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무너지는 명나라 - 명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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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32회 작성일 16-02-07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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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표


명청전쟁 개요

전쟁주체


명 vs 후금(청)

전쟁시기


1618~1662

전쟁터


랴오둥 반도, 중국 내륙

주요전투


사르후 전투, 영원성 전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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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 동쪽 지역 장악, 내륙으로



사르후에서 후금이 명의 본격적인 토벌시도를 보기좋게 무찌른 후 후금과 명의 처지는 180도 달라졌다. 후금의 흥기를 변방 오랑캐의 반란 정도로 얕잡아 보았던 명은 수세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고 후금은 승세를 타고 적극적인 공세에 나섰다.

당시 요-심(遼瀋, 요양-심양,랴오양-선양) 지역은 넓은 평야지대였고 본격적인 인구와 영토의 확장에 필요한 농업지역이었다.그 중요성을 알고 있던 누르하치는 이미 자이판과 사르후에 요새를 쌓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사르후 전투의 승리가 요-심지역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었다.

사르후에서의 승리 후 누르하치는 자신이 구축한 자이판성을 전진기지 삼아 요동의 명세력을 소탕하고 여진세력 중 마지막까지 자신에게 복속되지 않고 있던 예허부를 쳤다. 사르후 전투 이후 누르하치의 군은 바쁘게 움직이면서 1619년 6월에 개원성(開原城), 다음 달에는 철령성(鐵嶺城)을 점령하고 그리고 8월에는 예허부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이어 1620년 요양과 심양지역으로 나가면서 요동의 대도시라고 할 수 있는 요양과 심양을 떨어뜨리고 요양-심양과 연계된 주변의 대소 요새 70곳도 함락시켰다. 이로써 후금은 요하(遼河, 랴오허강) 동쪽 지역을 모두 장악하였으며 1621년 4월에 수도를 허투알라에서 요양으로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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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양을 공격하는 청군. 1621년에 누르하치는 요양을 점령하였고 요양은 1625년까지 후금의 수도로서 기능한다.



한편 요동지역에서의 대패에 충격을 받은 명 왕조는 새로운 토벌군을 조직할 여력이 없었고 요서에 있는 요새들을 보강하여 후금의 침공에 대비하고자 하였다. 이중 영원성(寧遠城)은 요서의 중진(重鎭)이었는데 원숭환(袁崇煥. 1584~1630)이 그 수비를 맡게 되었다. 광동 출신의 원숭환은 과거에 급제하기 전 중국에 거주하고 있던 선교사들을 통해 많은 서양문물을 보고 배웠는데 특히 화포의 배치와 사용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원숭환은 홍이포(紅夷砲)라 불리우게 되는 대포를 도입하여 자신이 지키고 있던 영원성에 배치하였다. 그러나 요서에서의 수비정책을 주도하였던 손승종(孫承宗)이 실각하고 고제(高第)가 조정의 수반으로 등장하자 명의 수비정책은 더욱 소극적으로 바뀌어 만리장성 이북의 모든 야전군은 산해관(山海關) 안쪽으로 옮기라는 명령이 내려진다. 원숭환은 이 명령을 사실상 거부하고 영원성의 수비를 더욱 강화하였지만 그의 휘하에는 병력 1만 정도밖에 없었다.

명나라의 야전군 철수 소식을 들은 누르하치는 1626년에 자칭 20만대군(실제로는 10만)을 이끌고 심양을 떠나 영원성으로 진격한다. 일단 원숭환은 성밖의 사람들을 안으로 불러들이고 성밖의 모든 가옥과 건물을 불태운다. 청야(淸野)작전의 일환임과 동시에 화포를 자유롭게 활용하려는 목적에서였다. 아울러 탈영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장성을 지키고 있던 장수들에게 만약 영원성에서 탈영병이 오거든 지체없이 참수하라는 서신을 보냈다.

영원성에 도착한 청군은 바로 공격을 개시하였고 이틀간 주야로 싸움이 그치지 않았다. 포의 성능과 사각(射角)에 대하여 면밀히 연구를 한 원숭환인 누르하치가 비교적 먼 곳에서 정예호위병에 둘러싸여 있음에도 해당 위치에 대한 사격을 명하였고 이로 인하여 누르하치의 호위병 다수가 죽고 누르하치 역시 중상을 입게 된다. 누르하치는 회복하지 못하고 1626년 9월 30일에 사망한다. 이에 그의 여덟째 아들인 홍타이지가 후금의 새로운 칸으로 등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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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6년 후금군의 영원성 공격. [청실록]의 영원성 전투 삽화.





조선의 항복



후금의 2대 칸으로 등극한 홍타이지는 누르하치의 한인차별정책을 바꾸어 한인들을 우대하고 관료로 등용하기 시작하였다. 한인들을 계속 차별하다가는 한인들과 서로 융합하지 못하고 한인들의 반란으로 밀려난 원조(元朝)의 전철을 밟게 된다는 우려가 작용하였다. 아울러 홍타이지의 다른 우려사항은 요동반도 근해와 조선의 도서에 주둔한 모문룡(毛文龍, 1576~1629)등의 명군과 함께 배후에 있는 조선이었다.

명-후금 전쟁에 가급적이면 개입하지 않으려고 하던 광해군 정권이 1623년의 쿠데타로 인하여 몰락하고 향명배금(向明排金)을 공식적인 정책으로 삼은 인조(仁祖, 1595~1649)정권이 들어섰다. 인조반정은 명과 후금 둘 다에게 지대한 관심사가 되었다. 전쟁의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명나라에서는 일단 만력제가 조선국왕으로서 책봉한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를 빼앗은 것을 불법찬탈로 간주하였고 때문에 인조를 퇴위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일시 비등했다. 반정이후 인조정권이 북경에 사신을 파견했을 때에도 주요 관료들이 인조반정에 대하여 상당히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했다. 결국 인조정권은 요동 근해의 섬에 주둔하고 있던 모문룡을 통하여 정권의 정당성을 인정받으려고 하였고 책봉을 받는 조건으로 이전 광해군 정권이 거절하였던 둔전과 염전의 설치를 허락하여 주었다. 모문룡은 더 많은 것을 받아내려는 욕심 때문에 인조정권의 책봉노력을 적극 도와주었고 결국 인조는 책봉을 받는 데 성공한다.

영원성에서 패배하고 창건주인 누르하치의 사망으로 다소 어수선했던 분위기를 홍타이지는 조선에 대한 침략으로 상쇄하고자 하였다. 조선을 쳐서 명나라편을 들지 못하게 하고 동시에 모문룡 등의 명 주둔군에 대한 소탕 목적도 있었다. 바이러 아민(阿敏) 등이 지휘하는 3만의 후금군은 1627년에 조선을 침공한다. 이괄의 난의 여파로 북방의 수비가 허술해져 있던 조선은 의주와 정주 등이 함락당하는 등 잠시 위기를 맞았으나 정봉수(鄭鳳壽, 1572~1645) 등이 일으킨 의병으로 인하여 후금군의 후방이 위험해지자 후금은 조선에게 명의 연호를 쓰지 않을 것, 그리고 홍타이지와 인조간 형제맹약을 맺을 것을 약속받고 서둘러 철수한다.



후금은 ‘청’으로, 홍타이지는 ‘황제’의 자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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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의 무장 원숭환은 명청전쟁 당시 영원성 전투에서 후금군에 승리했으나 모반 혐의로 처형되었다.



이 와중에 홍타이지는 새로운 국가의 기반을 다지는 데 집중한다. 중국식의 과거제도를 채택하는 것은 물론 명조의 혼란을 피해서 도망오는 한인들을 보다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병졸들을 이끌고 오는 군관의 경우 매우 후대(厚待)하였다. 이는 더 많은 한인 장수들을 후금쪽으로 끌어들이는 효과를 가져왔다. 심지어 후금의 중신들이 망명해오는 한인 장수들은 ‘질이 좋지 않은 부랑자’들이며 이들을 접대함에 있어 칸의 융숭함이 지나치다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홍타이지의 정책은 압록강 하구와 요동반도 해안지역, 그리고 심지어 산둥성(山东省)의 도서에 배치된 장수들까지 후금으로 끌어들여 후금이 취약한 해안지대를 안정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때 끌어들인 한인장수들이 많아 홍타이지가 2개의 한인 기(旗)를 따로 만들 정도였다.

한편 홍타이지는 명나라에 대한 전면적 공략을 재개하여 1629년에는 만리장성을 돌파하고 북경을 포위한다. 영원성을 지키고 있던 원숭환은 부랴부랴 그의 군사를 서진(西進)시켜 후금군을 격퇴한다. 원숭환의 군이 북경공격을 막아내기는 하였지만 후금군이 117일간 하북(河北, 허베이) 지방을 휩쓸면서 엄청난 보물과 물자를 약탈하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아울러 간신이자 내관인 위충현(魏忠賢, ?~1627)이 1627년 숭정제에게 주살된 이후에도 명 조정의 혼란은 계속되어 동북방 방어의 주축인 원숭환이 처형된다. 명의 약화와는 반대로 청나라는 1631년에 자체적으로 홍의포(紅衣砲)를 제작하였고 1633~4년에는 원숭환에게 주살당한 모문룡의 해상전력을 거의 흡수하였다. 이미 일부 군진만 제외하고 명의 방어체계는 와해된 것과 다름없었다. 이 당시 인조의 사신으로 북경에 사행(使行)을 갔던 잠곡 김육(金堉, 1580~1658)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적병이 6월 13일에 백마관을 통해서 들어와 창평주(昌平州), 탁주(涿州) 등 10여 현을 함락하였다고 합니다. 이곳은 모두 내지로, 성은 모두 토성이고 수비하는 군사도 적습니다. 그러므로 적들이 허술한 틈을 타고 승승장구하여 들어와 사람과 가축을 약탈한 것은 헤아릴 수 없는데, 장정은 붙잡아 가고 노약자는 목을 자르며, 지나간 성읍은 모두 불살랐습니다. 적들은 왔다 갔다 하면서 남쪽으로 내려왔다가, 동쪽을 향해 가서 옥전(玉田) 등지를 노략한 다음 영평부(永平府)에 도착하였으며, 9월 4일에 냉구관(冷口關)을 경유하여 나갔습니다. 천하의 군사 16~17만 명이 한꺼번에 구름처럼 몰려들었는데도 감히 맞서 싸우지를 못하고 단지 뒤를 옹위한 채 따라만 가서, 관군은 손상된 바가 없으며, 적병도 꺾이지 않았습니다.

홍타이지는 앞서 말한 만몽일체 정책을 더욱 활발히 추진하여 청 황가와 몽골 왕공들과의 혼인동맹을 강화했다. 청군이 산해관으로 들어가기 전(1644)까지 여진족 황실의 여인 27명이 몽골의 왕공귀족들과 혼인하고 반대로 57명의 몽골여인들이 만주의 황가와 귀족들과 혼인했다. 이러한 혼인동맹은 중원을 도모하기 전에 몽골과의 동맹을 굳건히 하려는 정책이었다.

명은 여진족과 몽골의 동맹을 막으려고 무진 애를 섰다. 그러나 1634년 몽골의 마지막 대칸이었던 링단-칸[林丹汗, 1588~1634]이 죽고 1635년에 링단-칸의 아들 콩구르가 홍타이지에게 항복하고 전국옥새를 바쳤다. 이로써 몽골은 완전히 명으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되고 홍타이지는여진과 몽골을 온전히 하나로 합쳤다. 소위 명나라의 관외(關外) 지역 중 여덟 개의 성만 제외하고는 후금의 영토로 편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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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정제는 무능함과 의심으로 명의 몰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누르하치도 그러하였지만 홍타이지를 비롯하여 후금의 지도층이 원하는 것은 단순히 옛 후금의 영광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중원 전체를 석권하여 새로운 천하를 여는 것이었다. 이를 보다 명확하게 하기 위하여 1636년에 예전의 ‘금’을 연상시키는 ‘후금’이란 이름을 버리고 보다 중국적인 ‘청(淸)’을 국명으로 채택하고 아울러 ‘여진’이라는 호칭 역시 버리고 대신 ‘만주’족이라는 새로운 종족명을 채택한다. 일설에는 명(明)이라는 국호와 국성(國姓)인 주(朱)는 불(火)과 연결이 되는데 행의 원리에 의하면 불이 쇠를 이기므로(火克金)하므로 후금의 금(金)이 명한테 패한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따라서 역시 오행의 원리에 의거하여 물 부수가 들어간 청(淸)으로 국호를 정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홍타이지는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청의 태종(太宗)으로 등극하였다.

청을 세운 태종은 조선과의 형제맹약을 파기하고 군신(君臣)의 관계를 맺을 것을 요구하였다. 인조정권은 청의 요구를 거부하였고 청 태종은 1636년에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한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이다. 비록 광교산 등지에서 일부 승리를 거두기는 하였지만 청군과 싸우러 나온 소위 ‘근왕군(勤王軍)’과 조정의 관병들은 유기적으로 움직이지 않아 청군에게 각개 격파 당한다. 인조는 청태종에게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올리면서 항복하고 명과의 관계를 끊는다.

명나라도 계속되는 전쟁으로 인하여 사회경제적으로 파탄지경에 이르렀다. [조천록]에 따르면 전란으로 인명ㆍ재산 피해를 크게 본 지역들에는 기근이 크게 들었고, 난주(灤州)ㆍ영평(永平)ㆍ산해(山海) 일대가 특히 심각하였다. 북경 이동 지역에는 1637년 1월부터 윤 4월까지 비가 오지 않아 농사가 거의 불가능하였고 수많은 백성들은 굶주리다 못해 자식을 팔고 유랑하였다. 이러한 상황이 되면 과거에 그러하였듯이 중국에서는 참다 못한 농민들의 반란이 일어난다. 자연재해와 청의 침탈이 겹치면서 일어난 반란은 소소한 반란이 아니라 큰 세력을 형성하고 왕조를 위협하는 수준의 대반란이다.

이중에 가장 두드러진 것이 섬서(陕西, 산시)에서 일어난 이자성(李自成, 1606~1645), 그리고 사천(四川, 쓰촨)에서 장헌충(張献忠, 1606~1646)이 일으킨 반란이었다. 이자성은 섬서의 기근을 견디다 못한 고영상(高迎祥, ?~1636)이 일으킨 반란군에 들어가 뛰어난 활약으로 그 군의 선봉장이 된다. 고영상이 죽은 후 반란군의 수령이 된 이자성의 군은 지방군과 정부군을 격파하고 1644년에는 북경 근방에 도착한다. 숭정제(崇禎帝, 1611~1644) 주유검(朱由檢)은 국경에서 두 개의 군을 불러들여 이자성의 반란군을 막으려 하지만 이들이 도착하기 전에 반란군이 북경에 난입한다. 이자성의 반란군이 북경에 들어왔다는 말을 들은 숭정제는 공주 둘이 욕을 당하기 전에 칼로 찌르고 자금성(紫禁城) 뒤의 경산(景山)으로 들어가 자결한다. 청의 발흥 때문에 명이 약해지기는 하였지만 정작 북경을 함락시킨 것은 청군이 아니라 반란군 수령인 이자성이었다. 끝없는 의심으로 충신들을 주살하며 명을 약화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숭정제는 이렇게 죽었다.



참고문헌 : 김영숙, [조천록을 통해 본 明淸交替期 遼東情勢와 朝明關係], 인하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1; 김종원, [丁卯胡亂시의 後金의 出兵動機], 東洋史學硏究, Vol. 12·13, 1978; 남의현, [15세기 북방정세와 明의 邊境政策의 再檢討], 인문과학연구, Vol. 26, 2011; 남의현, [明末 遼東政局과 朝鮮], 인문과학연구, Vol. 26, 2010; 부남철, [조선시대의 대외전쟁과 유교적 和·戰論], 동양정치사상사, Vol.5 No.2, 2005; 서정흠, [明末淸初 누르하치의 대명관계와 그 성격], 역사교육논집, Vol.18 No.1, 1993; 유지원, [사르후(薩爾滸) 전투와 누르하치], 명청사연구, Vol.13, 2000; 蔡暻洙, [明淸交替期 海上權力의 動向 - 鄭成功 勢力의 反淸活動을 中心으로], 서울대 동양사학과 논집, Vol.29, 2005; Jonathan D. Spence, [The Search for Modern China], W.W. Norton & Company, New York, NY, 1990; [명사(明史)]; [청태조무황제실록(淸太祖武皇帝實錄)].






김성남 | 안보·전쟁사 전문가
글쓴이 김성남은 전쟁이 인간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 UC 버클리 동양학과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국제학 석사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에 진학하여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전쟁으로 보는 삼국지], [전쟁 세계사] 등이 있으며 공저로 [4세대 전쟁]이, 역서로 [원시전쟁: 평화로움으로 조작된 인간의 원초적인 역사]가 있다.


발행2012.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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