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전쟁의 도화선, 네덜란드 독립전쟁 - 에스파냐 잉글랜드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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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13회 작성일 16-02-07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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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표


에스파냐 잉글랜드 전쟁 개요

전쟁주체


에스파냐, 잉글랜드, 네덜란드

전쟁시기


1580년대

전쟁터


현재의 에스파냐, 네덜란드, 프랑스 북부, 잉글랜드, 아일랜드, 대서양 일부지역

주요전투


아조레스, 에디스톤 암초, 그레이브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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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파냐령 네덜란드의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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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랑예공 빌렘. 네덜란드인들의 봉기에 대한 알바 공작이 무력으로 진압하자, 이에 대해 오랑예공 빌렘이 알바공에 대항하는 군사를 일으킴으로써 네덜란드 독립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잉글랜드가 북부 프랑스의 교두보를 잃어버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잉글랜드는 다시 대륙에 발을 들여놓을 기회를 얻게 되는데 이는 에스파냐령 네덜란드에서 반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때 프로테스탄트(신교)는 주로 북부 유럽에 많이 퍼져 있었고 이에 신교도들은 상업지역인 네덜란드 인구의 상당수를 차지하게 되었는데 전통적인 귀족 이외에도 새로이 부를 획득한 상인세력들이 모여 길드를 형성하고 많은 부분에서 자치를 누리고 있었다.

카를 5세가 신성로마황제가 되면서 많은 전쟁을 치르게 되고 네덜란드의 세금부담은 급증하였다. 비록 카를 5세가 네덜란드 각 지역의 행정을 맡고 있던 길드의 장(長)들을 자신이 임명하는 총독(Stadtholder)으로 교체하는 등 자치권을 제한하였지만 적어도 상인들이 필요한 존재들이라는 것은 인정하고 있었기에 신교도들에 대한 심한 탄압은 없었다. 그러나 카를 5세가 아들인 펠리페 2세에게 네덜란드를 물려준 후 펠리페 2세는 신교도에 관하여 강경책으로 일관하였고 그의 이복누이인 마르가레타에게 네덜란드를 통치하게 하였다. 펠리페의 강경한 정책에 견디다 못한 네덜란드의 국가회의(Raad van State) 의원들은 사사건건 펠리페와 대립하였다. 결국 펠리페는 국가회의에서 나오는 모든 청원을 무시하거나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아울러 이때 신교도들의 종교 자유 요구도 거세지면서 펠리페 2세는 신교도들의 요구를 힘으로서 누르려고 하였다.

결국 펠리페의 강압정책에 대한 반발로 1566년에는 칼뱅교파 과격분자들이 네덜란드 전국의가톨릭 교회를 습격하여 성상과 기물을 파괴하였다. 네덜란드의 귀족들 중에는 과격분자들의 이러한 행위를 지지하는 자들까지 생겨났고 사태의 평화적인 수습이 어렵다고 생각한 펠리페 2세는 알바 공작(Gran Duque de Alba)에게 1만의 병력을 주어 네덜란드인들의 봉기를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이에 오라녜 공 빌렘(Willem I, 1533~1584)이 알바공에 대항하는 군사를 일으킴으로써 네덜란드 독립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효율적으로 병력을 모으지 못한 네덜란드 병력들이 알바 공작에게 각개 격파 당하면서 네덜란드 반란은 잠잠해지는 듯하였으나 1572년에 일단의 반란군이 브리엘을 점령하면서 네덜란드 반란은 다시 구심점을 얻어 반란의 불길은 더욱 맹렬하게 번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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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리페의 강압정책에 대한 반발로칼뱅교파 과격분자들이 네덜란드 전국의 가톨릭 교회를 습격하여 성상과 기물을 파괴하였다.



잉글랜드 사략선의 약탈이 에스파냐에게 눈엣가시이기는 하였어도 에스파냐에 있어 최우선으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는 아니었다. 에스파냐와 잉글랜드의 관계가 본격적으로 악화된 것은 잉글랜드가 가톨릭이 되어야 한다는 펠리페의 고집과 함께 잉글랜드가 네덜란드에 대한 지원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펠리페는 1554년에 당시 잉글랜드의 여왕이었던 메리 1세(Mary I, 1516~1558)와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한 일이 있다. 메리는 펠리페와의 결혼생활을 진지하게 받아들였으나 펠리페 2세에게 있어 메리와의 결혼은 “육신의 일과는 상관없고 이 나라(잉글랜드)의 병통(病痛)을 치유하고 네덜란드를 지키기 위한” 정치적인 행위였다. 펠리페가 언급한 잉글랜드의 “병통”이란 신교도들의 준동을 의미했다. 그는 엘리자베스 1세에게가톨릭 교도인 사보이의 엠마누엘레 대공과의 결혼을 종용하였지만 엘리자베스의 거부로 무위로 돌아갔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유럽대륙의 형세를 잘 아는 현실주의자였으며 이 때문에 1570년대에 잉글랜드 내의 가톨릭들에 대한 노골적인 탄압을 자제하였고 네덜란드에서 반란이 일어난 후 1572년에 잉글랜드의 일부 해안지역에 자리잡은 네덜란드의 칼뱅교도들을 몰아내었다.

한편 브리엘을 위시한 북부의 주요 항구들을 장악한 네덜란드 봉기군의 수장인 빌렘은 대 에스파냐 감정이 악화될 데로 악화되었음을 감지하고 단순히 봉기의 차원을 넘어 남북 네덜란드를 반 에스파냐 기치하에 통일할 수 있는 호기로 보았다. 1576년에 ‘반도(叛徒)’들에 대한 강경책으로 일관하던 알바공이 안트베르펜(앤트워프)를 점령하면서 벌어진 대학살로 인하여 빌렘의 목표는 달성되는 듯이 보였다. 네덜란드의 반란이 더욱 격화되면서 앞서 말한 에스파냐의 재정적 부담 역시 늘어났고 이에 펠리페 2세는 1578년 파르마 공(알레산드로 파르네세)을 파견하면서 이전에 네덜란드 지역에 대한 자치권을 돌려주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이에 남부 네덜란드의 10개 주는 펠리페 2세의 약속을 믿고 에스파냐의 통치를 다시 받아들였으나 북부의 민심까지 되돌리기는 어려웠고 결국 1581년에 북부 네덜란드는 에스파냐에서 독립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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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리페 2세와 메리 1세. 펠리페 2세는 잉글랜드의 여왕이었던 메리 1세와 결혼했으나, 펠리페 2세에게 있어이 결혼은 정치적인 행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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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 네덜란드의 철회 선언 첫번째 장.





갈등의 씨앗이 된 잉글랜드의 네덜란드 지원



에스파냐로부터 독립을 결정한 북부 네덜란드는 발트해, 지중해, 프랑스 등 유럽과 아메리카 일부 지역까지 배를 보내 무역과 관세수입, 그리고 해상약탈 등으로 군사를 유지하면서 에스파냐에 대항하였다. 이에 펠리페 2세는 북부 네덜란드의 돈줄인 무역로를 끊어 북부 네덜란드를 고사(枯死)시키려 하였다. 그는 자신의 영향력 하에 있는 지역은 물론 그 외의 나라들에까지 서신을 보내 북부 네덜란드와의 무역을 중단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를 거부하는 나라들에 대해서는 에스파냐에 거주하고 있는 해당국 상인들의 선박과 재산을 모두 압류하는 방법으로 북부 네덜란드에 대한 무역봉쇄를 관철시키려 하였다. 대다수의 상인들은 이 조치에 불만을 표시하였지만 강대국 에스파냐 왕의 비위를 거스르고 싶지 않아 그대로 따랐다. 그러나 잉글랜드의 무역상은 무역제한조치를 따르기는커녕 오히려 네덜란드와의 무역을 늘리려고 하였다. 이는 에스파냐의 당국의 심기를 건드리게 되고 결국 네덜란드와 무역하던 많은 잉글랜드 상인들이 에스파냐에 있는 재산을 압류 당하였다.

네덜란드 반란이 심해지면서 잉글랜드의 사략선들과 함께 네덜란드인들도 함대를 만들어 에스파냐의 선단들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일부 에스파냐 인사들은 유럽 북부와의 무역을 아예 중단할 것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에스파냐는 북부 유럽에서 오는 밀과 곡식이 필요했고 북유럽의 무역선들이 내는 관세 역시 국가수입의 중요한 부분이었기 때문에 무역의 전면적인 단절은 불가능하였다. 펠리페는 이 때문에 무역의 봉쇄와 유지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할 수밖에 없었다. 펠리페 2세가 봉쇄정책을 단행할 때마다 장삿길이 막힌 잉글랜드와 네덜란드 함선들의 ‘해적질’은 급증하였다.



넌서치 조약, 피할 수 없는 전쟁의 길로 접어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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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동남부 서리의 넌서치 궁전에서 잉글랜드와 북부 네덜란드는 넌서치 조약을 체결하고 공식적인 군사동맹을 맺게 된다.



잉글랜드와 엘리자베스에게 있어 에스파냐와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틀어지게 된 사건은 에스파냐가 1585년경에 발트해의 한자동맹(Hanseatic League)과 조약을 맺어 북부의 물품을 계속 공급받는 동시에 잉글랜드와 북부 네덜란드의 무역망을 약화시키려고 한 것 때문이다. 이때 한자 동맹은 매우 약해져 있어 외부의 보호가 필요하였고 펠리페 2세의 제안을 거부할 상황이 아니었다. 한자동맹과의 조약을 맺은 펠리페는 이를 믿고 1585년에 전면적인 금수(禁輸)조치를 단행하였고 이는 엘리자베스와 잉글랜드의 격한 반발을 불러온다. 잉글랜드는 에스파냐의 금수령에 맞서서 북부 네덜란드와 1585년에 넌서치 조약(The Treaty of Nonsuch)을 체결하고 네덜란드와 공식적인 군사동맹을 맺게 된다. 그렇지 않아도 잉글랜드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펠리페 2세는 에스파냐 제국의 사활이 걸린 네덜란드 지역의 전쟁에 잉글랜드가 개입하게 되자 잉글랜드에 대한 전면적인 침공을 결정하게 된다. 당시로서는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인 에스파냐와 유럽 변방의 2등국가인 잉글랜드는 피할 수 없는 전쟁의 길로 접어들었다.

잉글랜드가 넌서치 조약을 통하여 네덜란드에 병력을 지원해주겠다고는 하였지만 잉글랜드가 네덜란드에 파견한 병력은 파르마 공 휘하의 에스파냐 병력에 실질적으로 위협이 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넌서치 조약에 의하면 엘리자베스는 보병 5000과 기병 1000을 파병하고 대신 질란트 지방의 항구인 브리엘과 플리싱겐을 반영구적인 주둔지로 넘겨받기로 되어있었다. 잉글랜드군은 네덜란드군 17500명과 힘을 합쳐 에스파냐군과 싸우기로 되어있었지만 에스파냐가 네덜란드 지역에 주둔시킨 병력이 총 6만 7천에 달하였음을 보면 주둔지를 지키는 것 이상의 역할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네덜란드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된 것은 잉글랜드 주둔군의 무력이 아니라 잉글랜드가 네덜란드에 매해 제공하기로 한 60만 플로린의 재정적 원조였다. 이는 북부 네덜란드 봉기세력이 매년 쓰는 전쟁비용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아울러 북부 네덜란드가 운영하고 있던 군선들에 잉글랜드의 사략선과 군선들이 더해지면서 에스파냐의 무역에 만만치 않은 차질이 예상되었다. 무엇보다도 넌서치 조약은 에스파냐에 대한 잉글랜드의 실질적인 선전포고였다. 이제 에스파냐가 해야 될 일은 분명해졌다. 에스파냐 대전략의 핵심은 잉글랜드가 아니라 여전히 네덜란드였다. 그러나 이제 잉글랜드가 네덜란드 편을 들고 나서면서 에스파냐 정부는 잉글랜드를 쳐부수지 않고는 네덜란드를 지킬 수 없음을 깨달았다.





김성남 | 안보·전쟁사 전문가
글쓴이 김성남은 전쟁이 인간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 UC 버클리 동양학과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국제학 석사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에 진학하여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전쟁으로 보는 삼국지], [전쟁 세계사] 등이 있으며 공저로 [4세대 전쟁]이, 역서로 [원시전쟁: 평화로움으로 조작된 인간의 원초적인 역사]가 있다.


발행2012.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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