소르킨 시라라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 타이치우트를 탈출하게 되며 소르킨 시라의 아들인 칠라운은 후일 칭기즈칸의 심복이 된다.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 테무진은 역시 후일 명장이 되는 젤메와 보르츄를 친구로 삼는다. 테무진은 16세에 옹기라트의 보르테와 결혼하게 되는데 메르키트의 습격으로 보르테가 납치당하자 아버지 예수게이와 의형제를 맺은 케레이트의 토그릴칸과 그의 어린 시절 안다(의형제)인 자다란의 자무카의 도움을 받아 메르키트를 격파하고 보르테를 되찾는다. 그러나 메르키트에게 잡혀있는 동안 보르테는 임신을 하였고 구출된 후 아들인 조치(손님이라는 뜻)를 낳게 된다. 조치의 출자가 의심받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이는 이후 칭기즈칸의 아들들간에 계승논쟁이 벌어질 때 갈등의 불씨가 된다.

비록 도움을 받았기는 하나, 초원에서 주도권을 잡는데 있어 토그릴과 자무카 역시 걸림돌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서력 기원 1206년에 자신들에게 모여든 부족들로부터 ‘칸’으로 추대받은 후 토그릴칸과 역시 추종세력으로부터 ‘구르칸’으로 추대된 자무카와 싸워 승리하고 몽골을 포함한 북방초원의 제 부족을 통일하게 된다. [원조비사]에는 자무카가 패한 후 칭기즈칸 앞으로 끌려왔으나 칭기즈칸은 예전의 우정을 상기시키며 다시 의형제로 지내자고 하는 대목이 있다. 그러나 칭기즈칸만큼이나 야심이 강했던 자무카는 권력의 생리를 잘 아는 사람이었으며 칭기즈칸의 ‘우정에 찬’ 제의를 거부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한다.



“나의 형제여,
그대는 우리 족속을 모두 복속시켰으며
다른 부족을 모두 하나로 만들었고
이로서 칸의 보좌는 그대에게 주어졌다
이제 온 세상을 그대의 뜻대로 할 수 있는데
내가 과연 그대의 형제로 쓸모가 있겠는가?“


이제 초원은 모두 칭기즈칸의 것이 되었으며 칭기즈칸은 초원의 모든 전사들을 하나로 만들어 ‘해가 지는 땅끝’까지 달려가기 시작했다.



전쟁:유목사회와 정착사회의 차이



전 부족이 통일된 몽골은 과거 어느 때보다 강력한 군세(軍勢)를 동원할 수 있었으나 이마저도 인구가 밀집된 정착형 국가에 비하면 수적으로는 초라하였다. 그러나 몽골의 강점은 기마집단특유의 기동성과 함께 말을 탈 수 있는 성인남성을 모두 군사력으로 동원할 수 있다는 점에 있었다. 아울러 활을 쏘고 사냥감을 추적하여 잡아들이는 일상 자체가 군사훈련이었기 때문에 병사들이 장기간의 훈련이 필요 없이 빠르게 전장에 투입될 수 있다는 것도 정착국가의 군대와 싸울 때 큰 장점으로 작용하였다. 아울러 이들은 이미 전투에 필요한 마필을 키우고 있었으며 평소에 무기와 갑옷 등을 마련해 두었기 때문에 군사동원에 필요한 비용이 최소화되었다. 그리고 전쟁에 동원되어 일을 하지 못한다 하여도 전쟁에 참여함으로써 얻는 노획물이 대개는 일을 하지 못하는 비용보다 몇 갑절 많다. 즉 유목민에게 있어 정착사회에 대한 전쟁 자체가 생산활동이 되는 것이다.

일반적인 국가의 군대는 농업이나 기타 생산활동에 있던 성인남성을 일부 차출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들에게 무기 사용과 전투에 익숙해지게 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 아울러 군대의 구성원이 서로를 믿고 의지하도록 만드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에 사회로부터 격리시켜 생활하게 하여야 한다. 그리고 이들을 훈련시키고 먹이고 재우는 것은 모두 국가의 비용으로 충당하여야 한다. 즉 전쟁행위 자체가 큰 소비행위가 된다. 물론 정착국가의 전쟁도 이득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정착국가가 같은 정착사회와 싸울 경우 비축된 재화(財貨)와 함께 생산기반인 농토, 그리고 노동력을 제공할 수 있는 농민을 차지하기 때문에 전쟁 이후 오히려 국가의 재산과 생산력이 증대되는 경우가 있다. 로마가 공화정 말기에 벌인 정벌의 경우 대개 같은 정착사회를 상대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오히려 전쟁에 들어가는 비용의 몇 갑절에 해당하는 금액을 벌어들였다. 기원전 167 년 로마가 마케도니아를 점령한 후 획득한 마케도니아 왕실의 막대한 재산으로 인하여 로마인들에게는 세금이 면제되었다. 카이사르가 갈리아를 정복하고 얻은 금의 양은 엄청나서 로마에서 금의 가격이 36%나 폭락할 정도였다.

그러나 정착국가가 유목국가를 상대로 싸울 때의 양상은 사뭇 다르다. 일단 유목민들이 살고 있는 초원지대는 대개 농업에 적합한 지역이 아니어서 이를 차지해보았자 농사를 지을 수도 없다. 유목민들은 정착사회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많은 재산을 쌓아두고 있는 것도 아니어서 빼앗아 보았자 동원의 비용도 건지지 못한다. 결국 정착국가가 대군을 일으켜 유목민들을 무찌른다 하여도 유목민들은 속된 말로 짐을 싸가지고 달아났다가 대군이 물러나기를 기다려 다시 차지하면 그만이다. 정착국가는 또 변경에 성을 쌓고 군대를 주둔시켜 유목민의 침공을 막아야 한다. 이런저런 비용 때문에 정착국가의 관점에서는 효과도 확실하지 않은 정벌전을 벌이기 보다는 협상을 통하여 일정량의 ‘하사품’을 내려주고 변경의 시장을 개방하여 유목민의 소, 말, 양과 털옷 등의 물품을 곡식이나 옷감과 맞바꾸게 하는 것이 비용의 측면에서 오히려 나을 수 있다.

칭기즈칸 등장이전의 몽골사회도 이러한 패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주변의 정착국가를 침탈하지 않는 대신 일정량의 물품을 받고 서역과 중원 등의 무역중개, 그리고 변경무역 등으로 돈을 벌어들였다. 그러나 초원을 통일한 칭기즈칸은 단순히 중원을 공격하여 돈을 뜯어내는 것 이상의 꿈이 있었다. 칭기즈칸 이전 초원의 지배자들은 전쟁으로 벌어들이는 물품을 나누어주는 방식으로 하위 부족들을 아래에 붙들어두었다. 칭기즈칸 역시 어느 정도는 이러하였으나 이와 더불어 내세운 이념을 부족들에게 내세웠다. 즉 자신의 울루스(나라)에 있는 모든 부족들은 ‘푸른 이리’의 후손들이며 푸른 이리의 후손들은 하늘 아래 존재하는 모든 땅을 그들의 것으로 할 수 있는 권리를 천신(天神)인 ‘텡그리’로부터 받았다는 것이다. 단순히 하나의 군주가 아니라 몽골이라는 집단이 천하를 정복하고 지배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일종의 선민의식(選民意識)이라 할 수 있다. 과거의 유목연맹체들을 유지하는 기본적인 시스템이 노획물의 재분배였다면 칭기즈칸은 새로운 통일집단을 뒷받침하는 정치종교적 이념을 만드는데 성공한 것이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일종의 민족주의라고 할 수도 있으며 이로 인하여 새로이 형성된 울루스의 구성원들은 보다 단단히 뭉칠 수 있었다. 이들은 푸른 이리의 후예라는 자의식 하에서 하나가 되었고 이로서 칭기즈칸은 일단 약탈물의 공급이 끊기면 쉽게 분열되고 쪼개졌던 과거의 유목연맹체와는 확연히 다른 일종의 정치적인 ‘민족’이 형성된 것이다. 이 때문에 현재의 몽골에서는 칭기즈칸을 ‘몽골’이라는 국가를 만든 건국의 아버지로 간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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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칸의 정벌 이전 동아시아 형세도.





정벌의 시대 1: 대금(對金) 전쟁



통일된 몽골부족의 첫 정벌대상은 티베트족 계열의 당항(탕구트)족이 지금의 중국 섬서성과 영하(닝시아) 자치성, 그리고 신강성에 걸쳐서 세운 국가인 서하(西夏)왕국이었다. 이는 서하 왕국이 통합된 몽골 부족의 영역으로부터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만만한 상대였기 때문이다. 1202년의 첫 공격을 시작으로 서하의 영역을 파고 들었고 1206년에는 대대적인 침공이 이어졌다. 물론 북중국 중원지역과 만주 일대를 차지하고 있던 금(金)나라의 맹약을 맺고 있어 서하를 정벌할 경우 금나라가 구원군을 보낼 가능성이 있었으나 칭기즈칸은 내부 정쟁으로 시끄러운 금나라가 서하에 원군을 보내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공격을 개시하였다. 몽골의 침공을 맞은 서하는 예상대로 금나라에 원병요청을 하였으나 금나라는 원병요청에 응하지 않았다. 이 와중에 서하의 왕실에서는 쿠데타가 발생하여 환종(桓宗)황제가 살해당하고 양종(襄宗)이 새 황제로 등극하였다. 양종은 칭기즈칸에게 자발적으로 복속을 청하고 그의 공주 중 한 명을 칭기즈칸에게 시집보냈다.

한 편 그 동안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으로 몽골의 분열을 조장해온 금나라는 1210년에 칭기즈칸에게 사절단을 보내어 과거의 칸들이 그러하였듯이 금나라에 복속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금나라는 단단히 착각을 하고 있었다. 이는 새로운 몽골의 칸과 함께 통합된 몽골의 힘을 과소평가했던 것이다. ‘푸른 이리’들의 후손들은 더 이상 그 누구에게도 무릎을 꿇으려고 하지 않았다. 1211년에 전 부족을 포함하는 ‘쿠릴타이’를 소집한 칭기즈칸은 천신에게 제사지내는 자리에서 과거 금나라가 몽골에게 가한 온갖 모욕을 상기시키며 원한을 갚을 것임을 천명하였다. 그리고 천신에 대한 제사를 끝내고 돌아왔을 때 “천신께서 우리에게 원수갚음과 승리를 약속하였다”고 선언하며 금나라에 대한 공격을 명하였다. 이어 칭기즈칸은 9만의 몽골군을 이끌고 금나라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야호령(野狐嶺)의 전투에서 50만에 달하는 금나라의 대군을 격파하고 몽골군이 금나라의 영역에 진입하자 과거 북부 중국의 지배자였으나 금나라에 복속된 체 지내고 있던 거란족과 심지어 일부 여진 부족까지 몽골에 자진하여 편입되었다. 이 과정에서 칭기즈칸의 심복인 제베가 심양을 점령하고 만주지역을 금나라로부터 떼어놓았다. 1213년에는 금나라의 중도(中都)인 지금의 북경을 포위하였다. 그리고 1213년부터 1214년 봄에 걸쳐 몽골군은 북중국을 철저히 약탈하고 파괴하였다. 결국 중도에 갇힌 금나라 조정에서는 쿠데타가 일어났고 금나라의 새 조정은 몽골군이 포위를 풀고 물러가면 몽골의 제후가 될 것을 약속하였다. 뒤이어 금나라의 황제가 된 애종은 아예 수도를 예전 북송의 수도였던 개봉(카이펑)으로 옮겼다. 금나라는 스스로가 유목민의 후예였고 몽골군의 몇 갑절에 달하는 병력을 지니고 있었으나 송나라와의 전쟁과 내부의 혼란으로 군세를 통일하지 못하여 지리멸렬하였다.

1214년에는 현재에도 그 지명이 남아있는 대동부가 몽골군에 함락되었다. 그리고 1215년에는 중도가 몽골군에 함락되었고 몽골군은 엄청난 살육을 자행하였다. 당시 그 참상을 담은 기록에는 건물들과 함께 죽은 사람들 역시 불태워 지면서 그 기름이 중도의 거리에 흘러넘칠 정도였다고 한다. 금나라는 1234년에 몽골과 남송의 연합에 패하고 멸망한다.





김성남 | 안보·전쟁사 전문가
글쓴이 김성남은 전쟁이 인간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 UC 버클리 동양학과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국제학 석사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에 진학하여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전쟁으로 보는 삼국지], [전쟁 세계사] 등이 있으며 공저로 [4세대 전쟁]이, 역서로 [원시전쟁: 평화로움으로 조작된 인간의 원초적인 역사]가 있다.


발행2012.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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