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오스만-동로마 전쟁(1) - 로마의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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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33회 작성일 16-02-07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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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에 그려진 코소보 전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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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표


오스만-동로마 전쟁 개요

전쟁주체


오스만튀르크, 동로마제국, 헝가리, 신성로마, 세르비아(티무르 제국)

전쟁시기


1280년대-1453년

전쟁터


현재의 터키, 발칸반도, 남유럽, 동유럽

주요전투


브루사, 니코볼리스, 콘스탄티노플 (코소보, 앙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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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마와 동로마



역사를 읽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기 476년, 서로마 ‘마지막’ 황제인 로물루스·아우구스툴루스가 고트족 군장인 오도아케르에게 황위를 넘긴 때를 로마제국 멸망의 순간으로 본다. 그러나 로마제국의 동쪽에 살았던 사람들이 이런 말을 듣는다면 무슨 말이냐며 펄쩍 뛸 것이다. 서로마의 황위가 ‘야만족’에게 넘어간 이후에도 제국 동부의 사람들은 여전히 스스로의 나라를 ‘로마니아(Romania)’, 즉 로마인들의 땅이라고 여겼다. 서로마의 멸망은 이들에게 있어 단지 야만인들에 의한 제국 서부영토의 침탈이었다. 서로마는 멸망한 것이 아니라 빼앗긴 것일 뿐이며 언젠가는 무력으로 회복해야 할 ‘고토’였다. 아울러 동쪽의 ‘로마노스’들에게 있어 제국의 수도는 로마가 아니라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이름을 딴 콘스탄티노플이었고 이때문에 로마제국의 정통은 자신들에게 있다고 주장하였다. 흔히 서양사에 있어 로마를 천년 제국이라 하지만 동로마까지 포함하면 2000년의 역사를 가지게 된다.



사면초가와 말기현상



동로마의 황제들 중 서로마의 영토를 회복하여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려던 황제들은 많지만 서로마 제국의 영토를 상당부분 회복한 유스티니아누스, 또는 동로마 제 2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바실리우스 2세를 제외하면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하였다. 주변 지역을 군사적 문화적으로 압도하던 서로마와는 달리 동로마의 국제정치적 환경은 그리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산조 페르시아, 이슬람 아랍제국, 불가르 왕국, 흑해 건너의 루스 세력 등 콘스탄티노플을 무너뜨리고자 하는 세력은 너무 많았다. 심지어 13세기에는 같은 ‘기독교도’들에 의하여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고 자칭 라틴 왕국이 세워졌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수많은 논자(論者)들이 하나의 왕조가 멸망할 때는 그 ‘징조’가 나타난다고 한다. 이를 일반적으로 ‘말기현상’이라고 하며 대개는 정치와 관계(官界)의 부패, 군사상의 약세, 사회적 혼란, 그리고 심지어 초자연적 현상까지 기록된다. 어떤 나라건 그냥 망하는 것이 아니라 망할 이유가 있어서 망한다는 논리이다. 특히 나라를 다스릴 권리가 하늘이나 전능(全能)한 신들에 의하여 주어진다는 천명(天命)론, 또는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에 의하면 왕조가 멸망하는 것은 왕들이 잘못해서 하늘의 노여움이나 신들의 벌을 자초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과거에 멸망한 모든 왕조들은 ‘응당’, 또는 마땅히 망했어야 했으며 그 왕조가 지속되었으면 ‘천하’또는 ‘세상’에 크나큰 해악이 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말기현상’은 논리적인 근거가 확실치 않은 결과론에 불과하다. 동양, 특히 중국에서는 해당 왕조가 멸망한 다음에 나타난 왕조에 의한 정치적 정당화인 경우가 많으며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나타난 사건을 꿰어 맞추어 그저 ‘그럴듯한’ 사건의 연속을 만들어낸 것뿐이다. 이 때문에 말기현상에서 자주 등장하는 것은 이전 왕조가 멸망할 때 나타나는 도덕적 타락상이다. 도덕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정치가 어지러워지고 나라가 약해져 멸망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역시 당위적 결과론에 불과하다. 어떠한 논자는 그 논리를 오히려 뒤집으면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단순히 어떤 한 사람의 탐식, 과음, 엽색에 의하여 정치체가 붕괴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사회적 붕괴에 따른 현상은 그 몰락의 규모에 맞먹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고위층의 도덕적 타락은 언제든지 나타나는 현상이다. 타락은 국가가 ‘멸망할 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있었으며 다만 국가가 어려워질 때 부각이 되는 것뿐이다. 타락 때문에 그 국가가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자체가 정치사회적 타락을 버텨내지 못할 정도로 심각하게 약화된 것이다. 국가가 멸망하는데는 단순히 상층부의 도덕적 타락이나 피상적인 사회적 혼란이 아닌, 그 이상의 원인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말기현상’의 관점으로 보자면 동로마는 망해도 여러 번 망했어야 하는 나라이다. 7세기 초에 사산조 페르시아의 군대가 콘스탄티노플 앞마당까지 왔고 7세기말-8세기초에 걸쳐 아랍인들이 레바논과 시리아 등 중요한 영지를 모두 잃고 콘스탄티노플이 두 번이나 대군에 포위당하였다. 10세기 중반에는 불가르족이 크게 세력을 떨치면서 발칸반도 영토 대부분을 잃었다. 11세기말에는 투르크족에게 크게 패하면서 아나톨리아(지금의 터키)가 거의 모두 상실되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유능한 군주의 등장이나 국제정세의 흐름으로 인하여 멸망하지 않고 기사회생하였다. 동로마의 예를 보더라도 어떤 나라가 망해야 할 ‘필연적’인 이유는 없다. 어떤 나라건 위기는 언제든지 찾아오기 마련이며 그 위기를 넘기면 나라가 존속되고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면 망하는 것뿐이다. 여기에 필연적 운명이나 당위적 논리를 운운할 이유는 전혀 없다. 그렇지만 14세기말, 여러 차례의 위기를 넘기고 용케 살아남았던 동로마는 투르크에게 몰려 멸망직전에 와있었다.



오스만의 흥기와 동로마의 쇠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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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주크 투르크 제국 최대판도와 단다나칸 전투(1040) / 만지케르트전투(1071)



지금의 터키를 세운 투르크의 역사는 몽골 서부와 중앙아시아에 걸친 지역에서 전개되었다. 중국사의 척발씨, 사타, 돌궐, 중앙아시아와 대초원 지대의 캉리, 쿠만, 킵차크, 하자르, 페체네크 등이 모두 투르크 계통이다. 6세기와 7세기에 걸쳐 현재 중국 북부에서 트란스옥시아나(현재 시르-다리아/아무-다리아강 유역의 땅)까지에 걸쳐 크나큰 제국을 이룬 투르크족은 이후 동-서로 분열되었다가 서부의 투르크인들이 중동지역으로 진출하여 11세기경 동로마와 아나톨리아를 놓고 충돌하게 된다. 이들은 역사에서 ‘셀주크’라는 이름으로 불리는데 이들은 약 10세기경 아랄해 인근에 살고 있던 오구즈-투르크 집단으로부터 분리되어 남쪽으로 이주하였고 현재 우즈베키스탄에 정착하게 된다.

사실 돌궐, 즉 서돌궐 제국을 구성하던 인원들이 중앙아시아로 진출하기 이전에도 중동에는 많은 수의 투르크인들이 살고 있었다. 예를 들어 지금의 이란을 다스리던 페르시아 계통의 왕조에서 복속민으로 있던 일군(一群)의 집단이 있었는데 이들은 가즈니(Ghazni)라고 불리며 10세기경에 사마니조(朝) 페르시아를 전복시키고 이란 서부에서 아프간, 그리고 인도 북부에 걸친 가즈나 왕국을 세웠다. 카자흐에서 남하하는 셀주크 집단은 1040년에 현 투르크메니스탄 남부 메르브 인근의 단다나칸에서 이 가즈나 왕국의 군대와 격돌하였고 가즈나 왕국군이 대패하면서 그 영토는 인도 북부로 수그러든다. 가즈나비를 쳐부순 셀주크는 향후 20년에 걸쳐 이란 북부의 호라산과 메소포타미아를 차지하였다. 1060년대에 기독교와 이슬람이 맞물리는 지역인 아르메니아와 그루지야(조지아)까지 진출한 셀주크 세력은 동로마와 충돌하게 된다. 그리고 1071년 반(Van)호수 인근의 만지케르트에서 내부의 정쟁(政爭)으로 약화된 동로마 황제 로마누스-디오게네스의 동로마군을 격파하였다. 이로서 동로마제국의 농지와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아나톨리아가 상실되었고 동로마는 예전의 강세를 회복하지 못한다. 셀주크는 현재의 터키에서 아라비아 반도 남부, 그리고 아랄해 지역까지 아우르는 셀주크 제국을 건설하게 된다. 이 셀주크 제국은 12세기 중반까지 번성하였으나 유럽인들에 의한 대대적인 십자군 원정이 시작되면서 이들과의 싸움에서 크게 국력을 소모하게 되고 이후 이집트의 아유브 왕조와 중앙아시아의 코레즘 세력에 패한다. 설상가상으로 각 지역을 맡고 있던 제후들(베이)이 독립하면서 제국은 사실상 와해되고 지금의 터키의 룸-셀주크만 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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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1세의 초상



오스만 제국의 역사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오스만 제국의 창업주인 오스만의 아버지는 원래 아나톨리아 동부의 군장(베이)이었으나 당시 중동을 휩쓸고 있던 몽골군의 무자비한 칼을 피하여 부족들을 이끌고 아나톨리아 동부로 가서 룸-셀주크의 술탄 휘하에 들어간다. 술탄은 오스만의 아버지인 에르투그룰에게 동로마와의 접경지대를 하사하였다. 한창 싸우고 있는 적국과의 접경지역을 받은 것은 불만사항일 수 있었지만 다행히도(?) 술탄은 에르투그룰이 동로마와 싸워 얻은 땅은 그대로 가지는 것을 허락하여 주었다.

아버지가 죽은 후 아버지의 베일릭(베이의 영지)을 물려받은 오스만 역시 몽골군의 침입에 따른 혜택을 받는다. 메소포타미아에서 몽골군의 철권통치를 피하여 아나톨리아로 들어온 이슬람 전사들이 그 휘하에 모여든 것이다. 오스만은 이들을 기반으로 군세를 확장하여 터키 서북부에 남아있던 동로마 영토를 잠식하였고 1302년에 동로마군은 바페우스에서 크게 이기면서 동로마의 영역이었던 비투니아 전부를 자신의 영역에 편입하였다. 그 뒤로도 동로마에 대한 공격은 계속되어 아나톨리아 서부 해안의 중요도시인 에베소를 차지하였다.

오스만은 동로마령 아나톨리아 최대의 도시인 브루사를 공격하였으나 아직 그의 군이 공성전에 서툴렀던 까닭에 함락이 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오스만이 죽은 후, 그의 아들 오르한이 군주의 자리를 물려받아 1326년에 브루사를 함락시켰다. 브루사는 이후 새로이 형성된 오스만 투르크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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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1세 사망 당시의 영토와 오르한 1세가 정복한 영토



브루사의 함락으로 인하여 동로마의 아나톨리아 영토는 거의 상실되었다. 아나톨리아 서쪽 끝의 동로마 영토를 모두 차지한 오르한은 마르마라해(海)를 건너 게리볼루(갈리폴리) 반도 이북의 땅도 차지하였다. 오스만 왕국의 국력이 신장되면서 오스만 제국은 룸의 술탄으로부터 사실상 독립하였다. 사실 동로마는 앞서 말한 만지케르트에서 패한 후로 예전의 국세를 회복하지 못하고 계속 약해지고 있었다. 심지어 1204년에는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기독교 세계를 지키기 위하여 출정한 4차 십자군이 오히려 콘스탄티노플을 습격하여 함락시키고 ‘라틴 제국’을 세우는 등 우환이 겹쳤다. 다만 1200년대 중반에 유능한 황제인 미카엘 팔레올로구스의 등장으로 약간 세력회복을 하면서 지금의 불가리아/알바니아에서 터키 중부까지 회복하였으나 예전 바실리우스 2세 때의 강성함에는 못 미쳤다. 그나마 미카엘 팔레올로구스가 이룬 중흥도 오래가지 않았다. 1305년에 불가르족의 침공이 이어졌고 트라키아(지금 터키 공화국의 유럽영토) 대부분을 잃었다. 그리고 오스만 1세와 오르한 1세에 의한 팽창이 이어지며 브루사를 비롯하여 아나톨리아 서부의 나머지 영토를 빼앗긴 것은 매우 중대한 타격이었다. 제국의 중심영토였던 아나톨리아를 완전히 상실한 동로마는 오스만의 세력을 막을 수 있는 힘이 없었다. 오스만군이 마르마라해를 건너 유럽영토까지 잠식하기 시작했을 때 동로마의 멸망은 불가항력인 것으로 보였다.



오스만 투르크의 남유럽 정복



그러나 오르한의 뒤를 이어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이 된 무라드는 동로마를 직접 치는 대신 발칸반도 깊숙이 진격하였다. 수도를 아드리아노플(현재 터키영토 최북단인 에디른)으로 옮긴 무라드 1세는 1371년 세르비아왕 부카신과 왕제(王弟) 우글리에사가 아드리아노플을 찾기 위하여 일으킨 세르비아 원정군을 격파하고 1385년에는 현재의불가리아 수도인 소피아를 점령하였다. 1386년에는 세르비아의 대영주인 라자르 레블리야노비치가 이끄는 세르비아군과 사힌-베이의 오스만군이 프로츠니크(현 세르비아 남부 프로코피예市 인근)에서 격돌하여 오스만군이 패하였다.

오스만군의 진격은 잠시 주춤하였으나 1389년에 세르비아 전국에서 모인 왕군(王軍)과 오스만의 대군은 코소보에서 대회전(大會戰)을 벌이게 되었다. 이 싸움에서 양군 모두 처절히 싸웠고 병력의 대부분을 잃어버렸다. 세르비아군을 이끈 레블리야노비치와 오스만 투르크 술탄 무라드 1세 둘 다 목숨을 잃었다. 세르비아의 군사력은 소진된 것이나 다름없었고 큰 타격을 입은 오스만군의 진격도 아나톨리아에 남아있던 병력을 불러올 때까지 멈출 수밖에 없었다. 다시 동방에서 병력을 불러온 오스만투르크의 새로운 술탄인 바야제트는 다시 팽창을 재개하였고 세르비아는 오스만투르크의 후국(侯國)이 될 수밖에 없었다. 1393년과 1394년에 콘스탄티노플로 들어가는 길목에 요새를 구축하여 동로마에 대한 최후의 공격을 준비하였고 1395년에는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본격적인 공격이 개시되었다. 오스만 투르크의 목표는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여 동로마의 숨통을 끊으려 한 것이다. 물론 오스만 투르크가 유럽을 공략하는 과정이 수월하기만 하였던 것은 아니다. 1395년에 잠시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공격을 멈추고 지금의 루마니아 동부에 있는 작은 왕국 왈라키아를 정벌하여 동로마 공격에 방해가 될 수 있는 모든 장애물을 사전에 제거하려 하였다. 4만의 군대로 쳐들어갔으나 로비네의 전투에서 불과 1만의 왈라키아군에게 격퇴당하였다.

왈라키아에서 일격을 당하기는 하였지만 오스만투르크의 팽창이 멈춘 것은 아니었다. 오스만의 팽창에 역시 영토를 잠식당하고 있던 불가리아가 영토를 되찾고자 하였고, 투르크군을 한차례 물리친 왈라키아를 비롯하여 동유럽의 영주와 군주들도 오스만을 물리쳐 그 위협에서 벗어나는데 불가리아와 이해를 같이 하였다. 이탈리아의 양대 상업도시인 베네치아와 제노바 역시 아드리아해와 에게해에서 자신들의 상권이 위협받을 것을 우려하여 남유럽-동유럽에서 형성된 반 오스만 동맹에 힘을 보태었다. 헝가리도 국경에 가까워지는 오스만의 팽창에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오스만에게 영토의 거의 대부분을 잃고 소국(小國)으로 전락한 동로마는 유럽의 손을 빌려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하려 하였다. 서방교회는 이때 로마(보니파시오 9세)와 아비뇽(베네딕토 13세)에 있는 두 명의 교황들이 서로가 진짜 교황이라고 주장하며 분열되어 있었다. 로마의 교황인 보니파시오 9세는 기독교 세계를 위협하는 투르크 이교도를 물리쳐야 한다며 성전을 선포하였고 서로 이권을 노리는 유럽국가들에서 기사와 병사들이 모여들었다. 투르크와 싸우기 위하여 프랑스, 헝가리, 신성로마제국 각 영지, 몰다비아, 아라곤등지에서 병력을 보내왔고 베네치아와 제노바는 선박을 동원하여 이 ‘십자군’을 싸움터까지 실어 날랐다.

이에 맞서는 투르크군은 술탄인 바야제트 1세가 지휘하고 있었고 그의 제후국이 된 세르비아의 군주 스테판 라자레비치가 병력을 이끌고 투르크편에 참전하였다. 바야제트 1세는 7년전 아버지 무라드 1세가 코소보 전투의 막바지에서 세르비아 암살자에게 피습을 당하여 죽은 후 아버지의 죽음을 알리지 않고 형이나 무라드 1세의 장자(長子)인 야쿠브를 지휘천막으로 끌어들인 다음 목졸라 죽임으로써 술탄이 된 인물이었다. 일부 유럽인들의 기록에 의하면 투르크군은 20만이 넘었다고 하지만 이는 자신들의 패배가 불가항력이었음을 강조하기 위한 변명에 불과하며 실제 병력은 마찬가지로 3만에서 4만 사이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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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에 그려진 니코폴리스 전투도



프랑스의 디종에서 출발한 십자군은 헝가리의 수도인 부다를 거쳐 불가리아의 니코폴리스 인근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니코폴리스 요새를 포위하였는데 이는 니코폴리스가 발칸반도 내륙에서 흑해지역을 잇는 중간 요충지에 위치해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십자군이 니코폴리스를 차지하게 되면 도나우강 하류 지역을 차지할 수 있게 되고 투르크의 수도인 아드리아노플을 위협할 수 있으며 콘스탄티노플 지원을 위한 수로와 육로를 열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비록 수송수단이 없어서였기는 하지만 요새 공략을 위한 공성무기를 가져오지 않았고, 이 때문에 사방이 낮지만 가파른 벼랑으로 되어있는 니코폴리스 공략에 애를 먹을 수 밖에 없었다. 수 차례의 공략에 실패한 십자군은 결국 니코폴리스를 포위하여 굶기는 고사(枯死)작전으로 전환하였다.

바예지드 1세는 군을 이끌고 니코폴리스 요새의 구원에 나섰고 투르크군이 요새 인근에 이르자 십자군은 포위를 풀고 야전을 준비하였다. 1396년 9월 25일에 벌어진 전투 초반에는 십자군 기사들이 투르크군의 전방에 배치되어 있던 투르크 보병을 공격하여 돌파에 성공하여 도망치는 투르크 보병들을 뒤쫓으면서 십자군이 우세를 점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공격에 나선 프랑스 기마들 상당수가 투르크군이 설치한 꼬챙이에 꿰이고 투르크 궁병의 사격으로 십자군 역시 손실이 만만치 않았다. 노련한 기사들은 일단 서전을 이겼으니 뒤에 대기하고 있던 헝가리군과 함께 전열을 정비하여야 한다는 신중론을 폈으나 전공(戰功)에 눈이 멀어있던 젊은 기사들은 이를 무시하고 계속 공격하였다. 그러나 기사들이 후퇴하는 투르크 보병을 쫓아 인근의 고지를 올라갔을 때 그 곳에는 바예지드가 예비대로 두고 있던 중갑기병대(시파히)가 대기하고 있었고 시파히들의 돌격이 이어지면서 프랑스군의 정예들은 모두 쓰러지고 그 지휘관인 네베르는 사로잡혔다. 시파히들은 고지아래에 대기하고 있던 십자군 진영을 그대로 치는 것이 아니라 양 옆으로 돌아 포위하고자 하였고 이를 신성로마의 기사들이 막으려고 하면서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다. 이때 투르크군에 참전하고 있던 라자레비치의 1500기사에 의한 돌격이 이어지면서 신성로마군이 무너지고 왈라키아와 트란실바니아 병력들은 싸움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그대로 철수하였다. 로도스 기사단과 그 단주인 시기스문트도 열심히 싸웠으나 기울어진 싸움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이로서 중동에서의 십자군 원정이 끝난 이후 최대 규모의 십자군 원정은 참담한 실패로 돌아갔고 동로마 제국의 운명은 경각에 처하게 되었다.





김성남 | 안보·전쟁사 전문가
글쓴이 김성남은 전쟁이 인간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 UC 버클리 동양학과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국제학 석사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에 진학하여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전쟁으로 보는 삼국지], [전쟁 세계사] 등이 있으며 공저로 [4세대 전쟁]이, 역서로 [원시전쟁: 평화로움으로 조작된 인간의 원초적인 역사]가 있다.


발행2012.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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