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오스만-동로마 전쟁(2) - 로마의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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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01회 작성일 16-02-07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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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노플 공격을 위하여 출정하는 메흐메트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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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표


오스만-동로마 전쟁 개요

전쟁주체


오스만 튀르크, 동로마 제국, 헝가리, 신성로마, 세르비아(티무르 제국)

전쟁시기


1280년대-1453년

전쟁터


현재의 터키, 발칸반도, 남유럽, 동유럽

주요전투


브루사, 니코폴리스, 콘스탄티노플 (코소보, 앙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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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동로마 전쟁(1)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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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장자(長子), 이슬람의 전사



오스만 투르크가 지금의 터키 지역에 자리잡으면서 정착 국가를 세우기는 하였지만 그들의 근본은 기마민족이었다. 터키 서부를 완전히 장악하고 마르마라해를 넘어 남부 유럽으로 진격하던 시기에도 주축은 궁기병과 함께 술탄 휘하의 영주들이 거느린 중갑기병이었으며 보병은 대개 급히 동원되었거나 점령지에서 징집한 장정들을 급히 훈련시켜 선봉으로 내세웠고 이 때문에 그 전투력을 보장받을 수 없었다. 남부 유럽 대부분을 차지한 후에도 투르크 술탄의 주력군은 여전히 제후(베이)와 군장(아미르)들로부터 지원받은 기마군이었다. 그러나 비잔틴과 유럽인들과 싸우기 시작하면서 공성전, 그리고 대규모 보병과의 전투를 많이 겪게 되었고 보병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아울러 초기의 오스만 투르크군은 공성전에 약한 모습을 보였고 니코폴리스의 전투를 비록 이기기는 하였지만 초반에 선두에 내세웠던 보병들이 무너지면서 잠시 어려운 싸움이 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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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2년 로도스 섬을 공격하고 있는 예니체리 병사들



보병의 수를 충당하기 위하여 오스만 투르크 술탄인 무라드 1세는 유럽인들과의 전투에서 사로잡은 포로와 노예들을 훈련시켜 기존의 주력군과 대비되는 새로운 군대를 만들었는데 기마군은 ‘카피쿨루 수바리’가 되었고 보병은 신군(新軍), 즉 새로운 군대란 뜻의 예니-체리(Yeni Ceri)가 되었다. 예니체리는 영어권에서 부르는 ‘재니서리(Janissary)’란 명칭으로 보다 잘 알려져 있다. 무라드 1세가 새로운 군단을 만든 까닭은 영주들과 자치권을 가진 군장들의 병력에 의존하는 시스템을 바꾸어 술탄의 직접적인 지휘하에 있는 글자 그대로의 중앙군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한동안 전쟁 포로들과 노예들을 훈련시키는 제도가 계속되다가 얼마 후 ‘데프시르메’라는 제도가 새로이 도입되었다. 이는 새로이 점령되어 술탄이 직접 임명한 베이(Bey)들이 있는 발칸반도에서 주로 시행되었고, 정해진 지역 내의 기독교도들은 기독교 신앙을 지키고 다소 낮은 세금을 내는 대가로 5년마다 기독교 가정 40호(戶)중 한 명이 맏아들을 내놓아야 했다. 이런 식으로 매년 다른 지역에서 약 1000명에서 3000명의 어린 소년들을 받아들였다. 도시지역의 청소년들은 세속에 물들었다고 제외되었고 장인들은 경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기에 역시 제외되었다.

이 소년들은 단체로 시험을 보았고 성적 우수자들은 “이츠-오글란”이 되어 술탄의 궁정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일단은 문학, 수학 등의 종합교육을 받은 다음 각종 무예(검술, 창술, 궁술, 레슬링)와 종교적 교육을 받았다. 우수자는 술탄의 궁정으로 가서 벼슬을 하게 되었고, 나머지는 엘리트 기병인 카피쿨루 군단이 되었다. 이츠-오글란이 되지 못한 아이들은 아체미-오글란이라고 불리는데, 일단 지방토호들의 집으로 보내져 농사를 짓고 기본적인 군사훈련과 종교 교육을 받았다. 이후 병영으로 보내어져 공동으로 생활 하면서 군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일반적으로 ‘예니체리’라고 하면 아체미-오글란 출신의 보병들을 가리킨다. 이중에서도 우수자 들은 근위대인 ‘보스탄치’ 군단에 입대하였다.

훈련과정에서 기독교인 아이들은 철저한 무슬림으로 교육되었고, 술탄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하였다. 유럽이 아직도 봉건적인 군대에 의존할 때 등장한 예니체리는 근대적인 의미의 ‘정규병’에 상당히 가까웠다. 중앙정부와 군주에게만 충성을 하였고 정기적인 급료를 받았다. 그리고 평시에는 치안과 소방업무 등을 담당하였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면 결혼을 하여 가정도 꾸리면서 연금을 받아 비교적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일부러 자신들의 자식을 데브시르메에 내보내는 기독교 가정도 있었으며 나중에는 무슬림 가족들도 예니체리를 출세의 길로 인식하고 자식들을 예니체리로 만들기 위한‘로비’를 하였다. 예니체리 군단 내에 무슬림의 숫자가 늘면서 데브시르메는 1683년에 폐지된다. 나중에는 예니체리 아버지가 자신의 아들들을 입대시키는 인척주의가 횡행하여 예니체리 군단은 상당히 부패하였고, 결국 1826년에 예니체리 제도는 폐지되었다.

부패와 인척주의가 만연하기 이전 예니체리는 오스만 투르크의 정예였다. 싸움에서는 적 앞에서 물러나지 않았고 후퇴할 때도 질서정연하게 물러났다. 아울러 많은 수의 유럽 국가들이 아직도 창칼로 전쟁할 때 이미 총기를 개인무장으로 채택하였다. 1500년대 예니체리 보병들의 기본무기는 총이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할 때 술탄 메흐메트는 일종의 폭력배집단인 바시-바주크들을 앞에 내세워 총알받이로 쓴 다음, 바시-바주크들이 전멸하자 예니체리들을 투입하였다. 그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예니체리들은 빗발치는 화살과 탄환 속에서도 질서정연하게 진군하였고 동료가 쓰러지면 뒤에 있던 병사가 바로 그 자리를 채웠다 한다. 그리고는 성벽에 다가와 침착하게 사다리를 놓았다. 비록 성벽을 넘지 못하고 물러나기는 했지만 기존의 군대와는 여실히 다름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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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0년경 동로마의 영토





티무르가 구원한 동로마



비록 2만에서 3만에 불과하였지만 거의 전 유럽이 반 투르크의 기치하에 연합한 십자군이 니코폴리스에서 참패하자 동로마에게 구원은 어디에도 없어 보였다. 1396년의 십자군 자체가 동로마의 구원요청에 의하여 구성된 것이었기 때문에 유럽의 각 왕국, 특히 서유럽의 왕국들이 승산 없는 싸움에 다시 병력을 내어줄 리가 만무하였고 그나마 병력의 여유가 있는 프랑스는 비록 일시 휴전 중이기는 하지만 잉글랜드와의 100년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나설 수가 없었다. 동로마와 발칸반도의 국가들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서 싸운다지만 서유럽의 주요세력들은 당장 자국에 위협도 없는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나서기를 꺼려하였다. 아울러 이 당시 일부 국가를 제외하고는 국왕권이 강하지 않았기 때문이 국왕들이 전쟁에 나가라고 하여도귀족들이 즉각 나서는 것도 아니었다.

니코폴리스에서 대승을 거둔 바야제트는 콘스탄티노플을 더욱 더 옥죄었다. 구원군이라고는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콘스탄티노플의 포위는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의 구원은 유럽이 아닌 전혀 다른 방향에서 왔다. 이때 파리에서 서유럽의 군주들에게 재차 구원을 호소하고 있던 동로마의 황제 마누엘 2세는 티무르라는 무자비한 정복자가 중동을 무자비하게 휩쓸었으며 바그다드와 시리아 지역을 초토화 시키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아울러 아나톨리아 동부의 베이(영주)들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바야제트와 날카로운 신경전을 펼치고 있음을 알고 티무르를 동로마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하여 사신을 파견하였다. 마누엘 2세가 티무르에게 사신을 보낼 당시 티무르는 복속되었다가 얼마 안되어 반기를 든 기독교 국가들을 다시 치고 있었다. 사실 티무르는 무슬림과 크리스찬들을 가리지 않고 짓밟은 무자비한 점령자였고 기독교 왕국인 아르메니아와 그루지아를 철저히 약탈하고 파괴하였지만 2000년을 이어온 제국의 운명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 동맹의 상대가 누구인지 따질 수 있는 여유는 없었다.

1399년에 티무르는 대군을 휘몰아 그의 도성인 사마칸드에서 서쪽으로 진격하였고 충차, 투석기와 화염차 등 최신 공성무기를 동원하여 기독교 왕국인 그루지아의 도시들을 무자비하게 공격하였다. 그루지아를 마구 짓밟은 티무르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바야제트에게 신속(臣屬)한, 오스만 제국의 동쪽 변경에 있던 시바스(현재 터키 동부의 도시)를 함락시키고 주민은 모두 노예로 팔아버렸다. 자신의 군에 맞서 싸운 적병들은 모두 산채로 매장시켜 버렸다. 티무르와 바야제트는 서로가 ‘이슬람의 수호자’임을 자임하고 있었고 자신들보다 더 위의 정복자를 인정할 수 없었다. 이러한 라이벌 관계는 티무르와 바야제트간에 싸움을 붙이려는 마누엘 2세의 공작대상이 되었고 이로 인하여 수 년 후에 티무르군과 오스만 투르크 군대는 정면충돌하게 된다.

티무르군은 이후 시리아의 알레포로 향하여 그 군을 크게 무찌르고 알레포를 함락하였다. 티무르군은 4일동안 알레포를 불태우고 약탈하였고 2만의 주민을 학살하고 그 머리를 모아 피라미드 모양으로 쌓아놓았다. 알레포를 함락한 티무르는 다마스쿠스로 진격하여 포위하였다. 티무르군은 공성무기를 총동원하고 성벽 밑에 갱도를 뚫어 결국은 다마스쿠스의 성벽을 붕괴시키고 다마스쿠스에 난입하였다. 티무르군은 수일 동안 멈추지 않고 다마스쿠스를 약탈하였고 다마스쿠스의 거리에는 수만 명의 시체가 나뒹굴었다. 티무르군이 값나갈만한 모든 것을 빼앗은 후 다마스쿠스는 거의 폐허가 되었다. 다마스쿠스를 불태운 티무르군은 이집트를 치러 남쪽으로 움직였으나 팔레스타인 지방 근처에서 메뚜기떼의 습격이 크게 일어나 식량을 구할 수 없게 되자 행군을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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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엘 2세 황제의 초상



북쪽으로 간 티무르는 이전에 그의 두 아들이 바그다드로 이끌고 간 2만명의 부대가 아직도 바그다드를 함락시키지 못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지체 없이 바그다드로 진격을 명한 티무르는 바그다드에 도착한 후 총공격을 감행한다. 1258년 훌레구의 몽골군단에 의하여 불태워진 바그다드는 다시 한 번 재앙을 맞았다. 바그다드는 함락이 되고 티무르군은 2만명을 무자비하게 살해하였다. 2만명의 잘린 머리는 피라미드 모양으로 쌓아 올린 후 불태워졌고 불이 꺼진 후 사막 한가운데에는 두개골로 이루어진 끔찍한 탑이 남았다. 마누엘 2세의 사신은 동로마를 멸망직전까지 몰아붙인 오스만 술탄 바야제트를 무찔러 주면 동로마 황제가 티무르의 신하가 될 것이라며 오스만에 대한 동맹을 제안하였다. 사실 이때 마누엘 2세는 바야제트와 항복을 전제로 한 협상을 진행시키고 있던 중이었기 때문에 티무르의 등장은 동로마의 명운(命運)을 연장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로 보였다. 티무르와 바야제트는 이미 오랫동안 모욕적인 서신을 주고받으며 서로에 대한 적개심을 키워왔다. 마누엘 2세의 공작이 그 행동에 영향을 미쳤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티무르가 아나톨리아 동부를 약탈하고 파괴한다는 소식을 접한 바야제트 1세는 콘스탄티노플의 포위를 풀고 터키로 군을 이끌고 달려갔다. 수년간 풀리지 않던 콘스탄티노플의 포위는 티무르의 등장으로 한 순간에 풀린 것이다.

바야제트는 니코폴리스에서의 전공으로 얻은 ‘천둥’이라는 그의 별명에 걸맞게 약 85,000의 병력을 이끌고 빠른 속도로 지금의 터키 중부로 진격하였다. 티무르의 군은 비록 오랜 원정으로 지치기는 하였지만 바야제트보다 많은 14만이었다. 그러나 티무르는 수적 우위만을 믿지 않고 수개월 동안 바야제트의 투르크군에 종군하고 있던 타타르족들의 수장들을 상대로 공작을 폈다. 티무르는 자신의 군대 대부분이 타타르인인 것을 수장들에게 주지시키면서 동족간의 상잔(相殘)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물론 동포애만 강조한 것이 아니라 만약 티무르군과 오스만투르크군의 싸움에서 티무르가 이기게 해준다면 엄청난 전리품을 주기로 약속하고 타타르의 협조약속을 얻어냈다. 공교롭게도 티무르의 군에도 투르크족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타타르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동족상잔은 피할 수 없는 문제였다. 오스만군과 티무르군은 1402년 7월에 터키 공화국의 수도가 되는 앙카라 근처에서 멈추고 서로를 탐색하면서 주변을 배회하였다. 투르크군의 우익은 특이하게도 세르비아 출신 기사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는 투르크가 세르비아를 점령하면서 제후가 된 스테판 라자레비치가 이끌고 나온 병력이었다. 바야제트는 라자레비츠의 누이인 올리베라 데스피나를 아내로 맞아들였고 대신 세르비아의 자치를 보장해주었다. 앙카라에 등장한 세르비아 기사들의 번쩍이는 갑옷은 햇볕을 받아 번쩍이며 빛났다.

이윽고 세르비아 기사들이 돌격을 시작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티무르군은 중무장 기사들의 돌격에 기마궁사들의 화살연사로 맞섰다. 몇 명이 쓰러지기는 하였지만 중무장한 기사들은 그대로 기마궁사들이 있는 곳으로 들이닥쳤고 경장(輕裝)의 기마궁사들은 무거운 갑주를 입은 기사들을 감당할 수 없어 뒤로 물러섰다. 이때 티무르군의 우익에 포진한 기마병이 투르크 좌익을 향하여 맹렬히 돌격하여 투르크 좌익을 거세게 압박하였다. 티무르의 우익은 곧 우위를 점하였지만 세르비아 기사들의 공격도 만만치 않게 거셌고 싸움은 대등하였다.

바로 이때 투르크군 좌익에 있던 타타르군이 갑자기 말머리를 돌러 투르크 본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바야제트의 아들인 술레이만 첼레비 왕자가 지휘하던 투르크군 좌익은 타타르인들의 배신이 결정타가 되어 힘없이 무너졌고 무질서하게 도망하기 시작하였다. 좌익이 무너지는 것을 목격한 세르비아 기사들은 용감해야하는 술탄의 왕자가 도망가는 꼴을 보자 전장을 이탈하였다. 타타르의 배신과 술레이만의 도주, 그리고 세르비아군의 이탈 이후 바야제트에게 남은 것은 예비대인 시파히 기병과 정예보병 예니체리 밖에 없었다. 기독교 가정의 맏이들로 태어났지만 철저한 이슬람 전사로서 훈련을 받은 예니체리들은 물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좌우익이 모두 무너진 상황에서 본군만으로는 티무르의 대군에게 중과부적이었다. 바야제트에게 남아있는 병력이 모두 죽거나 도주하고 바야제트는 300명의 패잔병과 함께 높은 언덕위로 올라가 싸웠다. 그러나 결국 고지의 진지가 무너질 위기에 처하자 바야제트는 티무르의 대군 속을 뚫고 나가려다가 말에서 떨어져 티무르의 포로가 되었다.

바야제트의 투르크군을 꺾은 티무르군은 지금의 터키 전역을 휩쓴 다음 당시 오스만 제국의 초기 수도였던 브루사로 달려가 분탕질을 자행하였다. 물론 바야제트의 다른 왕자들이 이미 국고의 보물을 빼돌려 마르마라해(海)를 건너 유럽으로 탈출한 후였지만 브루사에 남은 귀중품은 아직도 상당했다. 티무르군은 부르사에 남은 것이 없을 때까지 철저히 약탈하였다.

티무르에게 잡힌 바야제트는 그래도 일국의 군주로서 후한 대접을 받기는 하였으나 감금된 체로 하루 종일 지내야 했으며 일설에 의하면 전장에 같이 나갔던 데스피나는 티무르의 장막에서 나체로 시중을 드는 등의 모욕을 당했다고 한다. 바야제트는 결국 화병이 나서 이듬해(1403년)에 병사(病死)한다. 마누엘 2세는 때가 되면 항복하기로 바야제트에게 한 약속을 파기하고 오스만투르크의 왕자들이 내전을 벌이고 있는 틈을 타서 영토를 북쪽으로 약간 넓히고 기존에 있던 요새들을 강화시켰다. 유럽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었던 오스만 투르크는 티무르와의 한 판 싸움으로 치명타를 입었고 동로마보다 빨리 멸망의 길을 걷는 듯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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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제트를 사로잡은 티무르





오스만의 부활



앙카라에서의 패배 후 오스만 제국에서는 왕위를 둘러 싼 대혼란이 일어났고 만약 유럽이 이때 동맹군을 형성하여 오스만 투르크를 공격하였으면 오스만 투르크는 큰 위기를 맞았을 것이다. 앙카라에서 바야제트를 사로잡은 티무르는 바야제트의 왕자 중 한 명인 메흐메트 첼레비를 오스만의 ‘왕’으로 임명하였다. 오스만의 술탄이 티무르의 제후가 된 것이다. 그러나 다른 왕자들은 메흐메트를 꼭두각시로 여기면서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결국 메흐메트와 다른 왕자들간의 내전이 벌어졌다. 유럽과 동로마의 관점에서 이는 천금의 기회라고 할 수 있었지만 앞서 말한 유럽의 분열상과 함께 100년 전쟁으로 인한 혼란, 그리고 동로마 자체의 약세로 인하여 오스만 투르크의 분열이 제공한 기회를 이용하지 못하였다. 티무르는 명나라 정벌을 위하여 사마르칸드로 회군하였고 메흐메트는 다른 왕자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무너져가던 오스만 투르크를 다시 통합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때문에 메흐메트 1세는 오스만 제국을 중건(重建)한 군주라는 평가를 받는다.

메흐메트 1세가 죽은 후 그의 아들인 무라드 2세가 즉위하자 동로마 황제 마누엘 2세는 술탄이 된 후에 여러 도시들을 동로마에 돌려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이전에 포로로 잡아두고 있었던 투르크 왕자 무스타파 첼레비를 풀어준다. 풀려난 무스타파는 재빨리 병사들을 모아 무라드 2세가 보낸 베야지드 파샤의 군을 무찌르고 아드리아노플에서 술탄으로 즉위한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다시 한 번 혼란으로 빠져드는 듯싶었으나 무스타파의 병사들은 그의 잔인함과 불 같은 성정을 견딜 수가 없었다. 결국 그의 군대 대부분이 떠나고 무스타파는 게리볼루(갈리폴리)에서 무라드 2세에게 패하여 죽는다. 무라드 2세는 무스타파의 반란을 정리한 후 1421년에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였다. 티무르의 등장으로 잠시 숨통을 텄던 동로마는 20년 만에 다시 경각에 처하게 된 것이다.

콘스탄티노플이 위치한 반도를 둘러 싼 넓은 포위망을 구축한 후 무라드 2세는 유럽으로의 진격을 재개하여 1430년에 동로마가 회복하였던 그리스의 테살로니카를 다시 차지하고 1439년에는 세르비아를 완전히 점령하였다. 1444년에는 헝가리 왕가의 섭정인 야노스 훈야디의 군을 바르나에서 격파하면서 헝가리는 더 이상 오스만의 발칸반도 점령에 개입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스칸데르베크가 이끄는 알바니아 점령에는 실패하였고 무라드 2세가 1451년에 아드리아노플에서 사망하면서 아들인 메흐메트가 술탄으로 즉위하였다.



콘스탄티노플 공방전과 동로마의 멸망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하여 로마제국의 새로운 수도가 된 콘스탄티노플은 메흐메트 2세의 오스만군이 1453년에 포위하기 전까지 무려 13차례의 큰 공성전을 치렀다. 그러나 1204년에 4차 십자군에 의하여 단 한 차례 함락되었을 뿐 콘스탄티노플은 제국의 수도이자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흑해가 지중해로 빠져 나오는 보스포루스 해협 왼편의 조그마한 반도에 위치한 콘스탄티노플은 육지로는 3중의 성벽으로 보호되고 있었으며 나머지 부분도 해안을 따라 지어진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육지부분의 외벽에는 무수한 고탑(高塔)과 함께 10개의 거대한 문이 있었다.

이때의 동로마 ‘제국’은 참담할 정도로 축소되어 있었다. 콘스탄티노플 밖 수 km정도, 에게해의 몇몇 군도, 그리고 그리스 펠로포네수스 반도의 몇몇 요새밖에 없었다. 제국의 영토였던 곳은 모두 투르크가 차지한 뒤였고 이제 새로이 술탄으로 등극한 메흐메트 2세는 수 없는 공격에도 무너지지 않던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킴으로써 자신의 위상을 드높이려 하였다. 여러 방향에서 포위당한 콘스탄티노플이 무너지지 않고 있었던 이유는 제노바와의 협약을 맺고 흑해의 무역기지들로부터 지속적인 해상보급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메흐메트는 콘스탄티노플의 북쪽과 아시아쪽 대안(對岸)에 요새를 지어 콘스탄티노플의 보급로를 끊으려 하였다. 콘스탄티노플을 1,000년이 넘게 지켜준 것은 4세기중반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지어놓은 두터운 성벽이었는데 메흐메트는 헝가리 출신의 대포 기술자인 우르바노스를 고용하여 ‘바실리카’라는 거대한 공성포를 제조하여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을 공략할 무기까지 확보하였다. 비록 250kg의 철탄(鐵彈)과 화약을 장전하는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하루에고작 7번밖에 발사할 수는 없었지만 이 무지막지한 철탄은 석벽으로서는 도저히 막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로 인하여 콘스탄티노플은 종말에 한 발자국 더 가까이 서게 되었다.

다급해진 동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는 가톨릭 교황 니콜라오 5세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 대가로 교황은 동로마가 바티칸의 권위에 복종할 것을 요구하였고 비록 내부에서의 반대가 심했지만 콘스탄티누스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콘스탄티누스가 그의 조건을 받아들이자 이에 고무된 니콜라오 5세는 서유럽 국가들에게 동로마를 도울 것을 종용하였으나 그렇지 않아도 교회의 간섭을 매우 귀찮게 여기던 왕과 영주들은 아무도 도움을 주지 않았다. 결국 동로마를 1000년간이나 지탱해온 정교회를 가톨릭에 복속시키면서까지 서유럽의 도움을 바랐지만 받은 것은 고작 궁수 200명이었다. 동로마에게 보다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한 것은 제노바 출신의 용병대장인 죠반니 지우스티니아니(Giovanni Giustiniani)였다. 지우스티니아니는 공성전에 맞서는 방어전의 전문가로 유럽에서 이름이 드높았고 1453년 1월에 용병 700명을 데리고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하였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그에게 즉시 콘스탄티노플의 방어에 대한 전권을 주었다. 아울러 콘스탄티누스 11세는 1204년에 4차 십자군이 황금곶 방향에서 해안성벽을 뚫고 콘스탄티노플에 난입하였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하여 황금곶 입구를 거대한 사슬로 막아 투르크 함선이 진입하지 못하게 막았다. 육지의 외벽 중 가장 앞쪽으로 튀어나와 있어 취약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블라케르나에(Blachernae)부분을 집중적으로 보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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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터키에서 만들어진 대포. 콘스탄티노플 공격에 사용된 ‘바실리카’와 비슷한 유형이다.



전투는 메흐메트 2세가 2만의 비정규 병력(바시-바주크)와 7만의 정규군을 거느리고 1453년 4월 6일에 콘스탄티노플 앞에 도착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메흐메트는 직접적인 공격을 하지않고, 가지고 온 대포로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을 포격하여 부수는 일에 집중하였다. 이 예비 포격은 열흘을 넘겨 계속되었고 마침내 4월 18일에 성벽이 충분히 약해졌을 것이라고 생각한 메흐메트 2세는 총공격을 명하였다. 공성포의 포격으로 인하여 성벽에 약간의 틈이 생겼지만 많은 수의 병사들이 일시에 진입하기에는 너무 좁았고 투르크의 첫 공격은 200명의 사상자만 내고 수월히 격퇴되었다. 4월 20일에는 제노바에서 온 수송함대가 다르다넬스 해협을 순시하던 투르크 함선들의 수비를 뚫고 황금곶에 진입하는데 성공하였다. 이에 메흐메트는 황금곶을 가로막는 거대한 사슬을 무력화시킬 방법을 찾았고 결국 해협에서 시작하여 약 2km에 이르는 목재도로를 만든 후 그 길 위로 함선들을 올려 황금곶으로 날랐다. 황금곶에 들어온 투르크 함선들은 직접적인 위협은 안 되었지만 이로서 콘스탄티노플의 보급은 큰 차질을 빚게 되었다.

초반 공격에 실패한 메흐메트 2세는 다시 포격을 명하였고 5월 6일에는 성(聖) 로마누스의 문(門) 근방의 성벽이 포격에 무너졌다. 이 지점은 리쿠스 강(江)이 콘스탄티노플안으로 흘러드는 지점이어서 블라케르나에와 함께 성벽의 취약지점이었다. 이 부분이 무너지자 지우스티니아니는 성벽을 다시 짓는 것을 포기하고 무너진 지점 약간 뒤에 새 벽을 쌓았다. 다음 날 2만 5000의 투르크군에 의한 일제 공격이 이어졌으나 불과 3시간의 전투 후 무수한 시신을 남겨두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투르크군의 포격은 다시 블라케르나에에 집중되었고 5월 12일에 이 구역의 성벽이 무너졌다. 콘스탄티노플은 함락될 위기에 처했으나 콘스탄티누스 11세가 그의 근위대를 이끌고 직접 방어에 나섰고 투르크의 공격을 다시 한 번 격퇴하였다.

성벽에 대한 직접 공격에 실패한 메흐메트는 그의 군사들에게 성벽 밑을 파서 무너뜨릴 것을 명령하였다. 땅을 파서 성벽을 무너뜨리는 것은 공성전에서 상당히 자주 쓰이는 방법이다. 공성전에서 자주 쓰인다는 것은 수비측도 이를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 마침 콘스탄티노플에는 방어전의 대가인 지우스티니아니뿐만 아니라 탁월한 공성기술자인 요한 그랜트(Johannes Grant)가 있었다. 원래는 독일인이라고 알려졌으나 최근의 연구에 의하여 스코틀랜드 출신 존 그랜트(John Grant)임이 유력시되고 있는 이 천재 기술자는 여러 가지 방법을 응용하여 투르크군이 굴을 파고 있는 위치를 밝혀냈고 온갖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투르크의 땅굴공격을 좌절시켰다. 맞은편에서 땅굴을 판 다음 병사들을 투입하여 투르크 인부들을 죽이거나 위에서 구멍을 내서 액체 화약인 그리스의 불(Greek Fire)를 붓고 불을 붙이고, 또는 투르크군이 굴을 파고 있는 지점 바로 밑으로 굴을 파서 투르크군의 굴을 붕괴시켰다. 심지어 투르크군이 파고 있는 땅굴에 물길을 끌어와서 투르크 인부들을 익사시키는가 하면 땅굴에 불붙은 화약덩이를 던져 인부들을 폭사시켰다. 기록에 의하면 투르크군은 무려 14개의 갱도를 팠지만 그랜트의 활약 때문에 하나도 성공시키지 못하였다.

투르크군은 방법을 바꾸어 거대한 누차(樓車)를 만들어 성벽을 위에서부터 공격하려 하였다. 이번에는 콘스탄티노플 외벽의 최북단인 카리시우스 문을 공격지점으로 삼았다. 카리시우스문 역시 투르크군의 포격으로 약화된 상태였고 투르크군은 누차를 밀어 외벽 밖의 해자(垓字)에 접근한 다음 누차에 탄 병사들이 수비병들을 향해 화살을 날리게 하였다. 이로서 해자를 건너는 투르크 보병들은 성벽 가까이에 접근할 수 있었다. 튼튼하게 지어진 누차는 화살과 동로마군이 보유한 소형포로는 끄덕도 하지 않았다. 만약 이번 공격을 막지 못하면 다음 날에는 분명히 총공격이 이루어질 것이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성벽 밖으로 나가 누차를 공격할 결사대를 모았고 의외로 많은 인원이 모였다. 동로마군은 어둠이 깔리기를 기대려 누차 습격에 나섰다. 성을 지키기에도 급급한 수비군이 공격해 나오리라 예상치 못하고 있던 투르크군은 뜻밖의 공격에 당황하였고 결사대는 투르크 보초병들이 지키고 있던 지점을 돌파하여 누차를 향하여 불 붙인 그리스의 불 항아리를 던졌다. 그리스의 불로 공격당한 투르크의 누차는 걷잡을 수 없이 불탔고 투르크군이 불을 끄느라 정신없는 사이 수비군은 밤 세워 무너진 성벽과 탑을 수리하였다. 다음 날 아침, 카리시우스 문 근처의 성벽과 탑은 새로 만들어졌고 투르크군의 누차는 숯덩이가 되어 성벽 앞에 흉물스럽게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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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르크군을 향하여 돌격하는 콘스탄티누스 11세 (20세기 초반, 그리스)



식량이 부족하고 거의 두 달이 되도록 공격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동로마 수비군이 지쳤음은 말할 것도 없지만 공격하는 투르크군도 계속되는 실패로 인하여 지쳐가고 있었다. 마침내 메흐메트 2세는 참모들을 모아 공격을 계속할 것인지의 여부를 물었다. 일부는 손해가 자꾸만 쌓여가니 그만두자고 하였고 일부는 포기하면 술탄의 위신이 큰 타격을 입으니 계속해야 한다고 하였다. 메흐메트는 심사숙고 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공격해보고 만약 실패하면 물러나기로 하였다.

마지막 공격지점은 외부 성벽 중 가장 약한 곳, 리쿠스강이 흘러드는 지점이었다. 이전에도 한 번 공격이 있었고 그나마 가장 성공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투르크 진영에 숨어있던 동로마 첩자가 이를 황제에게 보고하였지만 동로마로서는 대비를 단단히 할 수 있을 뿐 더 이상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투르크의 ‘마지막’ 공격은 5월 29일 새벽 2시에 이어졌다. 다시 불량배 집단인 바시-바주크에 의한 육탄공격이 두 시간 동안 이어졌고 동로마 수비병들은 화살과 화약무기를 총동원하여 겨우 1차 돌격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1차 돌격이 좌절되자마자 정규병들에 의한 2차의 돌격이 이어졌고 수비병들은 쉴 틈 없이 다시 싸워야 했다. 2차의 돌격을 저지하는데 성공하였지만 잠도 자지 못한 수비병들은 거의 쓰러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는 메흐메트의 작전이었다. 2차 돌격이 실패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최정예 보병인 에니체리를 투입하였다. 수비병들은 몽롱한 상태에서 그야말로 정신없이 싸웠다. 놀랍게도 예니체리에 의한 3차돌격도 저지되었다.

투르크의 마지막 공격도 무위로 돌아가는 하였으나 블라케르나에 근처의 돌문(突門: sally gate, 수비병들이 성밖 기습을 위하여 출입하는 문)이 열린 채로 있었고 이를 본 일단의 투르크 병사들이 진입하여 근처의 탑을 점거하고 투르크군의 군기를 세웠다. 콘스탄티노플의 탑에 투르크의 군기가 휘날리자 성벽이 뚫렸다는 소문이 수비 병력 사이에 걷잡을 수 없이 퍼졌고 수비군의 사기는 급락하였다. 설상가상으로 방어전을 지휘하고 있던 용병대장 지우스티니아니가 투르크군의 사격에 중상을 입고 성 밖으로 옮겨졌다. 배로 옮겨진 지우스티니아니는 회복하지 못하고 며칠 후 바다를 건너던 중 배 안에서 사망하고 만다. 퍼지고 있던 소문과 지우스티니아니의 부상은 치명타였다. 사기가 떨어진 수비병들은 잘 싸우지 못하였고 투르크군의 4차 돌격이 이어졌다. 투르크군은 마침내 성벽을 돌파하여 성안으로 난입하였다. 제국의 운명이 다한 것을 안 콘스탄티누스는 치욕스럽게 살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의 근위대와 함께 성안으로 난입하고 있던 투르크군을 향하여 돌진하였다. 동로마는 이로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콘스탄티노플은 ‘이스탄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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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노플로 입성하는 메흐메트 2세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은 흔히 서양역사에서 ‘중세’를 마감하고 ‘근대’가 시작되는 하나의 상징적인 사건으로 간주된다. 중세 이전부터 역사를 이어오고 있었으며 비록 유산이긴 하지만 고전시대의 제도를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던 국가가 마침내 그 운명을 다했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노플을 돕기를 거부하였지만 투르크 세력을 물리칠 것으로 생각한 서방국가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마침내 동로마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는데 성공한 투르크의 군사력이 이제는 자신들에게 집중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1529년 투르크의 빈 공격이 좌절될 때까지는 이러한 우려가 현실로 나타났다. 그러나 15세기의 유럽은 8세기 아랍에 의한 콘스탄티노플 공격 때와는 달랐다. 비록 정치적으로 분열되어있기는 하지만 유럽이 이슬람과 군사적으로 대적할만한 힘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는 1571년 신성동맹(Holy League)의 연합해군이 레판토에서 투르크 해군을 크게 이기면서 증명이 되었다 1683년에 투르크는 빈을 다시 한 번 포위하였지만 폴란드와 독일이 힘을 합쳐 투르크군을 여지없이 무찔렀다. 오히려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은 동로마의 학문과 기술이 유럽으로 전해져 르네상스를 더욱 가속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로서 2000년 이어져온 로마의 역사는 끝이 나고 유럽은 서서히 교회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김성남 | 안보·전쟁사 전문가
글쓴이 김성남은 전쟁이 인간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 UC 버클리 동양학과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국제학 석사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에 진학하여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전쟁으로 보는 삼국지], [전쟁 세계사] 등이 있으며 공저로 [4세대 전쟁]이, 역서로 [원시전쟁: 평화로움으로 조작된 인간의 원초적인 역사]가 있다.


발행2012.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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