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덴마크의 개입 - 30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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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47회 작성일 16-02-07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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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표


30년 전쟁 개요

전쟁주체


신성로마제국, 스페인 vs 보헤미아 등 반가톨릭연합, 덴마크, 스웨덴, 프랑스, 네덜란드, 튀르크

전쟁시기


1618~1648

전쟁터


중부 유럽(주로 독일)

주요전투


바이센베르크 전투, 루터 전투, 브라이텐펠트 전투, 뤼첸 전투, 뇌르틀링겐 전투, 로크로아 전투, 얀코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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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안과 발렌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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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슐리외. [삼총사]로 유명해진 그는 추기경이면서 프랑스를 위해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과 신성로마제국에 대항했다.



보헤미아 반란 진압 이후, 의기양양해 있던 페르디난트 2세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 일이 하나씩 둘씩 벌어졌다. 1621년에는 휴전조약에 따라 12년 동안 무기를 들지 않았던 네덜란드가 다시금 스페인을 상대로 독립 전쟁을 벌였으며, 따라서 스페인의 원조는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 1624년에는 프랑스에서 리슐리외 추기경(Cardinal Richelieu, 1585~1642)이 재상이 되었는데, 그는 프랑스가 합스부르크에 포위된 상태를 반드시 타개해야 하며, 위그노 반란을 처리하는 대로 독일의 신교도들에게 직, 간접적인 지원을 해야 한다는 생각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가장 짜증스러웠던 일은 1625년에 생겼다. 덴마크의 왕 크리스티안 4세(Christian IV. 1577~1648)가 여전히 황제에 불복하며 산발적인 저항을 벌이던 저지 작센 지역 영주들에게 ‘맹주’로 추대되어, 신성로마에 대항하는 전쟁을 걸어왔던 것이다. 크리스티안이 참전하기로 결정한 까닭은 확실하지 않다. ‘신교도로서 박해받는 다른 신교도들에 대한 동정심’ 때문이라지만, 북독일 지역이 황제에게 장악되면 발트 해가 독일의 패권 아래 들게 되고, 그러면 덴마크의 국익에 치명적인 영향이 올 수 있다고 판단해서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결정은 덴마크 의회의 지원을 받지 못했는데, 귀족들로만 이루어진 덴마크 의회는 그 누구와의 동맹도, 전쟁도 일체 거부한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크리스티안은 예전에 다른 명목으로 타낸 예산이 아직 상당히 남아 있었으므로, 의회에서 추가 예산을 타내지 못했음에도 전쟁에 뛰어들었다. 당분간 남은 예산으로 싸우다가 신교도 연합이나 네덜란드, 또는 프랑스에서 지원을 받으면 되리라 여긴 것이다.

하지만 막상 독일 땅에 발을 디디고 보니, 신교도이거나 황제의 전횡을 못마땅히 여기는 군소 영주들은 크리스티안을 지지하지만 영향력이 큰 선제후들은 냉담하다는 게 밝혀졌다. 그들 중에서 황제권을 못마땅히 여기던 브란덴부르크나 작센의 선제후조차도 신교도 편에 서서 싸우거나 외국인과 손을 잡는 일을 거절했다. 한편 크리스티안과 뜻이 통했던 스웨덴의 구스타프 아돌프 왕(Gustav II, 1594~1632)은 마침 폴란드와 전쟁을 시작했고, 네덜란드는 스페인과 싸우기 바빴으며, 영국과 프랑스는 위그노 반란을 놓고 대립하고 있었다. 크리스티안은 자신이 너무 경솔하지 않았나 하고 후회했을지 모르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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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의 크리스티안 IV.



하지만 페르디난트도 초조한 참이었다. 제후들이 자신에게 창끝을 돌리지는 않아도 병력 지원 등에는 소극적이었던 데다, 스페인의 지원이 끊긴 상황에서 새로 전쟁을 벌이기가 부담스러웠다. 게다가 보헤미아 진압에서 공을 세운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Maximilian, 1573~1651)과 그가 이끄는 가톨릭 연맹의 입김이 점점 더 세어질 가능성도 염려되었다. 이때 마침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Albrecht Eusebius Wenzel von Wallenstein, 1583~1634)라는 사람이 황제에게 연락해 왔다. 그는 대단치 않은 하급 귀족 출신이었는데, 부유한 미망인과의 결혼으로 갑부가 된 다음 계속되는 전쟁을 약진의 무대로 삼아 용병대장으로 활약하여 점점 더 큰 부자가 되고, 최근에는 프리틀란트 공작의 지위까지 손에 넣은 사람이었다. 그는 곤란에 빠진 황제에게 전쟁을 치르기에 충분한 자금과 병력, 그리고 스스로의 지휘 능력을 제공하겠다고 제의했다.

황제의 허락을 받은 발렌슈타인은 틸리 백작의 군대와 합세하여 1626년 8월 27일, 루터 암 바렌베르크에서 크리스티안의 덴마크-북독일 연합군을 격파했다. 그는 파죽지세로 북독일의 반 황제 도시들 전체를 점령해 나갔으며, 슈트랄준트 항구를 제외한 발트 해 연안이 모조리 그의 통제 아래 들어갔다. 이렇게 되자 크리스티안도 더 이상 버틸 수 없었고, 강화조약 조건을 두고 밀고 당기느라 3년을 더 끌기는 했지만 더 이상의 전쟁 참여는 사실상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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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 전투 묘사도.





승자의 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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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9년에 반다이크가 그린 발렌슈타인의 초상.



여기까지는 황제 측의 일방적인 승리였으며, 그것도 페르디난트 자신도 생각지 못했던 대승이었다. 북쪽의 불안요인을 단숨에 제거하고, 그 땅에 황제의 권위를 떨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대 이상의 승리는 곧잘 오만함을 가져오고, 오만함은 냉정한 상황 판단을 어렵게 만든다. 페르디난트는 발렌슈타인의 공로를 기려 메클렌부르크 공작의 작위를 부여했는데, 이는 발렌슈타인의 보잘 것 없는 출신에 대한 쑥덕공론과 함께 ‘황제가 제후의 영지를 마음대로 빼앗고 수여할 수 있는가?’하는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그는 발렌슈타인을 시켜서 덴마크를 우회하여 북해와 발트 해를 직접 연결하는 운하를 건설하게 했으며, 그것은 북독일 한자동맹 도시들의 이권을 심각하게 침해했으므로 그들을 철저한 반 황제파로 돌려놓았다. 또 1628년에는 ‘만투아 전쟁’을 일으켰다. 프랑스, 독일과 접경이던 이탈리아의 만투아 공국이 프랑스 왕의 신하인 샤를 공(Charles Gonzaga, Duke of Mantua and Montferrat, 1580~1637)에게 넘어가자 이에 반대해 병력을 파견한 것이다. 이는 프랑스와의 적대관계를 강화했을 뿐 아니라, 교황의 비위를 건드림으로써 이후 교황은 친 신성로마 진영에서 이탈한다.

그리고 1629년 3월에는 악명 높은 ‘토지반환령’을 선포했다. 1607년에 루돌프 황제가 검토했던 수준을 넘어, 예전에 가톨릭 교회령이던 토지를 일체(신교, 가톨릭을 구분하지 않고) 몰수하여 교회에 반환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신교도뿐 아니라 가톨릭 제후와 영주들에게도 참을 수 없는 조치였다. 비난이 물 끓듯 했으며, 1630년 3월 28일, 라이프치히에서 열린 제후회의는 토지반환령을 철회할 것과 그러지 않을 경우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모른다는 최후통첩을 황제에게 전달했다.

이런 불만을 모른체할 수 없었던 페르디난트는 결국 발렌슈타인을 희생양으로 삼기로 했다. 그가 ‘최근의 모든 불온한 움직임’의 장본인이라는 식의 정보를 흘리고는, 1631년 8월에 그의 등을 떠밀어 사임시켰다. ‘토사구팽’이었달까. 그러나 더 중요한 문제인 토지반환령을 그대로 두고서는 불만을 근본적으로 잠재울 수 없었다. 게다가 사냥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토끼는 잡았는지 몰라도, 이번에는 사자가 북방에서 달려오고 있었다.



참고문헌 : 버나드 몽고메리, [전쟁의 역사], 책세상, 2004; C. V. 웨지우드, [30년 전쟁], 휴머니스트, 2011; 메리 풀브록, [분열과 통일의 독일사], 개마고원, 2000; P. R. 파머-J. 콜튼, [서양근대사], 삼지원, 1985; 김용구, [세계외교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6; 이동언, “30년 전쟁과 합스부르크 왕가”, 조선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8; 송요태, “30년 전쟁의 영향에 관한 연구”,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1; 송요태, “30년 전쟁과 구스타프 아돌프”, 육군제3사관학교논문집.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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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규진 | 서울교육대학교 교수/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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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2.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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