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잉글랜드의 전략과 카디스 습격 - 에스파냐 잉글랜드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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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28회 작성일 16-02-07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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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표


에스파냐 잉글랜드 전쟁 개요

전쟁주체


에스파냐, 잉글랜드, 네덜란드

전쟁시기


1580년대

전쟁터


현재의 에스파냐, 네덜란드, 프랑스 북부, 잉글랜드, 아일랜드, 대서양 일부지역

주요전투


아조레스, 에디스톤 암초, 그레이브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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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략선단과 프랜시스 드레이크의 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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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는 에스파냐에 대응하기 위해 사략선단을 활용하는데, 이때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큰 활약을 펼치게 된다.



에스파냐가 튜더 왕가를 멸망시키려는 함대를 모으는 동안 잉글랜드라고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잉글랜드 정부는 이전에 고용하였던 사략선단들을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특히 전쟁 발발 이전부터 전 세계의 바다를 돌아다니던 사략선주 프랜시스 드레이크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1568년부터 그의 육촌뻘인 존 호킨스와 함께 카리브해와 잉글랜드를 오가며 사실상의 해적질을 하였고 몇번은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하였으나 그때마다 살아남아 경력을 쌓아갔다. 1570년대에는 스스로 선주가 되어 파나마와 페루 등지에서 에스파냐의 선박, 또는 나귀 캐러밴을 공격하여 보물을 약탈하였다. 수차례의대규모 약탈을 성공시키면서 드레이크의 명성은 높아졌고 마침내 1577년에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고용되어 공식적인 사략(私掠)활동에 나서게 된다.

원래 남아메리카와 카리브해에서 에스파냐 선박들을 약탈하여 에스파냐의 무역을 방해하려는 목적으로 떠난 6척의 사략선단은 중간에 페루에서 37000 듀카트(현재 시세로 약$1000만)에 해당하는 보물을 싣고 있는 에스파냐 배를 약탈하는 등 ‘성과’도 있었으나 남아메리카 남쪽 끝을 돌아 태평양으로 나와서 에스파냐 함선을 약탈하는 과정에서 손실도 많았다. 이후 현재 샌프란시스코 인근, 필리핀, 인도양, 아프리카를 거쳐 잉글랜드로 돌아오면서 드레이크는 지구를 한 바퀴 돌은 셈이지만 1580년에 플리머스로 들어왔을 때 6척이었던 그의 선단은 1척(Golden Hind號)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이 공으로 그는 1581년에 기사작위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그의 악명은 높아졌고 그의 해적질에 상당한 피해를 입은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는 드레이크의 머리에 2만 듀카트(현재 약$650만)의 현상금을 걸었다고 한다.



드레이크의 카디스 전투



넌서치 조약으로 인하여 에스파냐와 잉글랜드가 사실상 전쟁 상태에 돌입한 후 에스파냐에서 잉글랜드 침공을 위한 준비가 한창이라는 정보는 엘리자베스의 귀에도 들어갔다. 엘리자베스는 사략선주로서 대활약을 했던 드레이크에게 기동함대의 지휘권을 주고 에스파냐군의 준비상태를 정찰하고 함선과 항구에 대한 기습, 그리고 에스파냐군 보급품에 대한 약탈 등의 임무를 수행할 것을 명한다. 드레이크의 기동함대는 4척의 군선과 20척의 무장상선으로 구성되어있었다. 상선들은 런던의 유력상인들이 투자하여 바다에 나온 것으로서 상인들은 각자의 투자액에상응하는 약탈의 결과물을 받게 되어있었다. 비록 공식적인 함대이기는 하였지만 드레이크에 이전에 거느렸던 사략함대와 성격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심지어 엘리자베스 여왕은 함대 무력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4개 군선의 ‘선주’였기 때문에 약탈물의 50%를 받도록 되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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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시스 드레이크의 카디스 전투 맵.



비록 넌서치 조약을 맺어 반 에스파냐 전선에 동참하기는 하였지만 엘리자베스는 여전히 당시 최강국이었던 에스파냐와의 전면전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에스파냐군이 잉글랜드 침략을 준비하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어 드레이크의 함대를 내보내기는 하였지만 에스파냐와의 전쟁이 크게 확대되는 것만은 막고 싶었다. 결국 여왕은 함대가 출항한지 7일 후에 그녀의 이전명령을 취소하는 서신을 가지고 있는 전령을 쾌속선에 태워 보냈으나 이 쾌속선이 중간에 폭풍을 만나 회항하면서 그녀의 두 번째 명령은 전달되지 못하였다. 드레이크의 기동함대는 원래의 목적인 에스파냐 기습을 위하여 남쪽으로 계속 항해하던 중 에스파냐의 갈리시아 근처에서 네덜란드 함선들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는데 이들로부터 매우 중요한 정보를 얻게 된다. 내용인 즉 잉글랜드 공격을 준비하는 에스파냐의 군선들과 보급품이 모두 안달루시아의 카디스항에 모여있으며 곧 리스본으로 보내질 예정이라는 것이었다. 드레이크의 함대는 카디스항으로 향하였고 4월 29일에 카디스만(灣) 외곽에 도착한 드레이크 함대는 공격중 6척의 에스파냐 갤리선의 반격을 받았으나 이들을 격퇴하고 항구에 정박해 있던 배들에 대한 본격적인 공격을 시작하였다.



에스파냐의 손실



에스파냐 갤리들을 손쉽게 물리치기는 하였지만 카디스만을 직접 공격하는 것은 만만치 않았다. 특히 보급품을 탈취하려면 상륙을 하여 배에 싣는 작업을 하여야 했는데 에스파냐군이 카디스만 주위에 해안포를 촘촘히 배치해놨기 때문이다. 비록 에스파냐 포병들의 사격솜씨가 신통치 않아 잉글랜드 함선들의 손해는 없었지만 상륙정을 육지에 댈 수가 없었다. 잉글랜드 선원들은 상륙정을 동원하여 엘 푼타(El Punta)에 상륙을 시도했지만 맹렬한 포격에 그대로 물러 나와야 했다. 할 수 없이 드레이크 함대는 보급품 탈취를 포기하고 보급품과 수송선을 모두 불태우기로 했다. 그들은 5월 1일 새벽까지 카디스만을 공격하여 33척에 달하는 큰 상선을 불태우고 엄청난 양의 보급품에 불을 질렀다. 공격은 불과 이틀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에스파냐 측의 손해는 막대하였다. 침몰한 상선의 톤수만 1만톤이 넘었고 에스파냐 수병들을 위한 군량과 보급품을 잔뜩 싣고 있었던 상선 네 척을 나포했다. 드레이크의 습격으로 입은 손실 때문에 결국 에스파냐는 1587년에 잉글랜드를 공격하려던 계획을 포기하여야 했다.





김성남 | 안보·전쟁사 전문가
글쓴이 김성남은 전쟁이 인간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 UC 버클리 동양학과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국제학 석사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에 진학하여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전쟁으로 보는 삼국지], [전쟁 세계사] 등이 있으며 공저로 [4세대 전쟁]이, 역서로 [원시전쟁: 평화로움으로 조작된 인간의 원초적인 역사]가 있다.


발행2012.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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