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바투 원정 (1) - 칭기즈칸의 후예들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댓글 0건 조회 426회 작성일 16-02-07 08:27

본문















14548012310870.png






14548012324583




공성기로 성을 공격하는 몽골군 전투도(집사(集史)에 실린 삽화)




상품 정보



14548012335015.jpg





개요표


바투 원정 전쟁 개요

전쟁주체


몽골족, 루스, 폴란드-독일(슐레지엔), 헝가리

전쟁시기


1236년-1242년

전쟁터


현재의 러시아, 폴란드, 헝가리, 우크라이나

주요전투


시트강 전투, 레그니차 전투, 사요강 전투






관련링크

바투 원정(2) 보기






통합검색

통합검색 결과 보기





바투 원정



18세기와 19세기. 서양인들은 기타 지역, 특히 아프리카와 아시아 지역 곳곳에서 원주민들의 땅을 빼앗고 이를 식민지로 만들었다. 계몽시대 이후 발전하는 경제와 과학의 힘은 서양, 특히 유럽국가들에게 군사적 우위를 보장해 주었고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전통사회들은 보다 먼 곳에서 배를 타고와 총과 대포를 쏘아대는 서양군대 앞에서 힘없이 무너졌다.

사실 원양항해가 현실화되기 전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에 위치한 유럽과 동아시아간의 접촉은 그리 빈번하지 않았다. 간헐적인 무역과 함께 사절단의 교환이 있었지만 본격적인 교류는 없었고 군사적인 충돌은 더더욱 드물었다. 유럽인들은 다만 동아시아에 지리적으로 가까운 중동을 통하여 동아시아에 대한 짧은 지식을 얻을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서양에서 르네상스의 기운이 태동하고 있었던 13세기와 14세기, 현재 몽골의 초원지대에 있는 모든 부족들을 키야트-보르지긴의 테무진(칭기즈칸)이 통일하면서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기마를 통한 기동력을 지녔으나 정치적으로 통합되지 못하여 주변 정착제국들의 부용(附庸)세력으로서만 존재하였던 몽골족이었다. 그러나 강력한 지도자가 나타나 이들을 하나의 이념 하에 통일하고 ‘세상 끝까지의 정복’을 목표로 삼으면서 몽골기마의 기동력은 무시무시한 군사력으로 전환되었다. 이를 가능케 한 것은 바로 만주북부에서 몽골, 중앙아시아, 카스피해와 흑해연안, 그리고 중부 유럽헝가리 평원까지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지르는 스텝지대, 이른바 ‘초원의 길’이었다.



초원의 길: 몽골인의 고속도로



로마제국이 제국의 구석까지 도로를 만든 이유는 무엇보다도 군사이동을 원활히 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제국 각지의 교류와 물자의 유통을 원활히 하는 부수적인 효과도 있기는 하였지만 로마 도로는 기본적으로 군도(軍道)로서 지어졌다. 동아시아, 특히 중국의 경우 육상도로가 있기는 하였지만 로마만큼의 길이와 규모는 아니었다. 중국지역을 가로지르는 많은 강과 하천이 도로의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마와 중국은 모두 정착문명이었고 육로이건 수로이건 체계적으로 관리할 국가체계가 있었다. 몽골을 포함한 북방에는 정착문명의 도로같은 시설은 드물었다. 인공적인 도로를 만드는 사람도, 관리하는 사람도 없었다.





14548012343551




서부 카자흐스탄의 초원지대 모습.



그러나 말을 탄 유목민들은 널리 펼쳐진 초원을 따라 자유롭게 이동하였다. 세간도 많지 않았고 집도 천막의 형식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해체하여 수레에 싣고 이동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 유목민들의 이동은 계절에 따라 가축이 살기 좋은 곳으로 옮겨 다니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지만, 다른 부족과의 경쟁에서 패하는 경우, 또는 인근 정착국가로부터의 압박이 심해지는 경우 자신들이 살고 있던 곳을 떠나 아예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유목민의 이동은 일부 예외적인 경우를 제하고 대부분 초원의 길을 따라 이루어졌다. 평원과 낮은 구릉으로 이루어진 초원은 말 탄 유목민들의 이동을 용이하게 하였다. 지금의 헝가리를 건국한 마쟈르족은 원래 우랄산맥 남쪽 끝에 살고 있었으나 흑해 북부연안을 거쳐 중부 유럽을 장악하였다. 고대로부터 유라시아의 정착문명을 괴롭힌 스키타이(사카), 사르마타이, 아바르, 투르크(돌궐), , 흉노, 몽골 등 유목민족들은 모두 초원의 길을 따라 활동하였다. 정착문명의 농경민들에게 초원의 길은 농사지을 수 없는 쓸데없는 땅이 끝없이 이어진 불모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기마가 일상인 유목민들에 있어 초원의 길은 수천 km떨어진 곳을 이어주는 고속도로였으며 이를 따라 유라시아의 유목민과 정착문명간에 치열한 투쟁이 전개되었다.

초원의 길을 구성하는 몽골땅에서 태어난 칭기즈칸은 초원의 부족들을 통일하여 강력한 기마군을 만들고 금과 서하, 코레즘을 멸망시켰다. 그가 1227년에 텡그리신의 곁으로 돌아갔을 때 몽골과 바이칼호 인근의 대초원과 중앙아시아, 북중국이 몽골 울루스의 일부가 되어있었다. 이미 몽골 울루스는 거대한 제국이었지만 몽골군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칭기즈칸은 ‘땅끝까지 정복하라’는 유언을 남겼고 몽골의 쿠릴타이는 이 유언에 따라 다음 목표를 설정하였다. 1221년에 수부타이와 제베가 정찰하였던 러시아가 불행하게도 몽골 기마병들의 다음 제물로 선택이 되었다. 그리고 러시아를 정복하면 그 다음에는 유럽을 짓밟을 예정이었다. 유럽인들이 유라시아 동쪽에서 어떠한 일이 벌어지는지 조차 모르고 있을 때, ‘악마의 기마병’들은 유라시아를 관통하는 천연의 고속도로인 ‘초원의 길’을 따라 서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서양인들의 무의식속에 황화(黃禍)로 자리잡게 되는 몽골의 서방침공이 시작된 것이다.





14548012353469




몽골 초원지대에 있는 몽골인의 게르.





서방 원정군, 진군을 시작하다



칭기즈칸의 사망 이후 새로이 대칸으로 등극한 오고데이의 주재 하에 열린 쿠릴타이에서는 이후의 군사작전에 대한 사항이 논의되었다. 러시아와 유럽침공에 대한 결정은 1229년에 몽골 울루스의 ‘수도’인 카라코룸에서 열린 쿠릴타이에서 이루어졌다. 남송, 고려, 그리고 페르시아에 대한 전쟁을 계속하는 동시에 새로이 러시아와 유럽을 치기로 한 것이다. 수부타이는 1221-2년의 정찰을 통하여 러시아와 유럽에 대하여 많은 정보를 수집하였고 다시 몽골로 귀환하면서 현지에 많은 첩자들을 남겨놓았다. 이들은 계속하여 수부타이를 위시한 몽골 수뇌부에게 자신들이 담당한 지역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였다. 몽골 울루스의 정복활동은 대개 첩자들과 현지인들에게서 얻은 많은 정보를 토대로 적의 강약(强弱)을 철저히 가늠한 후에 이루어졌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오고데이칸은 러시아/유럽 원정군의 규모를 설정하였는데 15만에 달하였다. 코레즘을 정복할 때와 맞먹는 수치였다. 다른 군사들이 이미 고려와 페르시아등지에서 싸우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다소 무리한 동원일 수도 있었다.

이러한 대군을 동원한 이유는 단 한 가지, 몽골은 단순히 유럽을 공격하여 약탈하는 것이 아니라 복속과 점령을 원했기 때문이다. 몽골의 정보담당자들은 아울러 우랄산맥에서 서쪽의 대해(大海)까지의 지역을 완전히 복속시키는데 16년에서 18년이 걸릴 것이라 추정하였다. 단순한 공격이 아닌 점령을 위한 대규모 원정군이었고 일개 장군에게 맡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이에 원정군의 총사령관에는 서쪽의 영지를 받았던 칭기즈칸의 맏이 조치의 아들인 바투가 임명되었다. 서방을 향한 몽골의 대군은 1235년에 원정길에 나섰다. 비록 바투가 총사령관이었기는 하였지만 그는 불과 28세였고 전쟁경험도 많지 않아 원정군의 실질적인 지휘는 바투의 할아버지 칭기즈칸의 심복이자 명장이었던 수부타이가 맡았다.

1221년의 칼카강 전투에서 러시아 남부의 18개 공국의 연합군이 몽골군에게 궤멸되었을 때 남부 러시아 공국의 귀족 대부분이 전사하였고 그나마 전투에서 살아남은 키에프의 므티슬라프는 몽골군에게 처형되었다. 오직 갈리치아의 므티슬라프(앞서 인물과 동명이인)만이 몸을 건져 서쪽으로 달아날 수 있었을 뿐 남부 러시아는 사실상 공백지대가 되었지만 다행히도 1221년의 몽골군은 정찰부대에 지나지 않았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몽골로 돌아갔다. 몽골군이 러시아에 대한 정벌전을 시작하였을 때 주요 목표는 북부의 여러 공국들이었다. 북부 러시아의 공국들은 남부에 비하여 수가 많고 따라 인구와 군대도 상대적으로 많았지만 남부와 마찬가지로 분열되어있었고 그나마 서로 싸우는 바람에 정치적인 통합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몽골군은 러시아를 치기로 결정하기 이전부터 이러한 분열상을 훤히 알고 있었다. 첩자들을 통하여 러시아 지역의 소식이 몽골에 속속 전해졌기 때문이다. 몽골군은 북부 러시아의 공국들이 하나로 뭉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기에 자신감을 가지고 서방원정을 추진할 수 있었다.





14548012361777




러시아의 도시들.





북부 러시아의 파멸



지금의 러시아에 진입한 몽골의 정벌군에게는 북부를 치기 전에 우선 할 일이 있었다. 러시아와 유럽을 치기 전에 혹시라도 방해가 될 만한 인근의 세력을 전부 소탕하는 것이었다. 첫 번째 목표는 지금의 볼가강(江)과 카마강이 만나는 지점(지금의 러시아공화국 카잔 근처)에 있는 불가르족의 왕국(발칸 반도에 세워진 불가르 제국과는 다른 나라)이었다. 소위 볼가-불가르 왕국은 몽골군 앞에 소멸되었고 그 수도가 함락될 때에 무려 5만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전해진다. 불가르 왕국을 깨뜨린 몽골군은 카마강과 카스피해 사이에 있는 모든 도시와 촌락을 불태우고 그 주민들을 학살하였다. 싸울만한 남자들은 강제로 몽골군에 편입되었다. 몽골족에게 이미 복속된 쿠만족과 새로이 복속된 불가르족은 기본적으로 기마민들이었다. 몽골군은 이들은 몽골 전술을 훈련시킨 후 몽골군에 편입시켜 병력을 보충하였다. 전쟁포로들에 의한 병력충원이 이루어지면서 몽골원정군의 군세(軍勢)는 20만까지 불어났다. 이후 볼가-불가리아가 있던 곳은 이후 금장한국이 되는 조치 울루스의 일부분이 되었다.

볼가-불가리아를 일소한 바투는 1237년 11월경에 블라디미르(현 러시아 공화국 블라디미르 오블라스트) 대공인 유리 2세에게 사절을 보냈다. 그러나 이 사절은 외교를 위하여 블라디미르로 간 것이 아니었다. 몽골의 사절이 요구하는 것은 단 한가지, 유리의 항복과 블라디미르의 복속이었다. 유리는 사절의 요구를 거절하였고 약 한 달 후 주변의 큰 도시였던 리아잔이 몽골군에 의하여 포위되었다. 이 당시 러시아에는 중세 유럽이나 중국에서 볼 수 있는 전통적인 의미의 성(城)이 거의 없었다. 다만 도시 주변에 수비시설로서 목책(木柵)을 길게 둘러치고 귀족들은 중앙부에 지은 큰 저택에서 거주하였다. 이 당시의 몽골군은 단순히 활만 쏘는 기병이 아니라 중국과 서하, 코레즘과 싸우면서 공성(攻城)의 경험도 축적하였고 몽골군대에는 중국과 코레즘의 공성기술자들이 종군하고 있었다. 이러한 몽골군을 목책으로 막을 수 있을 리가 만무하였다. 몽골군이 리아잔의 목책을 무너뜨리는 데는 5일 밖에 걸리지 않았고 도시 안으로 난입한 몽골군은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죽이고 집들을 불태웠다. 남자들은 거리에서 보이는 족족 살해되었고 몽골군은 정교회 사제들과 여인들이 피신하여있는 교회당에 불을 질렀다.

몽골군이 리아잔에서 물러갔을 때 리아잔에는 살아 움직이는 것이 거의 없었다. 다른 기록자가 “죽은 자들을 위하여 눈물을 흘릴 자도 없었다”고 쓸 정도였다. 사실 리아잔이 공격당하는 동안 그 지도자들이 유리 대공에게 구원군을 청하는 사절을 보냈지만 유리는 움직이지 않고 리아잔의 파멸을 지켜보기만 하였다.





14548012372113




수즈달(Suzdal)에서 몽골군의 학살을 묘사한 중세의 기록화.



일종의 본보기로서 리아잔을 철저히 짓밟고 불태운 몽골군은 콜롬나로 향하였고 블라디미르의 본성(本城)으로부터 100km도 떨어지지 않은 콜롬나 역시 본보기 파괴와 학살의 현장으로 변하였다. 이 와중에 몽골군을 막기 위하여 군을 이끌고 오던 유리의 아들이 몽골군에게 패하고 죽었다. 그제서야 유리가 군을 이끌고 움직였고 영지 곳곳에 전령을 보내어 군을 이끌고 시타(Sita)강가에 집결할 것을 명령하였다. 블라디미르군이 느릿느릿 시타강가로 모이는 동안 빠르게 이동하는 몽골군은 모스크바강(江) 위에 있는 조그만 성인 모스크바를 포위하였다. 모스크바는 강가의 가파른 고지 위에 지어진 요새도시였고 유리는 모스크바 수비군이 몽골군을 맞아 잘 버텨주기만 한다면 전군을 모아 모스크바를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모스크바 수비군은 몽골군이 오기도 전에 겁을 먹고 요새를 포기하고 달아났다. 모스크바를 구원하기 위하여 움직이던 구원부대 하나는 몽골군에게 요격당하여 전멸당했다. 중대한 위기임을 깨달은 유리는 시타 강가에 모이고 있는 군대의 지휘를 위하여 블라디미르 본성을 떠났다.

블라디미르는 시타강가에 대군을 모아 몽골군과 결전을 기하고자 하였으나 수부타이는 유리가 원하는 데로 움직여줄 마음이 없었다. 유리가 시타강가로 향하는 동안 수백 km를 우회하여 블라디미르 본성으로 쳐들어갔다. 또 다른 부대는 약 40km 북쪽에 떨어진 도시인 수즈달로 향했고 수즈달은 단 하루 만에 함락되었다. 마침내 1238년 2월초, 블라디미르 본성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고 블라디미르 본성은 이틀 만에 떨어졌다. 몽골군은 목책을 불태우고 도시에 난입하였고 이전과 마찬가지로 약탈과 파괴가 시작되었다. 이 와중에 블라디미르 교회가 불타고 그 주교는 몽골군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이러한 사정을 모르는 유리가 시타강가에서 몽골군을 기다리는 동안 몽골군은 블라디미르를 떠나 시타강가로 조용히 움직였다. 시타 강가에서 나무와 흙으로 방벽을 쌓아놓고 싸울 준비를 하고 있던 유리는 여러 날이 흘러도 몽골군이 모습을 보이지 않자 3000명을 정찰대로 삼아 주변을 돌아보게 하였다. 정찰대는 몽골군이 이미 근처까지 몰려와 블라디미르 본군의 방벽을 에워싸고 있다는 것을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유리는 방벽 뒤에서 수비하는 대신 전군을 이끌고 몽골군과 결전을 하려 하였다. 그러나 주변은 온통 눈으로 덮여있었고 소수의 기병 뒤에 농민출신 보병들이 뒤따르고 있는 블라디미르군은 눈 속에서 움직이는 것조차 버거웠다. 많은 수의 병사들은 몽골군이 있는 곳으로 가기도 전에 멀리서 날아오는 몽골군의 화살에 맞아죽었고 그나마 몽골군과 맞닥뜨린 몇몇의 기사들 역시 난전 중에 모두 쓰러졌다. 유리는 달아나다가 뒤 쫓아온 몽골군과 싸우다가 패하고 목이 잘려 죽었다.

북부 러시아에서 가장 큰 세력이었던 블라디미르군을 전멸시킨 몽골군은 북쪽으로 진군하여 로스토프, 유리에프와 야로슬라블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역시 철저히 파괴하였다. 바투는 러시아 지역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인 노브고로드를 공격하기 위하여 다른 방향으로 진격하였다. 수부타이군의 공격은 계속되었고 드미트로프와 트베르등의 도시도 역시 몽골군의 말발굽에 짓밟혔다. 1238년 2월을 지나 3월이 되었을 때 북부 러시아에 온전한 도시는 거의 없었다. 노브고로드를 향하던 바투의 군단은 중간에 토르초크라는 조그마한 도시를 지나게 되었다. 몽골군은 토르초크를 쉽게 함락하리라 생각하였지만 토르초크의 몇안되는 수비병들과 도시민들은 자신들의 도시를 죽기 살기로 방어하였다. 몽골군은 의외의 장애물을 만난 셈이었고 토르초크 공격에서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토르초크는 힘이 다하여 결국 함락되기는 하였지만 바투의 군단은 토르초크 공격에 2개월을 허비하였다. 토르초크가 마침내 함락되었을 때 이미 계절은 봄으로 접어들었고 겨우내 얼었던 땅이 녹아 진창으로 변하였다. 아울러 쌓였던 눈이 녹아 하천으로 흘러들었고 겨울에 몽골군의 이동로 역할을 했던 시냇물과 강의 얼음판은 격류(激流)가 되어 흐르고 있었다. 노브고로드 인근 역시 습지가 넓게 펼쳐져 있었고 봄이 되자 거대한 진흙벌판으로 변해버렸다. 녹은 땅과 범람하는 하천 사이에서 몽골군의 움직임은 심각하게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몽골군은 노브고로드의 습지에서 갇혀버릴 우려가 있었고 몽골군은 결국 노브고로드에서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측방에서의 위협을 두고 물러난 것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북부 러시아의 다른 세력들이 사실상 멸망한 상태에서 노브고로드의 군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홀로 몽골군을 대적할 수도 없었고 자신들의 도시를 지키기에도 급급하였다. 수부타이 역시 노브고로드가 홀로 남음과 동시에 더 이상 위협이 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말머리를 돌려 철수한 것이다.

놀라운 사실은 각 지역이 몽골군에게 공격당할 때, 다른 도시에서 이를 구원하기 위하여 움직이는 일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몽골군이 겨울 두 달에 걸쳐 12개의 도시를 땅 위에서 지워 없애는 동안 북부 러시아 지역에서 몽골군에 맞서서 동맹군은커녕 그 비슷한 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1223년에 비록 지휘권을 통일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힘을 합쳐 몽골군과 싸우러 나선 남부 러시아 18개 공국과는 상당히 대조적이었다. 결국 몽골군이 첩자들로 받은 정보는 정확했던 것이다. 북부 러시아의 도시들은 힘을 합치지 못하고 몽골의 침공을 맞고도 눈치만 보았고 결과는 공멸(共滅)이였다.



남부러시아 진멸(盡滅)



노브고로드에서 물러난 몽골군은 휴식을 위하여 돈(Don)강의 너른 초원지대로 이동하였다. 북부 러시아 지역을 휩쓸기는 하였지만 수많은 공성전과 전투가 있었고 몽골군의 피로와 피해가 누적된 것이다. 특히 토르초크에서는 의외로 힘든 싸움을 치르면서 사상자가 상당하였다. 그 해 봄과 여름에서는 돈 강가에서 휴식을 취하고 기력을 회복하면서 다음 전투를 기약하였다. 그러나 몽골군이 가만있기만 한 것은 아니어서 1238년 여름에 크림반도를 휩쓸었고 돈강 유역에서 말리 떨어지지 않은 모르도비아 사람들이 몽골군에 대한 반항의 기미를 보이자 이를 공격하여 철저히 제압하였다. 러시아의 가을 역시 봄과 마찬가지로 ‘진흙장군’이 기승을 부리기 때문에 몽골군은 땅이 얼어붙기 시작하는 늦가을까지 기다렸고 다시 진군을 시작한 몽골의 정벌군은 1221년에 공격하였다가 물러난 남부 러시아를 본격적으로 공격하였다. 1239년 겨울, 체르니고프와 페레예슬라프가 몽골군에게 떨어진 것을 시작으로 남부 러시아의 도시들은 다시 몽골군의 공격에 시달려야 했다.

북부 러시아의 공국들도 그리하였듯이, 그리고 1223년과는 대조적으로 남부 러시아 도시들은 힘을 합치지 못하였다. 물론 남부 러시아의 도시들이 다시 몽골군에게 참패하는 이유 중 1223년에 칼카강 전투에서 패한 타격에서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것도 있을 것이다. 남부 러시아의 도시들은 연합전선을 형성하지 못하고 각기 군을 동원하여 몽골군과 싸우러 나섰다. 그러나 소수의 귀족 중기병만이 훈련이 되어있고 병력의 대부분이 도시에서 징집된 민병이거나 시골에서 동원된 농민인 군대들이 어릴 때부터 기마전술을 배운 몽골군의 상대가 될 리가 만무하였다. 나름 싸워보려고 나온 병력들은 몽골군의 기사(騎射)와 돌격에 대패하는 패턴이 반복되었다. 몽골군은 다시 휴식하였다가 전쟁을 재개하였고 1240년 늦가을 11월에는 남부 러시아의 대도시인 키예프 앞에 도착하였다. 키예프는 예전 루스(Rus)시절부터 수도 역할을 하였고 많은 성당과 사원이 있는 종교의 도시이기도 하였다. 동시에 북부 러시아와 흑해연안, 나아가 비잔틴 제국과 중동지역을 잇는 무역도시이기도 하였다. 다른 러시아 도시들과는 달리 키예프는 단단한 석벽(石壁)에 의하여 보호되고 있었다. 이때 키예프는 이전에 칼카강에서 몽골군과 싸웠던 므티슬라프의 사위인 다닐로 할리츠키가 다스리고 있었고 그의 장군인 보이보데 드미트로가 수비를 맡고 있었다. 몽골군의 침공을 맞아 드미트로는 수비군과 성민(城民)을 지휘하여 한동안 잘 싸웠다. 키예프군의 수비가 만만치 않자 몽골군은 작전을 바꾸어 키예프 성벽의 구간 중 폴란드 대문(Polish Gate) 근처 목재로 만든 부분을 집중 공격하였다. 몽골군이 러시아의 도시들을 공격할 때 수훈갑은 중국에서 가져온 공성무기였다. 몽골군은 중국제 공성무기를 총동원하여 목재성벽을 타격하였고 12월 5일, 이 목책구간이 무너지고 말았다. 이에 몽골군은 중기병을 동원하여 무너진 구간으로 돌입하려고 하였으나 러시아 수비군의 총력방어로 인하여 1차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수비군은 너무나 지쳐있었고 다음 날 12월 6일에 몽골군의 공격이 재개되었다. 결국 몽골군은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성내로 진입하여 수비군을 난전 끝에 전멸시켰다. 키예프에서 역시 힘든 전투를 치른 몽골군은 키예프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도시 전체에 불을 질렀다. 과거 루스의 수도이자 유서 깊은 종교도시 키예프는 결국 사람이 살지 않는 폐허로 변해버렸다. 6년 후에 어떤 사람이 키예프 인근을 지나면서 남긴 기록은 몽골군의 파괴행위가 얼마나 극심했는지 알려준다.



“그곳에는 겨우 움막들만이 서 있었고 땅은 여전히 죽은 자들의 두개골과 뼈다귀로 덮여 있었다.”

그나마 버티고 있던 키예프가 무너진 후 남부 러시아도 지리멸렬하였다. 다닐로 할리츠키의 영지에서 가장 중요한 두 도시라고 할 수 있는 할리치와 볼로도미르-볼린스키 역시 점령되었다. 크레메네츠, 체르벤, 페르제미츨등의 도시도 몽골군의 공격 앞에 무너졌다. 이 시점에서 각 러시아 도시들의 귀족들은 이미 동유럽 방향으로 도주한 뒤였고 남겨진 백성들이 몽골군의 침입을 온 몸으로 받아야 했다. 남부 러시아는 완전히 무너지고 러시아인들은 향후 200년간 몽골인들의 강권통치하에서 몽골의 칸들을 섬기면서 살아야했다.





김성남 | 안보·전쟁사 전문가
글쓴이 김성남은 전쟁이 인간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 UC 버클리 동양학과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국제학 석사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에 진학하여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전쟁으로 보는 삼국지], [전쟁 세계사] 등이 있으며 공저로 [4세대 전쟁]이, 역서로 [원시전쟁: 평화로움으로 조작된 인간의 원초적인 역사]가 있다.


발행2012.01.27.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