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에스파냐의 쇠퇴와 잉글랜드의 부상 - 에스파냐 잉글랜드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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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47회 작성일 16-02-07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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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표


에스파냐 잉글랜드 전쟁 개요

전쟁주체


에스파냐, 잉글랜드, 네덜란드

전쟁시기


1580년대

전쟁터


현재의 에스파냐, 네덜란드, 프랑스 북부, 잉글랜드, 아일랜드, 대서양 일부지역

주요전투


아조레스, 에디스톤 암초, 그레이브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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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이후



인구와 경제력, 그리고 영토의 크기에서 비교도 안되는 당시의 2등국가 잉글랜드가 강대국 에스파냐를 변명의 여지없이 무찌름으로서 강대국 에스파냐의 왕인 펠리페의 체면은 땅에 떨어졌다. 펠리페는 포기하지 않고 1596년과 1597년에 다시 대함대를 만들어 보내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 펠리페 3세가 1601년에 아일랜드 반란군을 도와 아일랜드에 교두보를 만들려고 하지만 킨세일의 전투에서 패하면서 이마저도 무위로 돌아갔다. 612년에 자신의 국력만 믿고 고구려 정벌을 위한 대군을 일으켰다가 글자 그대로 나라를 말아먹은 수양제처럼 펠리페도 막대한 인력과 재력을 동원하여 잉글랜드를 공격하였지만 결국 국력이 약화되는 결과만 낳았다.



에스파냐의 쇠퇴, 잉글랜드의 부상



전쟁사 속에는 단번에 역사를 바꾸어놓은 결전이 있는가하면 규모는 크지만 역사에는 별다른 영향이 없었던 전투가 있기도 하고 아울러 당장의 영향은 없지만 장기간에 걸쳐 역사의 흐름을 바꾼 전투가 있다. 잉글랜드가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를 격파한 후에도 에스파냐는 잠재적인 국력을 짜내어 전쟁을 계속하였지만 결국 에스파냐가 신대륙에서 가져올 수 있는 막대한 보물과 당시 유럽에서 가장 효율적인 조세제도도 결국은 한계에 부딪혔다. 펠리페 2세는 지킬 곳이 너무 많았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전쟁을 국가의 이익을 위한 전쟁이 아닌 ‘종교전쟁’으로 보았기 때문에 신교를 철저히 박멸할 때까지는 멈출 수 없는 성격의 것이었다. 결국 지나친 국력의 소모로 인하여 에스파냐는 바다와 땅 모두에서 예전의 힘을 유지할 수가 없었고 서서히 쇠퇴의 길로 접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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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1세 여왕.



에스파냐가 빠진 바다를 접수한 것은 네덜란드와 잉글랜드였다. 네덜란드와 잉글랜드는 에스파냐와의 전쟁에서는 동맹이었으나 곧 적으로 변하여 바다를 놓고 한 판 승부를 벌이게 된다. 이 경쟁에서 잉글랜드가 승리함으로써 잉글랜드는 대서양에서의 주도권을 쥐게 되고 해외에 수많은 식민지를 건설하게 된다. 이후 프랑스를 비롯한 경쟁자들을 모두 물리치고 금융과 조세개혁을 단행한 후 동인도 회사를 위시하여 해외의 무역로를 장악한 잉글랜드는 18세기에 스코틀랜드와 통합되면서 대브리튼(Great Britain)이 되고 19세기에 이르러 해가 지지않는 ‘대영제국’을 건설한다. 비록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잉글랜드는 무적함대를 무찌름으로서 대영제국의 초석을 놓을 수 있었다.





김성남 | 안보·전쟁사 전문가
글쓴이 김성남은 전쟁이 인간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 UC 버클리 동양학과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국제학 석사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에 진학하여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전쟁으로 보는 삼국지], [전쟁 세계사] 등이 있으며 공저로 [4세대 전쟁]이, 역서로 [원시전쟁: 평화로움으로 조작된 인간의 원초적인 역사]가 있다.


발행2012.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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