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명청전쟁 - 화(華)와 이(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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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399회 작성일 16-02-07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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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장성. 명은 오랑캐의 위협을 막기 위해 북방에 성벽을 쌓아 흩어져 있던 성벽과 요새들을 하나 둘씩 이었고, 이로써 오늘날 만리장성의 모습이 갖춰지게 된다. <출처: getty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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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표


명청전쟁 개요

전쟁주체


명 vs 후금(청)

전쟁시기


1618~1662

전쟁터


랴오둥 반도, 중국 내륙

주요전투


사르후 전투, 영원성 전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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쫓겨난 한족, 중원으로 돌아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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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의 초대 황제, 주원장. 주원장은 양쯔강 이남에서 시작하여 원을 몰아내고 1369년에 남경에 도읍한 명(明) 왕조를 창건하였다.



12세기 초, 북송의 수도인 개봉(開封,카이펑)이 무너지고 여진(金)이 현재의화이허[淮河, 양쯔강, 황허와 함께 중국의 3대하로 불리는 강] 이북을 차지하자 스스로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을 하던 한족은 큰 충격을 받았다. 군사력을 키워 다시 북부를 되찾아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지만 남부로 쫓겨 간 남송은 실질적으로 북부를 찾을 능력이 없었다. 이때 등장한 것이 주희(朱熹, 1130~1200)의 이기론(理氣論)이다.

남송의 학자인 주희는 이(理)와 기(氣)에 대한 개념을 당시의 국제정세에 대입시켰다. 그의 이론 안에서, 만물의 기본이 되는 원리인 이(理)는 한인(漢人)들을 상징하는 화(華)가 되었고 원리에 종속되어 움직이는 ‘힘’인 기(氣)는 오랑캐를 뜻하는 이(夷)가 되었다. 사실, 화이(華夷)의 개념은 이미 춘추전국시대부터 생겨난 개념으로 주자가 만든 것은 아니지만 주자는 자신이 살던 시대의 상황, 즉 문명의 중심인 중화가 강성한 오랑캐에게 쫓겨서 몰려있는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화이관에 이기(理氣)의 개념을 덧붙인 것이다. 당장은 기운(氣)이 왕성하여 원리(理)를 누르고 있지만 원리가 기운을 다스리는 것이 우주의 질서이니 곧 질서가 회복될 것이라 한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오랑캐가 강성한 것처럼 보이지만 곧 한족의 힘이 다시 왕성해져 중원을 회복한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주희의 바람과는 달리 ‘오랑캐’들의 힘은 약해지지는 않았다. 여진 금나라의 뒤에는 보다 훨씬 강력한 칭기즈칸[成吉思汗, 1162~1227]의 몽골이 있었다. 몽골의 기마군은 서하(西夏)와 금을 무너뜨리고 이어 1279년에 남송마저 무너뜨렸다.

한인들이 중원을 회복한 것은, 그후로도 100여년의 시간이 지나, 일개 농군이자 평범한 명교(明敎) 신도였던 주원장(朱元璋, 1328~1398)에 의해서였다. 대부분의 중국 왕조들이 북방에서 시작하여 중원을 통일한 것에 비해 주원장은 양쯔강 이남에서 시작하여 몽골의 (元)을 몰아내고 1369년에 남경(南京, 난징)에 도읍한 (明) 왕조를 창건하였다. 1127년에 개봉이 함락된 후 252년만에 한족이 남북중국을 아우른 통일왕조를 세운 것이다.



‘오랑캐’의 위협, 불안한 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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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락제. 영락제는 명의 수도를 남경에서 연경, 즉 지금의 북경으로 옮기고 몽골에 대한 정복을 단행하는 동시에 몽골족들이 서로 싸우게 하는 이이제이의 정책을 추진했다.



몽골을 몰아내고 나라를 세운 명나라는 당연히 북방의 위협에 민감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몽골은 여전히 상당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미 제국을 세워보았던 몽골의 귀족들은 여전히 봉건적인 권력을 유지하며 명나라에 대한 위협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명나라 초기에 태조 주원장의 측근인 장군 서달(徐達, 1332~1385)이 네 차례, 영락제(永樂帝, 1360~1424) 주체(朱逮)는 일곱 번이나 북벌을 감행하여 원나라의 복원을 꾀하는 몽골세력을 소멸시키려고 했다.

특히, 명의 3번째 황제인 영락제는 유목민들에 대한 적극적 전진전략의 일환으로 명나라의 수도를 남경에서 연경(燕京), 즉 지금의 북경으로 옮긴다. (영락제가 이토록 적극적이었던 이유는 스스로가 북쪽에서 성장하였고 14세기 말 북원(北元)과의 치열한 전쟁을 겪었던 세대였기 때문이다.) 영락제는 몽골에 대한 정복을 단행하는 동시에 몽골족들이 서로 싸우게 하는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정책을 추진했다.

영락제는 북경 북쪽으로부터 요동 북쪽까지 널리 분포한 몽골세력인 우량하 [兀良哈, 우량카이, ‘오랑캐’란 말이 여기서 나왔다고 전해진다]의 군장들에게 작위를 내려주고 교역특권과 함께 관대한 대우를 해줌으로써 그들을 서쪽의 오이라트[衛拉特]와 북부의 타타르[韃靼]에 대한 방벽으로 삼고자 하였다. 하지만, 적극적인 정책과 달리 영락제 당시 명조의 북방국경은 오히려 후퇴하였다. 태조 주원장이 현재의 다닝[大寧]과 오르도스 이북으로 밀어 올렸던 북방변경을 포기하였고 이 지역은 다시 몽골 부족들의 차지가 되었다.

명조의 반복되는 정벌에도 유목세력은 강대함을 유지하였다. 그리고 몽골세력간 다툼에 대한 명조의 개입은 군사적/방어적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면서 오히려 몽골의 대명 투쟁을 격화시키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다. 명 영락제 19년에 신하인 하원길(夏原吉)이 “이번 출정으로 얻은 것은 거의 없고 군마와 축적된 군량의 8-9할이 없어졌습니다. 재해가 계속되어 농사를 망쳤으며 나라 안팎이 모두 곤하여졌습니다”하며 친정을 하지 말 것을 간할 정도였다. 이처럼 명의 북방 정벌은 별로 소득이 없는 일이었으며 그 뒤를 이은 선덕제(宣德帝, 1399~1435)는 대신 군사요새인 보(堡)를 많이 지어 북방에서의 위협에 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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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영종 정통제. 토목보의 전투에서 몽골의 포로가 되는 망신을 당한다.



명의 소극적 북방정책은 명의 6대황제인 영종 정통제(正統帝, 1427~1464)에 이르러 본격화된다. 정통제는 선덕제의 방어선 강화전략을 그대로 채택하여 방어선을 서부 협서(陜西)와 감숙(甘肅) 지역까지 연장한다. 그러나 어린 나이(8세)에 즉위한 정통제는 통치에 있어 관료들보다는 측근의 환관들에게 의존하는 경향을 보였고 결국 환관인 왕진(王振)의 말을 믿고 1449년에 50만 대군을 이끌고 계속된 오이라트의 약탈을 응징하기 위해나섰다. 그러나 이 대군은 길도 모르는 사막으로 들어갔다가 물과 식량이 끊기게 되고 결국 토목보(土木堡)라는 요새에서 자칭 북원의 태사(太師)라 칭하는 에센타이시[也先太師]의 2만 몽골군에게 전군이 함몰된다. 정통제는 황제로서 포로가 되는 치욕(토목의 변)을 겪는다.

그러나 북방을 향한 공세가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명의 성화제(成化帝, 1447~1487)가 청수(淸水,칭수이)에서 영하(寧夏,닝샤) 간 991km의 성을 짓는 등 요새와 성 쌓기에 집중하였다. 계속되는 성 쌓기로 북방에 흩어져 있던 성벽과 요새들이 하나 둘씩 연결이 되었고 오늘날 보이는 만리장성이 완성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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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만리장성(빨간 색 선 부분).



참고문헌 : 김영숙, [조천록을 통해 본 明淸交替期 遼東情勢와 朝明關係], 인하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1; 김종원, [丁卯胡亂시의 後金의 出兵動機], 東洋史學硏究, Vol. 12·13, 1978; 남의현, [15세기 북방정세와 明의 邊境政策의 再檢討], 인문과학연구, Vol. 26, 2011; 남의현, [明末 遼東政局과 朝鮮], 인문과학연구, Vol. 26, 2010; 부남철, [조선시대의 대외전쟁과 유교적 和·戰論], 동양정치사상사, Vol.5 No.2, 2005; 서정흠, [明末淸初 누르하치의 대명관계와 그 성격], 역사교육논집, Vol.18 No.1, 1993; 유지원, [사르후(薩爾滸) 전투와 누르하치], 명청사연구, Vol.13, 2000; 蔡暻洙, [明淸交替期 海上權力의 動向 - 鄭成功 勢力의 反淸活動을 中心으로], 서울대 동양사학과 논집, Vol.29, 2005; Jonathan D. Spence, [The Search for Modern China], W.W. Norton & Company, New York, NY, 1990; [명사(明史)]; [청태조무황제실록(淸太祖武皇帝實錄)].






김성남 | 안보·전쟁사 전문가
글쓴이 김성남은 전쟁이 인간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 UC 버클리 동양학과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국제학 석사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에 진학하여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전쟁으로 보는 삼국지], [전쟁 세계사] 등이 있으며 공저로 [4세대 전쟁]이, 역서로 [원시전쟁: 평화로움으로 조작된 인간의 원초적인 역사]가 있다.


발행2012.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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