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칭기즈칸 정벌 (2) - 푸른 이리의 후예들, 대제국을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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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24회 작성일 16-02-07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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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호령 전투에서의 몽골군과 금군(金軍): 집사(集史) 중 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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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표


칭기즈칸 정벌 전쟁 개요

전쟁주체


몽골 제부족, 몽골 울루스, 금(金), 서하(西夏), 코레즘

전쟁시기


1190년대~1227년

전쟁터


현재의 몽골, 남부 시베리아, 중국 북부, 신강성, 중앙아시아

주요전투


야호령, 중도 포위전, 오트라르, 부하라, 사마르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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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벌의 시대 2: 코레즘과 카라-키타이



몽골이 과거의 단순한 유목 약탈경제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한 칭기즈칸은 실크로드의 중간길목에 위치한 코레즘 왕국에 500명으로 구성된 상단을 만들어 파견한다. 그러나 몽골의 상단을 맞은 코레즘의 샤(페르시아말로 임금)인 알라 앗-딘 무함마드는 일단 몽골인들이 단순히 교역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왕국을 탐색하기 위하여 온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였다. 무함마드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무슬림이었는데 마침 바그다드에 있는 압바스 왕조의 깔리프와 갈등 중이었다. 바그다드의 깔리프는 명분상 이슬람 세계의 ‘교황’으로서 무함마드의 코레즘 왕국 역시 그 권위를 인정하기를 요구하였고 무함마드가 바그다드에 와서 깔리프에게 인사와 조공을 할 것을 명령하였다. 무함마드는 깔리프의 요구를 거부함과 동시에 깔리프가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되려 코레즘의 독립성을 인정할 것을 요구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바그다드의 깔리프가 몽골과 접촉하여 코레즘과 몽골사이에 전쟁을 일으키려고 하였다고도 하나 그 여부는 분명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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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고궁 박물관에 있는 ‘원태조’(칭기즈칸)의 초상.



몽골의 상단은 코레즘 왕국의 변경이었던 오트라르에서 코레즘의 관리에게 저지당하고 결국 포로로 잡혔다. 이 사건을 두고 실제로 칭기즈칸이 첩보전의 일환으로서 상단을 보냈다는 주장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물론 칭기즈칸이 정벌에 앞서 정보수집에 충실하였고 적진에 내분을 유도하였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위의 설이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나 금나라와 서하가 아직 멸망하지 않은 상황에서 코레즘과 일부러 전쟁을 할 핑계거리를 만들려고 하였다는 추론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몽골의 사단이 억류당하자 징기즈칸은 이에 대한 경위 해명을 요구하며 세 명의 사절을 보냈다. 그러나 무함마드는 세명 중 한 명을 참수하고 나머지 둘은 그 수염을 깎아버린 후 참수된 사절의 머리를 들려 돌려보냈다. 그리고 억류중인 몽골 상단 500은 모두 처형당하였다. 아무리 적이라도 사절은 절대로 건드리지 않는 몽골인의 관점에서 무함마드의 행위는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대노한 칭기즈칸은 코레즘과의 전쟁을 위하여 몽골 전역에서 전사들을 동원함과 동시에 몽골에 복속한 서하 왕국에서도 군을 내어줄 것을 요구하였다. 코레즘 왕국은 40만의 대군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이에 튀르크계의 유목민인 캉리족을 용병으로 고용하였다. 이는 코레즘 왕국이 실크로드의 중심을 장악한 부유한 나라였기에 가능하였다.

아무리 대초원을 통일하였다지만 코레즘의 40만 대군을 쉽게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약 15만의 명의 병사를 모은 칭기즈칸은 그래도 이전에 자신의 신하가 되기로 한 서하(西夏)왕국에 사자를 보내 증원군을 요청했다. 서하의 왕인 신종은 칭기즈칸을 도와주자 하였지만 대장군 아사-감푸를 비롯하여 군권을 장악한 장군들이 이를 거부하였고 “그 정도 병력도 모으지 못하면서 어찌 칸이라 할 수 있는가?”라고 하면서 오히려 칭기즈칸의 사절을 조롱하였다. 이는 몽골을 통일하고 금나라를 거의 정복해 북방 초원의 제왕이 된 칭기즈칸에게 형언할 수 없는 모욕이었다. 속이 부글거렸지만 코레즘과의 싸움이 급했던 칭기즈칸은 어쩔 수 없이 물러났다.

그러나 칭기즈칸이 코레즘을 정벌하기 위해서는 현재 중국의 신강성 서쪽에서 아랄해까지의 중앙아시아 지역에 걸쳐있던 서요(西遼, 카라-키타이)왕국을 지나야 했다. 원래 서요는 중국 북부를 지배하였던 요나라의 후예인 야율대석(耶律大石)이 1124년에 세운 나라였다. 그 이후 100년간 야율씨가 다스렸으나, 금나라와 싸우고 있던 1211년에 대초원의 부족중 하나였던 나이만이 칭기즈칸과의 전쟁에서 패한후 서쪽으로 도주하여 임금이었던 천희제(天禧帝, 이름 耶律直魯古)를 죽이고 서요의 왕좌를 빼앗는다. 나이만의 군장인 쿠츠룩은 서요에 들어왔을 당시 후대(厚待)를 받았고 서요의 조정에서 중요한 위치에 올랐지만 오히려 이를 이용하여 권력을 구축하고 서요의 왕좌를 찬탈한 것이다. 이로서 서요에서 거란인의 종사는 끝이나고 칭기즈칸에게 패하였던 쿠츠룩은 과거 서요의 땅을 7년동안 지배한다. 1218년에 코레즘으로 진격 중이던 몽골군은 쿠츠룩이 지배하고 있던 서요에 진입하였고 쿠츠룩은 몽골군에 맞서 싸웠지만 서요의 수도인 발라사군(현재 키르기스 공화국 비슈케크 인근)의 주민들은 구츠룩을 위하여 싸워주지 않았고 오히려 자발적으로 성문을 열고 몽골군을 받아들였다. 사세가 기운 것을 안 구츠룩은 남쪽으로 도망하였으나 주민들에게 사로잡혀 몽골군 앞으로 끌려왔고 결국 참수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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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레즘 제국 (1190년경)



몽골군의 진군소식을 들은 무함마드는 대군을 모아 결전을 하는 대신 군을 나누어 주요도시에 배치시켜 여러 방향에서 협격(挾擊)한다는 작전을 세웠다. 아울러 수도인 사마르칸트와 부하라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도시들이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기에 때문에 ‘무식한’ 몽골족들이 공성전에 약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칭기즈칸은 15만의 몽골군을 이끌고 천산을 넘어 코레즘으로 진격하면서 일대(一隊)는 맏아들인 조치에게 맡겨 코레즘의 남쪽으로 진격하게 하였다. 조치는 진격하는 중 약 3만정도의 코레즘군과 충돌하였고 이를 격파함으로써 몽골군이 단지 시위로서 코레즘에 온 것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조치는 아울러 혹시라도 전황이 불리해질 경우 무함마드가 남쪽으로 도망할 수 없도록 길을 막는 역할도 맡고 있었다. 칭기즈칸이 이끌고 있던 본군의 우선 공격대상이 된 도시는 몽골의 상단이 포로로 잡혔다가 처형당했던 오트라르였다. 몽골군은 오트라르를 파괴하여 몽골을 모욕하면 어떻게 되는 지의 본보기로 삼고자 하였다. 오트라르의 함락은 무려 5개월이 걸렸는데 몽골군은 수비군이 잘 지키지 않고 있었던 돌문(突門)을 통하여 성안으로 들어와 수비군을 살육하였다. 그러나 몽골군이 성안으로 진격한 후에도 성주와 그의 군사 일부는 내성(內城)에서 끝까지 저항하였다. 약 한 달간 다시 내성을 한 후에야 함락되기는 하였지만 몽골군은 오트라르의 성주 이날추크를 붙잡았고 어찌보면 몽골의 상단을 붙잡아 몽골과 코레즘간 전쟁을 촉발시켰다고 할 수 있는 이날추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펄펄 끓고 있는 은이었다. 몽골군은 상단을 살해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끓인 은을 이날추크의 목구멍으로 부어서 죽여버렸다. 칸은 또 다른 분대를 심복이자 대초원 최고의 명궁수로 이름이 높은 제베의 지휘하에 남쪽으로 보내고 칭기즈칸 자신과 막내 아들 톨루이가 이끌고 있었고 북서쪽으로 진군을 시작하였다. 그리고는 사라졌다.

오트라르를 함락시킨 몽골의 본군은 사마르칸드 방향으로 오다가 방향을 바꾸어 어디론가 사라졌다.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들이 향한 방향은 키질-쿰 사막이 있는 곳이었다. 죽음의 길로 악명높은 키질-쿰 사막은 현지인들은 물론 사막을 가로지르는 것이 업(業)인 카라반 상인들조차 가기를 꺼려하는 곳이었다. 이를 들은 샤는 몽골군이 길을 잃고 사라졌다고 생각하고 한 시름 놓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 칭기즈칸은 이미 키질-쿰 사막을 잘아는 향도(嚮導)들을 확보하고 이들을 앞세워 몇 안되는 오아시스가 있는 길을 따라 키질-쿰을 횡단하고 있었다. 많은 군사학자들은 이때 칭기즈칸의 키질-쿰 행군을 두고 역사상 최대의 우회기동이라고 극찬하고 있다.

무함마드의 제국에는 많은 도시들이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도시는 사마르칸트와 부하라였고 이 두 도시는 몽골군의 최대의 목표였다. 몽골군의 진격로로 볼 때 보다 동쪽에 위치하여 있는 사마르칸트가 먼저 공격을 당할 것이 당연시 되었다. 몽골군이 사마르칸트로 오다가 사라져 버렸으니 무함마드는 수비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마음을 놓고 있었다. 그러나 그 다음에 벌어진 상황에 코레즘 수뇌부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사라진 줄 알았던 5만의 몽골군이 갑자기 어느 날 부하라 성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부하라는 튀르크계 수비병들이 지키고 있었는데 긴 농성전을 하기보다 결전을 택하였고 불과 수 일 후에 2만의 튀르크계 병사들이 뛰쳐나와 몽골군을 공격하였으나 유인작전에 의하여 남김없이 궤멸되었다. 성을 지키던 군사들이 야전에서 패하는 것을 본 성민들은 자진해서 열었지만 성안에 남은 튀르크 병사들은 내성에서 계속 싸웠고 몽골군은 이들을 모두 죽여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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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에 있는 칭기즈칸의 언덕 위 초상.



부하라가 함락된 후 몽골군은 코레즘의 수도인 사마르칸드에 모였다. 사마르칸드는 부하라보다 높고 두터운 성벽과 약 10만의 수비병에 의하여 지켜지고 있었고 만약 이들이 마음먹고 수비만 한다면 몽골군에게는 길고 어려운 싸움이 될 수도 있었다. 몽골군은 유인작전을 써서 수비병들을 밖으로 끌어내었고 밖으로 나온 5만의 코레즘군은 몽골군의 함정에 빠져 전멸하였다. 사마르칸드의 주민들은 모두 살려주겠다는 칭기즈칸의 약속을 받은 후 자진해서 성문을 열었지만 무함마드의 근위대는 내성에서 계속 싸웠고 몽골군은 이미 복속한 도시에서 또 다시 힘든 싸움을 겪어야 했다. 근위대의 ‘과잉충성’의 대가는 혹독하였다. 칭기즈칸은 이전에 한 약속을 무효로 돌리고 사마르칸드의 주민들을 모두 밖으로 내몰아 죽여서 그 머리를 피라미드처럼 쌓았다. 이때 죽은 주민의 수가 무려 75000명에 달하였다

사마르칸트 함락후 다른 대도시인 우르겐치에 대한 공격이 이어졌다. 우르겐치는 습지에 지어진 도시였고 이 때문에 땅이 물러 몽골군의 장기인 기마전도 어려웠고 공성을 위한 중장비를 들여올 수가 없었다. 공성기를 들여왔다 하여도 주변이 습지라 큰 돌이 드물어 결국 병력을 동원한 공성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칭기즈칸에게 우르겐치를 차지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은 맏아들 조치가 성민(성민)들과 항복협상을 개시하자 차남인 차가타이가 반발하였다. 이에 칭기즈칸은 조치와 차가타이를 빼고 오고데이에게 지휘권을 주었고 조치와 차가타이간의 감정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우르겐치가 함락되자 장인들과 공인들은 몽골 본토로 보내졌고 여인들과 아이들을 노예를 잡은 후 나머지는 모두 참살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사망자가 백만을 넘는다고 하지만 이는 과장이다. 우르겐치의 전체 인구보다 많은 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한 것은 사실이고 이후 바미안과 더불어 코레즘 전쟁중 몽골군이 자행한 대학살 중 최대의 학살극이 벌어졌다.

몽골군이 사마르칸트, 부하라, 우르겐치등 코레즘의 주요도시들을 모두 점령하고 분산배치 되어 있었던 코레즘군을 대부분이 패한 후 코레즘제국의 왕 무함마드는 도망치는 것 외에는 방도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아들 잘랄 앗 딘은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남쪽으로 가서 저항할 준비를 했다. 마침 지금의 이란 북쪽 파르완에서 몽골의 소부대가 패했고 그 근처의 도시가 반기를 들 기미를 보였다. 코레즘의 중심부를 떠나 남부지역인 호라산으로 진입한 몽골군은 테르메즈, 발흐, 메르브, 니샤푸르, 헤라트, 바미안 등을 연이어 함락시켰다. 이 방면의 지휘를 맡은 톨루이는 메르브의 수비군이 강력히 버티자 살려준다고 그들을 속인 다음 모두 죽였다. 니샤푸르에서는 칭기즈칸의 사위 중 한명인 토쿠차르가 목숨을 잃었고 니샤푸르가 함락되었을 때 톨루이는 성안에 살아 돌아다니는 것은 심지어 짐승조차 남기지 않을 정도로 철저히 살육하였다.

몽골군이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남쪽 바미안을 공격할 때는 불행하게도 칭기즈칸의 손자 모두간이 농성군의 화살에 맞아 죽었고 이에 분노한 칭기즈칸은 몽골군에게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바미안을 함락시키라고 명령했다. 엄청난 희생을 치른 몽골군은 결국 바미안을 함락시켰다. 도시를 함락시킨 몽골군은 대개 학자와 기술자, 공인(工人)들은 살려 몽골로 데려가는 것이 관례였지만 칸의 친족이 죽임을 당한 경우는 달랐다. 복수심에 눈이 멀어 있던 칭기즈칸은 바미안에 있는 모두를 죽일 것을 명령했다. 바미안에 있던 사람들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두 몽골군의 칼에 피를 뿌리며 쓰러졌고 니샤푸르와 마찬가지로 바미안에는 살아 돌아다니는 생명체가 하나도 없었다. 그 참상이 어찌나 끔찍했던지 몽골군 스스로도 바미안을 ‘슬픔의 도시’라고 부를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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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르겐치의 코레즘 왕궁유적.



무함마드는 카스피해 방면으로 도망쳐 외딴 섬에서 병들어 죽었고 아들인 잘랄 알-딘은 비록 소규모 몽골 선봉대와 싸워 승리하기는 하였으나 그의 목적은 5000명과 피난민들을 이끌고 안전한 곳으로 일단 달아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인더스강에서 몽골군에게 따라잡히고 잘랄 알-딘은 인더스 강가의 전투에서 그나마 남아있던 병력마저 거의 모두 잃었다. 결국 몇 안되는 군사들과 함께 인더스강을 건너 델리의 술탄에게 몸을 의탁하였다. 몽골보다 병력도 많고 실크로드 위에서 번성하던 코레즘 제국은 이리하여 1221년, 몽골의 칭기즈칸에게 멸망 당하였다. 이후 잘랄 알-딘은 다시 나라를 일으키려고 코레즘으로 돌아와 반란을 선동하였으나 칭기즈칸의 뒤를 이은 오고데이칸이 보낸 군사에게 패한 후 국제적 미아로 전락하여 셀주크 그루지아 등지에서 싸우면서 약간의 세력을 회복하였으나 1231년에 셀주크의 술탄이 보낸 암살자에게 죽는다.

몽골의 코레즘 정벌은 군사의 수에서 절대적인 열세에 있는 유목세력이 거대한 정착국가를 멸망시켰다는 선례를 남김과 동시에 후일 몽골군에 의한 러시아, 유럽, 이슬람 세계 정벌을 가능케 하는 기반에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적지 않다.



정벌의 시대 3: 코카서스, 루스



코레즘 정벌이 완료된 후 몽골군은 둘로 나누어졌다. 본군은 아프간과 인도 북부를 휩쓴 후 칭기즈칸의 인솔하에 몽골 본토로 돌아갔으나 수보타이가 이끄는 군은 페르시아와 코카소스 방면으로 진격하였다. 카스피해 남부를 돌아 러시아로 행하던 도중 수보타이의 몽골군은 현 아제르바이잔의 바쿠시(市) 근처 쿠라江가에서 그루지아왕 게오르규 4세의 군대와 격돌하였다. 몽골군은 무려 7만에 달하는 그루지아군과의 정면대결을 피하고 경기병을 내보내어 유인하였다. 그루지아군의 기사들은 열심히 뒤쫓았으나, 아무리 달려도 몽골의 경기병들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러는 동안 그루지아군은 어느새 개활지로 나와 있었고 매우 지쳐 있었다. 이때 몽골 경기병이 도주를 멈추고 일제 사격을 가한 뒤, 말을 갈아탄 몽골의 중기병 군단이 돌격을 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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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카서스와 러시아 남부까지 정벌한 칭기즈 칸.



몽골 중기병들이 그루지아 군을 양분(兩分)하고 그루지아 보병을 도륙하기 시작하였고 수 시간 후 그루지아군은 전멸에 가까운 대패를 당하였다. 같은 해 (1221)말에 본격적으로 코카서스 산맥을 넘어가기 전에 그루지야(현 조지아)군과 다시 격돌하였고 몽골군은 다시 유인작전으로 그루지아군을 함정에 빠뜨린 다음 궤멸시켰다.

이들은 이미 1220년, 코레즘 정벌이 막바지로 접어들 당시 칭기즈칸의 최종 승인이 있기 전에 이미 코카서스 방면으로 진입하여 북쪽의 알란족, 체르카스 등의 부족연합군을 격파하고 뒤이어 부족유목민인 쿠만과 싸워 쿠만의 칸을 전사시킨 일이 있었다. 이들이 다시 코레즘으로 돌아가 칸의 허락을 받는 동안 코텐이란 인물이 이끄는 다른 쿠만족 일파가 결혼동맹을 맺고 있던 갈리치아-블라디미르의 므티슬라프에게 도망쳤다. 코텐은 자신을 도와주지 않으면 몽골이 쳐들어와서 루스마저 점령당할 것이라며 구원을 요청했으나 쿠만족은 오랫동안 루스의 변경을 약탈하면서 괴롭혔기 때문에 루스의 대공(大公)들과 귀족들 중 그 누구도 선뜻 쿠만족을 돕겠다고 나서는 자가 없었다.

수부타이와 제베의 코카서스/러시아 남부 원정은 본격적인 공격과 점령보다는 일종의 정찰과 함께 적의 전력을 가늠하기 위한 탐색공격(Probing attack)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이 거느린 병력은 두 개의 투만(만인대)에 불과하였으니 아무리 많아도 2만을 넘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불과 2만으로 그루지야, 알란-체르카스, 쿠만을 이겼다는 것은 거친 환경에 익숙한 몽골인들의 강인함과 함께 수부타이와 제베의 전술적 천재성이 합쳐진 결과라고 해야 할 것이다. 코카서스 인근을 휩쓴 몽골군은 결국 1223년에 루스의 18개 공국(公國)의 군사들이 연합하여 우크라이나 동부의 칼카강에서 대결하게 된다.

몽골군은 드네프르강까지 진출하여 지금의 카자흐스탄 남부에 있는 조치로부터 원군을 기대하였으나 조치가 병을 이유로 원군을 보내지 않아 결국 있는 병력 그대로 루스의 병력과 싸워야 했다. 수부타이와 제베는 일단 물러서기로 하였다. 루스의 군세는 몽골보다 많았지만 총지휘자가 없어 각자 군을 이끌고 움직였다. 몽골군은 동쪽 칼카강을 향하여 물러나면서 1000명의 후위를 두어 루스군의 움직임을 감시하게 하였다. 이 후위부대는 강을 비록 중구난방으로 건너기는 하였지만 이곳 저곳에서 들이닥치는 루스의 군사들을 맞게 되었고 결국 중과부적으로 전멸한다.

칼카강에서 격돌하였을 때 루스 연합군중 폴로프치의 군사들이 싸워보지도 않고 도망하였고 뒤이어 전장에 진입하고 있던 연합군과 충돌하면서 대혼란이 일어났다. 몽골군은 이를 놓치지 않고 공격하였고 화살공격에 이은 포위전을 구사하면서 루스의 군사들을 궤멸시켰다. 비록 점령에 충분한 군사들이 없어 전투에 이겼음에도 철수하여야 했지만 칼카전투의 결과로 루스의 군사력은 심각하게 약화되었다. 그리고 이때 통합되지 못한 루스가 매우 취약함을 알아낸 몽골군은 후일 조치의 아들인 바투의 지휘하에 루스 전역을 휩쓸고 초토화시킨다.



서하에 대한 공격과 죽음



칭기즈칸이 코레즘 정벌을 끝내고 돌아온 후 그는 이전에 서하 왕국에 코레즘 정벌을 위한 병력을 요구하였다가 거절당하고 모욕까지 당한 것을 상기하고는 그 날의 모욕에 대한 징벌을 가하고자 하였다. 이때 서하의 임금이었던 헌종(獻宗)은 칭기즈칸에 고개를 숙이고 용서를 받고자 하였으나 서하의 군부는 이를 거부하고 몽골과 결전을 기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몽골군의 무자비한 공격에 전황은 서하군에게 불리해지기만 하였고 설상가상으로 헌종 황제마저 사망하였다. 서하의 마지막 임금인 말제(末帝) 이현은 수도인 흥경(興京)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공격을 지휘하고 있던 톨루이에게 복속의 의사를 밝혔고 톨루이는 이를 수락하였다. 그러나 흥경의 성문이 열리는 순간 몽골군이 난입하여 흥경내의 모든 것을 닥치는 데로 파괴하였고 말제는 톨루이 앞으로 끌려나와 처형당하였다. 이로서 이원호가 1038년에 세워 거의 200년을 지속하였던 서하 왕국은 이전에 칭기즈 칸을 모욕한 대가로 지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수도 싱징(興京)은 불타 없어졌다. 하지만 서하 정벌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1227년, 전 몽골을 통일하고 카스피해에서 바이칼호, 그리고 만주의 요하에 이르는 제국을 건설한 칭기즈칸은 이미 전장에서 사망한 후였다. 일설에는 늙은 칸이 낙마(落馬)한 후 그 후유증으로 죽었다고 하고 다른 기록에는 서하의 군사들과 싸우다가 죽었다고 한다. 칭기즈칸은 그의 생이 짧아 세상을 전부 정복하지 못한 것을 한탄한 뒤 그의 자손들에게 남은 세상을 정복할 것을 주문한 후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그의 유언대로 강력한 지도자가 사라진 후 급격하게 붕괴하였던 다른 유목제국들과는 달리 몽골은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그 영토를 더욱 넓히고 그들의 말발굽 아래 더 많은 나라들을 복속시켰다.



칭기즈칸의 제국과 유산



칭기즈칸이 통일한 몽골군의 말발굽 아래 짓밟혔던 나라들은 그의 군사적 위업을 인정하면서도 그를 무자비한 학살자로 그린다. 미국의 시사잡지인 타임지는 1999년말에 특별판을 내면서 지난 천년간(1000-1999)에 가장 잔인한 인물중의 하나로 칭기즈칸을 선별하였다. 비록 점령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사후 몽골군에게 여러 차례 크게 패한 적이 있는 유럽인들은 몽골군을 타르타로스(지옥)에서 온 군대라 부르면서 사악한 악마의 군대로 묘사하였다. 타임지의 기사는 이러한 인식이 아직도 불식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자손들에게 도시들이 철저히 파괴되었던 이슬람에서도 칭기즈칸에 대한 인식은 그리 좋지 않다. 특히 이슬람의 문화적 수도였던 바그다드가 1258년에 몽골군에게 깡그리 불태워진 사실은 이슬람의 역사에서 커다란 트라우마로 작용하고 있다. 물론 칭기즈칸이 이끈 몽골인들이 일부 점령지에서 파괴행위를 한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전쟁의 부산물인 약탈행위의 결과, 또는 적들에게 공포를 심어주려는 심리전의 일환으로서 몽골인들뿐만이 아니라 알렉산드로스, 카이사르, 진시황등 소위 ‘제국의 건설자’들이라면 피할 수 없는 문제이다. 따라서 칭기즈칸을 위시한 몽골인들만 지옥에서 온 야만인들로 인식하는 것은 상당히 불공평하다고 할 수 있다.

칭기즈칸이 뛰어난 지휘관이나 전쟁지도자였던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칭기즈칸은 몽골에게 있어 전쟁에서의 승리 이상의 것을 남겨주었다. 그는 국가 시스템과는 거리가 멀었던 몽골족이 국가를 운영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주었다. “푸른 이리”의 후손이라는 이념에 기반한 초기적 형태의 민족의식은 물론 유목민의 관행을 ‘야사’라는 법으로 법제화하여 ‘울루스’의 구성원들이 이에 따르게 하였다. 국가운영 제반 사항에 대한 명문화된 룰이 있다는 것은 체계적인 행정과 통치를 가능케 한다. 아울러 칭기즈칸은 비록 다른 문화권의 문자이긴 하지만 ‘위구르 문자’를 차용한 문자를 국문(國文)으로 공식화하여 문자가 통용되지 않던 몽골사회에 각종 정보를 명문화 할 수 있는 기호체계를 주었다. 정착 왕조를 정벌하여 정복왕조를 통치하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다른 유목민들과 달리 통합이념과 체계적인 법, 그리고 문자를 가지게 된 몽골인들은 그들의 정체성을 지키게 되고 칭기즈칸과 그의 후손이 이룩한 제국이 역사에서 사라진 후에도 하나의 공고한 집단으로 존속하게 된다. 세상은 칭기즈칸의 기마대와 거대한 제국을 기억하지만, 필자는 몽골이란 나라와 민족을 존재하게 한 영웅으로서의 칭기즈칸을 기억하고 싶다.





김성남 | 안보·전쟁사 전문가
글쓴이 김성남은 전쟁이 인간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 UC 버클리 동양학과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국제학 석사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에 진학하여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전쟁으로 보는 삼국지], [전쟁 세계사] 등이 있으며 공저로 [4세대 전쟁]이, 역서로 [원시전쟁: 평화로움으로 조작된 인간의 원초적인 역사]가 있다.


발행2012.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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