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조선, 철저히 유린되다 - 임진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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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31회 작성일 16-02-07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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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표


임진왜란 개요

전쟁주체


조선, 명 vs 일본

전쟁시기


1592~1598

전쟁터


한반도

주요전투


탄금대 전투, 평양 전투, 행주산성 전투, 진주성 전투, 한산해전, 명량해전, 노량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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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죽지세의 일본군



1592년 3월 27일, 히데요시는 교토에서 일왕에게 출정의 보고를 하고, 3만의 친위군을 거느리고 침략군이 집결해 있는 나고야로 향했다. 그리고 4월 13일 아침, 총 15만 8700명에 달하는 군대를 9개 군으로 나누어 출격시켰다. 선봉은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1만 8700명의 제1군. 이들은 13일 오후 5시쯤에 부산포 앞바다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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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진을 공략하는 일본군.



[조선왕조실록]과 [징비록]에는 당시 부산 첨사 정발이 사냥을 즐기고 있었고, 적의 공격이 시작되자 그제야 허둥지둥 성으로 돌아가다가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전사했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그것은 풍문을 기록한 것으로 보이며,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정발은 적의 접근을 제 때에 발견하고 전투 준비를 하는 한편 경상좌수사 박홍에게 통보했다. 그리고 일본군은 절영도에 일단 정박하고는 정발에게 “명나라를 치러 가는 길이니 길을 빌려 달라”고 통보했으며, 이를 거부하자 14일 아침부터 부산성을 공략했다. 정발 등은 분전했으나, 부산성을 지키는 병력은 1천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적의 전진을 막고자 철질려(쇠못)를 길목에 뿌렸지만 공성전에 능숙한 적은 나무판자를 깔고 쉽게 건너왔다. 결국 정발을 포함한 다수가 전사하고, 부산성을 점령한 일본군은 여세를 몰아 인근 다대포와 서평포까지 손에 넣고, 다음날인 15일에는 동래로 진격했다. 동래의 경상좌수영에 있던 박홍은 달아나고, 동래 부사 송상현은 결사 항전을 했지만, 정발과 같은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이렇게 이틀 만에 부산 일대를 장악하여 교두보를 확보한 일본군은 4월 18일부터 유유히 도착하는 후속군을 맞이하여 병력을 강화한 다음 곧바로 세 갈래로 한양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정발이 실록과는 달리 제 할 일을 다 했는지 몰라도, 이 급변을 한양에 즉각 보고하기 위해 봉화를 올리는 일은 소홀했다(또는 저지당했다). 그래서 조정은 이 일을 사흘이나 지나, 박홍의 보고를 통해 비로소 알게 된다. 당황한 조정은 당시 가장 신뢰받고 있던 무장인 이일과 신립에게 응전하도록 했다. 하지만 대구에서 적을 맞이하기로 한 이일이 한양에서 어느 정도 병력을 모아서 내려가려 했으되 사흘 동안 삼백 명도 모으지 못했으며, 조정의 재촉에 내려가 보니 이미 대다수의 병력이 흩어진 뒤였다. 상주에서 고니시군과 대치했으나, 제대로 승부를 볼 수가 없어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제승방략 체제의 맹점, 즉 현지에서 병력을 집결시키는 어려움과 병력과 지휘관이 만나기까지 시간이 걸린다는 문제점이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다.

신립 역시 충분한 병력을 모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여러 사람이 적을 막기에 최적의 요새지라고 꼽고 있던 조령을 포기하고 충주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다. 두려워하는 보병들에게 배수진으로 필사즉생의 결전의지를 북돋우고, 자신했던 기병대의 돌파력을 최대한 활용하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4월 26일, 결전을 앞두고 비가 내렸으며, 그 때문에 조선군의 맥궁이 못쓰게 되고 길은 진창이 됨으로써 기병의 빠른 진격을 방해했다. 수적으로도 우위였던 일본군이 조총을 콩볶듯 쏘아 대며 몰려들자, 그만 병사들은 강물에 뛰어들며 달아나 버렸다. 참패했음을 깨달은 신립은 자결했다.



한강, 임진강, 마침내 대동강까지 건넌 일본군



믿었던 두 장수의 완패 소식에 조선 조정은 그야말로 ‘멘붕’ 상황이었다.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북쪽으로 파천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런데 신하들이 벌떼처럼 반대하고 나섰는데, 이제 한양을 지킬 병력은 거의 남지 않았음을 생각하면 선조에게 한양을 사수하라는 말은 말 그대로 ‘死守’하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당시의 정치체제에서 왕이 변을 당하면 그 자리에서 나라가 멸망하는 것이었기에, 선조 개인이 죽고 사는 문제를 떠나파천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이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신하들이 반대한 까닭은 나중에 자신은 위기 앞에서도 의연했음을 과시하고자, 또는 한양이 점령되면 놔두고 갈 수밖에 없는 가족과 재산이 어떻게 될지 몰랐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아무튼 개국 이래 처음으로 도성이 적에게 짓밟히게 된 상황에서 공황 상태에 빠진 한양 백성들은 궁궐로 몰려가 절대 사수를 부르짖었고, 선조가 결국 도망치듯 도성을 빠져나가자 궁궐과 관아를 불태우며 화풀이를 했다. 고니시의 일본군은 선조가 한양을 떠난 지 사흘 만에 무혈입성했다. 그리고 대오를 정비한 다음 고니시군은 선조를 쫓아 평안도로,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는 함경도로, 구로다 나가마사의 군대는 황해도로 방향을 정한 다음 계속 진격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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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생을 그린 문학 [회본태합기]에 삽입된 선조 피난 행렬 삽화.



선조 일행은 갖은 고생을 하며 개성을 거쳐 평양에 들어갔다. 평양성은 한양성과 달리 이중 삼중으로 성벽이 쳐져 요새화되어 있고, 대동강이라는 장벽도 있었으므로 이를 거점으로 삼아 반격을 노릴 만 했다. 하지만 워낙 병력이 부족해서 성벽 가장자리 나무에 옷을 걸어 병사처럼 보이게 했으며, 가뭄 때문에 대동강 강물이 많이 줄어서 군데군데 걸어서 건널 수 있는 곳까지 있음이 불안요소였다. 도원수 김명원은 도순찰사 한응인, 경기감사 권징, 유도대장 이양원등과 함께 1만 3천 명이 임진강을 방어선으로 진을 쳤으며, 전라 감사 이광, 충청도 순찰사 윤선각, 경상도 순찰사 김수 등이 남도의 5만 병력을 모아 북진 중이었다. 또한 금강산의 유정(사명당), 전라도의 고경명등도 각자 의병을 모집해 근왕(勤王)을 내세우며 출정 중이었기에 평양의 조정은 한양 수복의 희망을 품을 만도 했다. 5월 6일에는 이순신의 수군이 옥포에서 첫 승전을 거두었다는 낭보도 들렸다.

하지만 희망은 다시 짓밟혔다. 일본군의 유인 작전에 걸려든 임진강 수비군이 5월 17일에 참패했으며, 남도 연합군도 6월 5일과 6일에 용인과 광교산에서 잇달아 패배한 것이다. 이렇게 되자 고경명군도 북상을 포기하고 호남을 구하기 위해 발걸음을 돌렸다. 선조는 한편으로 이덕형을 명나라에 보내 파병을 요청하고, 자신은 다시금 파천하였다. ‘임진강 방어선’은 다시 ‘대동강 방어선’으로 끌어올려져 임진강에서 패배하고 온 김명원과 한응인, 그리고 도순찰사로서 평안도에서 병력을 모으고 있던 이원익과 좌의정 윤두수등이 평양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6월 14일, 적진을 야습하려던 것이 그만 왕성탄(대동강의 한 여울목)의 얕은 여울을 적에게 알려주는 결과를 줌으로써 고니시군이 일제히 강을 건너오자 모두 평양을 비우고 달아나고 말았다.



평양에서 멈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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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을 점령한 고니시 유키나가는 더 이상 선조를 추격하지 않고 평양에 머물렀는데, 이것은 임진왜란의 최대 수수께끼 중 하나다.



개전 2개월 만에 평양까지 함락되었으니, 이제는 끝장이 난 듯했다. 국토의 끝에서 끝인 의주까지 피난한 선조는 한양을 떠나기 직전 벼락치기로 세자를 삼았던 광해군에게 분조(分朝)를 맡아 강원도 쪽으로 가도록 하고, 자신은 명나라의 허락을 얻어 요동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유성룡, 윤두수 등의 극렬한 반대 속에 실천은 못했는데, 묘하게 평양을 점령한 고니시군이 더 이상 선조를 추격하지 않고 그해 가을과 겨울을 내내 평양에서 보내고 있었으므로 파국에는 이르지 않았다.

고니시군의 평양에서의 머무름은 임진왜란을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 계속 논란이 되는 이 전쟁의 최대 수수께끼 중 하나다. 많은 경우 이순신의 활약을 이유로 든다. 일본군은 원래 부산에 상륙한 육군이 한반도를 종단해 치고 올라가고, 수군은 전라도를 돌아 서해로 올라간다는 ‘수륙병진책’을 계획했는데, 육전은 자신들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잘 되었으나 수군이 뜻밖에 이순신에게 가로막혀 서해안으로 진입할 수 없었고, 따라서 필요한 보급을 얻을 수가 없어 발이 묶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장기적으로는 맞는 말이지만, 이순신이 한산도에서 일본 수군을 궤멸시키고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한 때는 7월 8일로 고니시가 평양에 입성한 한참 뒤의 일이었다. 또 평양에는 군량미 10만 석이 쌓여 있었고, 일본군이 조선 백성들에게 실시한 행정체제에 의해 세금도 걷고 있었기에 당장은 군량 사정이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왜 10일이면 도착할 거리에 있던 의주의 선조를 내버려 두었을까?

생각해 볼 수 있는 한 가지 해답은 군량 말고도 그럴 형편이 안 되었으며, 정치적, 전략적 고려가 모두 작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고니시의 일본군은 부산에 상륙한 뒤 별다른 병력 보충 없이 전투를 거듭하며 평양까지 올라갔다. 살인적인 행군으로 이미 한양에 입성했을 때 병사들이 온통 발이 부르터서 어기적거렸다는 기록을 보면, 평양쯤에서는 기진맥진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대동강변에 진을 친 고니시군이 불과 5, 6천밖에 되지 않아서 평양 수비군이 야습을 감행했다는 기록도 있다. 즉 식량 사정은 나쁘지 않았으나, 고니시군은 좀 쉬면서 재정비할 시간이 절실했다.

그리고 아마도 일본의 본래 전쟁 목표는 한양에서 조선 왕을 포위하고 항복을 받아내고는, 조선군까지 합친 병력으로 명나라를 치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본의 아니게 한반도를 종단하며 평양까지 올라오게 되었고, 여기서 계속 밀어붙이면 선조가 명나라로 망명하거나 한 상태에서 명군과 맞닥뜨릴 가능성이 있었다. 조선군의 합세가없어도 과연 명나라와 전쟁할 수가 있을 것인가?어차피 명나라 정벌은 무리였음을 인정하고, 조선 및 명나라와 교섭해 영토를 더 얻는 선에서 마무리 짓는 게 낫지 않을까? 고니시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평양에서 발을 멈춘 채로 있었을 수 있다.



‘세 명의 장군’, 일본군을 밀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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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표준영정.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든 일본군의 열화 같은 공세가 일단 주춤하자, 곧 그들은 ‘세 명의 장군’의 손으로 애써 차지한 조선 땅에서 밀려내려가게 된다. 첫 번째는 바로 이순신 장군이었다. 옥포 해전에 이어 5월 29일 사천포, 6월 2일 당포, 6월 5일 당포, 7월 8일 한산도, 7월 10일 안골포, 9월 1일 부산포까지 연전연승을 거두면서 일본 수군의 서방 진출을 완전히 틀어막아 버렸다. 조선 육군을 연패시킨 병력 부족 문제는 수군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한산대첩이나 이후의 명량대첩에서 모두 적은 수의 함대로 압도적 다수의 적 함대를 격파했는데, 사거리가 월등히 긴 총통과 육중한 조선 전함의 파괴력, 빠른 방향 전환 능력을 적절히 활용하며 일본 함대의 약점을 파고들었기 때문이었다. 본래 일본 배들은 조선 배들보다 빠르다. 그러나 유인작전에 걸려 조선 함대를 쫓다가 갑자기 돌아서서 총통으로 사격하니, 여기저기 부서지고 불타는 자신들의 배가 장애물이 되어 퇴각이 어려워진다. 반대로 전진하여 접전하려 해도 판옥선이나 거북선에는 씨름 선수에게 일반인이 덤비는 꼴이다. 게다가 일본의 함대란 여러 다이묘들이 마련한 혼성함대였기에 위기 상황에서 질서가 잡히지 않아 우왕좌왕하느라 더욱 피해가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되자 일본의 수륙병진책은 완전히 실패했고, 잘못하면 조선과 일본 본토 사이의 교통마저 끊길 위험이 있었다.

두 번째는 이여송장군이었다. 본래 일본인들은 명나라 군대를 가볍게 여겼다고 한다. 바로 얼마 전까지 왜구로서 명나라 해안지대를 공략해 보니 거의 무인지경으로 휘저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7월 15일에는 요동 부총병 조승훈의 선발대를 격파하고 평양을 지켜내기도 했다. 그러나 12월에 압록강을 건넌 이여송의 5만 명군은 차원이 달랐다. 이여송은 젊은 나이에 여진족과 몽골족의 반란을 진압한 경력이 있었고, 그가 이끄는 요동 기병은 정예였다. 그리고 “고니시에게 조총이 있으면, 이여송에게는 대포가 있었다.” 그는 김명원의 조선군과 유정의 승군까지 포함한 병력으로 1593년 1월 초하루부터 평양성을 두들겨 부쉈는데, 불랑기, 호준포, 멸로포 등을 동원하여 집중포화를 퍼부었다. 결국 고니시는 평양에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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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해전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동장군’이 있었다. 일본은 조선보다 덥고 습한 땅이었고, 그 중에서도 침공 주력군이 살던 구슈는 일본에서도 가장 더운 곳이었다. 조선 북녘의 추위는 그들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1592년 겨울, 프로이스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저와 제 부하들 전원이 동상에 걸렸습니다. 제대로 걷지도 못할 지경입니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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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대첩을 그린 병풍.



혼을 빼는 추위에 지원 병력은 오지 않고, 명군이 대거 진입해 들어온데다 조선군도 이제는 만만찮게 반격하며, 의병들이 각지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일본군은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사실 초기에는, 공포에 질린 데다 그동안 조정에 품은 불만도 한몫하여 일본군에게 협조하는 조선 백성이 적지 않았으며, 일본군은 자국에서처럼 다이칸쇼(代官所)를 두고 일부 조선인들에게 일본의 벼슬을 주어 점령지를 통치했다. 함경도처럼 평소 조정에 대한 불만이 컸던 곳에서는 회령, 경성, 갑산 등에서 반란이 일어나 그곳 관리들을 일본군에게 넘겼으며, 그쪽으로 피난했던 임해군순화군두 왕자도 그들의 손으로 넘겨졌다. 하지만 겨울을 지나며 일본군의 기세가 꺾이고, 의주에 선조가 건재한 데다분조 활동 중이던 광해군의 독려도 한몫하여 전국적으로 일본에 저항하는 백성들의 활동이 활발해진다. 결국 일본군은 일제히 후퇴하여 한양, 경기, 경북을 차례로 포기하고 영남 남해안의 교두보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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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대첩을 그린 민족기록화. <출처: 전쟁기념관>



사실상 이 전쟁에서 조선군의 작전권을 접수한 명군은 이여송이 평양 수복 후 기세 좋게 남하하다가 벽제관에서 역습을 당한 뒤로 전쟁 수행 열의가 가셨으며, 심유경등이 고니시와 비밀 회담을 한 결과 일본군이 질서 있게 퇴각하고 명군은 그들을 느릿느릿 ‘쫓는’ 형태로 일본군의 남하가 진행되었다. 일본 측 자료에 따르면 심유경은 고니시에게 “명나라 입장에서는 굳이 조선 땅을 조선 임금이 다스릴 필요가 없다. 명나라를 넘보지 않을 것을 약속하면 영토권을 최대한 보장하겠다” 등의 언질을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조선군이 일본군을 맹렬히 추격하려고 하면 명군에 의해 제지되곤 했다. 그래도 조선군은 일본군과 불꽃 튀기는 대결을 몇 번이고 벌였는데, 1593년 2월 12일의 행주산성 전투 와 6월의 2차 진주성 전투가 그 예였다. 진주성은 일찍이 1592년 10월에 전라도로 진출하려던 일본군을 맞아 싸워 격퇴한 곳이었는데, 히데요시는 철수할 때 철수하더라도 진주성에만은 반드시 복수하라고 지시했다. 그리하여 의병장 김천일등이 분전했으나 결국 10일 만에 함락되고, 6만여 군민들도 광분하는 일본군에게 학살되었다. 이처럼 치열하고 처절한 싸움은 이미 조선인과 일본인은 원수가 되었다는 뜻을 나타냈다. ‘조선을 신속히 복속시키고, 조선군을 흡수한 병력으로 명나라를 친다’는 히데요시의 당초 구상은 이 시점에서 완전히 물거품이 된 것이다. 결국 7월에 선조가 한양에 환도하고, 10월에 잡혀 있던 임해군, 순화군이 풀려나면서 임진왜란의 1막은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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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대첩을 그린 민족기록화. <출처: 전쟁기념관>





참고문헌 : [조선왕조실록]; 이순신, [난중일기]; 조경남, [난중잡록]; 신경, [재조번방지]; 유성룡, [징비록]; 조원래, [임진왜란사 연구의 새로운 관점], 아세아문화사, 2011; 한일문화교류기금·동북아역사재단 편, [임진왜란과 동아시아세계의 변동], 경인문화사, 2010; 한일관계사연구논집 편찬위원회 편, [동아시아 세계와 임진왜란], 경인문화사, 2010; 최관, [일본과 임진왜란], 고려대학교출판부, 2003; 민승기, [조선의 무기와 갑옷], 가람기획, 2004; 이순신역사연구회, [이순신과 임진왜란], 비봉출판사, 2005; 황원갑, [부활하는 이순신], 마야, 2006; 송복, [서애 유성룡, 위대한 만남], 지식마당, 2007; 버나드 몽고메리, [전쟁의 역사], 책세상, 2004; 루이스 프로이스, 국립진주박물관 편, [프로이스의 <일본사>를 통해 다시 보는 임진왜란과 도요토미 히데요시], 부키, 2003; 中野等, [文祿ㆍ慶長の役], 吉川弘文館, 2008; 기타지마 만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 경인문화사, 2008; 최두환, [임진왜란 시기 조명연합군 연구], 경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0; 김만호, “임진왜란기 일본군의 함경도 점령과 지역민의 동향”, 역사학연구, 제38집, 2010. 2; 민덕기, “임진왜란의 '전후처리'와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동”, 한일관계사연구, 제36집, 201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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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규진 | 서울교육대학교 교수/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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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2.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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