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전쟁이 남긴 것 - 임진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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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399회 작성일 16-02-07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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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표


임진왜란 개요

전쟁주체


조선, 명 vs 일본

전쟁시기


1592~1598

전쟁터


한반도

주요전투


탄금대 전투, 평양 전투, 행주산성 전투, 진주성 전투, 한산해전, 명량해전, 노량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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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 대신 경직된 사회로



조선이 이 전쟁으로 입은 피해는 상상을 초월했다. 조선의 인구는 삼분의 일이 사라졌고, 전답의 면적도 삼분의 일로(전라, 충청, 경상도 기준) 줄었다. 줄어든 인구는 대부분 조총과 칼과 창에희생된 것이지만, 노예 또는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궁궐에서 여염집까지 쑥대밭이 되고 사방에 거두지 못한 해골들이 널려 있었고, 논밭이 불타거나 돌보지 않아 잡초밭으로 변함으로써 살아남은 사람도 극심한 기근에 시달렸다. 시체가 사방에 널려 있고 영양 상태가 좋지 않아 저항력이 떨어지니 전염병까지 돌았다. 이 지경이 되니 도덕의식이나 이성도 땅에 떨어져, 사람을 잡아먹어 배고픔을 달래려 하는가 하면(“남편이 아내를, 아버지가 자식을 잡아먹었다”고 실록은 전한다) 도적이 날뛰고, 당장 내일은 어찌 되든 말든 남은 식량을 모두 술로 바꿔 퍼마셔 버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또한 정신적, 정치적으로 조선이 더욱 경직되는 계기가 되었다. 명나라에 대한 존화의식은 더욱 짙어졌고, 그것은 명-청 교체기에 현실적인 대응을 하지 못하게 방해함으로써 또 한 차례의 병란을 자초하고 말았다. 그리고 명나라가 망한 뒤에도 그 의식은 더 경화되고 구체화되어, 오직 대의명분에 집착하는 주리주의적 성리학만이 조선의 학술, 정치, 문화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대들은 오늘이 지난 뒤에도, 또 다시 동인이니 서인이니 하겠지." 의주에서 통곡하듯 읊은 선조의 예언, 아니 그 이상으로, 난리가 끝난 다음에도 사람들은 계속 “동인이니, 서인이니” 했으며, 남-북-노-소로 갈수록 분열하면서 서로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명분을 따르는 당이랍시고 실질적이지 못한 문제로 국력을 소모했다. 그래도 전란 도중에 대동법의 싹이 트는 등 일부 실용적 개혁의 토대가 마련됨으로써, 17-18세기 ‘실학’의 밑거름이 되기는 했다.



누가 만두를 먹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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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데요시 가를 지지하는 세력을 물리치고 일본의 새 주인이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



명나라도 전쟁의 후유증에 시달리다 결국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주저앉았다고 할 수 있다. 이로써 막대한 자금과 인력이 소모되었을 뿐 아니라, 명왕조의 내홍(內訌)을 바라보며 차차 고개를 들고 있던 변방의 이민족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주(朱)씨네 밀가루로 이(李)씨가 만두를 빚었는데 조(趙)씨가 홀라당 먹어버렸다”는 말이 있다. 주씨란 곧 명나라이며, 이씨란 명나라 멸망을 직접 불러온 농민반란군의 대장 이자성이며, 조씨는 곧 청나라인 것이었다.

비슷한 이야기가 일본에서도 나왔다. 일본판에서는 오다 씨가 쌀을 찧고, 도요토미 씨가 떡을 만들고, 도쿠가와 씨가 홀라당 먹었다. 오다가 닦은 기반을 물려받았으나 본래 정통성이 없던 히데요시가, 어쩌면 그래서 명나라와 아시아를 정복한다는 거대한 프로젝트까지 세운 것이었으나, 결과적으로 수많은 인명만 희생시키고 한 뼘의 땅도 얻지 못한 이상 히데요시 사후에까지 권력이 계승되기는 어려웠다. 천하를 홀라당 삼킨 도쿠가와는 막부를 열고, 조선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조선에서 들여온 성리학을 바탕으로 보다 질서정연하고 안정지향적인 국가체제를 수립하고 운영해 나갔다. 전쟁의 피비린내가 차차 가셔지면서 오늘날 일본 전통문화의 주류가 되는 에도 문화가 꽃피었으며, 그 문화에는 왜란 중에 조선에서 들여온(내지는 빼앗아온) 도자기 기술, 인쇄술 등도 한몫했다. 황금 궁전과 황금 다실을 지으며 요란하고 화려한 것을 추구하던 히데요시의 모모야마 문화와는 달리, 조선의 영향으로 보다 그윽하고 차분하며 내면의 정신을 중시하는 문화가 일본에 뿌리내렸다. 결국 히데요시는 자신이 조선에서 얻은 것이라고는 수많은 ‘코’ 뿐이라고 생각하며 죽어갔으나, 코보다훨씬 가치 있는 것을 자신도 모르게 가져갔던 것이다.



참고문헌 : [조선왕조실록]; 이순신, [난중일기]; 조경남, [난중잡록]; 신경, [재조번방지]; 유성룡, [징비록]; 조원래, [임진왜란사 연구의 새로운 관점], 아세아문화사, 2011; 한일문화교류기금·동북아역사재단 편, [임진왜란과 동아시아세계의 변동], 경인문화사, 2010; 한일관계사연구논집 편찬위원회 편, [동아시아 세계와 임진왜란], 경인문화사, 2010; 최관, [일본과 임진왜란], 고려대학교출판부, 2003; 민승기, [조선의 무기와 갑옷], 가람기획, 2004; 이순신역사연구회, [이순신과 임진왜란], 비봉출판사, 2005; 황원갑, [부활하는 이순신], 마야, 2006; 송복, [서애 유성룡, 위대한 만남], 지식마당, 2007; 버나드 몽고메리, [전쟁의 역사], 책세상, 2004; 루이스 프로이스, 국립진주박물관 편, [프로이스의 <일본사>를 통해 다시 보는 임진왜란과 도요토미 히데요시], 부키, 2003; 中野等, [文祿ㆍ慶長の役], 吉川弘文館, 2008; 기타지마 만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 경인문화사, 2008; 최두환, [임진왜란 시기 조명연합군 연구], 경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0; 김만호, “임진왜란기 일본군의 함경도 점령과 지역민의 동향”, 역사학연구, 제38집, 2010. 2; 민덕기, “임진왜란의 '전후처리'와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동”, 한일관계사연구, 제36집, 201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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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규진 | 서울교육대학교 교수/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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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2.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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