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30년 전쟁 - ‘로마제국’은 ‘신성’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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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51회 작성일 16-02-07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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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쟁의 뤼첸 전투에서 스웨덴의 사자왕, 구스타프 아돌프가 전사하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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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표


30년 전쟁 개요

전쟁주체


신성로마제국, 스페인 vs 보헤미아 등 반가톨릭연합, 덴마크, 스웨덴, 프랑스, 네덜란드, 튀르크

전쟁시기


1618~1648

전쟁터


중부 유럽(주로 독일)

주요전투


바이센베르크 전투, 루터 전투, 브라이텐펠트 전투, 뤼첸 전투, 뇌르틀링겐 전투, 로크로아 전투, 얀코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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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쟁은 명목상의 기간으로는 십자군 전쟁이나 백년 전쟁, 그리고 “80년 전쟁”이라고도 불리는 네덜란드 독립전쟁보다 짧다. 그러나 거의 쉬지 않고 전쟁이 치러졌으며 심지어 겨울에도 전투가 벌어졌다는 점을 볼 때, 그리고 동원된 병력과 화력의 규모를 따져 볼 때는 오히려 종전의 전쟁을 압도했다. 그리고 그것은 최후 최대의 종교전쟁이면서, 최초의 근대적 ‘영토전쟁’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서구세계가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길목에, 이 치열하고 복잡한 전쟁사가 자리하는 것이다.



아우크스부르크의 불만



1517년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비텐베르크 교회 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임으로써 불을 당긴 이후, 종교개혁의 불길은 점점 커져서 16세기 내내 유럽을 들불처럼 불태웠다. 그 불길은 전혀 정신적이지만은 않았으며, 폭력과 유혈이 낭자했다. 잉글랜드에서 트란실바니아에 이르는 유럽 땅에서 신교도에 대한, 또는 가톨릭교도에 대한 박해와 학살이 그치지 않았다. 또한,1522년 루터의 영향을 받은 독일의 기사들이 트리어 대주교령을 공격했던 ‘기사 전쟁’, 1524년에서 1525년까지 역시 루터의 영향으로 봉기한 농민들과 기사들이 싸운 ‘독일 농민 전쟁’, 1531년 스위스에서 츠빙글리파 신교도와 가톨릭교도들이 치열하게 싸운 ‘카펠 전투’, 1546년에서 1547년까지 독일 신교파 제후 및 도시들이 신성로마 황제 카를 5세(Karl V, 1500~1558)의 신교 탄압 정책에 항거해 ‘슈말칼덴 동맹’을 맺고 황제 측과 싸운 ‘슈말칼덴 전쟁’, 1562년부터 1593년까지 여덟 차례나 벌어진 프랑스의 ‘위그노 전쟁’ 등 “종교전쟁”도 꼬리를 물었다. 종교만큼 사람들을 격정적으로 만들고, 세상 일을 선과 악으로 단순화하여 ‘악에 맞서서 목숨을 걸고 투쟁’하게끔 부추기는 계기도 없는데다, 당시 종교단체는 막대한 부와 정치권력을 안고 있었으므로 그것을 탈취하려는, 또는 종교를 빌미로 상대 도시/국가를 약탈하려는 세속 권력의 속셈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그토록 많은 피가 흐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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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5년의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화의’ 장면.



종교개혁의 진원지인 독일의 경우, 1555년 9월에 하나의 잠정적인 협정이 맺어짐으로써 사태가 극단을 치닫는 것을(이미 극단이었는지 몰라도) 막았다. 카를 5세를 이어 신성로마 황제가 된 페르디난트 1세(Ferdinand I, 1503~1564)는 아우크스부르크 제국회의에서 개신교와 가톨릭의 대표를 불러 모아 일정한 타협을 모색했으며, 그에 따라 루터파 개신교도에게 가톨릭교도와 같은 권리가 인정되었다. 그리고 ‘각 지역의 주민의 신앙은 지역 통치자의 신앙에 따른다(cuius regio, eius religio)’는 원칙이 수립되었다. 이로써 “하나의 제국, 하나의 신앙”을 고집했던 카를 5세의 노선이 포기되었으며, 지방 영주들이 세속권력만이 아니라 종교권력까지 갖게 됨으로써 황제에 대항할 동기가 감소되었다.

그러나 이 타협에는 불만의 목소리도 많았다. 루터파와 달리 칼뱅파 신교도는 여전히 아무런 권리를 얻지 못했으며, 영주의 신앙을 강제로 따라야 하는 지역민들의 저항도 끝이 없었다. 루터파에게 양보를 했다고는 하지만 기존의 제후가 개신교로 개종하는 일을 차단함으로써 결국 황제는 가톨릭을 후원함을 분명히 했다는 점도 불만 요소였다. 아우크스부르크는 중세 이래 ‘교황의 보호자’로서 가톨릭과 불가분의 관계를 유지해온 신성로마 황제와 소수의 가톨릭 제후들이 이미 주민의 다수가 개신교도로 바뀌어 버린 제국을 통치한다는 정치적인 난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것이다.



전쟁을 부르는 세 개의 혜성



그런데 한편으로 당시의 유럽은 종교가 전쟁을 부추기는 한편, 종교를 빌미로 전쟁을 더 많이 일으키려고 하는 경향이 함께 존재했다. 그리고 그것은 경제, 정치를 놓고 말해도 비슷했다.

16세기 초까지는 지리상의 대발견이 가져온 상업부흥으로 유럽의 경제는 호황이었다. 그러나 중엽부터는 양상이 달라졌다. 대규모의 귀금속이 아메리카에서 유입되면서 인플레이션이 생겨났고, 17세기로 넘어가던 때를 전후해 유럽이 소빙하기에 들며 농업생산력은 크게 떨어졌는데 인구는 마침 급증해 있어서 식량 사정이 심각해졌다. 여기에 흑사병 등의 전염병까지 창궐했다. 당시 유럽 도시 인구의 사분의 삼이 재산이 전혀 없는 무산자였으며, 뉘른베르크의 경우 16세기 중엽에서 말엽까지 4만 5천명이던 주민이 기근과 전염병으로 2만 5천까지 줄어드는 참상을 보였다.

한편 불어난 귀금속을 믿고 사치와 세력 증대를 위해 돈을 물쓰듯 하던 왕후 귀족들은 어느새 자신이 빚더미에 올라 있으며, 농민들의 세입은 크게 줄어든 사실을 발견했다. 이를 극복하고자 그들은 가뜩이나 어려운 농민의 삶을 더욱 어렵게 했는데, 더 가혹한 세금을 물리고, 빚을 빌미로 자유농민의 신분을 농노로 추락시키고, 그리고 전쟁을 벌여 이웃의 물자를 강탈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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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스 이탈리엔이라 불리는 축성술의 예, 네덜란드 그로닝겐.



여기에 군사기술의 발달이 개재되었다. 트라스 이탈리엔(trace italienne)이라 불리는 축성술이 개발되자 공성전에는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병력과 물자가 필요해졌고, 따라서 공격과 방어(어디서나 트라스 이탈리엔을 도입해야만 했으니) 비용이 모두 크게 늘었다. 전격적으로 적의 도시를 함락시키는 일이 어려워지면서 여름철만이 아니라 일 년 내내 병력을 동원하여 포위전을 전개하는 경우도 늘었다. 이렇게 되자 경비는 둘째 치고 늘어난 병력 수요(1550년대에 영국군의 수는 2만, 스웨덴군은 1만이었다. 1650년대에는 그 수가 각각 7만으로 늘었다)를 중세적인 군역 체제가 충당하지 못함에 따라 일부에서는 상비군이 출현했고, 그것을 감당하기 어려웠던 영주들은 전쟁 때마다 병사들을 모집해 용병대를 운용했다. 이 역시 결국에는 돈, 돈, 돈을 필요로 했다. 그래서 당시의 왕후 귀족들은 하나의 전쟁에서 이기고 그 전리품으로 은행 부채와 용병의 급료를 지불하고 나면 다시 빈털터리가 되어 또 전쟁을 벌여야만 하는 꼴이었다.

하지만 훨씬 힘든 쪽은 농민이었다. 전쟁은 그들에게 무거운 세금과 강제 징집을, 그리고 불타 버린 집과 황폐해진 밭, 강간되고 살해된 가족을 남겼다. 이렇게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전쟁이었다! 병력의 수요는 늘 있었으므로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은 용병이 되어 먹고 살았고, 이를 통해 잘 하면 한밑천 잡고 신분 상승까지 누릴 수 있었다. 이렇게 전쟁은 점점 위에서나 아래에서나 필수적인 ‘사업’이 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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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0년경의 전쟁 풍경. <출처: (CC)Annual at wikipedia.org>



여기에 정치적인 긴장이 30년 전쟁의 마지막 밑거름을 마련했다. 신성로마 황제들은 엄밀히 말해 자신의 직할지에서만 세금과 병력 징발을 할 수 있는 봉건영주에 불과했지만, 그 이름에 걸맞게 ‘로마 황제’처럼 단일 통치자로서 제국을 호령할 수 있기를 내내 꿈꿔왔다. 그래서 제후들 일부가 신교도라는 것을 빌미로 그들을 압박하고 영지를 몰수하고 싶어 했으며, 1540년 이후 생긴 예수회는 황제의 야심에 부응해 신교도들을 압박하는 선봉 역할을 했다. 반면 신교 제후들은 반대로 황제의 간섭에서 완전 독립을 꿈꿨고, 그런 목표의식은 가톨릭 제후들도 다르지 않았다.

이렇게제국 내에서 중앙과 지방의 긴장이 날로 고조되는 가운데 국제정치적으로도 역시 긴장이 커졌다. 카를 5세 때 독일과 하나였던 스페인은 이제는 분리되었지만 그래도 같은 합스부르크가문이라는 인연으로 신성로마제국과 연대하려 했다. 그것은 스페인에게서 벗어나려 분투하던 네덜란드와 두 합스부르크 제국을 양쪽으로 상대하던 프랑스를 긴장시켰다. 독일이 가톨릭을 중심으로 하는 더 통일된 국가로 발전할 움직임은 스웨덴이나 덴마크 같은 인근의 신교 국가들로서도 두고만 볼 수 없었다. 17세기 초에는 라인 강, 피레네 산맥, 지중해와 발트 해가 모두 일촉즉발의 긴장으로 덮여 있었다.

그리고 1618년, 무려 세 개의 혜성이 나타났다. 케플러 (Johannes Kepler, 1571~1630)와 갈릴레오(Galileo Galilei, 1564~1642)는 이를 분석하여 과학적인 설명을 내놓았으나, 과학은 과학일 뿐, 뭔가 큰 일이, 끔찍하고 살벌한 일이 벌어지리라는 예감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그 예감은 맞았다.



참고문헌 : 버나드 몽고메리, [전쟁의 역사], 책세상, 2004; C. V. 웨지우드, [30년 전쟁], 휴머니스트, 2011; 메리 풀브록, [분열과 통일의 독일사], 개마고원, 2000; P. R. 파머-J. 콜튼, [서양근대사], 삼지원, 1985; 김용구, [세계외교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6; 이동언, “30년 전쟁과 합스부르크 왕가”, 조선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8; 송요태, “30년 전쟁의 영향에 관한 연구”,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1; 송요태, “30년 전쟁과 구스타프 아돌프”, 육군제3사관학교논문집.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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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규진 | 서울교육대학교 교수/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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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2.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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