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드디어 프랑스가 움직이다 - 30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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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26회 작성일 16-02-07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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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표


30년 전쟁 개요

전쟁주체


신성로마제국, 스페인 vs 보헤미아 등 반가톨릭연합, 덴마크, 스웨덴, 프랑스, 네덜란드, 튀르크

전쟁시기


1618~1648

전쟁터


중부 유럽(주로 독일)

주요전투


바이센베르크 전투, 루터 전투, 브라이텐펠트 전투, 뤼첸 전투, 뇌르틀링겐 전투, 로크로아 전투, 얀코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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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뀌는 운명의 바람



발렌슈타인의 뒤를 이어 황제군의 총사령관을 맡은 사람은 황제의 아들인 페르디난트였다. 그는 1634년에 왕을 잃은 스웨덴군을 뇌르틀링겐에서 격파했고, 1637년에는 사망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페르디난트 3세(Ferdinand III, 1608~1657) 황제가 되었다. 그 사이에 전황은 제법 유리해져 있었다. 1635년에 스페인이 프랑스령인 트리에르를 점령하자, 마침내 프랑스는 스페인에 전쟁을 선포했다. 프랑스는 엉뚱하게도 먼저 네덜란드부터 점령하려고 군의 주력을 남쪽이 아닌 북쪽으로 보냈다가, 그만 참패하고 말았다. 이를 본 페르디난트 2세는 1636년에 프랑스에 선전포고했다. 독일의 도움을 받는 스페인군은 한때 파리 근교까지 진출, 독일-스페인 동맹은 프랑스-스웨덴 동맹을(인구 최대의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와 황제가 대결하는 이상, 가톨릭측/신교측이라는 진영 구도는 더 이상 불가능했다) 바야흐로 쓰러트리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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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데. 부르봉 왕가의 일원이며, 30년 전쟁에 참여한 프랑스군을 지휘하여 “위대한 콩데(그랑 콩데)”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1637년, 방금 전까지 싸웠던 프랑스와 네덜란드가 손을 잡았다. 이듬해에는 프랑스와 스웨덴이 정식으로 동맹을 맺었다. 이제 바람은 거꾸로 불기 시작했다. 1640년에는 포르투갈이 스페인에서 분리 독립했고, 따라서 스페인의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전쟁 초에는 신교도 영주들이 외로운 싸움을 하고 황제 편에는 스페인도 교황도 있었지만, 이제는 반대로 황제가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었다. 심지어 튀르크까지 반 황제 진영에 가담하여 제국의 남동쪽에서 치고 올라왔다.

이쯤 되니 이제는 강화를 모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겨졌다. 1640년, 뉘른베르크의 제후 회의에서 그런 결의가 나오자, 이듬해의 레겐스부르크 제국회의에서도 추인되었다. 하지만 전쟁은 점점 황제 측이 불리해지는 가운데 계속해서 해를 넘겼다. 1642년에는 제2차 브라이텐펠트 전투에서 토르스텐손(Lennart Torstenson, 1603~1651)이 이끄는 스웨덴군이 황제군을 격파했고, 1643년에는 새로 루이 14세(Louis XIV, 1638~1715)가 즉위한 프랑스의 군대가 로크루아 전투에서 스페인군을 무찔렀다. 다시 1645년에는 보헤미아의 얀코프에서 스웨덴군이 황제군을 이겼고, 1646년에는 튀렌(Vicomte de Turenne, 1611~1675)이 이끄는 프랑스군과 브랑겔(Carl Gustaf Wrangel, 1613~1676)이 이끄는 스웨덴군이 연합하여 황제가 가장 믿고 있던 바이에른군을 압도했다. 1648년에는 전쟁의 진원지였던 프라하를 포함한 보헤미아 전체가 스웨덴군의 점령하에 들어갔다.

1644년 이래 양 진영 사이에는 강화 협상이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쉽사리 합의가 되지 않는 사이에 황제 측만 점점 협상에서 불리해져갔다. 1648년이 되면 제국의 핵심 지역들이 하나같이 적의 손에 들어간 데다, 그동안 내전을 치르느라 대륙에 신경을 쓰지 못했던 영국도 내전을 끝내고 강력한 신교도 국가로서 개입을 검토하는 중이었다. 반면 황제의 유일한 동맹인 스페인은 자기 밥그릇도 챙기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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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를 공략하는 스웨덴군.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결국 협상이 타결되었다. 신-구교 전쟁이라는 초기의 전쟁 성격을 기념이라도 하려 했던지, 베스트팔렌 지방의 가톨릭 도시인 뮌스터와 개신교 도시인 오스나브뤼크에서 동시에 협상이 이루어졌고, 이를 종합하여 ‘베스트팔렌 조약’이라고 불렀다. 공식적으로는 1648년 10월 25일에 전쟁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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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스터 조약의 체결 장면.



베스트팔렌 조약의 내용에 따르면 프랑스가 알자스-로렌을 비롯한 라인강 유역의 땅을 획득하고, 스웨덴은 서부 포메른을 비롯한 발트 해 연안의 독일 땅을 차지했으며, 이들과 손을 잡았던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과 작센 등도 영토를 늘렸다. 또한 독일의 모든 제후들은 황제에게 적대하지 않는 한 외국과 자유롭게 수교할 수 있는 ‘외교주권’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스위스와 네덜란드가 독립국 지위를 승인받았다(따라서 이 조약은 30년 전쟁의 결말인 동시에 네덜란드 독립전쟁의 결말이기도 했다).

종교적으로는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화의의 결정사항을 재확인한다고 했으나, 이제는 칼뱅파도 루터파처럼 가톨릭교도와 동등한 권리를 인정받았다. 또한 ‘각 지역의 주민의 신앙은 지역 통치자의 신앙에 따른다’는 원칙이 사실상 폐기되어 개인별로 신앙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말썽이 되었던 황제의 토지반환령은 부정되고 1624년을 기준으로 교회와 세속영주의 토지관계를 정리했다.



참고문헌 : 버나드 몽고메리, [전쟁의 역사], 책세상, 2004; C. V. 웨지우드, [30년 전쟁], 휴머니스트, 2011; 메리 풀브록, [분열과 통일의 독일사], 개마고원, 2000; P. R. 파머-J. 콜튼, [서양근대사], 삼지원, 1985; 김용구, [세계외교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6; 이동언, “30년 전쟁과 합스부르크 왕가”, 조선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8; 송요태, “30년 전쟁의 영향에 관한 연구”,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1; 송요태, “30년 전쟁과 구스타프 아돌프”, 육군제3사관학교논문집.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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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규진 | 서울교육대학교 교수/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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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2.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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