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백년전쟁(1) - 기사들의 황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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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25회 작성일 16-02-07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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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하로서 프랑스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던 잉글랜드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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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표


백년전쟁 개요

전쟁주체


잉글랜드(부르고뉴, 포르투갈, 독일 등의 지원) VS 프랑스(스코틀랜드, 웨일스, 카스티야 등의 지원)

전쟁시기


1337년-1453년

전쟁터


프랑스, 벨기에-룩셈부르크 등 저지대

주요전투


슬로이스 해전, 크레시 전투, 푸아티에 전투, 아쟁쿠르 전투, 오를레앙 전투, 카스티용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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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의 “3대 오해”



백년전쟁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세 가지의 오해가 있다. 첫째, 백년전쟁은 말 그대로 백 년 동안 벌어진 전쟁이 아니다. 둘째, 백년전쟁은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전쟁”이 아니다. 셋째, 백년전쟁에서 패배자는 동시에 승리자에게서 해방되었다.

백년전쟁이 1337년,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 왕위를 요구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하지만 실제로 두 나라 사이의 전쟁은 그 전에도 계속 벌어졌으며, 1453년에 카스티용 전투가 벌어지고 잉글랜드의 세력이 칼레를 제외한 프랑스 전역에서 축출된 뒤에도 분쟁은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1066년, 노르망디 공 윌리엄(윌리엄 1세)이 잉글랜드를 정복했을 때부터 1815년, 나폴레옹 전쟁이 끝날 때까지 두 나라는 사실상 “천년 전쟁”을 했다는 주장도 있다. 한편으로는 전쟁이 백 년이든 천 년이든 끊임없이 이어진 것이 아니고, 가장 길게는 20년이 넘도록 휴전하기도 하는 등 여러 주체가 여러 시기에 싸움을 벌였기 때문에 백년전쟁이라는 말은 역사가들이 만들어낸 말이라고도 한다.

또한 이 전쟁은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처럼 영국과 프랑스라는 두 국가가 서로 상대를 철저히 무릎 꿇리는 것을 목표로 벌인 전쟁이 아니었다. 일단 오늘날의 영국이라는 국가의 실체가 그때는 없었으며, 프랑스도 대체로 비슷했다. 잉글랜드는 에드워드 1세가 한때 스코틀랜드와 웨일스를 정복하여 “브리튼을 통일”했지만 진정한 통일은 이후 수백 년 동안 이루어지지 않았고, 전쟁이 그치지 않았다. 프랑스 역시 파리를 중심으로 하는 작은 땅덩이(일 드 프랑스)만 국왕의 직할지였고, 나머지는 여러 귀족들이 독립에 가까운 자치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므로 잉글랜드에 맞서서 스코틀랜드와 프랑스가 동맹을 맺고 싸우거나, 프랑스의 부르고뉴가 잉글랜드와 합작해서 프랑스 왕을 공격하는 일이 전쟁 내내 벌어졌다. 그러므로 이 전쟁은 “플랜태저넷 가문(잉글랜드)과 발루아 가문(프랑스)의 싸움”이라고 보아야 한다든지, 전쟁이 주로 프랑스 땅에서만 벌어졌고 잉글랜드 왕도 사실 프랑스의 귀족의 자격으로 전쟁을 벌였으므로 “프랑스 내전”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다.

그리고 전쟁의 마지막에 노르망디 공 윌리엄 이래 잉글랜드 왕실이 보유해 온 프랑스의 기엔(가스코뉴) 지방이 프랑스 왕의 손으로 들어감으로써, 오히려 잉글랜드 왕은 “프랑스 왕의 신하”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왕실과 귀족 차원에서는 프랑스의 왕이 잉글랜드 출신이 되든 스페인 출신이 되든 근본적으로 달라질 게 없었으나, “국가와 국민” 차원에서는 이로써 영국과 프랑스라는 두 나라의 경계가 확실히 그어진 것이었다. 그러므로 영국의 입장에서는 1453년이야말로 “명목적이든 실질적이든, 대륙 세력이 브리튼을 지배할 가능성이 최종적으로 소멸된” 해로써 기념할 만했다.



재앙과 불만은 전쟁을 희망으로



그래도 1337년이라는 기점이 특별한 것은, 이 전쟁이 프랑스 귀족의 일원으로서 프랑스 왕위를 탐낸 잉글랜드 왕의 야심 때문에 비롯되었다고 볼 여지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1328년, 프랑스의 샤를 4세가 후계자를 남기지 않고 죽었다. 당시 프랑스 법과 관행은 이럴 경우 누가 뒤를 이어야 하는지 구체적인 규정을 두지 않고 있었으므로, 샤를 4세의 누이인 이사벨과 에드워드 2세 사이의 아들인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 샤를 4세의 형제인 루이 10세의 사위인 필리프 데브루, 샤를 4세의 사촌인 필리프 드 발루아가 모두 왕위 계승 자격이 있었다. 그런데 당시 소집된 삼부회는 “여자 친족은 왕위 계승과 무관하다”는 옛 프랑크 시대의 법인 살리크 법전에 근거해 에드워드 3세와 필리프 데브루의 자격을 부정하고, 필리프 드 발루아에게 왕관을 씌워줌으로써(필리프 6세) 발루아 왕조를 출범시켰다. 이는 오랫동안 거론되지도 않던 케케묵은 법전을 핑계로 삼은 결정이었으므로, 에드워드 3세의 입장에서는 불만을 품을 만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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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3세



한편 잉글랜드에서는 계속해서 재앙이 일어나고, 정정이 불안하였다. 1315년에서 1321년까지의 흉년과 1326년의 홍수로 많은 농경지가 유실되고 백성의 살림은 피폐해져 있었으며, 당연히 왕실과 귀족의 수입도 줄어들었다. 이것이 스코틀랜드와 웨일스의 민족의식까지 겹쳐 잉글랜드에 대한 불만을 부채질했고, 잉글랜드의 귀족들도 불만이 팽배하여 반란과 내전, 반역 음모 등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국왕으로서는 어디 외국을 정복하여 귀족과 평민의 배고픔을 달래줄 물적 근거를 마련할 필요가, 적어도 전쟁을 통해 자신에게 자꾸만 겨누는 귀족들의 칼끝을 밖으로 돌리든지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전쟁의 가장 유력한 대상 후보는 프랑스일 수밖에 없었다. 지리적 가까움에다 왕위를 둘러싼 명분이 있었을 뿐 아니라, 브리튼 내부의 분쟁에 프랑스가 자꾸만 개입하고 있던 점도 고려의 대상이었다. 스코틀랜드는 프랑스와 1295년에 동맹을 맺었으며, 1334년에는 스코틀랜드의 데이비드 2세가 잉글랜드에 패배하고 프랑스로 망명하기도 했다. 게다가 부르고뉴의 포도주와 플랑드르의 직물은 잉글랜드 전체를 풍족하게 만들 만한 재원이었다. 따라서 브리튼의 안정을 위하여 프랑스에서 전쟁을 벌이며, 가능하면 프랑스 왕위까지 손에 넣는다는 것이 에드워드 3세로서는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구상이었다.



로빈 후드, 롤랑에 맞서다



그런데 당시 유럽의 보통 전략가라면 그런 구상에는 한 가지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고 말했을 것이다. 바로 잉글랜드가 프랑스에게 이길 턱이 없다는 것이었다. 당시 프랑스의 인구는 약 1600만. 반면 잉글랜드는 4백만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당시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하고 가장 숫자가 많은 기사들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그들은 하나같이 전쟁을 하고 싶어 좀이 쑤신 상태라서 왕이 소집령을 내리면 순식간에 수만 명의 기사들이 몰려들 정도였다(반면 잉글랜드는 기껏해야 1만 명이 좀 넘는 원정대를 보낼 수 있었으며, 그나마 기사는 그 중 일부에 불과했다). 그런 마당에, 더구나 적지에서 싸우는 전쟁에 어떻게 승리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잉글랜드에게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잉글랜드는 수십 년 동안 스코틀랜드 등과 치열한 전쟁을 벌이면서 전쟁 경험과 전략 전술을 갈고 닦을 수 있었다. 또한 영지인 가스코뉴는 물론 은밀히 잉글랜드와 내통하고 있던 플랑드르, 브레타뉴 등의 협력을 기대할 수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웨일스를 정복하면서 확보한 “장궁(long bow)”이 프랑스의 기사들에 맞설 강력한 무기였다. 길이가 2미터에 달하여 대부분의 궁수의 키보다 컸던 이 장궁은 약 2백 미터 밖에서 발사하여 기사의 철판 갑옷을 꿰뚫을 수 있었으며, 기사와 말을 한 번에 죽이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또 파괴력에서는 뒤지지 않았던 석궁의 경우 1발당 발사 소요시간이 오래 걸렸던 반면, 장궁은 훈련된 궁수라면 1분에 15발이나 발사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웨일스 정복 당시 이 장궁의 위력에 혼쭐이 났던 에드워드 1세는 이후 장궁 궁술을 “국민 스포츠”로 장려하여 전국적으로 활쏘기 시합을 열게 했으며, 40실링 이상 수입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장궁과 화살을 갖추고 있도록 했다. 이런 활쏘기 시합에서 상대가 정중앙에 명중시킨 화살을 반으로 쪼개며 명중시킨 명궁수가 바로 전설의 로빈 후드라고 한다. 아무튼 에드워드 3세가 1337년에 프랑스 왕위를 요구함으로써 “전쟁을 시작”했을 때, 그는 프랑스 쪽에 전설의 롤랑이나 랑슬로 같은 뛰어난 기사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자신에게는 그들의 갑옷을 멀리서 뚫어버릴 수 있는 로빈 후드 같은 명궁들이 있다며 자신하고 있었을 것이다.



영광의 에드워드



전쟁의 처음 몇 해는 프랑스가 유리하리라던 관측이 맞아떨어지는 듯했다. 에드워드가 기대했던 플랑드르의 협력자들은 프랑스군에게 몇 차례 당하더니 바로 잉글랜드에 등을 돌려 버렸고, 신성로마 제국과의 동맹도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한편 이들을 회유하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퍼부은 탓에 잉글랜드의 재정은 전쟁을 시작하자마자 바닥날 위기에 처했다. 또한 바다에서는 제노바 함대의 지원을 받은 프랑스 함대가 잉글랜드 선단을 밀어붙였으며, 잉글랜드의 해안까지 출몰하여 해안 도시를 노략질함으로써 일대 공포를 안겨주었다.

그러나 1340년, 네덜란드의 슬로이스 앞바다에서 펼쳐진 해전에서 프랑스 함대가 거의 전멸함으로써 승리의 바람은 잉글랜드 쪽으로 불기 시작한다. 1341년에는 브레타뉴에서 브레타뉴 계승 전쟁이 일어나면서 프랑스군의 주의를 분산시켰다. 그리하여 에드워드는 마침내 1346년, 4천 명의 기사와 1만 명의 궁수들을 거느리고 노르망디에 상륙했다. 당시 노르망디는 여러 세대 동안 전쟁을 겪지 않아 방어태세가 미비했기 때문에 잉글랜드군은 거침없이 진격할 수 있었다. 에드워드는 북부 프랑스를 유린한 다음 플랑드르로 들어갈 생각이었는데, 세느 강의 다리가 뜻밖에 끊겨 있어서 자칫하면 추적하던 적군에게 전멸될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침착하게 탈출하는 데 성공했으며, 8월 26일에는 칼레 남쪽의 크레시에 진을 치고 쫓아오던 프랑스군에게 반격할 준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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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시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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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시 전투도



크레시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은 1만 2천이었고, 이들을 단숨에 짓밟으려고 몰려오던 프랑스군은 3만 내지 4만에 달했다. 누가 봐도 프랑스군의 낙승이 점쳐졌다. 그러나 잉글랜드군은 산등성이에서 긴 대열을 지어 좁은 길을 돌아오는 프랑스군을 침착하게 내려다보고 있었고, 장궁 부대는 일렬로 늘어서서 발 옆에는 수십 발의 화살을 꽂아둔 채 적군이 사정거리에 들기만 하면 곧바로 사격할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마침내 수적 우위를 믿은 프랑스군의 기사들이 말발굽으로 지축을 뒤흔들며 잉글랜드군에게 돌격하자, “하늘을 메울 듯한” 화살의 비가 그들에게 쏟아져 내렸다. 사슬갑옷이고 철갑옷이고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장난감처럼 픽픽 쓰러지는 동료들을 보며 넋이 나간 프랑스 기사들을 더욱 겁에 질리게 한 것은 적진에서 일제히 불을 뿜은 대포였다. 당시의 대포는 아직 살상력이 대단치 않았으나, 그 천둥 같은 소리는 확실히 전의를 떨어트리는 효과가 있었다. 프랑스군은 지형에 따른 대형 편성에서도 실패했다. 군대를 셋으로 나누어 긴 대형으로 행군하다 보니 부대간 거리가 멀리 떨어져서, 앞선 부대가 도륙을 당하는데도 후속 부대는 멋모르고 뒤따라 도살장에 도착했던 것이다. 옆으로 도망치는 것도 쉽지 않아 이를 악물고 전진하는 가운데, 잉글랜드의 장궁대는 마치 맨몸으로 돌격하는 인디언들을 향한 기관포처럼 프랑스군을 싹쓸어버렸다.

이 전투로 프랑스군은 잉글랜드군에 대항할 힘을 잃어버렸고, 에드워드는 거침없이 북상하여 해협의 요충지인 칼레를 포위했다. 전설에 따르면 도시가 함락되자 그는 시민들을 대량 학살하려 했으나, 시장을 비롯한 시민 대표 6명이 스스로 목에 밧줄을 감고 에드워드 앞에 나타나 “우리를 죽이시고 시민들은 살려주소서”라고 애원했다고 한다. 덕분에 칼레는 학살을 면했지만, 이후 백년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공포 효과 등을 노린 대량학살은 여러 차례 벌어졌다. 나중에는 탈주병이나 패잔병 등이 도적으로 돌변해 자국 국민들을 약탈하는 경우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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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레의 시민], 오귀스트 로댕 작(1889)



이로써 전세가 기운 듯 했지만 잉글랜드는 이후 7년여 동안 추가적인 공세를 취하지 않았는데, 잉글랜드에 페스트가 유행했기 때문이다. 이는 몇 년 동안 브리튼 전역을 공포로 몰아넣으며 수백만의 인구를 줄였다고 한다. 이런 예기치 않은 타격을 입고 에드워드가 몸을 사리는 동안, 프랑스는 삼부회를 열고 세금의 증설과 군의 재정비를 추진했으나 서로 다른 입장들 때문에 별로 효과가 없었다. 마침내 1355년, 에드워드는 다시 프랑스에 상륙했다. 그의 옆에는 어린 나이임에도 크레시 전투에서 용맹을 떨쳤던 에드워드 태자, 항상 검은 갑옷을 입어서 “에드워드 흑태자”라 불리던 태자가 늠름하게 나란히 말을 몰고 있었다. 그 사이에 필리프 6세를 대신해 왕위에 오른 장 2세는 에드워드에게 정면으로 맞서는 대신 “청야 전술”을 벌이며 적의 보급이 바닥나기를 기다리는 전술을 취했으나, 에드워드는 북쪽의 노르망디와 남서쪽의 보르도를 하나로 이음으로써 프랑스를 두 동강내고 장기전에 대비하기로 하고는 흑태자에게 그 임무를 맡겼다. 흑태자는 푸아티에에서 장 2세가 이끄는 프랑스군과 마주쳤으며, 크레시 때처럼 병력은 프랑스가 훨씬 많았음에도 매복 전술을 적절히 사용하여 적군을 격파했다. 이로써 프랑스는 잉글랜드에 대항할 힘을 잃었고, 설상가상으로 장 2세가 포로로 잡혀 버려 전쟁 수행의 구심점마저 잃었다. 의기양양해진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왕위계승의 성지였던 랭스까지 당당히 기마행진을 벌이며 위력을 과시했다. 결국 1360년, 브레타니-칼레 조약이 맺어짐으로써 백년전쟁은 그 제1막을 내렸다. 조약의 내용은 에드워드가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일단 포기하되, 프랑스는 보르도 지역을 프랑스 왕의 종주권을 배제하는 잉글랜드의 영토로 할양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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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규진 | 서울교육대학교 교수/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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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2.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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