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보헤미아의 반란 - 30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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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42회 작성일 16-02-07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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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표


30년 전쟁 개요

전쟁주체


신성로마제국, 스페인 vs 보헤미아 등 반가톨릭연합, 덴마크, 스웨덴, 프랑스, 네덜란드, 튀르크

전쟁시기


1618~1648

전쟁터


중부 유럽(주로 독일)

주요전투


바이센베르크 전투, 루터 전투, 브라이텐펠트 전투, 뤼첸 전투, 뇌르틀링겐 전투, 로크로아 전투, 얀코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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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밖으로 쓰레기를 버리지 마시오’ -사람은?



“이, 이게 무슨 짓이야! 당장 그만둬!”
“사, 사람 살려, 사람 살려!”

1618년 5월 23일, 프라하의 라트신 궁전에서는 기묘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성난 한 떼의 사람들이 발버둥치는 두 사람을 꼼짝 못하게 붙잡고는, 창문 쪽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비명에도 아랑곳없이, 그들을 창 밖으로 냅다 집어던져 버렸다. 집어던진 사람들은 루터파나 칼뱅파를 따르는 제후들이었고, 던져진 사람들은 가톨릭 참사위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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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위원들을 내던지는 장면을 묘사한 판화.



그때까지 독일 신교도 제후들의 황제에 대한 불만은 차곡차곡 쌓여 왔다. 1607년에 도나우뵈르트에서 신구교 분쟁이 벌어지자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을 시켜 가톨릭 편에서 신교도들을 진압하게 한 것과, 이듬해 레겐스부르크 제국회의에서 1552년 이후 신교도 제후들이 구입한 가톨릭 교회의 영지를 몰수하여 교회에 반환하겠다는 황제의 뜻이 천명된 것은, 1608년에 아우하우젠에서 신교도 제후들의 ‘연합’이 결성되도록 몰아갔다. 그러자 이에 대항하여, 1609년에는 가톨릭 제후들의 ‘연맹’이 이루어졌다.

같은 해에 신교도가 압도적인 보헤미아에서는 영주들이 압력을 행사해 새로 신교 교회를 지을 수 있고 가톨릭 영주가 신교도로 개종할 수 있도록 제도를 마련했다. 이는 루돌프 황제(Rudolf II, 1552~1612)의 분노를 불러와, 그 사촌인 레오폴드가 보헤미아로 무력진압에 나섰으나 마티아스(Matthias, 1557~1619)에게 격퇴되었으며 보헤미아인들은 1611년에 마티아스를 새로운 왕으로 옹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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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헤미아 왕으로 옹립된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게다가 1609년에는 클레베-율리히 분쟁이 벌어졌다. 라인 강 하류의 클레베, 율리히, 라벤슈타인 등의 영지를 보유하고 있던 클레베 공 요한 빌헬름(John William, 1562~1609)이 후사 없이 사망했는데, 그 상속자가 모호했던 것이다. 그 지정학적인 위치 때문에 독일의 제후들뿐 아니라 프랑스와 네덜란드, 스페인 등도 과연 새로운 영주가 가톨릭일지, 신교도일지 대단한 관심을 보였으며 이로써 이후 전쟁이 국제전으로 비화하는 불씨가 마련된다.

그런데 보헤미아 신교도들의 영웅으로서 왕이 되고 1612년에는 루돌프에 이어 제국 황제의 지위까지 오른 마티아스는 이후 오히려 친 가톨릭 정책을 폈다. 특히 1609년의 제도개혁에도 불구하고 황제가 브라우나우와 클로스터그라프에 새로 세운 신교 교회를 폐쇄, 파괴하자 신교도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이들은 제후 중 12명을 뽑아 라트신 궁전에서 제후회의를 요구하고 황제의 정책 변경을 촉구했으나, 보기 좋게 묵살되었을 뿐 아니라 관행에 어긋나는 ‘즉시 해산하라’는 지시까지 받았다. 그러자 분노한 그들은 궁전 창에서 가장 악질적인 가톨릭 참사위원들을 내던져 버렸던 것이었다. 잠시 후 참사위원의 비서들도 창 밖으로 짐짝처럼 던져졌다.

참사위원들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으나, 이것은 황제의 분노를 일으킴으로써 30년 전쟁은 이로부터 비롯된다. 보헤미아의 신교도들은 선제후 중에서 유일하게 신교도였던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Frederick V, 1596~1632)를 보헤미아의 새 왕으로 선출했고, 그는 군대를 동원해 보헤미아에 대한 침공을 방어하려 했다.



미약한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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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디난트 2세 황제.



보헤미아 자체의 병력은 황제군을 막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그러나 독일 내외의 신교 세력의 지원을 기대하며 벌인 반란이었는데, 이것이 생각대로 잘 되지 않았다. 네덜란드는 자금을 지원했으나 병력은 보내지 않았고, 영국과 트란실바니아는 중립을 선언해 버렸다. 가장 강력한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되던 프랑스는 가톨릭 국가로서 신교도들에게 노골적으로 도움을 주기가 불편했을 뿐 아니라, 국내의 위그노 반란을 대처하느라 독일에 손을 뻗을 여유가 없었다. 반면 황제 측은 교황의 자금 지원과 스페인의 병력 지원을 받았다. 게다가 신교도라지만 칼뱅파인 프리드리히에 대해 루터파들이 불만을 품으면서 보헤미아 내부에서도 전열이 일치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 반란은 실로 싱겁게 진압되고 만다.

1620년 11월 3일 벌어진 바이센베르크 전투에서 틸리 백작(Johann Tserclaes, Count of Tilly, 1559~1632)이 이끄는 2만 5천의 황제군은 프리드리히가 이끄는 2만의 ‘잡탕’(급하게 여기 저기서 병력을 끌어모으다 보니 편성도 제멋대로였고 기강과 훈련 상태는 한심했다) 군대를 두 시간 만에 철저히 격파했다. 브란덴부르크로 달아난 프리드리히는 왕위 박탈은 물론이고 팔츠 선제후 및 백작의 지위까지 잃었으며, 황제(그 사이에 마티아스가 죽고, 페르디난트 2세(Ferdinand II, 1578~1637)가 즉위해 있었다)는 이에 관련된 제후들에게 절대 복종과 거액의 배상금 지불 의무를 물렸을 뿐 아니라 지위가 비교적 낮은 ‘반란주동자’ 27명을 공개처형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했다. 이후로도 이런 저런 이유로 걸고 넘어지는 바람에, 보헤미아 귀족의 절반이 재산을 황제에게 빼앗겼다.

이처럼 보헤미아의 반란은 약 70년 전의 슈말칼덴 전쟁보다도 더 허무하게 끝나고, 황제의 권위는 제국에서 더욱 떨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비록 반란에 큰 도움을 주지는 못했어도, 주변 국가들은 신성로마 황제권의 강화와 가톨릭 세력의 승리가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이 전쟁은 비록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그 끝은 점점 창대해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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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센베르크 전투도.





참고문헌 : 버나드 몽고메리, [전쟁의 역사], 책세상, 2004; C. V. 웨지우드, [30년 전쟁], 휴머니스트, 2011; 메리 풀브록, [분열과 통일의 독일사], 개마고원, 2000; P. R. 파머-J. 콜튼, [서양근대사], 삼지원, 1985; 김용구, [세계외교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6; 이동언, “30년 전쟁과 합스부르크 왕가”, 조선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8; 송요태, “30년 전쟁의 영향에 관한 연구”,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1; 송요태, “30년 전쟁과 구스타프 아돌프”, 육군제3사관학교논문집.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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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규진 | 서울교육대학교 교수/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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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2.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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