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바투 원정 (2) - 칭기즈칸의 후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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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398회 작성일 16-02-07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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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요강의 다리 위에서 격돌하는 몽골군과 헝가리군 (중세 기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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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표


바투 원정 전쟁 개요

전쟁주체


몽골족, 루스, 폴란드-독일(슐레지엔), 헝가리

전쟁시기


1236년~1242년

전쟁터


현재의 러시아, 폴란드, 헝가리, 우크라이나

주요전투


시트강 전투, 레그니차 전투, 사요강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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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를 모두 점령하고 헝가리로 향하다



몽골군이 북부와 남부 러시아를 모두 점령하고 유럽의 문턱에까지 다다랐지만 유럽인들은 몽골군이 와있다는 사실 조차 잘 몰랐다. 간혹 풍문을 들은 사람들도 있기는 하였지만 그리 대수롭게 여기지 않고 있을 때 남부 러시아에서 쫓겨난 쿠만족이 헝가리로 진입하였다. 몽골군의 침공에 고향을 잃고 서쪽으로 도망친 이들은 유럽인들에게 무시무시한 군대가 근처에 와있다고 하면서 러시아의 참상을 전하였다. 몽골군을 피하여 달아나는 처지였던 쿠만족은 헝가리의 왕 벨라 4세에게 기독교로 개종할 터이니 자신들을 백성으로 받아달라고 하였고 벨라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벨라가 갑자기 헝가리로 들이닥친 이방인들을 받아주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헝가리는 스스로가 유럽인들에게 야만인으로 취급받던 마쟈르족이 세운 나라였다. 11세기 초반에 초대왕인 스테판 1세가 스스로를 기독교 국가로 자임하고 나라를 열었으며 교황에게 기독교 국가임을 ‘인증’까지 받았다. 백성들 대부분이 기독교(가톨릭)으로 완전히 개종하였다. 따라서 국민들 대부분이 상당히 독실하게 가톨릭을 믿었으며 많은 성당과 수도원이 지어졌음에도 기독교 세계의 변방취급을 당하였다. 왕가의 교회중시 정책은 그 뒤에도 계속되었고 성당과 수도원들에게는 엄청난 땅이 주어졌다. 이에 비례하여 가톨릭 사제들의 정치경제적 영향력이 급증하였고 대장원을 경영하고 있는 헝가리의 귀족들은 이를 상당히 불편하게 여겼다. 벨라 4세 재위 시에는 이러한 경향이 더욱 심해져 사제들이 아예 왕의 심복이 되어 아예 궁정으로 들어와서 정치를 요리하였다. 왕의 궁정 내에서 왕과 가장 친하다고 할 수 있는 사람들 역시 고위 사제인 콜로차의 주교 우고린과 그란의 주교 마티아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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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세게드(Szeged)에 있는 벨라 4세 동상.



귀족들과 사제들의 갈등이 점증하는 가운데 20만의 야만인들이 제 발로 들어와서 백성이 되고 기독교도가 될 것이니 받아달라고만 하자 벨라는 뛸 듯이 기뻤다. 한 둘도 아니고 무려 20만을 개종시켰다고 로마에 보고하면 유럽 가톨릭 세계에서 자신의 지위는 급격히 치솟을 것이었다. 그러나 벨라는 쿠만족이 몽골군에게 대해서 하는 말은 별로 귀 기울이지 않았다. 원래가 호전적인 족속이었고 강력하기로 유럽 기독교 세계에서 손꼽히는 자신의 군대가 거뜬히 몽골군을 물리치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수부타이는 3만명의 병력을 떼어 새로이 점령된 러시아에 주둔군으로 남아있게 하면서 몽골군의 보급로/교통로를 지키도록 하였다. 그리고 12만 대군을 이끌고 키에프를 떠났다. 몽골군의 주된 목표는 당시 가톨릭 세계의 동쪽에서 유럽을 지켜주고 있던 헝가리였다. 한달 후 몽골군은 비스툴라 강을 건너 카르파티아 산맥의 동쪽 기슭인 할리체(지금의 우크라이나 서부 할리치)에 도착했다. 수부타이는 군을 넷으로 나누었는데 가장 북쪽의 군은 오고데이의 손자인 카이두에게 맡겨 폴란드와 독일방면으로 향하게 하였다. 헝가리를 치는 동안 보헤미아, 독일, 폴란드 등지에서 원군이 와서 측면을 위협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나머지는 카르파티아 산맥을 세 방향에서 횡단하기로 하였다. 남은 군의 지휘는 각각 바이다르, 바투(수부타이), 그리고 쿠유크가 맡았다. 바이다르는 북쪽에서, 쿠유크의 군은 남쪽으로 몰다비아와 트란실바니아를 거쳐 진군하였고 바투와 수부타이의 군은 그 가운데의 길을 택하여 헝가리의 대도시인 그란과 페스트로 향하였다.



별동군에게 전멸당한 독일/폴란드군: 레그니차 전투



폴란드 방향으로 향한 카이두의 별군은 대도시인 크라코프를 향하여 질주하였고 크라코프의 왕인 볼레슬라프 5세는 가족과 왕실의 보물을 가지고 모라비아 방면으로 피신하였다. 왕이 없는 크라코프의 수비는 그 시장인 블라디미르에게 맡겨졌다. 그러나 그나마 남아있던 귀족들과 영주들은 그들의 병력을 빼서 달아나기에 바빴고 결국 블라디미르는 마지막까지 남은 약간의 근위대를 데리고 츠미엘니크에서 몽골군을 기다렸다. 처음부터 수적으로나 전술적으로 상대가 안되는 싸움이었고 근위대는 전멸당했다. 그러나 블라디미르와 근위대를 모두 죽인 몽골군이 크라코프에 도착했을 때 이미 도시민들은 인근의 숲 속으로 피신한 후여서 도시 안에는 남아있는 사람이 없었다. 카이두의 몽골군은 크라코프에 방화하고 계속 진군하였다.

오데르강을 건넌 카이두의 군은 두 갈래로 나뉘어 하나는 발틱해 방향으로, 하나는 브레스라우로 향했다. 발틱해 방면으로 간 몽골군은 닥치는 대로 약탈과 방화를 하면서 주변을 휩쓸었고 엄청난 수의 피난민이 서쪽으로 도망하면서 몽골인들의 공포스러움에 대한 소문을 퍼뜨렸다(이는 몽골군이 자행하는 파괴행위의 목적이기도 하다.) 브레스라우로 간 두 개의 토우만(만인대)는 브레스라우의 성벽이 너무 견고해 보여 이를 우회하기로 하였다. 카이두는 군을 이끌고 슐레지엔으로 진격하였다. 몽골군이 진격해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슐레지엔 대공(大公) 하인리히는 인근의 영주들에게 동원령을 내림과 동시에 튜턴 기사단(Teutonic Knights)에도 도움을 청하였다. 아울러 처남인 보헤미아왕 웬츨라스에게도 연락을 하였고 연락을 받은 웬츨라스는 5만의 대군을 이끌고 북진하였다. 정찰병을 통하여 적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던 카이두는 두 군이 힘을 합치면 힘든 싸움이 될 것임을 알고 먼저 병력이 상대적으로 적은 하인리히가 있는 방향으로 진격하였다.

1241년 4월 9일, 하인리히가 레그니차에 도착하였을 때 보헤미아 병력은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 상태였고 몽골군이 근처에 와있는 상황에서 하인리히는 결전을 기하여야 했다. 레그니차 성안에 있다가 몽골군이 도착하였을 때 빨리 포진하지 못할 것을 우려한 하인리히는 그의 기사군이 싸우기 수월한 벌판에 나가 군대열을 정비하였다. 이는 기사군의 장기인 기마돌격을 돕기 위한 선택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치명적인 패착이 되었다. 결국 하인리히가 선택한 전장(이 전투의 다른 이름은 ‘발슈타트’. 전투의 이름은 ‘전장’이라는 뜻의 독일어에서 나왔다) 에서 두 군은 격돌하였다.

하인리히의 유럽군은 4개의 부대로 나누어져 있었다. 제 1대는 폴란드와 실레시아에서 선별된 정예기사들과 용병들로 구성되었다. 제 2대는 갑옷위에 십자가가 그려진 하얀 옷을 입은 튜턴 기사단이었다. 제 3대는 폴란드인으로 구성된 기병대였고 제 4대는 전직 광부들로 이루어진 보병대였다. 먼저 전투를 시작한 것은 1대를 구성하고 있는 폴란드 기사들이었다. 볼레슬라프가 이끄는 폴란드 기사들은 몽골의 중군을 향하여 돌격하였고 충돌한 후 난전을 펼치려고 하였다. 그러나 몽골군은 양 옆으로 갈라져 폴란드 기사들에게 화살의 비를 퍼부었다. 폴란드군은 뒤에서 후속부대가 올 때까지 기다려보았지만 후속부대는 오지 않았고 볼레슬라프는 후퇴를 명할 수밖에 없었다. 볼레슬라프가 후퇴하는 것을 본 하인리히는 제 1대의 본대에게 돌격을 명하였고 본대는 몽골의 중군에 충돌하였다. 잠시 동안 난전이 이어지는 듯 하더니 몽골 중군은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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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0년에 그려진 레그니차 전투묘사도. 몽골군이 하인리히의 머리를 창끝에 꿰어 진군하고 있다.



하인리히는 몽골군이 유럽군의 공격을 견디다 못해 달아나는 것으로 판단하였고 잠시 후 하인리히의 본대 전체가 몽골군의 추격에 나섰다. 이후 유럽군 전체의 진격이 이어졌다. 그러나 몽골군의 후퇴는 진정한 후퇴가 아니라 몽골군과 싸워본 러시아인들, 코레즘군, 그루지아군이 처절히 깨달았듯이 적의 주력인 기병을 꾀어내려는 몽골군의 전형적인 술책이었다. 적의 기병을 유인함으로서 보병과 기병을 분리시키고 적군 보기(步騎)의 합동작전을 무산시킴과 동시에 단단히 뭉친 적의 진형을 흩어놓기 위함이었다.

유럽군의 기병이 보병과 멀리 떨어졌을 때 새로운 몽골군 경기병대가 양 옆에서 나타나 기사들에게 무자비한 화살공격을 가하였다. 이 와중에 몽골군이 피워 올린 연기가 유럽군 기병대를 에워쌌다. 이로서 유럽군의 기사들과 뒤쳐진 보병대는 완전히 분리되었다. 이에 몽골 중기병들이 가까이 다가와 근거리 사격을 시작하였고 경기병대는 연기 속에서 나타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면서 뒤쳐진 보병들을 마구 쏘아 죽였다. 기사들은 단단한 갑옷을 입은 덕택에 화살에 맞아죽는 수는 많지 않았다. 이것을 본 몽골군은 기사들이 타고 있는 말들을 사격하였고 말에서 떨어진 기사들은 중기병의 좋은 먹이감이 되었다. 유럽군중 성당기사단(템플러) 출신들은 하나로 뭉쳐 싸우고자 하였고 결국 싸우다가 마지막 1인까지 남김없이 죽었다.

대형이 완전히 무너진 유럽군은 오합지졸에 불과하였고 이 시점부터는 전투가 아니라 학살이었다. 요행히 목숨을 건져 도망친 소수를 제외하고는 슐레지엔/폴란드/튜턴기사단 연합군은 모조리 시체가 되었다. 하인리히는 전투 중 참수되고 옷이 벗겨 발가벗겨진채 전장에 널브러졌다. 이후 전장에 남편의 시신을 찾으러 온 하인리히의 아내는 여섯 발가락이 달린 시신의 왼발을 보고서야 시신을 수습했다 한다. 몽골군은 전공(戰功)확인을 위하여 유럽군 병사들의 시신에서 귀를 잘라냈고 아홉 개의 바구니를 가득 채웠다. 레그니차 전투는 중기병 돌격과 기사들의 개인 전투능력에 의존하는 당시 유럽의 전투시스템이 몽골군 같이 효과적인 제병협동을 구사하는 군대 앞에서 얼마나 취약한지 여실히 보여주었다. 더군다나 레그니차의 전투는 몽골의 주력군도 아니고 조공(助攻)을 담당하였던 외곽 견제부대에 의한 승리였다. 발틱연안지방에서 몽골군을 피해 도망치던 피난민들은 몽골군이 무려 20만이라는 소문을 퍼뜨렸지만 카이두가 맡은 조공부대의 규모는 불과 2만에 불과하였다.

비록 레그니차에서 승리하기는 하였지만 카이두의 몽골군도 사상자가 적지 않았다. 그들의 임무는 독일이나 폴란드의 본격적인 침공도 아니고 주공에 위협이 될 만한 적 부대들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아울러 2만의 병력으로 전장으로 달려오고 있는 5만의 보헤미아군과 정면충돌할 이유도 없었다. 이때 즈음하여 중부 유럽으로 향하는 주력군은 카르파티아 산맥을 완전히 넘어 사요강에서 헝가리군을 궤멸시키고 있었다. 총사령관 수부타이는 전령을 보내 카이두의 귀환을 종용하였다. 카이두는 발틱연안으로 가서 슐레지엔을 돕기위하여 오고 있던 리투아니아군을 격파한 후 발틱연안을 철저히 짓밟아 몽골군에게 위협이 될만한 세력이라면 크고 작음을 가리지 않고 모두 없애버렸다. 그리고 본군에 복귀하기 위하여 헝가리 방면으로 물러났다.



사요강 전투: 몽골 대 헝가리



카르파티아 산맥을 돌파한 몽골군은 세 방향에서 헝가리로 진입하고 있었다. 몽골군은 지나는 지역마다 약탈을 하였고 벨라는 남쪽에서 진입하고 있던 몽골군을 막으려고 일군(一軍)을 파견하였지만 몽골군은 이 부대를 간단히 눌러버렸다. 1241년 3월에 벨라는 이미 몽골군이 헝가리에 본격적으로 진입하였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귀족들의 총회를 소집하여 몽골군을 어찌 막을 수 있을지 논의하였다. 그러나 총회가 진행되는 도중에 이미 몽골군의 선봉부대는 도나우 강가의 페스트(Pest)인근에 도착하였다. 때는 봄이라 눈이 녹아 도나우강은 범람할 듯이 넘쳐흐르고 있었고 페스트는 강고한 성벽에 보호되고 있어 벨라는 자신이 군을 모아 싸움에 나아갈 때까지 페스트가 충분히 버텨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4월초까지 벨라의 휘하에는 10만명이 모였고 벨라는 대군을 몰고 몽골군과 싸우러 나섰다. 그러나 몽골군은 헝가리군의 진격에 맞서지 않고 서서히 물러났다. 헝가리군은 해가 지면 멈추었다가 다음 날 몽골군을 향하여 움직였고 그럴 때마다 몽골군은 싸우지 않고 물러났다. 거의 9일이 지나 몽골군과 헝가리군은 사요강가에 이르렀고 몽골군은 강을 건넜다.

수부타이는 군의 대부분을 데리고 강을 건넜지만 일대(一隊)를 남겨 사요강에 있는 유일한 다리를 지키게 하였는데 이는 헝가리군을 막기보다는 헝가리군의 성급한 공격과 도강(渡江)을 유도하여 몽골군이 있는 강의 동안(東岸)에서 기습하려는 유인책이었다. 그러나 벨라는 유인책에 속지 않고 서안(西岸)에 이르러 군을 멈추었다. 그리고 수비진영을 구축하기 전에 일군을 보내어 몽골 유인부대를 쫓아버리고 다리 동쪽에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그 다음날 아침, 몽골군은 투석기에 중국제 화약폭탄을 장전하여 교두보 부대를 공격하였다. 비록 폭발력은 약했지만 화약이 터지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는 헝가리군은 폭음에 매우 놀라 우왕좌왕하였고 바투는 지체없이 교두보의 헝가리군을 공격하였다. 교두보를 지키고 있던 헝가리군은 화약의 폭발과 몽골군의 공격에 다리를 건너 무질서하게 도주하였다.

교두보가 무너지면서 몽골군은 본격적으로 다리를 건너 헝가리군을 공격하였다. 헝가리군은 이들이 단지 선봉부대일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의외로 많은 수의 적을 맞게 되면서 본대의 본격적인 공격을 맞고 있음을 깨달았다. 몽골군의 전면적인 공격에 잠시 당황한 헝가리군은 우고린과 마티아스의 지휘하에 뒤에 펼친 수레방진을 기반으로 강력한 반격을 펼쳤다. 강을 뒤에 두고 있어 기동력이 제한된 몽골군은 근거리에서의 난타전에 돌입하게 되었고 싸움은 몽골본대에게 결코 유리하지 않았다. 바투의 근위대까지 전투에 뛰어들었고 30명이 전사할 만큼 치열한 싸움으로 변하였다. 헝가리군이 나름대로 선전을 하면서 이길 수도 있다고 생각한 순간 수부타이가 이끄는 세 개의 토우만(3만)이 헝가리군의 측면을 찔렀다. 예기치 못한 기습에 헝가리군은 패하였지만 다행히 그들이 구축한 수레요새로 질서정연하게 후퇴할 수 있었다. 수부타이는 이미 전날 저녁에 3만명을 이끌고 강을 건널 수 있는 곳을 찾아 남쪽으로 이동한 상태였다. 그곳에서 서쪽으로 뻗은 반도(半島)지형을 발견했고 이를 다리삼아 주변의 얕은 강물을 건넜다. 그리하여 바투의 본대가 헝가리군과 한창 싸우고 있을 때 난데없이 나타나 그 측방을 기습할 수 있었던 것이다. 헝가리군의 수레요새는 상당히 단단하였고 이를 정면으로 공략할 수 없음을 안 몽골군은 다리 반대편에서 공성기를 가져와 갖가지 인화물질과 흑색화약 폭탄으로 헝가리군의 수레요새를 공격하였다. 화약 폭발하는 굉음이 사방에 가득하고 요새 곳곳에서 화재가 발생하면서 헝가리군은 궁지에 몰리고 있었다. 수부타이는 수레요새로 들어간 헝가리군을 추격하면서 요새를 포위하였는데 완전히 포위하는 대신 포위망에 약간의 틈을 남겨두었다.

폭음과 불에 견디지 못한 일부 헝가리 병사들이 몽골군이 의도적으로 남겨둔 간격을 통하여 도주하였고 몽골군의 공격이 거세지면서 도주하는 병사의 수는 늘어갔다. 몽골군은 도주하는 병사들을 막지 않고 오히려 그대로 두었다. 결국 요새안에 있던 헝가리 병사와 기사들은 사기가 완전히 떨어졌고 이들은 갑옷과 무기를 버리고 간격이 없어지기 전에 앞다투어 탈출하려고 난리법석이었다.

이것이 바로 수부타이가 노린 것이었다. 포위망을 너무 단단하게 하면 생명의 위험을 느끼는 적들이 목숨을 걸고 발악적으로 싸우면서 몽골군이 상당한 피해를 입을 수 있었다. 수부타이는 헝가리군을 구석에 몰린 쥐보다는 놀라서 달아나는 토끼로 만들려고 하였던 것이다. 수부타이는 병사들에게 말을 갈아타고 도주하기에 정신이 없는 헝가리군에게 일제 공격을 가하였다. 몽골군은 무기도 제대로 들지 않고 달아나는 헝가리 병사들과 기사들을 ‘사냥’하였다. 대부분은 길 위에서 몽골군의 칼에 희생되거나 화살에 맞아 죽었고 혹시라도 마을로 숨어든 자들은 몽골군의 철저한 색출작업으로 끌려나와 죽었다. 가장 보수적인 견해로도 사요강 전투에서 1만명의 헝가리군이 죽었고 심지어 7만명이 넘는 헝가리군이 죽었다고 보는 일부 견해도 있다. 사실 사요강 전투는 몽골군의 일방적인 승리는 아니었다. 교두보에서의 전투에 이은 바투의 정면승부는 몽골군의 강점인 기동력을 스스로 제한시킨 우매한 결정이라 아니할 수 없다. 강을 뒤로 두고 앞에는 헝가리군이 있는 상태에서 몽골군의 포위섬멸전술이 제대로 가동되지 못하였다. 강을 건넌 3만의 병력이 헝가리군의 측면을 들이치기 전에는 대등한 전투였다. 그러나 헝가리군에는 백전노장인 수부타이에 맞설만한 지휘관이 없었고 전장에서의 병력운용측면에서 뒤져 결국 전멸에 가까운 대패를 당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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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3년의 부다 묘사도 (뉴렌베르크 연대기).



사요강에서 패한 후 벨라는 오스트리아로 갔다가 인질로 잡혀 영토할양을 약속하고 겨우 풀려났고 풀려난 뒤 지금의 크로아티아 연안으로 달아나는 등 온갖 수모를 당하였다. 헝가리군을 격파한 몽골군은 헝가리를 철저히 약탈하여 경제적으로 무력화 시킨 후 꼭두각시를 임명하여 몽골의 속령으로 다스리려 하였다. 그러나 원래가 호전적인 족속이던 헝가리인들은 자신들의 왕이 패했음에도 포기하지 않고 산 위의 요새나 숲 속에 들어가 게릴라 전술로 몽골군을 괴롭혔다. 이에 아랑곳없이 몽골군의 영지화 작업이 계속되었고 몽골군은 이탈리아 북부와 오스트리아 빈 근방으로 정찰부대를 보냈다. 어떤 지역이 과연 먼저 공격을 받을 것이냐의 문제였을 뿐 ‘악마의 기마병’들은 다시 유럽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 유럽은 야전에서 몽골을 꺾을 수 있는 군대가 없었다.

그러나 몽골군의 유럽본토 진격에 최대의 장애물인 헝가리가 제거되고 몽골군이 다시 공격을 하려는 찰나, 몽골 본국에서 전령이 와서 대칸인 오고데이의 죽음을 알렸다. 몽골의 관습에는 대칸이 사망할 경우 왕자들과 왕족들은 모두 몽골로 돌아와 다음 칸의 선출을 위한 쿠릴타이에 참여하여야 했다. 수부타이는 바투에게 왕족으로서의 의무를 상기시켰고 몽골군은 헝가리에서 철수하여 동쪽으로 사라졌다. 결국 유럽본토에 대한 공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몽골군은 과연 유럽을 정복할 수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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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라가 몽골군에게 패하여 도주한 후 최종 도착지였던 클리스 요새. 현재 크로아티아 아드리아 해안에 있다.



상당수의 역사가들이 오고데이칸의 죽음과 이로 인한 몽골군의 철수가 유럽을 ‘살렸다’고 평가한다. 물론 오류라고 할 수 있지만 몽골군이 쉽게 유럽을 점령하고 통치할 수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아니 가질 수가 없다. 예를 들어 몽골군이 가장 먼저 들이칠 것으로 예상되는 독일 지역은 당시 유럽에서 가장 ‘군사화’된 지역이었다. 서유럽 최정예 병력이라고 할 수 있는 튜턴기사단과 템플러들이 상주하고 있었고 도시가 목책으로 둘러싸인 러시아와는 달리 거의 모든 요지가 석성(石城)에 의하여 보호받고 있었다. 아울러 독일 지역의 민병들은 지역에 대한 애착이 상당히 강한 편이었고 일정수준의 훈련도 받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고향이 공격받을 경우 매우 치열하게 싸웠다. 아울러 독일지역은 해안을 제외하고는 하천과 삼림이 많았다.

독일의 약점은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뛰어난 기사들과 훈련된 민병들을 하나로 뭉키게 만들 수 있는 권력중심부가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러시아에서와 마찬가지로 각개격파 당했을 것이고 어찌하여 몇몇 영주가 병력을 모아 회전(會戰)을 벌일 경우에도 전술운용이 뛰어난 몽골군이 이겼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만 싸움에서 이기는 것과 어떤 지역을 점령하고 통치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몽골군이 독일지역에 대한 점령을 시도할 경우 끝없는 공성전과 게릴라전에 지쳤을 가능성이 많다. 따라서 싸움에서 이긴다 하더라도 오래 통치를 하지 못하고 물러나왔을 가능성이 높다. 즉 오고데이칸의 죽음이 바투군의 유럽공격을 중단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과연 ‘유럽문명’을 살렸느냐의 여부는 조금 더 세심히 살펴보아야 하는 문제이다. 아울러 원정군을 이끌고 있던 바투는 서방보다는 몽골제국 내에서의 권력투쟁에 더욱 관심이 많았다.

바투 원정의 영향력은 서유럽보다는 몽골이 점령하고 향후 200년 이상을 다스린 러시아 지역에 강하게 미쳤다. 키에프 루스가 무너진 후 사실상의 도시국가/열국 상태였던 러시아에서 기존의 통치체제는 무너지고 몽골에 의한 강압통치가 시작되었다. 그 당시 이미 유럽에 비하여 발전수준이 낙후되었던 러시아 지역은 몽골의 압제로 인하여 그 발전이 더욱 더뎌질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각지의 영주들과 도시의 장(長)들은 금장한국의 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후신(候臣)이 되어야 했다. 몽골의 통치는 물리적 강압과 군사적 위력에 기반한 통치였고 후대 역사에 나타나는 러시아 군주들의 강압적 통치의 근원을 몽골에서 보는 논자들도 있다.

비록 오고데이의 죽음으로 인하여 몽골군이 사라지기는 하였지만 바투의 원정은 초원과 정착문명의 사이에서 보이는 약탈기습이 아니었다. 동쪽에서 일어난 원정군이 유럽을 침공하여 점령하려고 한 본격적인 시도였다. 몽골군의 공격은 아틸라의 훈족과 함께 유럽인들의 무의식 속에 깊이 각인되었으며 후일 나타나는 황화론의 모티프가 되었다.





김성남 | 안보·전쟁사 전문가
글쓴이 김성남은 전쟁이 인간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 UC 버클리 동양학과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국제학 석사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에 진학하여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전쟁으로 보는 삼국지], [전쟁 세계사] 등이 있으며 공저로 [4세대 전쟁]이, 역서로 [원시전쟁: 평화로움으로 조작된 인간의 원초적인 역사]가 있다.


발행2012.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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