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전쟁은 막을 수 있었는가? - 임진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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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31회 작성일 16-02-07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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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표


임진왜란 개요

전쟁주체


조선, 명 vs 일본

전쟁시기


1592~1598

전쟁터


한반도

주요전투


탄금대 전투, 평양 전투, 행주산성 전투, 진주성 전투, 한산해전, 명량해전, 노량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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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능과 당쟁으로 비극을 막지 못했는가?



일본이 힘을 기르고 전쟁을 준비하는 사이에 조선과 명나라는 정치 혼란과 체제 모순 심화가 진행되면서 제대로 대처할 여유를 찾지 못했다. 특히 조선은 오랜 훈척정치(공신과 친척이 국정 전반을 도맡아 하는 것)로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성리학적 이념은 아랑곳없이 여성(문정왕후), 승려(보우), 외척(윤원형) 등이 날뛰는 세상이 된 것을 깊이 반성하면서, 이름난 선비들이 정승에서 언관까지 조정을 장악함으로써 원칙과 상식에 맞는 정치를 펴고자 하였으나 시간이 갈수록 내적 갈등이 심화되었다. 지식인 특유의 소심함 때문에 그리 중대하지 않은 문제도 심각한 갈등으로 불거질 수 있었고, 여기에 많지 않은 주요 관직을 둘러싼 경쟁이 맞물리면서, ‘당쟁’이 발생하고 나날이 격렬해졌던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퍼진 ‘당쟁망국론’에서처럼 이 당쟁 때문에 조선이 왜란에 아무런 대비도 못한 것은 아니지만, 국론을 통일하고 효과적으로 정책을 도출하는 데는 확실히 장애가 되었다. 그것은 이이를 비롯한 국방-민생 개혁론자들이 진정성을 의심받은 상대 당파의 공격으로 제때 개혁을 추진하지 못한 사실과, 일본의 동태를 파악하는 일조차 의견의 불일치 때문에 효과적인 대응책 마련이 어려워진 사실 등에서 찾을 수 있다(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온 황윤길김성일이 서로 정반대의 말을 남겼음은 유명한데, 김성일은 일본의 침략 의도를 알았으나 혼란을 우려해 침략은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고 변명했다. 하지만 아무리 혼란이 있어도 무방비 상태로 병란을 맞는 것만큼 할까?).

한편 이처럼 필요한 개혁이 지연되고 정치리더십이 실종된 가운데 국방체제의 부실함이 심해졌다. 그것은 사실 선조대에 시작되었다기보다 조선 건국 후 2백 년이 지나면서 체제가 변형되고 해이해진 누적된 결과이기도 했다. 조선 초의 병제는 천민을 제외한 모든 양민이 병역을 지는 병농일치적 개병제였으나 차차 양반들이 병역에서 빠져나갔으며, 농민의 경우도 점차 군포를 내고 역을 면제받는 방군수포제를 따르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장부상으로는 병사가 있지만 죽거나 도망한 상황에서 새로 군적을 정리하지 않음으로써 실제 근무병은 없는 폐단이 점점 늘어났다. 그래서 왜란 직전 조선군은 17만 명 정도로, 20만이 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건국 초기에 비하면 축소되어 있었으며 그나마 허수(虛數)가 많았다. 한편 왜란 동안에 일본은 20만 명 정도를 조선에 파병했는데 따라서 수적으로는 그렇게 압도적이 아니었으나, 전문성이 떨어졌던 조선의 병력은 패배하면 흩어져 버리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실제로는 늘 병력 부족 상태에서 전쟁을 해야 했다.

이렇게 되니 전통적인 진관 체제가 제대로 운영되지 못했다. 진관 체제는 거점 방어에 주력하여 적이 침략하면 해당 진에서 최선을 다해 막고, 역부족으로 그 진이 뚫리면 다음 진이 막는 사이에 중앙군이 도착해 적을 섬멸한다는 개념이었다. 그런데 각 진마다 병력이 부족하다 보니 버티지 못하고 연속으로 격파되었으며, 1555년의 을묘왜변에서는 전라도가 깊숙이까지 유린되고 전라 병사 원적이 전사하는 사태가 빚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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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관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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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승방략 체제.



이를 계기로 진관 체제를 제승방략 체제로 전환하는 결정이 내려졌다. 거점 방어 대신 지역 방어 개념을 써서, 적이 침입하면 그 지역의 병력을 한데 집결시킨 다음 중앙에서 파견된 장수의 지휘로 적과 일대 결전을 벌여 격퇴한다는 것이었다. 소수의 병력으로 각개격파되기보다 초기의 희생을 감수하며 집중된 전력으로 승부한다는 것인데, 일리는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임진왜란 초기의 전황을 더욱 불리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국방의 부실은 민생의 불안, 민심의 이반과 이어져 있었다. 양반은 병역을 기피하며, 평민도 여유가 있으면 군포를 내어 면제받고 가난하면 도망해 버리는 가운데 죽은 이나 도망한 이의 군포를 친인척에게 강제 징수시킴으로써 원성이 컸다. 여기에 국초에 만든 방물 목록이 오랫동안 개정되지 않음으로써 바뀐 현실을 반영하지 못해 더 이상 생산되지 않는 ‘토산품’을 구해 바치느라 방납업자에게 등골이 빠지기도 했다. 오죽했으면 왜란 당시 일본군에게 호응하여 아군 관리들을 붙잡아 바친 고을도 적지 않을 정도였다. 병력의 대부분이 일반 백성인 나라에서, 민심의 이반은 곧 사기 저하, 전투력의 저하로 이어졌다.



소통의 부재와 오해, 또 하나의 전쟁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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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신숙주가 일본을 다녀와 남긴 [해동제국기]. 임진왜란 발발 당시까지 일본에 대한 주된 지침서로 쓰였다.



정보의 미비함도 조선이 전쟁을 준비함에 큰 지장을 주었다. 조선은 국초부터 명나라에는 사대, 일본에게는 교린이라는 원칙을 세우고 외교를 했으나 대일외교에는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다. 아예성종 때부터는 통신사를 받되 보내지는 않으며, 일본에 뭔가 전할 일이 있으면 대마도를 거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15세기에 신숙주가 일본을 다녀와 남긴 [해동제국기]가 16세기 말이 될 때까지도 일본에 대한 주된 지침서였으며, 심지어 왜란이 끝난 다음에 쓴 유성룡의 [징비록]에도 오다 노부나가와 미나모토 요리토모를 혼동하고, 히데요시는 평(平)씨에다 중국 출신이라고 적을 정도였다(히데요시가 잠깐 다이라(平)씨를 쓰기는 했지만, 중국인이라는 것은 허무맹랑한 말이었다).

결정적으로 일본의 군사력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1589년에 선조가 일본의 침입 가능성을 두고 신하들과 의논할 때, 신하들은 “왜구의 배는 한 척에 백 명 이상을 실을 수 없고, 배가 있어야 모두 백 척을 넘지 못하니 최대 1만 명 이상은 침입해올 수 없다”고 장담했다 (일본의 배가 조선 배보다 작은 편이기는 했으나, 히데요시는 전쟁에 2천 척의 배를 동원하도록 지시했다). 또한 일본의 조총에 대해서도 이일이나 유성룡처럼 그 위력을 경계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쏜다고 모두 맞겠는가. 우리 활이 우월하다”며 과소평가했던 신립같은 사람들이 우세했다. 조총을 우리도 제작해 사용하자는 움직임도 일부 있었으나 본격화되기 전에 왜란이 일어났다.

반면 일본은 침공을 결정한 이후 수십 명의 밀정을 조선에 들여보내 조선 지도를 제작하고 각종 사정과 지형, 인구와 물자 분포 등을 파악했다고 한다. 하지만 최고위 수준에서의 정보가 부실한 점은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히데요시는 조선과 명의 국가 규모나 정치 방식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으며, 따라서 조선을 위협하면 국왕은 곧 항복할 것이고, 왕이 항복하면 조선인은 일본의 충실한 신민이 될 것이니 조선인까지 합세해서 명나라를 공격하면 이길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이미 1577년에 “규슈 번(藩)을 공략해 번주의 항복을 받고 그 병력으로 조선을 친다”고 말했거니와, 대륙 침략도 그런 식으로"조선을 공략해 왕의 항복을 받고 그 병력을 더하여 명을 친다"라고구상했던 것 같다. 자국의 지방을 공략하는 전쟁과 국가간 전쟁의 차이를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상대에 대한 이런 무지는 서로 불신과 분노를 낳으며 전쟁의 도화선이 되기도 했다. 히데요시는 1587년에 대마도의 소 요시시게에게 “조선 국왕에게 일본에 건너와 나를 알현토록 전하라”고 통지했다. 조선이 대마도에 쌀과 콩 등을 하사해주던 것을 ‘조공’이라고 오해하고, 조선 왕이 대마도주의 말을 들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를 곧이곧대로 전할 수가 없던 소 요시시게는 가신인 타치바나 야스히로를 ‘일왕의 사신’으로 속여 한양에 보내 통신사 파견을 요청했는데, 일왕과 최고실력자를 제대로 구별하지 못했던 조선 조정은 오다 노부나가의 죽음을 두고 “왜인들은 최근 자신들의 왕을 시해했다”며 이런 야만스러운 나라에 사절을 보내줄 수 없다고 거절했다. 이에 히데요시는 분노하여 타치바나 일족을 멸문해 버렸으며, 1589년에 다시 한 번 조선 왕을 설득하라, 그가 복종하지 않으면 출병하겠다고 대마도에 통보했다. 이로써 황윤길과 김성일이 115년 만에 통신사로 일본에 가지만, 그들은 교린을 목적으로 했음에도 히데요시는 자신의 요구에 굴복한 조선이 항복을 표시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이후 “명나라를 칠 것이니 너희는 선봉에 서라”고 요구했으나(대마도에서는 이를 “명나라에 조공할 테니 길을 빌려달라”로 위조해서 전달했다), 조선이 이를 묵살하고 명나라에 일본의 움직임을 전달하자 결국 전쟁이 터지게 된다.

결국 국가간의 소통의 부재가 비극적인 전쟁의 한 원인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런 몰이해와 오해는 명나라와의 사이에서도 있어서, 명은 한동안 계속 조선이 일본과 손잡고 요동을 침공하지 않을까 하고 의심했다. 그리고 명-일 간 강화 교섭도 동상이몽 속에 진행되었다.



글라이더가 날고, 화학탄을 던지고-두 진영의 무기체계



흔히 이야기되는 것처럼 어린애 시절부터 칼 다루기를 배우는 일본의 상무 정신에 비해 조선은 갈수록 문치주의가 발전하면서 무를 천시하는 분위기가 짙었고, 그것이 왜란 초기에 무력하게 무너졌던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선조는 1594년에 “경상도는 풍습이 잘못된 지가 오래이다. 비록 친형제라도 [천자문]을 배우고 고상한 이야기를 하면 높은 자리에 앉히고 대우를 하지만, 활과 화살을 가지고 무술을 익히면 뜰에 내려가게 하고 천대한다. 그래서 변란을 당하기 전에 상주에는 궁수가 세 명뿐이었다 한다. 풍속이 이와 같고서야 어떻게 적병을 막겠는가.”라고 한탄했는데, 경상도만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그런 풍속이 만연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백병전이 벌어졌을 경우에는 일본군 병사가 조선군 병사보다 일반적으로 사기나 노련함 등에서 앞섰다고 할 수 있다. 무기체계도 조선은 접전을 벌이기보다 원거리에서 적을 사살하는 방식을 선호했으며, 따라서 활이 주된 개인 병기였다. 전통적으로 사용된 각궁은 최대사거리 300m, 유효사거리 100~150m였는데 값이 비싸고 비가 오면 부레풀이 녹아 풀어지는 게 문제였다. 이를 대신한 목궁은 사거리가 100m를 넘지 않았던 것 같다. 적의 화살과 단병 접전시의 방어를 위해 병사들까지 갑주를 착용했으며, 따라서 몸이 무겁기 때문에 칼은 되도록 가벼운 것을 썼다. 조선군의 환도는 길이가 50~60cm였으며, 일본군의 주무기인 일본도보다 10~20cm 정도 짧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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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조총. 진열품은 에도 시대의 것이다. <출처: (CC)Rama at Wikipedia.org>



일본군은 전통적으로 백병전을 선호했으며 따라서 가볍게 무장하고 일본도와 장창으로 적에게 돌격하여 참살하는 식으로 싸웠는데, 조선군은 활의 우위로 그 돌격의 기세를 약화시킴으로써 왜구와의 오랜 싸움을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왜란 때 이 균형을 깨트린 무기가 나타난다. 바로 조총이었다. 포르투갈 사람이 다네가시마(種子島)에서 전해주었다 하여 ‘다네가시마 뎃포(鐵砲)’로 불리던 이 조총은 오다 노부나가가 대량으로 사용하여 전쟁에서 우위에 선 이래로 일본에 널리 보급되어 있었다. 최대사거리 200m, 유효사거리 100m로 각궁에 비하면 그렇게까지 위력적이지는 않았으나(게다가 숙련된 사수라도 1회 발사에 30초 이상이 소요되어, 활에 비해 연사가 어려웠으며 여러 발을 쏘고 나면 총신이 과열되기도 했다) 각궁을 장비한 조선 병사가 많지 않은데다 조총을 쏠 때 나는 천둥치는 듯한 소리가 위협 효과를 주어 왜란 초기에는 일본군이 조선군을 연패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각궁을 많이 장비하고 침착하게 맞서 싸웠다면 팽팽하게 싸울 수 있었으나, 장비 부족과 공포감 때문에 적의 접근을 막지 못했고, 접전이 벌어지면 일본도와 장창 앞에 버티지 못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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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산성에서 위력을 떨친 화거. <출처: (CC)draq at Wikipedia.org>



그러나 개인이 아닌 집단용 병기는 대체로 조선군이 앞섰다. 총통은 조선이 자랑하는 대표적인 화기였는데, 구경이 가장 큰 천자총통은 사거리가 2km, 가장 많이 사용된 현자총통은 3.8km에 달했다. 다만 작은 철환을 여러 개 넣어 발사하기도 했지만 보통은 ‘대장군전’, ‘장군전’ 등의 대형 화살을 넣어 쏘았고, 따라서 인명살상보다 적의 진영이나 적함을 파괴하는 목적으로 쓰였다. 문종때 만들어진 화거(화차)는 한 번에 수십 발의 철환이나 화살을 사격할 수 있는 이동식 다연발포로, 왜란 때에는 신기전보다는 소구경 총통인 승자총통을 수십 정 장착해서 많이 사용했으며 행주산성전투 때는 그 위력이 승리에 한몫했다고 한다. 일본군은 기동력을 중시했기 때문에 끌고 다니기 어려운 화포는 거의 쓰지 않았으며, 대구경 조총을 거치시켜 박격포처럼 썼다. 하나의 대형 철환을 넣고 신속하게 발사하는 서양식 불랑기포는 명종 때 이미 수입되었다고 하지만, 왜란 중에는 명군이 주력 무기로 사용했다.

조선이 일본보다 월등히 앞선 군사기술은 선박 부문에도 있었다. 조선 전함은 하나의 두터운 판재로 외벽을 만들고 나무못으로 이어 붙이는 배였는데, 이것은 얇은 판재를 겹쳐 쓰며 쇠못을 사용하는 일본 배에 비해 무겁고 느린 편이었다. 그러나 나무못은 녹이 슬지 않고 같은 재질끼리 달라붙는 성질이 있었던 데 비해, 쇠못으로 여러 판재를 이은 일본 배는 충격을 받으면 이음새가 부서지면서 배가 파괴되기 쉬웠다. 그리고 기본 속도는 조선 배가 느렸지만, 회전은 보다 자유로워서 교전 중에 공격 방향을 빠르게 전환할 수 있었다. 또한 을묘왜변 이후 조선 초기의 맹선(猛船)을 개량하여 방패판과 상갑판을 올린 3층 구조의 판옥선(板屋船)을 만들었다. 이 배는 높이 때문에 적이 배로 뛰어오르기 어렵게 하고, 상층구조물로 적의 사격을 막는 한편 육중한 선체로 적선을 들이받아 깨트리며 총통을 배에 실어 적선을 부수거나 불태울 수 있어서 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활약에 큰 기여를 했다. 이 판옥선에서 한 층을 축소하고 상갑판을 둥글게 덮어서 아군이 완전히 가려지도록 만든 것이 거북선이었다. 거북선은 적의 사격을 겁내지 않았으므로 적진 깊숙이 돌격해 진영을 깨트리는 돌격선으로 활약했지만, 판옥선보다 낮았기 때문에 판옥선처럼 위에서 아래로 사격할 수가 없어 주력 전선으로 쓰이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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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수군의 주력함, 판옥선.



언제나 전쟁을 거치며 무기 기술은 진보되기 마련이다. 왜란 중에도 그리하여 총통을 소형화하여 조총과 비슷하게 쓸 수 있도록 한 별승자총통이 제작되고, 명나라에서 당파편곤, 제갈노, 화창(火槍) 등을 수입, 보급하여 일본도에 맞설 개인용 무기로 쓰도록 했다. 이장손이 만든 비격진천뢰는 일종의 수류탄인 질려포통을 개량하여 대포로 멀리까지 발사할 수 있게 한 공성무기다. 또 당시 조선군은 ‘비행기’까지 썼다고 한다. 비거(飛車)라 불리는 물건은 한 두 사람을 태우고 30리 가량을 날아갈 수 있었다고 하는데, 아마 일종의 글라이더였을 것으로 보이며 보급, 통신 등에 활용되었다. 화학무기도 썼다. 생석회 등의 독극물을 주머니나 나무통에 담아 터뜨렸는데, 행주산성 전투에 요긴하게 쓰였으며 수전에서도 사용되었다.



참고문헌 : [조선왕조실록]; 이순신, [난중일기]; 조경남, [난중잡록]; 신경, [재조번방지]; 유성룡, [징비록]; 조원래, [임진왜란사 연구의 새로운 관점], 아세아문화사, 2011; 한일문화교류기금·동북아역사재단 편, [임진왜란과 동아시아세계의 변동], 경인문화사, 2010; 한일관계사연구논집 편찬위원회 편, [동아시아 세계와 임진왜란], 경인문화사, 2010; 최관, [일본과 임진왜란], 고려대학교출판부, 2003; 민승기, [조선의 무기와 갑옷], 가람기획, 2004; 이순신역사연구회, [이순신과 임진왜란], 비봉출판사, 2005; 황원갑, [부활하는 이순신], 마야, 2006; 송복, [서애 유성룡, 위대한 만남], 지식마당, 2007; 버나드 몽고메리, [전쟁의 역사], 책세상, 2004; 루이스 프로이스, 국립진주박물관 편, [프로이스의 <일본사>를 통해 다시 보는 임진왜란과 도요토미 히데요시], 부키, 2003; 中野等, [文祿ㆍ慶長の役], 吉川弘文館, 2008; 기타지마 만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 경인문화사, 2008; 최두환, [임진왜란 시기 조명연합군 연구], 경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0; 김만호, “임진왜란기 일본군의 함경도 점령과 지역민의 동향”, 역사학연구, 제38집, 2010. 2; 민덕기, “임진왜란의 '전후처리'와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동”, 한일관계사연구, 제36집, 201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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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규진 | 서울교육대학교 교수/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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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2.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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