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에스파냐의 아즈텍 정복 전쟁(2) - 전쟁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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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64회 작성일 16-02-07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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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에 그려진 테노치티틀란 점령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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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표


에스파냐의 아즈텍 정복 전쟁 개요

전쟁주체


에스파냐 (코르테스/쿠바총독부), 아즈텍 제국, 틀락스칼라

전쟁시기


1519년-1521년

전쟁터


현재의 멕시코 베라크루즈-멕시코 시티

주요전투


촐로란, 라노케 트리스테, 테노치티틀란 공방전






관련링크

에스파냐의 아즈텍 정복 전쟁(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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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크테주마와 코르테스



에르난 코르테스를 동행하였던 에스파냐 군인 베르날 디아즈(Bernal Diaz)가 정복전쟁이 완료된 후 정리한 [新 에스파냐 정복에 대한 진정한 역사(La Historia verdadera de la conquista de la Nueva España)]에 의하면 에스파냐 병사들이 도착하기 전에 아즈텍 제국에서는 이상한 징조들이 나타났다고 한다.

하늘에서 불덩이가 떨어지고 위칠로포츠틀리의 사원에 불이 나 불타 없어지고 불의 신(火神)인 치우테쿠흐틀리의 사원에 벼락이 떨어져 사원이 부서졌다. 남자가 밝은 대낮에 해를 바라보면서 자위(自慰)를 하는가 하면 테노치티틀란 근처의 호수물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어떤 여자가 한 밤중에 도망갈 수 있을 때 도망가라고 외치며 흐느꼈고 머리 두 개 달린 남자가 테노치티틀란 시내를 뛰어다녔다. 그리고 황제 모크테주마 2세는 거울을 보다가 전사들의 환영을 보았다.

이러한 징조는 세계 다른 나라에서 망국 직전에 일어났던 징조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즉 그 나라의 멸망은 이미 예정되어있었으며 후세인(後世人)들에 의하여 부덕한 군주에 대한 하늘의 경고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아즈텍 제국에 일어났다는 이러한 징조들은 대부분 에스파냐인들에 의하여 아즈텍 제국은 응당 망했어야 했다는 정당화의 차원에서 거론된다. 이러한 징조들이 일어났는지도 확실치 않고 일어났더라도 아즈텍 제국의 멸망과는 별반 상관이 없다.

코르테스가 수도인 테노치티틀란에 도착하였을 때 아즈텍 제국은 썩어서 망하기 직전의 국가도 아니었으며 쇠락의 기미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건국한지 200년도 채 지나지 않았으며 황제 모크테주마 2세는 유약하고 우유부단한 늙은 왕이 아니라 선조들과 마찬가지로 주변 지역에 대한 정력적인 정복활동을 벌인 강한 군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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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즈텍 제국 전성기 영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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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노치티틀란 상상도



아즈텍인들이 코르테스를 ‘케찰코아틀’의 재현(再現)이라고 여겨 제대로 대응을 못했다는 주장 역시 근거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아즈텍인들과 같은 나우아 계통인 틀락스칼라족은 코르테스가 신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고 아즈텍인들 역시 에스파냐를 타라스칸이나 틀락스칼라 같은 ‘외부인’으로 여겼을 뿐, 아즈텍인들이 남긴 구전이나 기록 그 어디에도 코르테스를 ‘돌아온 케찰코아틀’로 여겼다는 증거는 없다. 위의 이야기는 아즈텍이 멸망한 후 에스파냐인들이 지어낸 것이다.

황제 모크테주마는 코르테스를 처음 만났을 때 그의 배를 보여주며, ‘그대와 같이 나도 인간의 피가 흐르고 있노라’라고 하여, 코르테스가 신이 아닌 인간임을 알고 있었다. 아즈텍인들이 에스파냐인들이 어쩌지를 못했던 것은 에스파냐인들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정확히 어떠한 대상인지 몰랐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촐롤란인들을 부추겨 에스파냐인들을 죽이려 한 시도가 실패한 뒤에 어떻게 할 것인지를 고심하였다. 코르테스를 맞기 전 모크테주마(원래의 명칭은 “모쿠테조마”이지만 여기서는 잘 알려진 모크테주마를 사용한다)는 고위 귀족들과 고참 전사들과 함께 에스파냐인들을 맞아들일지 말지의 여부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 일부 귀족들은 강대한 외부인들을 도성으로 끌어들이는데 반대하였지만 일단 에스파냐인들에 대한 공격시도가 실패하였으니 이들을 일단 테노치티틀란으로 끌어들이면 뜻대로 할 수 있다는 의견이 대세가 되면서 에스파냐인들은 테노치티틀란 남쪽 익스타팔라판에서 호수위로 쌓은 둑길을 건너 1519년 11월 8일에 테노치티틀란으로 입성한다.



두 세계의 만남, 아즈텍과 에스파냐



아즈텍 멸망 이후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베르나르디노 데-사하군(Bernardino de Sahagun) 수사가 아즈텍 사관(史官)들의 구전 역사를 모아 만든 [新 에스파냐 역사총서(La Historia General de las Cosas de Nueva Espana)], 소위 피렌체 사본(Florentine Codex)에 의하면 모크테주마는 자신의 궁전에서 나와 둑길에서 코르테스를 맞아들이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고 한다.



“우리의 주인이시여, 우리의 땅에 오셨음을 다시 기뻐하며 환영합니다. 메치코(멕시코)의 산과 물에 대하여 궁금하셔서, 그리고 제가 잠시 맡아놓고 있는 그대의 권좌에 앉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하지만 이는 아즈텍인들이 에스파냐인들을 신으로 맞아들였다는 것을 정당화시키는 기록일 뿐이다. 다른 기록에 의하면 모크테주마는 태양왕으로서 매우 오만하게 행동하였다고 한다. 그는 다른 나라의 황제들이나 왕들과 다르지 않았으며 자신을 그의 백성과 다른 존재로 보았다. 일반인들은 그를 만질 수 조차 없었고 식사할 때도 사람들과 같이 먹는 것이 아니라 발을 드리우고 그 뒤에서 따로 식사하였다. 물론 그 이전의 황제들은 모크테주마와 같은 특권이 없었으며 모크테주마의 ‘특권’은 사실 모크테주마가 자신의 권력을 다지기 위하여 새로이 만들어놓은 것이었다. 즉 이전의 황제들이 ‘귀족들의 우두머리’에 불과했다면 모크테주마 2세는 진정한 황권(皇權)을 다지기 위하여 황제를 보다 신성한 존재로 만들려고 하였다. 이러한 모크테주마 2세가 자신 스스로의 권위를 깎아 내리면서 코르테스를 ‘신’으로 받들었다는 것은 신용하기가 어렵다.

앞서 말하였듯이 에스파냐 병사들은 테노치티틀란에 입성하면서 그 규모와 함께 시장의 모습에 압도당하였다. 당시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큰 도시였던 그라나다와 리스본의 인구가 7만정도에 불과하였으니 인구 20만이 1350헥타르의 면적에 모여사는 대도시인 테노치티틀란을 보고 놀라는 것은 당연하였다. 그러나 에스파냐인들을 맞아들이는 아즈텍인들의 관점에서도 신기한 것이 있었고 특히 에스파냐인들이 타고 있는 말은 아즈텍인들에게 신기함과 함께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총, 균, 쇠]의 저자인 제레드 다이아몬드(Jared Diamond)에 의하면 구대륙(유라시아)와 신대륙(아메리카)사람들이 만났을 때 아메리카에는 소수의 라마나 구아나코 등을 제외하고는 사육하는 동물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식용으로 작은 개나 다른 동물을 키우기는 하여도 기승(騎乘)이 가능하거나 많은 짐을 실어나르는 운송의 용도로 쓰이는 짐승이 없었다. 그러나 세계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도시의 규모는 해당 도시와 다른 도시를 연결하는 교통/도로망의 규모에 비례한다. 테노치티틀란의 인구가 20만인데 비하여 이베리아 반도에 7만을 넘는 도시가 없었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에서 당시 아즈텍 제국의 교통망이 소위 ‘정복자’들의 고향인 이베리아 보다 우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운송용의 수레나 동물이 없는 상태에서 이러한 교통망은 모두 인력(人力)으로 유지되었다. 과거 로마나 몽골, 조선시대의 도로와 같이 아즈텍의 도로에는 역(Station)들이 있었으며 여행자들은 이러한 역에서 쉬면서 식사하고 화장실을 다녀왔다. 인력만으로써 멕시코만에서 태평양 연안까지 이어진 교통망을 유지할 수 있었기에 아즈텍인들은 특별히 짐승들을 길들일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그들이 에스파냐인들의 말을 처음보았을 때 그 충격은 대단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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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즈텍 사관(史官)들의 구전 역사를 모아 만든 ‘피렌체 사본(Florentine Codex)’ 속 ‘꽃의 축제’ 삽화





“그들의 사슴이 병사들을 태우고 앞으로 나왔다. 병사들은 면갑(綿甲)을 입었고 손에는 가죽 방패와 쇠로 된 창을 들고 있었다. 그들의 검(劍)은 사슴들의 말에 걸려 있었다 (…) 이 사슴들이 뛸 때는 큰 소리가 난다. 마치 돌덩이의 비가 땅에 떨어지는 것과 같은 소리이다. 발굽으로 땅을 딛으면 땅에 큰 상처와 구덩이가 생긴다. 발굽이 닿는 곳마다 땅이 마구 갈라진다...”

모크테주마 2세는 일단 에스파냐인들과 함께 테노치티틀란에 들어온 3000명의 기타 부족 전사들을 부왕(父王)이었던 아야차카틀의 궁으로 보냈다. 기록에 의하면 코르테스는 모크테주마에게 에스파냐 왕인 카를 5세에 대한 충성의 증거로 황금을 요구하였으며 테노치티틀란의 주(主)신전에서 아즈텍의 신상(神像)을 뜯어내고 성모상(聖母像)과 성 크리스토발의 상을 놓으라고 하였다. 모크테주마는 이러한 요구를 모두 들어주었고 이 때문에 백성들과 귀족들의 원성을 샀다고 전해진다. 코르테스의 병사들은 대개 에스파냐와 쿠바에 있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 엄청난 보물을 약속한 코르테스의 말을 믿고 테노치티틀란으로 온 사람들이었다. 이들에게는 문명인으로서 ‘문명’을 전파하는 것보다, 그리고 가톨릭 신자로서 그들의 신앙을 퍼뜨리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많은 보물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가 떵떵거리면서 사는 것이었다. 결국 코르테스는 모크테주마의 환대에도 아랑곳없이 혹시라도 테노치티틀란의 아즈텍인들이 그들을 공격할 것을 두려워하였고 이를 막기 위하여 가장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하였다. 바로 궁정쿠데타를 일으켜 황제인 모크테주마를 인질로 잡는 것이었다. 모크테주마의 시종들과 시위(侍衛)들이 이를 막으려 하였지만 강철갑옷에 큰 칼로 무장한 에스파냐 병사들을 막을 수가 없었다. 코르테스는 모크테주마를 사로잡고 그에게 다시 엄청난 양의 황금을 요구하였다.



모크테주마의 죽음와 ‘슬픔의 밤’



모크테주마를 인질로 잡은 것은 이후 에스파냐인들이 모크테주마를 통하여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주게 하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그러나 군사적인 효과도 있었으니 일단 아즈텍 전사들이 함부로 황제가 있는 궁전을 공격할 수 없었고, 아울러 황제를 굶겨 죽일 수도 없기에 궁전을 포위하여 굶겨 죽이는 작전을 구사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에스파냐군과 함께 입성한 수천 명의 틀락스칼라 전사들까지 먹여야 되는 상황에서 테노치티틀란 시민들의 불만은 점차 고조되고 있었다.

한편 모크테주마의 궁전에 있던 코르테스에게 이 시점에서 또 다른 문제가 생겼으니, 코르테스는 그의 상관이었던 쿠바 총독 벨라스케즈가 코르테스를 체포하기 위하여 부하인 판피요 나르바에즈(Panfilo de Narvaez)에게 원정대를 딸려 보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코르테스는 일단 나르바에즈와 장거리 협상을 하는 척하면서 전령들에게 아즈텍 제국에 가득한 황금과 보물에 대한 소문을 흘리게 하여 나르바에즈의 원정대 병사들 사이에 동요를 일으키려 하였다. 몇 개월 이후 때가 무르익었다고 생각한 코르테스는 부하인 알바라도(Pedro de Alvarado)에게 궁전의 수비를 맡긴 다음 250명을 이끌고 나르바에즈와 싸우러 떠났다. 코르테스가 흘린 소식 때문에 나르바에즈의 병사들은 싸움에 적극적이지 않았고 싸움도 오래가지 않았다. 나르바에즈의 병력은 900명이었지만 코르테스가 밤에 야습을 하여 나르바에즈를 공격하자 그 병사들은 그대로 항복하였고 나르바에즈는 어두운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나르바에즈의 병력 대부분은 코르테스에게 충성을 맹세하였고 다시 테노치티틀란으로 돌아갈 코르테스의 휘하에는 1100명의 병력이 있게 되었다.

코르테스가 나르바에즈와 싸우러 간 사이 테노치티틀란에서는 큰 사단이 일어났다. 수비를 맡고 있던 알바라도가 축제를 위하여 사람들이 모이자 이들을 공격하였고 대학살극이 벌어진 것이다. 축제를 위하여 모인 사람들이 공격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였는지, 아니면 어차피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아즈텍의 전사들을 죽여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정복 후 남은 원주민들의 구전에 알바라도가 자행한 학살의 생생한 모습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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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테즈의 부장 알바라도. ‘슬픔의 밤’ 전투의 원인이 된 대학살극을 주도하였다.





“그들은 춤추는 자들 사이에 난입하여 북이 울리고 있는 곳으로 밀고 들어갔다. 그리고 고수(鼓手)를 공격하였고 그의 팔을 잘라버렸다. 그 다음에는 고수의 목을 베었고 북치던 자의 머리가 바닥으로 굴러갔다.


그 다음에는 축제에 왔던 자들을 가리지 않고 공격하였다. 칼로 찌르고 창으로 찌르고 검으로 내리쳤다. 어떤 자들은 뒤에서 공격 당하였고 바로 창자를 쏟으면서 쓰러졌다. 다른 자들은 머리를 자르고 잘린 머리를 여러 조각내었다.


다른 자들은 어깻죽지를 내려쳐 그 팔이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에스파냐군은) 또 다른 사람들의 허벅지를 베고 그 종아리도 벴다. 또 어떤 자들은 배를 갈랐는데 이들의 창자가 땅 위에 쏟아졌다. 공격 당한 자중에는 달아나는 자도 있었는데 창자를 땅에 질질 끌고 갔고 어떤 자는 창자에 발이 걸렸다. 그러나 어떠한 방법으로 달아나려 해도 무사히 달아날 수가 없었다”


사실 이때 죽은 자들 중에는 아즈텍의 고위 전사들과 귀족들이 많았기에 아즈텍군의 지휘체계가 엉망이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알바라도의 공격과 학살로 인하여 그렇지 않아도 아슬아슬하던 아즈텍인들과 에스파냐군과의 관계는 완전히 틀어지고 코르테스가 돌아왔을 때 인질로 잡혀있는 모크테주마조차 에스파냐군과 협력하기를 거부하였다. 모크테주마는 이때 그의 동생인 쿠잇라후악을 풀어준다면 궁전 밖의 백성들이 이를 선의(善意)로 받아들이고 무기를 내려놓을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코르타즈가 쿠이라후악을 풀어주자 마자 쿠잇라후악이 황제로 등극하였고 에스파냐군에 대한 총공격이 이어졌다.

에스파냐군의 대포와 강철 무기는 아즈텍 전사들에 대한 우위를 보장하여주었지만 아즈텍 전사들의 수는 너무 많았다. 아즈텍군의 인해전술이 밀려 궁전의 외벽이 점령당하고 에스파냐군은 점차 좁은 궁지로 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에스파냐군 병사들 중 다치지 않은 자가 없었다. 모크테주마를 이용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의미가 없었지만 마지막으로 그를 종용하여 백성들과 전사들 앞에 나서게 하였다. 모크테주마는 만약 에스파냐군에게 길을 열어준다면 에스파냐군은 테노치티틀란을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미 분노한 전사들 중에서 더 이상 모크테주마의 명령을 듣고 싶은 자는 없었다. 전사들과 백성들은 모크테주마를 향하여 돌을 무수히 던져댔고 모크테주마는 무수히 날아오는 돌을 맞아 중상을 입었다. 결국 모크테주마는 3일후에 죽고 에스파냐군은 탈출하는 것 이외에는 살 길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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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 사본(Florentine Codex) 중 아즈텍 전사들 삽화



코르테스가 선택한 길은 길이가 가장 짧고 테노치티틀란에 들어오기 전, 우군으로 확보한 도시인 틀라코판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아즈텍군은 육지로 나가는 둑길에 장애물을 설치하고 에스파냐군을 막으려 하였고 에스파냐군은 장애물이 설치된 곳마다 치열한 전투를 벌여 아즈텍 전사들을 물리치고 장애물을 허문다음 다음 장애물로 이동하는 식의 힘겨운 전투를 벌였다. 궁전에서 나와 둑길입구까지 가는 데만 이틀이 걸렸다. 가는 도중에 있는 운하에 있는 다리들은 모두 아즈텍인들이 부수어버린 뒤였고 이 때문에 장애물을 허물로 이를 다리가 있던 자리로 밀어넣어 다리를 만드는 식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이전에 무어인들과 싸웠던 병사들 조차 이처럼 사납고 완강한 적을 본 적이 없다고 하였다. 이탈리아 전쟁에서 싸웠던 노련한 군인들도 이 인디오들보다 차라리 프랑스왕의 대포와 맞닥뜨리는 것이 쉬울 것이라고 할 정도였다.”

한참 싸우고 있던 와중에 아즈텍인들이 갑자기 휴전을 제안했다. 에스파냐인들이 잡고 있는 고위사제를 풀어주면 싸움을 멈추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에스파냐인들이 고위사제를 풀어주자 마자 공격을 다시 시작되었다. 아즈텍인들은 싸움을 멈추려던 것이 아니라 황위에 오른 쿠잇라후악의 공식 등극에 필요한 의식을 위하여 사제를 원했던 것이다. 결국 재개된 공격에 밀려 에스파냐군은 다시 궁전으로 후퇴하였다. 코르테스는 병사들에게 목재로 임시교량을 만들게 한 다음 둑길로 다시 싸우면서 나아갔고 둑길이 끊겨진 위로 교량을 놓았다. 그 다음 알바라도의 지휘하에 150명의 병사로 하여금 후위를 지키게 한 다음 생존자들을 건너게 하였다. 그리고는 끊겨진 곳으로 나아가 대포와 활의 사격으로 맞은 편의 아즈텍 전사들을 흩트리고 다시 건넜다. 이 방법은 단순하지만 효과적이어서 에스파냐군이 무사히 탈출할 수 있을 듯싶었으나 황금에 눈이 어두운 에스파냐군은 너무 많은 보물을 몸에 지니고 있었고 이 때문에 탈출속도가 늦어지면서 더 많은 아즈텍군과 싸워야 했다. 수월할 수도 있던 탈출은 악전고투로 변하였고 이 과정에서 에스파냐군 1100명중 600명이, 틀락스칼라 전사 3000명중 2000명의 목숨이 사라졌다. 이 날의 전투는 이후 La Noche Triste, 즉 “슬픔의 밤”으로 불리게 된다.



틀락스칼라로의 후퇴와 재침공



테노치티틀란에서 간신히 빠져 나온 에스파냐군은 이번에는 주변의 아즈텍 동맹세력에게 쫓겨야 했다. 여기에 테노치티틀란에게 추격해온 병력까지 겹치면서 에스파냐군은 전멸의 위기에 몰렸다. 만약 계속하여 소규모 접전으로 에스파냐군에게 쉴 틈을 주지 않고 공격하였더라면 전멸하였을 것이나, 직접 추격군을 이끌고 나온 신임 황제 쿠잇라후악은 평원에서의 정면대결을 택하였다. 그러나 이는 커다란 실수였다. 시내에서의 좁은 공간에서는 기병의 위력이 발휘될 수 없었기에 아즈텍인들은 에스파냐인들의 기마병력을 과소평가하였다. 비록 스무 마리 정도밖에 남지 않았지만 에스파냐의 기병은 평원에서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였다. 하루 종일 싸우고도 오히려 아즈텍군은 에스파냐군에게 우위를 점할 수 없었고 결국 아즈텍군의 지휘관이었던 귀족이 에스파냐 기마병에게 격살당하였다. 쿠잇라후악은 서둘러 병력을 후퇴시켰고 코르테스와 에스파냐군 생존자들은 틀락스칼라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틀락스칼라에서 코르테스는 상처를 치료하며 그의 기지인 베라크루즈에 사람을 보내 자메이카에 배를 띄우라고 하였다. 탄약과 마필을 구입하기 위해서였다. 코르테스는 이처럼 잃어버린 군대를 다시 만드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이와 동시에 둑길에 의존하지 않기 위하여 13척의 소형선박을 건조하였다. 아울러 틀락스칼라와 함께 주변세력을 정리함과 동시에 보다 많은 동맹을 확보하였다. 매년 아즈텍의 인신공희에 멀쩡한 청년들을 빼앗기는 도시들은 역시 복수를 위하여 에스파냐-틀락스칼라의 편에 섰다.

한편 코르테스가 군대를 다시 만들고 있던 와중에 뜻밖의 일이 벌어졌는데 이전 나르바에즈의 원정대에 섞여있는 흑인 노예로부터 시작된 괴질이 퍼진 것이다. 이 괴질은 주변지역을 순식간에 휩쓸었고 이 병에 대한 면역이 없던 인디오들은 속수무책으로 죽어나갔다. 후일 천연두로 밝혀진 이 괴질에 인디오들의 마을과 도시들은 초토화되었고 마침내는 테노치티틀란으로 퍼져 아즈텍의 세력을 급격히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신임황제인 쿠잇라후악 역시 병사(病死)하고 모크테주마의 사위 중 한 명인 쿠아후테모크가 새로이 황제가 되었다.

1520년 12월, ‘슬픔의 밤’이 일어난 지 5개월 후, 코르테스는 군세(軍勢)가 완전히 회복되었다고 여기고 다시 군을 이끌고 나섰다. 일단 테노치티틀란을 둘러싸고 있는 테츠코코호(湖)의 주변도시들을 모두 점령하여 테노치티틀란에 대한 지원세력을 없앴다. 테츠코코호 주변이 정리된 후 코르테스는 1521년 4월경 기병 86기, 118명의 노병(弩兵), 700명의 보병, 그리고 5만의 틀락스칼라 지원군과 함께 테노치티틀란의 공격에 나섰다.

코르테스는 그의 군을 넷으로 나누어 두 개의 군은 그가 ‘슬픔의 밤’ 때 빠져 나왔던 타쿠바와 코요아칸을 점령하게 하고 나머지는 테노치티틀란 남쪽의 이츠타팔라파로 보냈다. 네 번째는 그가 만든 13척의 선박을 운영할 수병(水兵)들이었다. 코르테스는 이미 건조한 선박들을 해체하여 테노치티틀란 근처에서 다시 조립, 소규모의 함대를 만들었고 이 함대는 그가 직접 지휘하였다. 테노치티틀란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려는 찰라에 틀락스칼라의 추장 중 한 명이 아즈텍 쪽으로 붙고자 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드디어 테노치티틀란에 대한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되었다. 에스파냐군은 먼저 5월 26일에 테노치티틀란으로 식수를 공급하는 수로를 끊어 수비군을 옥죄었다. 5월 31일에는 테노치티틀란에 대한 압력을 해소하고자 수많은 아즈텍 전사들이 수백 척의 카누에 나누어 타고 에스파냐 함정들을 공격하였다. 마침 바람의 방향이 일정하지 않고 왔다갔다하였고 코르테스는 오전 내내 교전을 회피하였으나, 오후 들어 바람의 흐름이 일정해지자 배를 돌려 아즈텍 카누들을 공격하였다. 비록 배 한척 당 대포 한 기밖에 없었으나 화기가 없는 아즈텍 카누들을 제압하기에는 충분하였다. 아즈텍 카누군단은 몇 시간 후 궤멸 당하고 에스파냐 함대는 테츠코코 호수를 완전히 장악하였다. 그러나 아직 둑길은 아즈텍 전사들에게 장악되어있었고 에스파냐/동맹군이 테노치티틀란으로 들어가는 길을 막고 있었다. 이때 에스파냐 함정 중 하나가 둑길이 크게 끊어져 있는 부분을 발견하고 그 틈으로 배를 몰아 둑길 반대편으로 나아갔다. 이로써 에스파냐 함대는 둑길 양 옆에서 아즈텍 전사들을 사격할 수 있게 되었고 대포의 사격에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자 아즈텍 전사들은 도시 안으로 몰리게 되었다.

먼저 에스파냐의 노병들이 테노치티틀란으로 진입하는데 성공하여 사원을 공격하였으나 아직도 아즈텍 전사들의 수는 많았고 결국 중과부적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에스파냐군이 테노치티틀란을 둘러싼 육지와 호스를 모두 장악하면서 쉽게 끝날 것 같았던 싸움은 이후 10주간 지속하게 된다. 상황이 다급해지자 아즈텍 전사들은 이전에 잡혔던 에스파냐 군인들을 피라미드 사원 위에 인신공희의 제물로 바치고 죽임으로써 에스파냐군의 사기를 꺾으려고 하였으나 이는 오히려 ‘야만인’들을 무찔러야 한다는 에스파냐군의 의지를 더욱 강하게 만드는 결과만 낳았다.

호수를 장악한 함대의 지원을 받아 에스파냐군은 서서히 모든 방향에서 둑길을 장악해갔다. 일부 아즈텍 전사들이 잘린 에스파냐인들의 머리를 가지고 테노치티틀란에서 빠져나와 주변지역을 돌면서 지원군을 모으고자 하였으나 아즈텍으로 붙을 기미가 보이는 도시들은 주변을 돌고 있던 틀락스칼라 전사들에 의하여 신속히 제압되었다. 마침내 몇 주의 지리한 싸움 끝에, 둑길의 끊긴 부분이 에스파냐인들에 의하여 다시 연결되었고 테노치티틀란 내부로의 진격이 시작되었다. 아즈텍은 계속되는 인해전술로 에스파냐군을 물리치고자 하였으나 전사들의 수가 줄어들면서 틀락스칼라군에 의하여 번번히 격퇴되어 아즈텍의 반격은 힘을 잃어갔다.

1521년 8월 13일에 마지막으로 테노치티틀란을 지키고 있던 15000명의 아즈텍 전사들에 대하여 에스파냐/틀락스칼라 동맹군의 총공격이 이루어졌고 1만 5천의 전사들이 모두 전멸하면서 동맹군은 마침내 부패한 시체들로 가득찬 테노치티틀란을 함락시켰고 아즈텍 제국의 역사는 이로서 종말을 고하였다.



문명사에 남을 테노치티틀란 전투



멕시코가 에스파냐에 멸망한 사건과 관련하여 최근까지의 추세는 반(反) 제국주의적 관점에서 전쟁을 모르던 평화로운 민족이 탐욕스런 유럽인들에게 짓밟힌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멕시코는 전쟁을 모르는 평화로운 사람들이 살고 있던 곳은 아니었다. 아즈텍 역시 강력한 정복국가, 강대국으로서 주변집단들의 희생을 강요하던 나라였다.

그러나 누가 침략자고 선의의 피해자냐의 문제를 떠나서 생각하면 테노치티틀란 공방전에서 에스파냐가 승리한 것은 단순히 전투에서의 승리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일찍이 몽골리안들의 후손들이 아시아로부터 건너온 이래 아메리카는 인디안/인디오(원주민이란 명칭은 너무 모호하여 그대로 인디안이라는 명칭을 쓰기로 한다)들의 땅이었다. 구대륙과는 태평양과 대서양, 두 대양(大洋)을 사이에 두고 있어 유라시아와는 거의 교류가 없었다. 그러나 유럽인들이 대양을 횡단할 능력을 획득하면서 아메리카에 나타나게 되었고 새로운 정복지를 찾는 콩퀴스타도르들 앞에 아메리카의 원주문명은 멸망하였다. 이후 아메리카는 원주민의 땅으로 남지못하고 남북 아메리카 공히 유럽계 이주민들에 의한 문화가 깊이 이식되었다. 테노치티틀란의 전투는 아메리카가 유럽인의 대륙이 되는 결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진정한 문명사적 전쟁으로 자리매김해야 할 것이다.





김성남 | 안보·전쟁사 전문가
글쓴이 김성남은 전쟁이 인간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 UC 버클리 동양학과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국제학 석사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에 진학하여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전쟁으로 보는 삼국지], [전쟁 세계사] 등이 있으며 공저로 [4세대 전쟁]이, 역서로 [원시전쟁: 평화로움으로 조작된 인간의 원초적인 역사]가 있다.


발행2012.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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