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1차 영국 내전, 왕당파의 우위 - 영국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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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67회 작성일 16-02-07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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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표


영국 내전 개요

전쟁주체


잉글랜드의 찰스 1세와 왕당파, 의회파

전쟁시기


1642~1651

전쟁터


그레이트 브리튼 섬(주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지역)

주요전투


에지 힐 전투, 에드월튼 무어 전투, 뉴베리 전투, 마스턴 무어 전투, 네이즈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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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트림의 음모, 전쟁 발발



‘장기의회’의 요구를 웬만해서는 들어주던 찰스도 잉글랜드 북부에 있는 왕군을 해산하라는 요구는 거부하였다.그러나 이때런던탑에 갇혀있는 스트래포드가 에스파냐와 공모하여 에스파냐를 전쟁에 끌어들이려 한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이에 의회는 왕에게 스트래포드의 처형을 요구하였고 결국 1641년 5월 11일에 스트래포드는 참수당한다. 스트래포드를 런던으로 불러들이면서 어떠한 경우에도 안전을 보장하여 주겠다고 한 왕의 명예는 땅에 떨어졌다. 한편, 잉글랜드 북부 주둔군의 지휘관들은 스코틀랜드인들에게는 돈까지 주면서 머물게 하는 대신 자신들은 아무 것도 받지 못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포츠머스에 있는 수비군과 합쳐 의회를 압박할 계획을 세웠다. 이와 더불어 리폰 조약의 이행을 지켜보기 위하여 런던에 와 있는 스코틀랜드의 인사들이 스코틀랜드 군의 위세를 내세워 의회의 진행에 개입하였다. 특히 종교개혁과 관련된 안건들이 스코틀랜드에 불리하다고 생각되면 이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였기 때문에 종교와 관련된 논의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지지부진하였다.

이런 상황에서(1641년 5월) 왕이 앤트림과 공모하여 아일랜드군을 모집하고 ‘만약 필요가 되면 아일랜드군으로 의회를 치겠다’고 한 소위 ‘앤트림 음모 사건(The Antrim Plot)’이 알려진다. 물론 이는 단순히 계획차원에 그친 일이었고 아일랜드군은 잉글랜드 근처에도 오지 못하였지만 의회는 여기에 상당한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진정한 위협은 앤트림의 음모 따위가 아니라 아일랜드인의 독립의지였다. 이미 2월부터 아일랜드에 있는 잉글랜드인들의 식민지인 얼스터 지역(현재 북아일랜드)을 점령하고 잉글랜드 신교도들을 몰아내려는 계획이 진행되고 있던 차에 5월에 앤트림 후작에게서 잉글랜드 진격을 위하여 동원태세를 갖추라는 언질을 받았다. 로리 오모르, 휴 맥메이언, 플레임 오닐 등의 공모자들은 이제 전혀 거리낌없이 독립음모를 진행시킬 수 있었다. 병력동원에 대한 왕의 ‘승인’을 받았기 때문이다. 후일 앤트림은 ‘아일랜드 바보들이 날짜도 정하지 않고 망동(妄動)을 벌이는 바람에 일이 틀어졌다’는 푸념을 하였으나, 이는 앤트림의 생각이었을 뿐, 필자의 의견으로는 아일랜드 반란군은 앤트림 음모를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 역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아일랜드 독립세력은 마침내 본격적으로 봉기하였고 아일랜드 전체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이 아일랜드 반란은 영국 내전의 본격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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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1세는 스트래포드의 처형에 원한을 품고 거병해 의회로 진격, ‘반역’을 저지른 5명의 의원들을 체포하려 했다..



아일랜드 반란의 소식은 잉글랜드에 퍼졌고 이는 이전의 앤트림 음모 사건과 상승효과를 불러일으켰다. 신교도, 특히 청교도 의원들 사이에는 찰스왕이 몰래 아일랜드 구교도들을 이용하여 자신들을 치려한다고 수군거렸다. 이래저래 의회가 말을 듣지 않자 결국 왕은 실력행사를 하기로 한다. 1642년 1월에 병사 400명을 모아 의회로 진격하였는데 그 명분은 ‘반역’을 저지른 5명의 의원들을 체포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존 핌(John Pym, 1584~1643)을 포함한 5명은 사실 스트래포드의 처형을 주도한 인물들이었기에 찰스 1세의 ‘거병’은 사실 측근이자 친구인 스트래포드가 처형 당한데 대한 사적인 복수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5명의 의원은 이미 왕의 거병을 미리 전해듣고 몸을 피했고 왕의 병사들이 의회에 들이닥쳤을 때 의장 윌리엄 렌털(William Lenthall, 1591~1662)은 자신은 왕의 신하가 아니라 의회의 종복(從僕)이라고 하며 5명의 행방을 대기를 거부하였다.

왕이 병사를 동원하여 의회를 쳤다는 소식이 퍼지자 왕과 의회간에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타협의 여지는 그대로 사라졌다. 런던은 그렇지 않아도 악화된 경제상황에 직업을 잃은 사람들이 날마다 폭동을 일으켰고 그들 대부분은 의회를 지지하고 있었다. 이에 왕은 런던을 떠나 자신들의 지지자들이 많은 북쪽으로 가서 병력을 모으기 시작하였고 의회는 의회대로 왕의 군대에 맞서 싸울 준비를 하였다. 내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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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왕파의 우두머리였던 존 핌 의원.



흔히 상공인들이 많은 잉글랜드 남부와 동부는 대체로 의회편, 농민들과 토호귀족들이 많은 북부와 웨일스를 포함한 서부는 찰스 1세의 편을 든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영국 내전의 양상은 이보다 더 복잡했다.

왕당파와 의회파는 오히려 지역 구분 없이 모든 지역에서 뒤섞여 있었고 아울러 일부 지역민들은 특별히 어느 편을 들지는 않고 사세에 따라 행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왕이 체포하려 하였던 5명중 한 명이며 의회 반왕파의 실질적인 우두머리였던 존 핌 의원은 서부 윌트샤이어 지역구 출신이었다. 또한, 왕이 런던을 떠난 후 1642년 2월에 앙리에뜨 마리 왕비를 떠나보내려 도버에 내려갈 때 왕의 행렬이 몇 명 안되고 초라했음에도 남부 켄트의 토호들과 농민들이 길가에 줄을 서서 왕을 열렬히 환영하였다고 한다.

아울러 계급이라던가 직업으로 왕당파와 의회파를 가르는 마르크스주의적 해석도 있다. 여기서는 일반적으로 지식인과 상인들이 의회파를 지지하고 역시 토호와 귀족 영주들이 왕당파에 지지를 보내는 것으로 되어있다. 캠브리지에 갔을 때는 대학의 총장과 교수들, 그리고 학자들이 모두 ‘Vivat rex(임금님 만세)’를 외쳤지만 왕의 법을 집행하는 사법관들과 왕의 편이라는 토호 영주들은 왕을 만나기를 거부하였다.

①콜체스터 빵집, ②런던 상인 가문, ③웨스트민스터의 밀랍가공업자, 그리고 ④레딩(Reading)의 커튼가게 출신이라고 하면 역시 공상인(工商人)들로서 의회파라고 여기기 쉽지만, 이들은 사실 ①요크 대주교 사무엘 하스넷(Samuel Harsnett, 1561~1631), ② 흠정역 편찬 작업 책임자 랜슬럿 앤드루스(Lancelot Andrewes, 1555~1626), ③ 하스넷 사후 요크 대주교가 된 리처드 닐(Richard Neile, 1631~1640), 그리고 ④ 캔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로드였다. 모두 성공회의 고위 사제들이고 찰스 1세를 종교적으로 지지하던 인물들이었다.

이를 정부와 반정부파의 싸움으로 보는 것도 옳지 않다. 왕당파와 의회파의 싸움은 어떤 정부를 이루냐는 문제로 정부내의 인물들이 갈라져 싸운 것이며 따로 ‘야당’이나 ‘반정부’ 세력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지역, 직업, 계급에 상관없이, 어떤 경우는 친구나 가족들도 이해에 따라 갈라져 싸웠던 것이다. 어떤 곳에서는 같은 카운티(County)에서 서로 이웃으로 지내던 사람들이 갈라져 싸우는 일도 있었다. 글자 그대로 ‘내전’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런던을 떠난 왕은 일단 요크(York)로 이동하여 그 곳을 근거지로 삼고자 하였지만 아직도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 많은 사람들이 어떤 편도 들지 않고 서로 눈치를 살폈다. 요크에서 여러 번 신민들의 의무를 강조하며 동조자들과 병력을 모으고자 하였지만 3월말까지 찰스 1세의 곁에 모인 인원은 39명의 귀족, 그리고 호위병 17명에 불과하였다. 몹시 실망한 찰스는 아예 잉글랜드를 떠나 아일랜드로 가서 병력을 모을 것을 고려하였다. 그러나 찰스는 결국 요크셔에 머무르면서 귀족들에게 왕에 대한 의무를 강조하였고 마침내 5월말까지 보병 600과 기병 140을 모을 수 있었다.

왕이 북부에서 병력을 모으려고 고심하는 동안 런던에 남겨진 의원들은 혹시라도 숨은 왕당파들이 습격할 것을 두려워하여 민병 수백명을 불러내어 의회를 지키게 한 다음 의회를 열고 속개하였다. 체포를 피하여 도망하였다가 역시 의회로 돌아온 존 핌은 이제 의회에 대한 왕의 음모가 분명해졌다며 싸울 것을 주장했다. 일부 유화파 의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장기의회 의원들의 의견은 싸우자는 쪽으로 기울어졌고, 병력과 전비를 모으기 위한 준비가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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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팅엄에서 찰스 1세의 거병을 알리는 팸플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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핫험은 헐을 점령하려는 찰스를 격퇴한다.



이제는 보다 상황이 분명하여지자 양 편 모두 병력을 모으는 것이 수월해졌다. 내전의 첫 번째 충돌은 7월에 요크셔 남부 헐(Hull) 시에서 있었다. 헐에는 2차 주교전쟁당시 사용하려 했던 많은 양의 무기와 물자가 축적되어 있었다. 찰스 1세는 런던의 물자와 인력을 사용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헐을 점령하면 전쟁 수행에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고 헐을 접수하려 하였으나 헐은 이미 1642년 1월에 의회의 명령을 받은 존 핫험(John Hotham, ?~1645)이 차지하여 관리하고 있었다. 찰스가 4월에 나타나 헐에 진입하려 하였으나 핫험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후 여름에 핫험은 찰스에게 헐을 내어줄 의사가 있음을 내비쳤으나 이는 준비를 위한 책략에 지나지 않았다. 핫험은 더 방비를 튼튼히 하고 7월에 찰스가 병력을 이끌고 나타나자 싸워서 이를 격퇴하였다. 화가 난 찰스는 핫험을 반역자로 규정하였지만 이미 물자와 무기의 양에서 앞선 의회파는 헐에서 추가로 물자와 무기를 확보하면서 전력의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의회파는 자신들의 승리가 병력의 움직임과 물자의 흐름에 달려있음을 알고 8월에 남부의 주요항인 포츠머스를 포위하였고 포츠머스를 지키는 왕당군 병력은 1개월의 농성 후에 항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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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퍼트 왕자. 내전시기에 왕당군의 기병대장으로 많은 활약을 한다.



이때 대륙에서 의외의 인물이 병력을 이끌고 왕당군 편에서 전쟁에 참여하였다. 라인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의 둘째 아들이자 제임스 1세의 외손이었던 루퍼트 왕자(Prince Rupert of the Rhine, 1619~1682)였다. 병법과 지휘를 배우기를 좋아하고 군사에 우수한 능력을 보인 루퍼트는 8월에 네덜란드를 떠나 잉글랜드로 잠입하려 했지만 의회파 함대에 발각되어 한 번 실패하고 다시 잠입을 시도하여 뉴캐슬에 상륙하였다. 그리고 즉시 말을 달려 레스터(Leicester) 근처에 있는 삼촌 찰스 1세의 군진에 도착하였다. 찰스 1세는 루퍼트를 즉시 기병대장으로 임명하였고 루퍼트는 즉시 기병 모집과 훈련을 시작하였다. 1642년 9월말에 루퍼트는 약 3천명의 훈련된 기병을 거느리게 되었다.

루퍼트는 이 기병을 이끌고 9월에 옥스퍼드 대학에서 왕당파에 군자금으로 기증한 막대한 은제품을 수송하는 부대를 보호하러 떠났다. 그러나 9월 23일에 우스터(Worcester) 근처의 포우윅 브릿지(Powick Bridge)에서 나다니엘 파인즈(Nathaniel Fiennes, 1608~1669)가 이끄는 의회파 기병과 우연히 맞닥뜨린다. 사실 충돌한 것은 아니었고 모르고 있다가 서로 군진을 가까이 설치하였음을 알게 된 것인데 루퍼트는 준비고 뭐고 그의 기병들에게 즉시 말을 타고 의회파를 기습하라 명하였다. 루퍼트가 선봉에 서서 갑자기 공격해오자 의회파 기병들은 우왕좌왕하면서 갑옷도 제대로 착용하지 못하였고 140명의 사상자를 내고 도망할 수 밖에 없었다. 이로서 루퍼트는 용감한 지휘관으로 그 위명을 드날리게 되었고 왕당파는 첫 승리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8월에 노팅엄에서 왕이 공식적인 거병을 하였을 때 의회는 에섹스 백작을 북쪽으로 보내어 왕을 상대하게 하였다. 에섹스는 우선 노스햄턴 방면으로 진출하여 2만의 병력을 확보하였다. 에섹스는 다시 우스터 방면으로 진격하였고 이 과정에서 에섹스의 선봉기병이 루퍼트와 격돌하여 패했던 것이다. 포우윅 브릿지에서 승리를 거둔 왕당군의 수뇌부는 에섹스 백작을 직접 공격할 것인지, 아니면 의회파의 본거지인 런던으로 진격할 것인지를 놓고 갑론을박하였다. 그러나 우스터 주변의 평야가 그리 넓지 않아 기병의 운용이 어려울 수가 있다는 점 때문에 런던에 대한 진격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는 왕당군에 의한 위위구조(圍魏救趙)였다. 런던을 노리는 척하면 에섹스는 황급히 달려와 막으려 할 것이고 왕당군이 원하는 곳에서 전투를 하여 격파하려는 계획이었다.

1642년 10월 22일에 양군은 포우윅에서와 마찬가지로 거의 우연으로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에지힐 근처의 키네톤 평야에서 만나게 되었다. 둘이 서로를 만났을 때 왕당군이 보다 높은 지대에 있었지만 중간에 간간히 낮은 절벽들이 있어 고지의 유리함을 살릴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왕당군은 고지를 내려가기로 결정하고 이동하였는데 이동로가 한정이 되어있었고 벼랑 사이의 좁은 길을 통하여 내려가야 했다. 에섹스가 만약 조금 더 용기가 있었더라면 이동 중이거나 또는 전장에 막 도착하여 정돈되지 않은 왕당군을 공격하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나치게 신중한 에섹스는 뒤에서 보급품을 수송하고 있어 아직 도착하지 않은 병력을 기다리기로 하였고 왕당군 병력이 정렬할 기회를 주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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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지힐 전투 하루 전 조카인 루퍼트와 기타 참모들과 함께 작전회의를 하고 있는 찰스 1세.



결국 다음날 벌어진 전투에서 초반의 우세는 왕당군이 점하였다. 총으로 무장하고 있고 그나마 잘 쏘지도 못하는 의회파 기병을 왕당군의 잘 훈련된 검기병이 매우 심하게 몰아붙였다. 의회파 기병대가 무너지자 왕당파 보병도 돌격을 시작하였고 의회파 보병의 일부는 싸우기도 전에 도주하였다. 그러나 토머스 발라드와 존 멜드럼의 의회파 보병대는 매우 완강하게 버텼고 마침 무너지지 않고 버티고 있던 의회파 기병대 일부가 보병대 사이의 틈을 따라 왕당파 보병에 역공을 가하였다. 이번에는 왕당파 보병대가 견디지 못하고 물러났다. 만약 이때 초반에 공격에 나섰던 왕당파 기병이 돌아와서 다시 의회파 보병을 습격하였더라면 왕당파가 완전히 승리할 가능성이 높았지만 그들은 의회파의 보급품을 발견하고는 물품을 털어서 챙기느라 바빴다. 이 와중에 의회파 기병은 깊숙이 진격하여 왕당파의 포병들을 도륙하고 한 때는 국왕과 루퍼트의 본진까지 위험에 처했다. 이 와중에 국왕의 측근이라 할 수 있는 에드먼드 버니가 전사하였다. 그러나 왕당파를 끝까지 밀어붙일 병력이 없었고 혹시라도 왕당파 기병이 다시 돌아올 곳을 두려워한 의회파 기병은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저녁이 되자 양측은 모두 부대를 뒤로 물리고 다음 날에 다시 대치하였으나 싸움은 없었다. 찰스는 에섹스에게 전령을 보내 왕이 제시하는 조건을 받아들인다면 그의 ‘죄’를 용서하겠다고 했으나 의회파 병사들은 이 전령을 두들겨 패고 쫓아 보냈다. 에섹스는 10월 25일에 부대에게 휴식을 준다는 명분하에 근처의 워윅 성(Warwick Castle)으로 들어갔다. 이는 왕당군에게 런던으로 가는 길을 열어준 셈이었고 왕당군은 즉시 런던으로 향하였다. 루퍼트는 자신의 기병대로 런던을 기습하겠다고 했지만 찰스는 이를 묵살하고 전군을 이끌고 천천히 움직였다. 며칠 후 밴버리를 점령한 왕당군은 옥스퍼드와 레딩 등을 거쳐 런던 근처의 턴엄-그린(Turnham Green)에 다다랐다. 그러나 시민군과 의용군을 합쳐 2만 4천명으로 이루어진 의회파 부대가 싸우러 나오자 1만 3천정도를 거느리고 있던 찰스는 부담을 느껴 싸우지 않았다. 군사적인 부담도 부담이지만 런던의 시민들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왕당파는 옥스퍼드로 철수하였고 옥스퍼드는 1차 내전 동안 왕당파의 ‘수도’가 된다.



의회파의 위기



1642년 말, 왕의 본군을 런던에서 지척이라 할 수 있는 옥스퍼드에 두게 된 의회파의 상황은 좋지 못했다. 턴엄-그린에서 왕당군의 진격을 막기는 했지만 이제는 왕과 지리한 정통성 싸움을 벌여야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1642년 당시 의회의 중론도 왕을 폐위시키거나 죽이는 것이 아니라, 왕이 의회의 권위를 인정케 하고 의회가 설정한 법에 따르게 만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의회에는 아직도 ‘왕은 국가의 수장인 동시에 정부의 수장’이라는 생각을 가진 친왕파(親王派)의 수가 적지 않았다. 이 와중에 왕은 옥스퍼드에서 완전히 굳히기에 들어갔다. 옥스퍼드는 각지의 지원병력과 방어시설로 요새화되었고 인근의 지역에 병력이 배치되어 거대한 전선이 형성되었다.

12월 초 잉글랜드의 북방 지역에서는, 친왕파 귀족인 뉴캐슬 공작(Duke of Newcastle, 윌리엄 캐번디시, 1592~1676)이 북방의 의회파군을 지휘하고 있던 핫험을 격파, 요크 지역의 왕당파들과 힘을 합쳐 의회파를 압박했다. 이에 근처 요크셔에서 의회파 병력을 지휘하고 있던 카메론 백작과 그의 아들 토머스 페어팩스(Thomas Fairfax, 1612~1671)는 헐(Hull) 지방으로 물러났고, 뉴캐슬 백작은 리즈, 핼리팩스, 브래드퍼드 등 청교도 의류공방들이 즐비한 산업도시들을 위협했다. 그러나 의회파의 핵심 지지 세력이었던 청교도들은 뉴캐슬의 병력에 맞설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울러 일시 물러났던 토머스 페어팩스가 기병들을 모아 웨스트 라이딩 지역에 주둔한 뉴캐슬의 병력을 수시로 기습하면서, 뉴캐슬은 1643년 1월 말 청교도들의 본거지 공격을 포기하고 물러났다. (하지만 후에(1642년 6월), 페어팩스도 애드월턴-무어(Adwalton Moor)에서 왕당군에게 패하며 다시 웨스트 라이딩에서 헐(Hull)로 물러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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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의 북방 지역에서, 의회파군을 압박한 친왕파 귀족인 뉴캐슬 백작(윌리엄 캐번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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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왕파 귀족 랠프 홉튼은 잉글랜드 서남부 콘월인들의 지역감정을 이용해 의회파를 지역에서 몰아낸다.



북방 전선이 안정되는 듯 싶더니, 서남부 지역에서 문제가 터져 나왔다. 1643년 초, 콘월 지방에서 친왕파 귀족인 랠프 홉튼(Ralph Hopton, 1596~1652)이 지역민들을 선동해 지역 법정에서 의회파를 ‘죄인’들로 규정하고 민병대를 소집해 의회파들을 공격했다. 의회는 서둘러 스탬포드 백작의 부대를 콘월에 보냈으나 1643년 1월 홉튼이 이끄는 콘월 왕당군은 브래덕 다운에서 의회파 병력을 완파했다. 결국 의회파는 내몰리고 콘월은 온전히 왕당파 지역이 되었다. 잉글랜드인들에게 켈트 촌뜨기라고 무시당하던 콘월인들의 지역감정이 폭발한 결과였다.

1643년 4월에 콘월을 떠나 동진하던 홉튼군은 사우어턴 무어(Sourton Moor)의 전투에서 의회파의 반격으로 일시 주춤하였으나, 1643년 5월에는 스트래튼에서 대승을 거두고 데본(Devon) 지역까지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여름에는 의회파의 월러(William Waller, 1597~1668) 장군에 의하여 반격이 이루어졌으나, 홉튼 군과 루퍼트의 동생인 모리츠 왕자(Prince Maurice of the Palatinate, 1620~1652)의 기병대가 협공해 윌러 군을 물리친다. 모리츠는 기세를 몰아 옆의 도르셋(Dorset)까지 점령하였고 서남부 거의 전체가 왕당군의 수중에 들어간다.

의회파 월러 군의 궤멸을 계기로, 서남부 콘월에서 올라온 모리츠-홉튼 군과 찰스의 본군은 연결 되었고, 런던을 직공할 수 있는 길이 열린 듯 했다. 그러나 홉튼 군의 본거지인 콘월(플리머츠)에 대한 위협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홉튼은 콘월에서 멀리 떠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다. 또한 아직도 의회파의 근거지로 남아있는 서남부의 항구도시 글로스터도 문제였다.결국 왕당파는 그 지휘부를 통합하지 못한 채, 뉴캐슬 백작은 북부의 헐을, 모리츠-홉튼은 서남부의 플리머츠를, 찰스의 본군은 글로스터를 함락하기 위해 따로 움직이게 된다.



전세 역전, 뉴베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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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베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에섹스 백작.



의회파 역시 이에 대응하여 맨체스터 백작(Earl of Manchester, 에드워드 몬터규, 1602~1671)과 올리버 크롬웰이 지휘하는 동부연합군으로 하여금 뉴캐슬 백작의 북부군을 상대하게 했고, 월러에게 증원군을 파병해 모리츠-홉튼의 서남군과 싸우게 했다. 에섹스에게는 글로스터를 포위하고 있는 찰스의 본군을 막으라는 명령이 내려졌는데, 에섹스의 의회파 본군이 9월 5일 글로스터 근처에 나타나면서 왕당파 본군의 포위는 풀렸다. 임무를 완수한 의회파는 원래 주둔해 있던 레딩(Reading)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왕당파가 이를 저지하기 위해 그들을 막고 섰다. 결국 두 군은 9월 20일에 뉴베리에서 격돌하게 된다.

사실 의회파는 불리한 상황이었다. 왕당파가 미리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던 데다, 루퍼트 기병대는 의회파가 글로스터로 이동할 때부터 수시로 의회파를 기습하며 괴롭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회파군은 억지로 대형을 맞추는 대신 각 부대가 진군하다가 전장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공격에 들어갔고, 이에 오히려 당황한 것은 찰스의 본군이었다. 또한, 뉴베리의 지형은 땅이 거칠고 낮은 관목이 길게 띠를 이루고 있는 지형이어서 기병의 운용이 쉽지 않았다. 왕당파 기병의 습격은 이전의 파괴력을 보여주지 못했고, 왕당파 기병은 계속하여 돌격을 시도하였지만 파이크(장창)을 앞세우고 전진하는 의회파 보병에 연이어 격퇴되었다. 이에 왕당파는 포격으로 의회파 보병대열을 파해하려 하였지만 의회파 보병은 포격을 무릅쓰고 공격을 계속했고, 결국 뉴베리의 전투는 의회파의 승리로 돌아간다. 이 전투로서 이제까지 전투를 유보하며 몸을 사린다고 비난받던 에섹스는 칭송을 받았고, 왕당파 쪽으로 기울었던 전세가 다시 균형을 되찾기 시작했다.



참고문헌 : Barbara Donagan, “Atoricity, War Crime, and Treason in the English Civil War,” [The American Historical Review], Vol. 99, No. 4 (Oct., 1994) 1137-1168; Ian Gentles, “Why Men Fought in the British Civil Wars,” [The History Teacher], Vol. 26, No. 4 (Aug., 1993), 407-418; Leonard Hochberg, “The English Civil War in a Geographical Perspective,” [The Journal of Interdisciplinary History], Vol. 14, No. 4 (Spring, 1984), 729-750; Mark Stoyle, “English Nationalism, Celtic Particularism, and the English Civil War,” [The Historical Journal], Vol. 43, No. 4 (Dec., 2000), pp. 1113-1128; Charles Carlton, [Going to the Wars: the Experience of the British Civil Wars 1638-1651], (London: Routledge, 1992); Stanley D.M. Carpenter, [Military Leadership in the British Civil Wars 1642-1651], (London: Frank Cass, 2005); Anthony Fletcher, [The Outbreak of the English Civil War], (New York: New York University Press, 1981); John Kenyon and Jane Ohlmeyer (eds.), [The Civil Wars: A Military History of England, Scotland, and Ireland 1638-1660], (Oxford, UK: Oxford University Press, 1998); Conrad Russell, [The Causes of the English Civil War], (Oxford, UK: Clarendon Press, 1990); Paul K. Davis, [100 Decisive Battles: From Ancient Times to the Present],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1).





김성남 | 안보·전쟁사 전문가
글쓴이 김성남은 전쟁이 인간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 UC 버클리 동양학과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국제학 석사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에 진학하여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전쟁으로 보는 삼국지], [전쟁 세계사] 등이 있으며 공저로 [4세대 전쟁]이, 역서로 [원시전쟁: 평화로움으로 조작된 인간의 원초적인 역사]가 있다.


발행2012.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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